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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묵상글 들 (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 자기들의 재산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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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상처가 은총이 되게
오늘은 프란치스코가 오상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모든 사건 중에서 오상 받은 것만 따로 떼어 기념하는 겁니다.
이참에 저는 상처받음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부터 상처받았다는 얘기가 너무 흔하고,
까딱하면 힐링, 힐링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저를 보고 여러분은 즉시 상처와 힐링을 얘기하는
요즘 행태에 대한 거부감이 제게 있는 것 아니냐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 텐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이고,
-제 상처를 제가 키우기 때문이며,
-상처를 키우는 것이 공포증 때문이고,
-상처와 치유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트라우마라고 하고
힐링이라는 표현이 다분히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상처와 치유를 영성이 아닌 심리학적으로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힐링 남용에 대한 저의 비판의 근거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에게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상처를 당하게 해달라고 했고,
-상처를 하느님에게서 받았지 인간에게서 받지 않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수난에 대한 공경심 때문에
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면 라베르나에 가 축일을 지냈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1224년 축일에
그는 두 가지 소원을 주님께 아뢰는데 그것이 하나는 죽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사랑이 크시기에 우리를 위해 그 큰 고통을 감수하시고
감당하셨는지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달라는 거였지요.
그러므로 상처 치유의 해법도 프란치스코에게 있습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과
-상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겁니다.
상처를 좋아하거나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상처를 사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할 터인데
그런데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지만 프란치스코처럼 상처를 사랑하면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고 은총이 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우리가 지내는 것이
바로 상처가 은총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받으면 은총이고
사람한테서 받으면 상처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고 더 나아가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사람에게서 상처받지 말고 하느님에게서 받을 것이고,
사람이 준 상처라도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치환하거나 승화해야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살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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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가 8,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쁜 소식”이요, “하늘나라”의 선포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가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열 두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가 있었으니,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그 중에는 오늘 <복음>에 이름이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같은 여러 여인도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이를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 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 다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마저도 바쳤다는 것이요,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너머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우리에게 ‘제자 되는 길’을 여섯 개의 동사를 통해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첫째>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는 그저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는 그토록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습니다.” <넷째>로는 그분을 따라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섯째>로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주님!
제가 믿기에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제자이기에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께 사로잡혀 있기에,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께 시중들고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입니다.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며,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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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기들의 재산으로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맞은 응답을 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쌓아 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가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가24,10).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디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시편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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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신심은 이득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니라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오직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고자 심산유곡을 찾아들어 교우촌을 세웠습니다.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와 배교자들의 눈을 피해 유랑 생활을 해야 했고, 또 먹고 살기 위해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업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산속에서 화전이나 골짜기를 개간해서 천수답을 가꾸기도 했고, 숯가마나 옹기점을 운영하거나 산나물을 채취하기도 했습니다. 또 담배, 조, 밀, 야채 등을 재배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교우촌 신자들은 대부분 몹시 가난했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피어난 것이 바로 신자들의 공동체 정신과 신심이었습니다. 교우촌에서는 과거의 신분이나 재산, 또는 얼마나 배웠는지 등을 따질 필요가 없었고 공동의 생업을 위해서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공동 작업, 공동 분배의 생활방식은 필수였고, 공동 기도 역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습니다. 박해시대에는 기도서나 교리서, 신심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부모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앙 지식들을 자녀들에게 입으로 들려주면서 신앙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은 생활화되었습니다.
신앙의 생활화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난 것이 나눔과 봉사 활동이었습니다. 애긍과 단식은 자신들의 허물을 씻기 위한 지향으로나 끼니가 떨어진 이들을 돕기 위한 지향으로 필수적이었습니다. 상가 봉사 활동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입각한 신앙 도리를 전파하였습니다. 이처럼 교우촌의 신자들에게는 신앙과 신심이 경제생활의 목적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삼지 마십시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입니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야고 6,5.7.10-11).
재물을 하늘에 쌓아 이웃과 나누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되시어 먹고 사는 경제 문제를 신앙 문제와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깨닫고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시중 들어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등의 여인들은 열두 제자 못지않은 신심으로 초대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신심은 이득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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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에서 강의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이곳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어디에 계시기에 그럴까요?
정답은 유튜브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유튜브 안에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강의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어떤 자료를 찾다가 어떤 분의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훌륭한 강의였습니다. 이 훌륭한 강의를 그것도 공짜로 봐도 되나 싶더군요.
작년부터 계속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이 강조되는 시기에 유튜브를 활용해 강의하는 것은 접근성도 좋고 비용도 무료라는 점에서 소비자에게는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유튜브의 지식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식을 요리해서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를 보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건너뛰기를 하면서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도 본인의 노력이 있을 때 그 가치는 더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자신의 노력 없이 많은 것을 얻기만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주님만을 원하지, 나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나의 노력이 없으면, 주님의 사랑과 은총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곁에 누가 있었는지를 오늘 복음은 전해줍니다. 열두 제자 외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여성이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차별이 대단했습니다. 여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명한 스승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남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많은 여성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신의 열두 제자를 부를 때처럼 여성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 의지하려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제외하고 그냥 주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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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루키우스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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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결혼 생활에 대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20대에는 서로 좋아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 실망하며 살고, 40대에는 서로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불쌍하고 가여워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어서 살고, 70대에는 서로 고마워서 산다.”
결혼과 함께 서로 고마워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7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고 이 글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실망하고 체념하고 불쌍하고 가엽고의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결혼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너무 많이 들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함께’의 가장 제일 원칙 ‘사랑’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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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신문사의 성모상 앞에 피어난 코스모스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얗고, 빨간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춥니다. 작년까지는 화단에 잡초만 있었습니다. 올해는 코스모스 모종을 얻어다 심었습니다. 지난봄에 물을 주면서 작은 모종이 언제 자라나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코스모스가 제 어깨만큼 자랐습니다. 잘 자라준 코스모스가 고맙고 대견합니다. 유모차를 모는 아이의 아빠가 코스모스를 아이에게 보여줍니다. 늦은 여름을 지나 코스모스 하나 피었을 뿐인데 신문사의 앞이 환해졌습니다. 성모님도 빙긋이 웃는 것 같습니다. 지중해의 도시 알제를 보고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코스모스의 가녀린 꽃잎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
농사를 시작한 수녀님에게 농부이신 할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수녀님 고추만 보지 말고, 야콘도 보세요.’ 수녀님은 밭에 고추와 야콘을 심었습니다. 고추를 수확할 마음에 야콘에 관심을 덜 가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야콘이 풀이 죽어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고 야콘에게도 관심을 가졌더니 야콘이 싱싱해졌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문사 앞마당에는 코스모스와 채소를 심었습니다. 가지, 고추, 옥수수, 토마토가 잘 자랐습니다. 사실 뒷마당에도 상추와 미나리를 심었습니다. 호박도 심었습니다. 그런데 앞마당의 채소보다 뒷마당의 채소는 덜 자랐습니다. 그늘이라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앞마당의 채소에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뒷마당의 채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정성껏 물을 주려합니다. 그늘에 자라는 아이들이니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 겸손, 온유, 나눔, 희생,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보험도 줄 수 없는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난 신앙인들이 천상에서 영원히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성인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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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인 예수님
-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인 삶 -
오늘은 중세기 독일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녀인 성녀 힐데가르트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생몰生沒연대를 보니 만81세, 그 옛날이 병약한 몸으로 이 정도 사셨으면 정말 장수한 것입니다.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성녀는 수녀원장으로 있으면서 예술가, 작가, 카운슬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자, 작곡가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성녀는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2012년 그를 성녀이자 교회박사로 시성했습니다. 현대의 전기작가는 성녀를 만물박사로 묘사하는데 공감이 갑니다. 한 사람 안에 어쩌면 이런 무궁한 만능의 재주를 지닐 수 있는지 하느님의 솜씨에 경탄하게 됩니다.
성인들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또 우리들 하나하나 예외없이 각자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성소이자 의무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성인이 되라고 우리를 북돋우는 성인 축일입니다.
성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성인입니다. 그러니 성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면서 참나를 실현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꿈을 현실화시킨 분들이 바로 성인들이며, 성인들 자체가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이야말로 하느님 은총과 인간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저절로 성인들이 아니라 한결같은 불굴의 믿음과 사랑을 지니고 노력했던 분들입니다.
요즘 수도원 주변을 산책하면서 곳곳에 무수히 산재해 있는 거미줄을 보면서 그 신비로움에 감탄합니다. 얼핏보면 보이지 않고 가만히 드려다 봐야 무수한 빛살같은 아주 정교하고 질서있으며 수겹의 복잡한 긴 거미줄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지을 수 있나 참 신비로울뿐입니다.
한 번 거둬낼까 하다가도 온 정성을 다해 지은 집을 허물수 없어 손대지 않고 그냥 보기만했습니다. 거미줄에는 무수한 작고 큰 곤충들이 망에 걸려 죽어있었고 왕거미가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곤충이 아니곤 거미줄망에 걸리면 탈출은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곳곳에 널린 거미줄이 상징하는 바 세상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혹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도 보이지 않는 거미줄같은 유혹이 있을수 있고 그 누구든 죄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광야인생중 유혹에 빠져 무수한 중독에 폐인이 되거나 괴물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무수히 산재한 유혹의 그물망들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 때, 유혹에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무지로 인해 눈뜬 맹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은총으로 눈이 열려야 올바른 분별로 유혹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요,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테오에게 보낸 바오로의 첫째 서간은 이단과 탐욕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줍니다. 무지로 인한 이단과 탐욕, 교만의 유혹의 그물망에 걸려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가르침을 소홀히 함으로 이런 무지의 유혹에 떨어진 상태에 대한 묘사들 들어 보십시오. 유혹의 거미줄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 눈멀 때 우리 마음안에도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재앙중의 재앙입니다. 진리를 잃어버려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나 폐인이 된 사람들, 그대로 지옥같은 유혹의 거미줄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실제 이런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탐욕의 무지의 피해가 참으로 큽니다. 오늘날 기후위기의 근원 역시 바로 인간의 무한한 탐욕에 있음을 봅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가 이런 무지의 탐욕에 대한 처방을 제시합니다. 참으로 기본에 충실한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지혜로운 삶을 위한 처방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자족할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하느님의 사람들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오늘날 물질주의와 탐욕에 중독된 사람들을 일깨우는 말씀이요, 한마디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주님의 전사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이들이 진짜 내공의 깊은 내적자유를 누리는 영적부자이자 지혜로운 자들일 것입니다. 어제 방문했던 어느 자매의 지혜로운 처신에 전적으로 공감했던 나눴던 내용을 나눕니다.
“결혼전 사윗감에 말했습니다. 내 딸하고 결혼하려거든 1.세례받고, 2.몸무게 감량하라고 두 조건을 제시했고, 사위는 이에 응답하여 세례를 받고 체중도 20kg 감량했기에 결혼을 시켰고 다음 주 출산 예정입니다.”
“참 멋지고 지혜로운 제안이였네요. 영적, 육신적 두 필수 조건을 충족시켰으니, 이제부터 영적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육신적으로 건강관리 잘하면 되겠습니다. 영혼 건강과 육신 건강은 함께 갑니다.”
요지의 대화였습니다.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이,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이 것이 뒤바뀐 주객전도의 현실을 수없이 목도하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추석을 앞두고 선물을 받으면서 곧 쓰레기로 버릴 값비싸고 화려한 포장지에 개탄합니다. 먹으면 없어질 것들에 쌓이는 쓰레기 때문에 흡사 먹는 것이 편치 않고 죄를 짓는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참 짧지만 귀중한, 믿는 이들 공동체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열두 제자들과 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일종의 대가족 공동체가,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질서잡힌, 균형과 조화를 이룬 하늘나라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 선포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담당하고 부인들은 자기네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기니 참 이상적인 역할 분담이 이뤄진 안정과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고 각자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런 공동체의 시스템이라면 세상 무지의 탐욕이나 그릇된 이단의 유혹이 스며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통해 입증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을 살게 하시며 더불어 아름다운 하늘나라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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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일러 주십니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루카 8,2)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루카 8,3)
복음은 예수님의 선교 여행에 함께 동반한 이들을 나열합니다. 열두 제자는 물론 영육의 고통에서 해방된 여인들, 그리고 또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열두 제자가 그리 뛰어난 면면을 지닌 엘리트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악령과 병고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경우도 적지 않았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구원자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
이 "재산"이라는 표현에는 물질적인 재물은 물론 비물질적인 봉사와 헌신, 지지도 포함되었으리라 보입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다보면 먹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영적 에너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 이들은 신앙과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심으로 제 뱃속을 채우려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티모테오에게 이릅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1티모 6,5)
사도는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논쟁만 일삼는 이들을 통해 교회 안에 분쟁과 알력이 번져 가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여겨, 왜곡한 진리와 가르침으로 자기 잇속을 챙깁니다.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8)
"자족"은 신심이나 소명, 직분에서 이득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 곁에 머무르며 활동을 돕던 이들이 그러했지요. 행여 은총 지위를 수단으로 이득을 탐하고 챙기는,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욕망으로 병든 이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티모 6,11)
주님 곁에 머무르는 이들이 가야할 길은 명료합니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해야 하는 덕목 역시 헷갈릴 일이 없이 분명하지요. 이러한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덕들은 악의 뿌리인 재물욕과 병립할 수 없습니다. 병립하는 것처럼 남에게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위선임을 자신도 알고 주님도 아시지요.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 6,12)
사도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소박한 재물에 만족하면서 주님의 일에 일조하는 모든 선한 이들을 독려합니다. 세상 걱정과 본능적 탐욕을 떨쳐버리고, 이득을 바라지 않으며 순수한 사랑으로 헌신하는 삶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어렵기에 늘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가 동반되어야 하지요.
주님으로 만족하며 그분께 의탁하는 삶은 하늘 나라의 신비가 허락된 "철부지"들의 특권입니다. 세속의 눈에는 무능하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참 행복"의 길이지요.
주님 곁을 지키며 자족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소유한 진복자, 참으로 행복한 이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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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3)
'여자 제자들!'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 시대 당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인격적인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있었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은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비의 복음'이라고도 불리는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들의 구체적인 이름과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여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뿐 아니라, 그들의 역할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을 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7-8.10)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 제자들처럼, 그리고 오늘 독서가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처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쓰여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구원과 모두의 구원을위한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몸과 마음으로 희생 봉사하는 하느님 자녀들, 소유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내어 놓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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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헌신적으로 도움을 준 여인들이 나옵니다.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른 많은 여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도 복음 선포에 도움을 준 여인들이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에 자주 등장합니다. 리디아(사도 16,14), 프리스킬라(사도 18,2), 에우오디아와 신티케(필리 4,2), 클로에(1코린 1,11), 포이베(로마 16,1) 등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 시대에도 복음 선포에 자신의 삶을 바친 여인들이 많습니다. 목숨을 바쳐 순교한 이도 있고, 숨어 살면서 고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알려진 강완숙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와 피난처로 제공하고, 주문모 신부와 교우들에게 음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인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탈렌트를 사용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때로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목적을 잊어버린 채 무조건 열심히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묵묵히 봉사한다면, 우리의 삶은 실망을 넘어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여인들처럼, 또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 교우들처럼 우리의 봉사에 대한 하느님의 영원한 갚음을 기억하며, 기쁨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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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헌신 봉사하였던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도와드리며 따랐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라는 여인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사도들도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처럼 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여인들과 수산나는 복음에 그 이름이 전해질만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인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인이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복음전파를 도운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주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아무 사심 없이 주님과 사도들을 도왔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도와왔고 지금도 여성들이 그러한 열성을 보이는 것은 또한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하겠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여인들과 같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봉사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시작한 일이니 잘 해봐!’라고 하면서 협조도 하지 않고 골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 자세는 없었는지, 그래서 그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여자들의 수가 더 많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여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살아있을 수도 죽어갈 수도 있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듯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가 깊이 일치한 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역사의 인물 속에서나 지금에도 그러한 역할, 그러한 도움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봉사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 자기 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영예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도 봉사를 통해 주님께 항상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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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상생과
협력으로
이가을은
열매를
맺는다.
주님께서
주신
열매의
시간이다.
마음을 바꾸는
은총의 계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더더욱
풍요롭다.
행복과 기쁨은
주님께 있다.
우리자신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오래갈 수 없다.
시중드는
삶이란
자아를 벗어나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열매의 삶이다.
나눔은
열매가 되고
봉사는
기도가 된다.
값지고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배우게된다.
함께하는 삶이
나눔의 삶이며
봉사의 삶이다.
삶의 보람은
주님의 일에
협력하는
우리들
봉사에 있다.
나눔과 보람은
봉사의
은총이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가치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을
함께하는
실천이다.
또한 사랑은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이다.
사랑은
시중드는
정성으로
주님께
내어드리는
우리들 마음이다.
마음을 만나고
이마음을
하느님께
올려놓는
마음의 만남이다.
마음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앙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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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다양성>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열두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루카 5,11).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는 뜻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인생 전부를 바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는 열두 사도 외에도 제자들이 많았는데(루카 6,13),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열두 사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은 아닙니다.
그 제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필요하면 가정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카가 복음서에 기록한 여자들도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루카는 그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후원회’ 같은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더라도, 자기들이 사는 마을에 예수님께서 오시면,
집으로 예수님을 모셔 들여서 대접을 하고,
말씀을(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남매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오시면,
자기들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였습니다(루카 10,3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에 베타니아에 숙소를 정하셨습니다(마르 11,11).
아마도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지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모르고 있던 ‘숨은 제자들’(익명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고 가셨던 나귀의 주인(루카 19,31-34),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 집의 주인(루카 22,10-12) 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제자로서(신자로서) 살았던 사람들인데,
사도들이 그 제자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사도들 공동체와 그 제자들이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요한 19,38-42).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후에는 오히려 제자라는 것을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루카복음 8장 38절-39절을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해 달라고 청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다른 임무를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에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남자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며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온 고을에 두루 선포하였다(루카 8,38-39).”
예수님께서 그 남자의 청을 받아들이시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임무를 맡기신 것은 그를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어도,
사도들과 같은 일을 한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온 고을에 두루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의 다양성은 ‘부르심의 다양성’이기도 하고,
‘은사의 다양성’이기도 합니다.
그 다양성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1코린 12,27-31ㄱ).”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순서는, 인간 세상 안에서 질서 유지를 위한
순서일 뿐이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남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은사’의 내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높거나 낮은, 또는 귀하거나 천한 차이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는 전부 다 똑같이 귀하고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마지막에 말한 ‘더 큰 은사’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모든 은사는, 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신앙인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에 응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수행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다양성은 ‘풍요로움’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도 ‘부르심’과 ‘은사’의 다양성에 관한 비유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준 것은(마태 25,15), 차별 대우가 아니라,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부르심과 은사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탈렌트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 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25,24-30).
우리는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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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벽을 허물고 받아들이는 해방의 길
예수시대의 유대인 관습 규정들은 여자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에게도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의무는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적어도 열 명의 남자가 있어야 거행될 수 있었는데 여자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지요. 율법학자들도 “자기 딸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딸을 타락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여 여자는 제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여자들, 가난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소외된 사람, 율법에 무지한 이들을 포함하여 누구든 차별 없이 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해방실천을 통하여 여성들을 ‘악령과 질병’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지요. 해방 체험을 한 여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창조와 사랑과 해방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퍼져나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깨달았으나 가르치거나 기적을 행하는 사명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도왔습니다(8,3ㄴ). 이들의 도움은 비단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큰 힘이 되었지요. 그들은 교회의 창설 회원들이 되었고, 초대교회는 그 여인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기억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가정과 사회는 차별 없는 해방 체험의 장(場)이 되고 있습니까? 율법을 삶의 핵심적인 지침으로 여겨 인간을 도구화했던 유대인들처럼 다양한 형태의 굴레를 씌우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왜 우리는 해방을 불러일으키는 열린 마음과 선을 발생시키기 위한 ‘거저 건네줌’ 앞에 망설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온갖 차별과 벽을 허물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지 않습니까. 벽을 허물고 자유와 해방의 길로 나아가려면, 자신을 떠나는 아픔을 허용하고, 물질적인 포기를 선택하며 자기 일에 몰두하는 눈길을 주변으로 돌리는 진실한 방향 바꿈이 있어야겠지요. 선입견과 편견, 성차별, 애착과 고착된 사고의 틀을 벗어던지고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것이 복음을 사는 사람다운 태도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과 제자 집단의 중심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중심, 가정과 사회의 중심에 무엇을 두고 살아갑니까? 참으로 나에게,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관계도 일도 사회문제도, 그 중심에 복음과 이타적인 사랑이 없다면 죽음으로 내몰릴 뿐입니다. 중요한 결정과 사회변화, 성장을 추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판단기준과 최종목표는 예수님이요 존엄한 인간임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서로를 가르고, 차별하고, 구속함으로써 비인간화의 길로 내모는 모든 것이 바로 악령이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도 병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해방체험을 한 여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바쳐 시중들었지요. 우리도 하느님 은총에 감사하고, 다른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배려와 친절, 도움과 인내, 관대함 등에 감사하며 해방의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나는 이런 해방체험을 어떻게 되돌리며, 구원의 선물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감사하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하며 벽을 허물고 생명과 해방을 위한 소명에 적극 참여하도록 힘쓰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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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2019년 9월 20일
예나 지금이나 믿음의 공동체에는 선한 사람들도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과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도 잘 알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셨으니 거룩하지만 그 구성원은 회개가 필요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기적인 욕심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동 떨어진 신심을 내세우며 논쟁과 설전에 열정을 쏟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티모테오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 안에서 쓸 데 없는 재물 욕에 사로잡혀 그릇된 길로 가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티모테오를 일깨우며 다음과 같이 글을 씁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9-10)
그러면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복음의 정신대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6,11-12)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막달라(미그달) 동네 출신인 마리아, 우리는 흔히 그녀를 마리아 막달레나로 부릅니다.
그녀의 고향은 부유한 어촌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일곱 마귀가 걸렸던 전력만 소개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에서 자주 나오는 인물이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을 ‘죄인인 여자’로만 설명하는데(7,36-50), 요한은 라자로의 여 동생, 마리아로 설명합니다.(요한 11,2)
이렇게 놓고 보면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나자로의 여 동생 베타니아 동네의 마리아와는 사실 구분됩니다.
그러나 루카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들의 재산을 들여 뒷바라지한 여인들 중에,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이름을 밝힙니다.(8,3)
당시 권력의 대표적인 인물인 헤로데는 갈릴래아와 페래아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요안나의 남편의 왕의 집사였으니 그 권력도 대단했다고 하겠습니다. 수산나는 이름만 거론되었을 뿐 그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루카는 이 이 세 여인들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또 다른 여인들은 악령과 병에 시달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고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들의 재산을 들여가며 봉사했던 것입니다.
다른 여인들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성심껏 예수님을 도운 여인들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루카는 섬세하게 다른 복음사가 보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실 때에 먼 발치에서 주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던 여인을 가리켜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23,55)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간 첫날 새벽부터 그 여자들은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갑니다. 눈 부시게 차려 입은 남자 둘이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루카는 이 여인들이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24,10)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에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마태 27, 55-56)
주님의 무덤 부근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있었다고 소개합니다.(마태 27,61)
마르코는 “‘갈릴래아의 여인들’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로 설명합니다 (마르 15,40-41)
이어서 안식일 다음날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고 설명합니다.(마르 16,1-2)
요한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시는 순간에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전하고 (요한 19,25) 예수님의 비어 있는 무덤과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요한 20,1)
복음사가마다 공통적인 이름도 있고 또 다르게, 그리고 묶어서 ‘그 밖의 여인들’로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위해서 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들여 뒷바라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 여자들은 악령과 병에 시달려야 했고 세상 재물이 다 인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을 암흑의 세계에서 빛이 세계로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세상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치유를 통하여 자유를 얻게 해주심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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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에 대한 야욕으로 가득 찼던 전도양양했던 유다 청년이자, 차세대 지도자로 촉망받던 사울의 회심과 그 이후에 펼쳐진 신앙 여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당시 사울이 지니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유다 고위층 인사들의 눈에 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 띄어 한 자리 차지하고 승승장구하며, 초스피드로 부와 권력을 손에 쥘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사울은 당시 정통 유다인들 입장에서 볼 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자 신흥 사이비 집단이었던 그리스도교를 박멸하는 데 최일선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를 향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사울의 귀에 다마스쿠스에 그리스도교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는 즉시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전속력으로 다마스쿠스로 달려가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자로 앞장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철저한 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사울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찐 그리스도인으로 환골탈태시키십니다.
안테나가 오로지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에로 향해있던 사울,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저한 박멸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장밋빛 미래를 활짝 펼쳐보려던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버리셨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티모테오 1서 6장 7~8절)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티모테오 1서 6장 11~12절)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을 묵상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무슨 변화?’하지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좀 더 마음을 활짝 연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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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여성 봉사자는 사제의 오른팔인가, 그리스도의 왼팔인가?>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신다.
2.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3. 여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예수님의 협조자는 제자들이고, 제자들의 협조자는 여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여성들은 사제가 될 수 없고 수녀님으로서 사제의 협조자 역할만 해야 할까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요?
그래서 일각에서는 여성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논의가 끝난 이야기입니다. 사제는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기에 여성이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그래서 당시는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여성도 당당히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공회는 여성 사제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성체를 나누어 줄 때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리해야 하는 사람이 여성일 때는 신자로서는 아무래도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의 협조자들인 여성도 여성이기에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남성과 같은 영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교회에서는 수녀님들이 사제들처럼 영광을 받을까요? 아무래도 사제들이 영명축일 같은 행사는 더 크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제들은 어쩌면 신자들이 주는 영광을 피상적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들과 더 가까워 자녀들의 감사를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직접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묵상글입니다. 함께 나눕니다.
“그 전 본당에서 작년 겨울 소임 이동을 준비하고 떠나기 직전에 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기도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초에 대한 집착이 있으셔서 지난 해에도 다 쓴 제대초를 대부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제대회에 봉헌금을 내고 짧아진 제대 초들을 택시를 동원하여 받아가십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겠지만 신자분들이 이 할머니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하시고 초에 대해 그렇게 오래전부터 집요한 애착을 두고 있어선지 그분들 사이에서는 약간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과 주위 분들의 그런 태도에 별 신경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른 곳으로 소임을 떠난다고 하니 할머니께서 저를 조용한 곳으로 잠깐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따라갔는데 저보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셔서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 같아 같이 의자에 앉자고 말씀드리니 굳이 일단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자에 앉으니 할머니께서 갑자기 맨바닥에 엎드려 제게 절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너무 놀라 당황했는데 절을 하시면서 저에게 '수녀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할머니의 절을 받고 제가 갑자기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저를 꼭 껴안으시며 죽을 때까지 저를 못 잊을 거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자식들 데리고 제가 떠나는 부임지로 꼭 한번 찾아가겠다고 하시면서 손을 못 놓으셨어요.
저는 그날 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큰 표징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마치 하느님과 같이 느껴지면서 그 할머니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저에게 2년 동안 이 본당에서 그래도 헛되이 살지 않았고 위로와 사랑을 주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체험이 또한 그저 평범하고 약한 이들 안에도 역시 숨어 계신 하느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소중한 신앙 체험으로 제 마음에 간직되고 있습니다.”
여성이 가진 어머니의 모성과 사랑을 남성은 쫓을 수 없습니다. 여성들은 성당에서 이런 역할을 합니다. 사제들이 하지 못하는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사제가 되려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교회에서 점점 여성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수녀님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성모회도 사라지는 곳이 많고 자모회도 예전만큼 힘이 있는 단체가 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당에 갔을 때 수녀님이 안 계신 성당은 왠지 좀 삭막한 것 같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오늘 복음의 여성들과 비견할 복자품에 오른 분이 계시는데 ‘강완숙 골룸바’입니다. 이 분은 ‘한국 천주교 초대 여성회장’이셨습니다. 이분의 역할은 그분이 숨겨주셨던 주문모 신부님 못지않았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서첩의 자녀로 태어나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라버니들의 어깨너머로 글공부를 하였으나, 오라버니들보다 더 뛰어난 학식으로 영특한 여성이되었습니다. 순천에서 아내와 자녀가 있었던 사람과 혼인하여 시모와 전처 자녀를 성실히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여 열심히 불경을 공부했으나 그에 충족하지 못하고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학을 알게 되어 심취하게 됩니다. 남편은 박해가 심해지자 자신의 아내가 천주교를 가까이함을 알고 배교하기를 바랐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집에서 내쫓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강완숙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합니다. 얼마나 어르신을 잘 모셨으면 시모와 전처소생인 아들까지 같이 한양으로 상경했을까요?
이때 중국에서 선교사로 오신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 신부를 찾고 있을 때라 시모께서 아실까 봐 광에 모시고 대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내다 골룸바는 단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일을 굶으니 시모님께 왜 식음을 전폐했는지를 물으시고 마음의 병으로 그렇다 말하니, 시모가 여러 사정을 물으며 당신도 같이 식음을 전폐하고 2일이 흘렀다고 합니다. 총 5일을 금식하신 복녀는 그제야 자신의 사정을 시모님께 아뢰었었고 시모님께서 그러한 마음의 병은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주문모 신부님을 댁으로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문모 신부는 골룸바 집에서 6년간 사목합니다. 주 신부 입국 당시 겨우 4,000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는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골룸바의 활약으로 여신도의 수가 절대다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총회장으로서 주위 아낙네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부는 주 신부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골룸바는 주 신부를 피신시켜 체포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주 신부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강완숙에게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함구하여 밝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로 인해서 수많은 신자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가슴 아파한 주 신부가 자수하여 처형당하자, 이를 옥중에서 전해 들은 강완숙은 자기 옷을 찢어서 그동안 주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지만 이것을 전해 받은 어느 여 교우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周牢)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므로 형리들도,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렇듯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만 3개월만인 그해 7월 2일,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 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즐거운 낯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습니다.
이러함에 누가 강완숙 골룸바 복자가 주 신부보다 뒤처지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 신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강완숙 골룸바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습니다. 골룸바가 없었다면 주 신부는 머물 곳이 없고 사목할 곳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성별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다만 성별에 따른 역할만 다를뿐입니다. 주문모 신부도 자신을 고문하는 이들에게 ‘신’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때 자신 대신 말해줄 사람이 없다면 들어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아론의 역할이 여성의 역할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아니면 자녀를 낳을 수 없고,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면 복음을 전할 수 없듯, 사제들도 여성의 도움이 없다면 어쩌면 무용지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사도들이었다면 왼팔은 여성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오른손이 그리스도요, 왼손이 성령이셨던 것과 같습니다. 여성들이 사제의 오른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 제자들과 여성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오른팔과 왼팔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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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잠시 호기심에 따를 수도 있고
무언가 기대하면서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한 이들에게는
그들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체험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든 이를 하느님 품으로 초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우리들은 하나둘씩 그분을 접하게 됩니다.
그분을 통해 치유를 받기도 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기도 하며
마귀로부터 해방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자 예수님께 바라는 대로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 주님과 끝까지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며 깨닫는 중에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몇몇 여자들은 악령과 병에서 해방되어 그분을 따르게 됩니다.
곧, 하느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빛을 발견한 이들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이들만이 함께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를 알려줍니다.
하느님을 통해 우리의 바람을 얻는 것이 첫걸음이라면
주님과의 만남에서 빛을 발견하는 것이 두 번째 걸음이며
그분과 함께 그 빛을 내 안에 담는 것이 세 번째 걸음입니다.
만약 만나지 않는다면 따르지 못하고
내가 바라는 모습에만 머물면 빛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빛을 보지 못한 이들은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스쳐 지나가지 않기를
그리하여 그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희망을 굳건히 하는 여정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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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김대군 형제님.
독서, 복음서 주해
제1독서<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2ㄹ-12
사랑하는 그대여,
2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5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6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9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0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항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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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주해(해제.역주 장 엘 마 로)
2절ㄴ
노예도 신자이고 주인도 신자인 경우에 문제가 많이 생긴 모양이다. 교회에서는 같은 신도로서 서로 “형제”이지만, 집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주종관계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의 사회제도를 문제시하지 않았으므로 이 관계를 소홀히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교직 수여식 때의 교훈
11-16절은 본래 교직 수여식 때나 세례식 때 주례자가 훈시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사목서간은 주로 교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편지이니 교직 수여식 때에 훈시로 알아들어야 할 것 같다.
11절
“하느님의 사람”이란 구약성서에서는 모세 또는 예언자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여기서는 안수를 통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교직자들을 가리킨다.
9-10절에서 말한 돈에 대한 욕심을 피하라는 뜻이다.
1티모 2.22;3.16에서와 같이 올바른 생활을 뜻한다.
12절
신앙생활 및 교직생활을 철저히 하라는 말이다.
이 고백을 세 가지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세례 때의 고백, 교직 수여식 때의 고백, 박해 때의 고백이다.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는 자와 교직 수여식에서 교직을 받는자는 신앙고백문을 신도들이 증인으로서 지켜 보는 가운데 엄숙히 봉송했다. 박해 때는 특히 교직자들이 박해자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12절의 고백은 박해 때의 고백인 듯하다. 빌라도 앞에서의 그리스도 증언을 상기시키는 말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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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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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 양 모)
제자들과 부인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다.
루카에만 있는 특수자료. 4.14; 6,17-20꽈 같은 집약문이라 하겠다.
1절
직역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 전하셨다.”
2절
갈릴래아 호수 서쪽 포구 막달라 출신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었다 한다. 이는 심한 정신병을 앓았다는 것을 뜻하리라. 예수께서는 그를 낫게 하셨다. 바리아이는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보았고(마르15.47) 맨 먼저 그분의 빈 무덤을 확인했으며(마르16.1)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했다(요한 20.1-18).
3절
24.10에 의하면 요안나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야고보의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다. 수산나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시중들었다는 것은 주로 음식을 대접했다는 뜻이다. 부인들이 예수 일행을 따라다닌 것은 당대 관습을 고려할 때 파격적이다. 사실 예수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남자가 여자와 공공연히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였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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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티모6,2ㄹ-12)
여기 에페소 공동체에는 사치와 수다로 소일하는 부유층 여자들이 있었던 모양인데, 여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는 2장 8-15절의 권고는 여성 전반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물의를 빚고 있던 일부 부유층 여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티모테오 1서의 저자는 이들에게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정숙과 선행으로 자신을 가꾸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낳아 잘 기를 것을 요구한다.
이런 부유층 여자들은 여자들은 돈을 노리는 거짓 교사들의 표적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6,5) 세속 사회처럼 교회안에서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로부터 오는 예언의 은사인지 교회안에서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버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자기 것인양~~그리고 하느님의 은사를 팔아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된다.
저자는 그들에게 돈의 위험성을 지적하고(6,5) 자선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6,17-19).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떨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사람들이 있습니다."(7-10)
또한 저자는 참다운 사목자로서 티모테모가 어떻게 처신하고 신자들을 어떻게 처신하고, 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세세히 가르쳐 준다(4,6-5,2;6,11-14).
오늘날 한 개인도, 회사도, 종교 단체도, 국가도 돈 때문에 망가져버려 시끄럽다.
인간도 육신, 몸 한덩어리로 끝나는게 아니라 눈에 드러나는 겉 모습과, 상대적 빈곤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허영과 사치에 빠져~ 부채에 허덕이며 감옥이든 자살이든, 몸으로 떼워야 되는 지경에 온 사람들이 많다.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과 인식의 콩깍지에 눈이 멀어, 뜬 구름 같은 신기루를 쫓아, 좀 더~~조금만 더~하다가, 그놈의 욕심 때문에 잘못 투자해서 망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 정선에서도 "그놈의 한방, 땡기는 것 때문에~~" 패가망신 알거지가 되고, 알콜릭이 되고, 노숙자가 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다.
미국은 전쟁에 너무 돈을 많이 써서 너무나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고~~
그리스 뿐 아니라 세계의 대다수 나라가 부도덕한 소수의 가진 자들과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몰염치하고, 국민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정치 권력때문에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역시 돈과 부의 정의롭고 공평한 분배와 동서남북의 균형 발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 개인의 윤리적 종교적 가치관과 신념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정에서부터 어떻게 자랐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구조악이나 제도적 모순이나 악법이나 그릇된 관행도, 그것을 만들고 시행하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는 말씀은 실천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다.
한 개인도, 재벌 회사도, 심지어 교구도, 본당도, 청빈을 모토로 하는 수도회도 나누어야 한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 대신에 쓰라고 준 것을, 제대로 쓰지도 않고 왜 묻어두는지를 못 알아듣겠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왜 걱정하는가?
특히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과 제 단체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하느님임을 체험하고, 미래를 가장 튼튼하고, 무너지지 않고, 말씀 한 마디면 무엇이든 창조하시는 전능의 하느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절대적 부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금고이고, 영원히 썩지 않는 은행임을 왜 모르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번다고 죽을 고생을 했지만, 한푼도 못 가지고 가는 것을, 한 푼도 좋은 곳에 쓰지도 못하고 그냥 가는~~ 그야말로 불쌍한 인생을 산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느껴진다.
한 수도회 단체도 그렇게 "청빈~청빈~" 해서 모은 돈들을, 왜 선교하는데, 그리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영육간에 돕는데 사용하지 하고, 서서히 멸망해 가는 지구의 종말을 기다리면서, 은행안에, 금고안에 사장시키고 있는지~~~ 도대체 납득이 안간다.
옛날 분도 성인이 몸담았던 작은 공동체에 수도자들이 먹을 빵도 없었을때, 성인이 기도하니까, 수도원 문앞에 누군가가 밀가루를 갖다 놓고 갔다.
우리는 좀 더 복음의 말씀에로,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의 모습대로 돌아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고, 물심양면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에 박차를 가해야 된다.
*옛날 큰 부자가 죽으면서 특이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어 시신을 장지로 옮길 때, 반드시 두 손이 관 밖으로 나가도록 하여라."
유언에 따라 가족들이 상여를 메고 갈 때,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놓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관 밖으로 내민 두 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사람들아, 보아라. 나는 돈도 많고 집도 크고 식솔들도 많지만, 오늘 이때에 당하여 나 홀로 간다. 부귀영화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평생 모은 재산도 한푼 가져갈 수 없음이니~~"
이렇게 관 밖으로 두 손을 내놓도록 한 까닭은, 인생은 올 때도 빈손, 갈 때도 빈손임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돈보다 더 소중한 무엇을 찾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무언으로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1코린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으로 죽으셨으니~~~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 복음을 믿어- 용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 하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 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위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 곧 죄인들(나)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들(나)의 죗값으로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분의 부활 역시 믿지 못하게 된다.
성경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받아 열심히 지키는 신앙을 살던 때~ 부활미사에서 ‘부활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를 받았을 때 기뻐하는 척 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그 믿음 없음을 감추기 위해 ‘척’ 했던 것이다.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정작 나는 그 죄에서의 자유를 모르는 삶으로, 오히려 그 신앙이 무거운 짐이되어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인 그분의 규정과 법규 계명, 곧 십자가의 복음 그 구원의 계약이 아닌 사람의 규정과 교리인 사람의 말, 그 인간의 계명으로 행위의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로마6,3-5)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저주가 되시어 저주의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죽으신 것(신명21,22), 그 예수님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높고 넓고 큰지를 몰랐기에 죄 의식에 시달리는 신앙을 살았던 것이다.
(1요한3,19-20)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예수님의 십자가)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 우리가 양심을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10,22) 22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00주년성서) 20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으니, 잠든 이들의 맏물이십니다.
= 우리의 맏물(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그 바른 양심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1베드3,21) 21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그래서 그 예수님으로 오늘 복음 (루가18,1~)의 열두제자와 함께 마리아(쓴물)가 요안나(은혜를 갚다), 그리고 수산나(경건하다)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이는 열두제자들의 참모습이기도 한 것이다.(열둘- 교회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가 내 십자가(죽음) 였음을 깨닫게 될 때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구원의 힘이며 기쁨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 베풀어 주신 은총,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복음(루카8,1~3)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2~3)
루카 복음사가는 '여인들의 복음서'라고 불릴 만큼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당시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은 시대였기에 여인과 관계된 일은 언급을 회피하였고, 굳이 언급할 때는 익명으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이런 통례를 따르지 않고, '몇몇 여자'('귀나이케스 티네스'; gynaikes tines)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하이'(hai)라는 관계 대명사를 사용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를 비롯해서 많은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안나'에 대해서는 그들의 신상이 비교적 더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6장 14~16절에서 제자들을 소개할 때 사용한 표현방식과 다르다.
제자들을 소개할 때 단지 이름만을 나열했던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섬기던 여자들을 소개할 때는 이름 뿐만 아니라 내력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활동이 당시 부와 권력, 또는 성(性)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 때문이다.
한편, 루카 복음 8장 2절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막달레나'(Magdalene)라고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막달라 출신의 여자'라는 뜻이다.
'막달라'(Magdala)는 갈릴래아 호수 서편, 티베리아 북쪽 약 4.8km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하느님의 탑'(the tower of God)이라는 뜻이다.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오랫동안 고생하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고 예수님께 헌신한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어 무덤에 묻히실 때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마르15,47),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무덤까지 갔으며(마르16,1), 성경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먼저 목격한 영광스러운 증인으로 묘사한다(마르16,9).
주님께로부터 치유받은 은혜가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 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였으면, 일생 동안의 삶을 통해 그토록 일관되게 헌신할수 있었겠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한 번 치유받은 감동과 감사를 잊지 않고, 남은 여생 전부를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이제 루카 복음 8장 3절에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가 소개된다.
'집사' 또는 '청지기'에 해당하는 '에피트로푸'(epitropu)의 원형 '에피트로포스'(epitropos)는 '돌보다' 또는 '위탁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에피트레포'(epitrepo)에서 유래하며 '어떤 것을 돌보도록 위탁받거나 그러한 영예를 얻은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단어가 관직 이름으로 쓰였으며, 헤로데 임금의 '행정 장관' 정도의 높은 직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고관의 아내 요안나는 8장 2절에 소개된 일곱 마귀들린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신분적으로 현격하게 구분된다.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의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특별히 이 두 여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대표적으로 헌신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이면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데는 지위 고하, 신분의 귀천이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함께 협력하게 됨을 강조하려는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시중을 들었다'
희랍어에는 '시중들다',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는 뜻을 지니는 다양한 단어가 있다.
'노예(종)로서의 맹목적 섬김'을 뜻하는 '둘류오'(duleuo), '자상하게 봉사함'을 뜻하는 '테라퓨오'(therapeuo), '급료를 벌기 위해 봉사함'을 의미하는 '라트류오'(latreuo), '공무에 봉사함'을 의미하는 '레이투르게오'(leiturgeo)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디아코네오'(diakoneo)는 특별히 '자원하여 봉사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나타나는 '데이코눈'(diekonun)은 '디아코네오'(diakoneo)의 미완료 형태로서, 여자들의 섬김은 자원하는 마음에 우러나온 희생적 봉사였으며,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고대 순회 설교자들은 부유한 여자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원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신의 소유 중 일부를 떼어 아무런 대가없이 자원하여 지속적으로 섬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기 과시적으로 기분에 따라 일시적으로 재정적 도움을 준 일반적 경우들과 차원이 다르다.
복음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배만 채우는것도,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도 아니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우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었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은 복음 선교에 전념하시느라 생계 수단을 갖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의해 구원받고 은혜받은 사람들의 재정적인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 15장 2절에서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은 자들은 그것을 나누어 준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돌볼 의무가 있다고 말하며, 갈라티아서 6장 6절에는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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