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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받은 업(業)
정유제
감겨진 눈의 수정체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나무늘보의 어정거림마냥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눈의 수정체가 넓어지는 만큼 마음자리도 넓혀지고 있다는 것이 감지된다. 아주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나무판자 덮개 틈을 비집고 무덤 속까지 폴폴 새어 들어오던 흙먼지 때문에 눈을 감았다. 한참 만에 흙먼지가 날리는 것은 잠잠해진듯한데 좀체 다시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때 감은 눈은 더 이상 떠지지가 않는다. 덩달아 호흡도 가빠진다. 되도록 천천히 숨쉬기를 조절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틈새 저절로 벌어진 입속에는 흙먼지가 가득 들어찬 듯 텁텁하기만 하다. 이내 얼굴은 빨개지면서 열꽃을 피우더니 손발까지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귀에는 아직도 제사장의 주문소리가 남아있기는 한데 벌떼가 날아다니는 앵앵거림으로만 울린다.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힘에 몸은 반응조차 할 수가 없다. 불안감은 떠나보낸 지 오래다. 체념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 하염없는 기다림만 남아있다. 빼앗긴 붉은 연꽃 씨앗이 그립다. 연꽃 씨앗을 간직하고 있기만 했더라도 이 신세는 면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고일어나 미련을 남긴다. 연꽃 씨앗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를 태웠던 초조한 세월보다 더 길어질 기다림만 남은 것이다. 기다림은 시간을 늘리고 공간을 넓혀놓을 것이다.
*
초우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늦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첩첩산중 말이산 깊은 계곡에 숨겨진 가람연지의 둔치 가장자리 수양버드나무 아래 앉아서 깜빡 졸았던 토끼잠이 확 달아났다. 미르의 갑작스런 현몽에 혼비백산한 것이다.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수양버드나무는 맥을 놓은 듯하다. 먼지 하나 앉아있지 않은 것처럼 파랗게 돋아나 산천을 뒤덮고 있던 풀잎마저도 노랗게 보였다. 어스름하게 건너다보이는 가람연지의 연꽃은 언제 붉은 기운을 잃었는지 하얗게 보이기까지 했다. 쳐다보고 있는 하얀 연꽃은 미르의 혼백인 양 소름을 돋게 하더니 금방 몸을 부들부들 떨리게 만든다. 벼리도 지쳤는지 말없이 초우 옆에서 넋을 놓고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벼리를 보는 순간 걱정이 떠나지를 않는다. 미르에게 일어났던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옛날 일이라고 치부해버린다손 치더라도 앞으로 벼리에게 불어닥칠 일이 이만저만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초저녁 움막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으면서 언제 올지도 모를 아침을 기다리는 초조한 시간보다 더 아득하다. 산길을 오르내리다 발을 헛디뎌 천 길 낭떠러지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던 순간만큼이나 아찔하다. 벼리도 숨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벼리의 놀란 눈은 바지랑대를 걸쳐둔 듯 화폭 속의 인물화가 돼 버렸다. 초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찾아온 가람연지에서 붉은 연꽃을 보자마자 모든 움직임이 정지돼버린 것이다. 꿈에서라도 찾아내기 위해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붉은 연꽃이었기에 벌어진 입도 다물 수가 없었는지 헤벌쭉한 채다. 붉은 연꽃을 눈앞에 두고 발걸음이 한 발짝도 떼이지 않아 몸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초우와 달리 벼리는 순간에 화석이 돼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돌아오지 않을 지아비를 기다리다가 화석이 돼버린 전설 속의 이야기들이 사실로 믿어지는 순간이었다.
전설의 꽃, 상상 속의 꽃으로만 생각했던 붉은 연꽃을 처음 본 순간 초우 역시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좀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남자의 순정을 다 바쳐 난생 첫 여자를 품에 안았을 때의 떨림보다도 더했다. 가람연지에 핀 붉은 연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초우였다.
초우는 산에서 나는 약초를 찾아 두 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가리지 않고 어디든 찾아 헤매고 다녔다. 철 따라, 길 따라 얻어지는 약초도 가지가지였다. 봄부터 여름에는 잔뿌리를 채집하는 오약, 창출이라고 하는 삽주 줄기뿌리, 다섯 장기를 보호하고 기억력을 증진시킨다는 석창포, 소나무담쟁이, 더덕, 칡, 생지황, 잔대가 많았다. 가을이면 산의 장어라고 일컫는 참마, 꾸지뽕나무, 뇌를 맑게 하고 정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복령, 눈을 맑게 해준다는 결명자, 다섯 가지 맛이 난다는 오미자, 어머니를 이롭게 하는 풀이라고 알려진 익모초가 주를 이루었다. 어느 해를 가리지 않고 취할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약초라 하더라도 누구나 욕심을 낼 수는 없는 것 또한 자연의 순리다. 같은 약재라도 사람에 따라 효험 상 차이가 있는 이치와도 같다. 초우는 약초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지신명께 먼저 감사의 예를 갖추는 의식부터 행했다. 고마운 마음으로 반드시 눈앞에 보여주는 것만큼만 얻었다. 더 이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산천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초우가 붉은 연꽃을 찾아낸 것은 깊은 산속 작은 연못가에 다다랐을 때다. 그곳이 가람연지라는 것을 안 사실은 나중의 일이었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헤맨 그때도 늦여름이었던지라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간지럽기까지 했다. 초우는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물을 떠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는 풀섶을 찾아 드러누웠다. 숨골을 타고 올라와 대롱거리던 거친 숨결은 어느새 잦아들었다. 앙증맞은 새털구름 한 조각이 먼 하늘에 홀로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불면 날아갈 듯, 손을 휘저으면 흩어질 듯한 구름을 보는 순간 미르가 보고 싶었다. 초우보다 네 살이나 어린 미르는 초우의 움막이 있는 곳에서 산을 하나 너머 있는 마을의 고상가옥에 사는 초시영감 딸이다. 초우가 수혈주거에 사는 것에 비하면 미르의 살림살이는 나은 편이었다. 미르에게는 쌍둥이 여동생도 하나 있었다. 그런 미르를 만난 것은 초시영감 때문이었다. 초시영감이 잦은 기침과 들끓는 가래로 고생을 할 때 산약초를 구해서 파는 일을 하는 초우의 움막으로 미르가 어머니를 따라 여러 번 찾아온 뒤의 일이다.
후닥닥, 산짐승 뛰어가는 소리에 놀란 초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가 나는 듯, 마는 듯 은은하게 풍겼다. 처음 본 작은 연못은 삼면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우묵하게 파인 절구통 같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디딜방아 공이에 찌여도 확 밖으로 튀어 오르지 못하는 곡물처럼, 향기가 산을 넘지 못하고 연못가에 그대로 모이고 모여 있었던 셈이다. 초우는 마음속에 미르를 그려보았다. 향기가 미르를 닮았다는 생각이 시나브로 들었기 때문이다. 초우는 혹시라도 미르가 연못가 어딘가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되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향기가 나는 곳을 찾아 살금살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둔치에서 물가로 내려서서 이리저리 한참을 둘러보아도 향기를 내뿜을 만한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 불어온 명지바람에 묻혀온 향기가 다시 날아들었다. 초우는 바람이 불어온 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기설기 엉켜있는 칡넝쿨에 가려 좀체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약초를 찾아 나설 때처럼 향기를 좇아 무작정 칡넝쿨을 헤치고 얼굴을 디밀었다. 칡넝쿨 뒤에는 붉은 연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남들이 절대로 찾지 못하게 누군가가 숨겨서 심어놓은 것 같은 붉은 연꽃이 여인네의 가슴팍만한 넓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첫눈에 연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물 위에 뜨다시피 널브러져 있는, 솥뚜껑을 뒤집어놓은 듯한 커다란 연잎에는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마침 초우의 얼굴에 송알송알 맺혔던 땀방울 하나가 연잎 위에 떨어지자 또르르 미끄러지듯이 금방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연꽃 속을 헤집으니 씨방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 연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뿌리는 확인해보나 마나 연꽃이라는 것을 단정한 초우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가 다리를 삐끗하면서 주저앉아 엉덩이를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물에 빠진 몸이 시원했다. 여름 더위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마음 또한 넓고 크고 둥글고 속이 꽉 찬 연꽃과 연잎, 씨방을 그대로 닮아 그득함이 느껴졌다.
연꽃과 연잎은 물론 연뿌리는 버릴 것 하나 없는 식물이다. 굵고 튼실한 뿌리와 잎자루는 먹을 수도 있다. 뿌리를 먹으면 허약한 원기를 북돋워주고 체력을 보강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입안이 헐거나 염증이 생겼을 때는 달인 물을 머금으면 좋고, 각혈을 하거나 하혈을 하는 사람은 즙을 짜서 먹으면 더 없이 좋다고 한다. 연잎은 치료제로도 이용된다. 다친 곳을 아물게 하거나 진물을 마르게 하고 피를 멎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잠을 자다가 누는 오줌치료제로도 탁월하다고 알려진 약초다. 1만년이 지나도 싹을 틔울 수 있으며, 옹골찬 자생력을 가진 덕분에 남녀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연꽃 씨앗은 부작(符作)의 일종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원하는 바를 마음에 새기며 늘 반복해서 생각하고 덕을 쌓아 사람됨의 도리를 다하면 언젠가는 필시 효험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널리 퍼져 있기까지 했다. 생명력이 질긴 것으로는 연꽃 씨앗을 당해낼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는 듯했다.
초우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연꽃은 전설의 꽃에 다름 아니었다. 초우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연꽃에 대한 이야기는 이웃하고 있었던 구야국 출현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야국을 탄생시킨 수로왕이 아내로 맞아들인,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왕녀 허황옥의 행적과 관련돼 있다. 아유타국에서 연꽃은 각종 신들의 어머니인 ‘라지브’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돼왔다는 것이다. 구야국의 황후가 된 아유타국의 왕녀가 바다를 건너 시집오면서 연꽃을 가지고 올 수가 없어 씨앗 5알을 가져온 것이 시초라는 것이었다. 황후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처럼 귀한 꽃을 하루빨리 보고 싶어 구야국에 도착하자마자 뒷마당에 연못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정성 들여 씨앗을 심었다. 다시는 가볼 수 없을 먼 나라, 고향을 그리워하며 황후는 매일같이 연못에 나가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떠나온 친정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도 연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황후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도 감복을 했던지 씨앗을 심은 바로 그 이듬해부터 연꽃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모두가 신기해하면서 관심을 가졌다. 황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돌보던 연꽃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크고, 더 아름답게 피어났다. 색깔도 여러 가지로 피어났다. 이 땅의 풍토와 기후에 따라 제 스스로 몸을 바꾼 듯싶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황후의 애절한 마음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황후가 즐거워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연꽃을 탐했던 하녀 하나가 하루는 아무도 모르게 씨앗 두 개를 훔쳐서는 자기가 하나를 간직하고, 연모하고 있었던 사내에게 다른 하나를 건네주었다. 한참 후 둘 사이에 임신이 됐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얼마 있지를 않아 함께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들이 안야국까지 도망을 와서 아무도 모르게 깊은 산, 깊은 계곡에 숨어살며 연못을 만들어 연꽃 씨앗을 심었다는 이야기다. 그랬기 때문에 초우의 할아버지도 그 연꽃을 보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산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전설처럼 들은 이야기로 상상을 해볼 뿐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바에 따르면 꽃은 달덩이처럼 환하고 화려하며, 넓은 잎은 절대로 물을 묻히지 않고, 굵은 뿌리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을 뿐만 아니라 씨앗을 담고 있는 씨방은 여인네들의 젖가슴처럼 생겼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진흙탕이 아니라 아무리 더러운 곳이라도 잘 자라나며 꽃의 화려함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도 했다.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황후를 빼 닮은 꽃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만 전해질뿐이었다.
초우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전설의 꽃, 상상 속의 꽃으로만 여겨왔던 연꽃을 직접 보다니……. 눈이 휘둥그레지고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머릿속은 하얘지는 것 같았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칡넝쿨 옆으로 피씩 주저앉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향기만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할 뿐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초우를 조르고 졸라 붉은 연꽃을 처음으로 본 벼리는 놀란 가슴을 좀체 진정시킬 수 없어 두 팔로 깍지를 끼고 가슴을 있는 힘껏 눌렀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데 초우가 다가가 흔들리는 어깨를 잡아주었다. 벼리는 초우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초우에게 붉은 연꽃을 찾아주었다고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인 양 느껴졌다. 하지만 벼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홀로된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리고 제 욕망을 좇아서 저질러버린 행동에 대한 갈등 끝에 솟구친 눈물이었다. 연꽃을 볼 수 있는 기회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연꽃을 보겠다는 결심을 세운 것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양 갈래로 놓인 앞길 중에서 하나를 선점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꽃을 본 뒤에는 부작으로 여겼던 연꽃 씨앗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당연지사였기 때문이다. 연꽃 씨앗을 갖는다는 것은 원하는 바를 좇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신앙처럼 여겼던 탓이다.
홀어머니는 벼리가 아도간의 가옥으로 들어가서 시녀생활 하기를 바랐다. 입고 지내는 것은커녕 끼니때마다 먹는 것도 제대로 챙겨 먹지를 못하는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할 바에야 아도간의 가옥에 시녀로 들어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생활이야 고단하겠지만 먹고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앞세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벼리는 그것이 마냥 싫었다. 벼리의 생각은 홀어머니와 달랐다. 잘 먹고 잘 입는 것도 중요하다고는 하겠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닐 것인데 홀로된 어머니를 다시 또 혼자 지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벼리는 피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그 길을 피하고 싶었다. 천지신명에게 매달리고 산천초목은 물론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줄 능력을 가졌다면 심지어 야차에게도 달라붙어 사정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붉은 연꽃 씨앗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호의 기회가 벼리에게 찾아온 것은 천우신조와도 같은 일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야말로 초우를 알게 된 것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느닷없이 돌아와 안겨준 행운과도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벼리가 붉은 연꽃 소식을 좇아서 초우를 찾은 것은 우연만이 아니었다. 홀어머니가 슬쩍 흘린 말 한마디가 벼리의 조바심을 부채질했다. 벼리가 궁리 끝에 초우의 움막을 처음 찾았던 날은 초우가 없던 때였다. 산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움막 곳곳에는 시래기처럼 짚 풀로 엮은 갖은 약재들이 나무 등걸에 걸쳐져 있거나 여기저기 매달려있었다. 마당은 언제 사람이 거쳐 갔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발을 내딛는 곳곳마다 푹푹 빠지면서 쌓인 흙먼지가 폴폴 날렸다. 끼니를 해먹은 지가 언젠가 싶게 아궁이에 불기운이라고는 없고, 물동이로 쓰는 듯한 항아리에도 먼지가 보얗게 덧씌워져 있었다. 여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홀아비로 사는 것 같았다. 벼리는 애잔한 마음이 들어 눈시울을 붉혔다.
벼리가 생각 끝에 그믐날 밤 초우의 움막을 다시 찾았을 때야 비로소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수십 번도 더 들락거린 뒤의 일이었다. 밤낮 없이 산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초우라 할지라도 그믐날 밤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벼리는 기쁜 마음으로 선걸음에 움막 앞의 거적때기를 걷어 올리고 안을 기웃거리며 초우를 찾았다. 움막 안은 바깥보다 더 캄캄했다. 안과 밖의 경계에서 엉거주춤하게 한참을 서 있자 희미하게나마 안쪽에 앉아있는 초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저함도 없이 안으로 들어선 벼리의 느닷없는 부탁에 초우의 거절은 단호했다.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게 아예 자리를 돌려 앉으며 등 뒤로 손사래를 쳐댔다. 벼리는 무릎걸음을 해서 초우의 등 뒤로 다가가 애원하다시피 간청을 했다. 초우의 등짝에 금방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초우는 화들짝 놀란 듯이 등짝을 움찔하더니 이내 모른 척 그대로 앉아서 딴청을 피웠다. 벼리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초우를 구슬려서 붉은 연꽃이 피어있다는 연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벼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물 몇 방울을 초우의 등짝에 다시 떨어뜨렸다. 벼리가 떨어뜨린 눈물은 초우의 등짝을 뚫고 들어가 심장으로 흐르고 있었다. 초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벼리는 이때다 싶어 더욱더 슬프게 흐느끼면서 초우를 껴안았다. 벼리의 팔을 벌리면서 돌아앉은 초우가 살포시 벼리를 껴안아주었다. 벼리는 초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더욱 세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초우는 왼쪽 팔로 벼리를 안은 채 오른쪽 손으로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
초우가 겨우 안정을 취해서 숨을 고르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둔치에서 일어서려는데 곡소리가 들려왔다. 초우는 귀를 의심했다. 미르가 어릴 때 노비로 팔려갔던 대궐 같은 군장의 집이 환영처럼 보였다. 곡소리는 그곳에서 났다. 안방인 듯한 곳에 마련된 빈소에는 병풍이 쳐져 있다. 병풍 앞에는 상복을 입은 상주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다. 남자들은 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착용하고 두건을 썼으며 굴건제복을 입었다. 여자들은 삼베로 된 복치마저고리를 걸쳤다. 머리에는 수질을, 허리에는 요질을 둘렀다.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가 들려있다. 병풍 뒤에는 관보가 씌워진 관 옆으로 소복을 한 남녀 두 쌍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인을 따라 순장될 이들이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곡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관속에 누워있는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숨조차 쉬지 않는 주검처럼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외로 꼰 새끼 금줄이 내 걸린 담 밖에는 늙수그레한 여인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인의 얼굴에는 초상집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집 안팎을 번잡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조차 띄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초우는 다시 짓눌려오는 어떤 중압감으로 인해 일어설 수가 없었다. 미르의 애절한 흐느낌이 몸서리쳐지게 다가왔다. 노랗게 질린 자신의 얼굴이 실루엣처럼 먼저 떠오르더니 사위가 점점 옅어지면서 두 여자가 맞붙어 싸우는 듯한 희미한 그림자가 다시 얼비쳤다. 젊은 남자 하나는 덩치가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두 여자가 있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남자의 눈물이 함부로 성큼 나서지 못하는 애타는 심정을 말하는 듯하다. 젊은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다. 옷 속에 숨겨놓은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는 젊은 여자의 웃옷을 벗겨내기라도 할 듯이 엉겨붙어 악다구니를 쓰는 모양새다. 산속에서 벌어진 두 여자의 실랑이는 각저희(角抵戱)를 보는 듯하다. 한참 만에 힘에 부친 젊은 여자의 젖가슴을 가린 속곳이 드러나면서 웃옷이 훌러덩 벗겨졌다. 젊은 여자의 웃옷을 거머쥔,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는 옷섶을 헤집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찾는 눈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기의 웃옷을 살피는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의 눈길을 피해 젊은 여자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연못으로 휙 집어던져 버렸다. 젊은 여자의 웃옷을 툴툴 털어 보기까지 하던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는 빼앗은 웃옷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에 젊은 여자의 속곳까지 풀어낼 양으로 다시 덤벼들었다. 그제 젊은 여자도 더 이상의 저항은 하지 않는다. 의기양양한 투로 찾아보려면 찾아보라는 심사 뒤틀린 사람처럼 담대하게 대했다. 산속에서 사내와 몰래하고 있다는 사랑을 눈치 챈 미르의 어머니가 딸의 몸 상태를 살펴보려다가 옷섶에 숨겨두었던 연꽃 씨앗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미르는 끝끝내 빼앗기지 않으려고 죽기를 각오하며 버티다가 포기해버린 것이다. 모녀의 다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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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벼리를 따라서 초우도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먼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산대로 푸르고, 하늘은 하늘대로 높았다. 지금이라도 벼리를 데리고 산을 내려가고 싶었다. 초우는 어떻게 해서라도 벼리에게 붉은 연꽃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자꾸만 딴청을 피웠다. 벼리에게 떠밀려 가람연지까지 오기는 했으나 자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먼 산에 두고 있던 눈길을 거두어 벼리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벼리는 눈을 똑바로 뜬 채 초우를 올려다보았다. 왜 딴청을 부리느냐고, 말이라도 뱉을 기세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말을 끄집어내지를 못하는 눈치였다. 자칫 초우의 심사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으로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초우는 다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라 붉은 연꽃을 감추고 있는, 칡넝쿨 더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치 빠른 벼리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초우는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벼리의 손을 낚아챘다.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다가 벼리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으면 싶었다. 초우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벼리가 칡넝쿨 더미 쪽으로 내달렸다. 초우는 하는 수 없이 벼리의 뒤를 따라가 칡넝쿨을 헤쳐 주었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붉은 연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벼리의 큰 눈망울이 더 커졌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흥분에 겨워 울먹이기까지 하는 벼리를 지켜보던 초우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때 벼리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우가 황급하게 팔을 뻗어 벼리를 잡았다. 벼리는 연꽃 속에 숨어있는 연꽃 씨앗을 따려는 심사였다. 아직은 설익은 연꽃 씨앗을 딸 수 없다는 초우의 말에 벼리는 적이 실망의 낯빛을 드러냈다. 초우는 연꽃이 시들고 난 뒤에 제대로 익었을 때 연꽃 씨앗을 따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벼리는 초우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초우는 하는 수 없어 물속으로 들어가 연꽃을 헤집어 속에 숨어있는 씨방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초우는 그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씨방은 여물지가 않아 씨앗도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네들의 젖무덤처럼 씨방을 뚫고 씨앗이 솟아오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인지 한참 만에 겨우 마음을 다독인 벼리가 초우의 손에 이끌려 둔치로 올라섰다.
미르는 달랐다. 초우의 손에 이끌려 가람연지로 왔던 미르의 손에 연꽃 씨앗을 들려준 것은 초우였다. 그의 의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가람연지에 다다른 젊은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들떠 있었다.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을 맹세하는 중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끌어 당겨 깊은 포옹을 하더니 붉은 연꽃이 피었던 곳으로 곧장 다가갔다. 연꽃은 지고, 씨앗은 잘 익어있었다. 완벽한 여인네의 젖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씨방을 꺾어 올린 남자가 그 속에서 씨앗을 골라냈다. 여자에게 먼저 세 개를 건네주고 자기도 세 개를 거머쥐었다. 사랑의 정표를 나누듯 그 순간의 일은 첫날밤을 치르는 사람들의 행동처럼 소박하지만 장중한 의식 같았다. 저들의 사랑이 연꽃 씨앗의 생명력처럼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부작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포옹을 한 두 사람은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여자가 먼저 산을 내려간 뒤에 남자가 뒤를 따랐다.
초우와 미르의 사랑은 산속을 떠도는 해바라기를 하며 연꽃의 씨방처럼 익어갔다. 물속에서 몸을 썩혀 스스로 싹을 틔우는 씨앗 마냥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군장의 집 노비로 팔려 가느니 하루빨리 임신을 해서 거부당하기를 바랐다. 초시영감의 기침을 멎게 하고 가래를 삭혀줄 약초를 구해오겠다는 핑계로 두 사람은 매일같이 붙어서 산야를 헤매고 다녔다. 노비로 팔려가기 전에 효도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미르의 간곡한 부탁이 늙은 부부의 마음을 움직여 허락을 얻어냈던 것이다. 산속에서 나누는 사랑 놀음은 연꽃 향기처럼 시나브로 달콤 달콤해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초우가 산기슭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리면 미르는 한참 뒤에 나타났다. 산길을 오르내릴 때도 두 사람은 가급적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나무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라도 띄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미르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훨씬 편하기도 했다. 미르가 남장을 하고 나타나면 초우조차도 멀리서는 몰라볼 정도로 감쪽같았다. 미르의 번쩍이는 생각이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꼬리가 길면 드러나기도 쉽고 언젠가는 밟히기 마련인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를 못했다. 미르 어머니의 직감이 두 사람의 긴 꼬리를 확인하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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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는 벼리가 산에서 먼저 내려갈 것을 권했다. 연꽃 씨앗을 얻을 수 있을 때 날을 잡아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벼리가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맥없이 내딛는 벼리의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산길을 내려간 벼리가 눈에 보이지 않자 초우는 붉은 연꽃을 모두 베어버릴까 하는 상상을 했다. 초우는 급한 마음에 걸망에서 낫을 꺼내 연못으로 내려섰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연꽃을 보는 순간 낫을 거머쥔 팔의 힘이 죽 빠져나갔다. 크게 실망하게 될 벼리를 생각하자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벼리가 대궐로 들어가서 시녀생활을 하는 것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초우는 둔치 쪽으로 낫을 던져버리고 물에서 걸어나와 돌무더기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붉은 연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벼리가 붉은 연꽃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 연꽃을 발견하게 된 것도 운명일 것이다. 미르가 그렇게 된 것도 자기 인연 때문이고, 벼리가 겪어야 할 앞으로의 일도 정해진 행로일 뿐이다.
초우는 둔치로 올라와 낫을 주워들고 걸망을 찾아서 산길을 내려갔다. 벼리가 걸어갔을 그 길을 그대로 따라 움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몸은 천근만근 물에 젖은 연대를 한 짐 짊어진 느낌이었다. 미르의 환영을 본 것도 마음에 걸리기는 매 한가지다. 거기다가 벼리의 성화에 못 이겨 부질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에서 잠도 오지 않았다.
벼리 또한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초우가 행여나 연대를 모두 없애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머릿속에 꽉 들어차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새삼 가람연지로 달려가 연꽃 씨앗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기에 끙끙대며 앓는 소리만 낼뿐이다. 몸을 돌돌 말았다. 마음은 그만큼 오므라들었다. 벼리는 잠을 자려고 누웠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붉은 연꽃 씨앗을 얻지 못하게 되더라도 달리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하늘이 됐건, 돌이 됐건, 나무가 됐건 뭔가가 필요했다. 그것을 찾아야 했다.
초우는 순간 벼리 혼자 말이산으로 올라가는 상상을 했다. 초우도 서둘렀다. 벼리를 좇아가 말려야 할 일이었다. 벼리의 발걸음은 빨랐다. 산약초를 얻기 위해 매일같이 산야를 누볐던 초우의 발걸음이 가녀린 여자아이 벼리를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축지법이라도 쓰는 양 벼리의 몸은 공중에 떠서 날아가듯 거침이 없었다. 초우의 너덜걸음이 따라잡을 수 있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이내 말이산 깊은 계곡 가람연지에 도착한 벼리는 망설임도 없이 붉은 연꽃이 피어 있던 곳으로 가서 씨방을 땄다.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초우는 더 이상 벼리를 좇아가는 것이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씨방을 거머쥔 벼리는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것을 모두 쟁취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내지르며 빙글빙글 주위를 맴돌았다. 환희와 기쁨의 표현이었다. 연밥을 부작처럼 지니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었다. 방편이 인연 따라 오는 앞일을 모두 막아줄 수 없는 이치를……. 벼리도 알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믿고 의지할 그 헛것과도 같은 것을 늘 찾아다니고, 또 차지하려고 아귀다툼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연유다.
헛것을 본 것이다. 초우는 헛것을 볼 정도로 후회하고 있는 이 순간이 괴로웠다. 한낮에 연 줄기를 모두 베어버리지 않은 것이 한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베어버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바에야 차라리 없애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친 것이다. 홀어머니의 각오가 단단할 것이라는 사실은 초우의 입장에서라도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장차 시녀생활을 하기 위해 아도간의 가옥으로 들어가야 할 아이가 사랑을 찾겠다고 연꽃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벼리 어머니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벼리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쯤은 알고도 남음이 있기에 속앓이가 시작될 것은 뻔한 일이다.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질 것이기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도 남을 일이다.
미르가 그랬던 것처럼 벼리와 홀어머니 간에 있을 다툼이 선연하게 그려지기까지 한다. 벼리가 감추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발각될 연꽃 씨앗을 두고 벌일 모녀의 정신적인, 육체적인 각저희가 상상되는 것이다. 초우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낟가릿대에 매달린 짚이나 헝겊 등속이 바람에 휘둘리듯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좌우로 일렁거렸다. 낟가릿대 아래서 벼리가 팔짱을 낀 채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옷섶에 숨겨놓은 연꽃 씨앗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홀어머니는 벼리의 웃옷을 벗겨내려고 엉겨붙어 악다구니를 쓴다. 한밤중 들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여자의 실랑이는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해보인다. 한참 만에 힘에 부친 벼리의 웃옷이 훌러덩 벗겨지면서 젖가슴을 가린 속곳이 드러났다. 농사일로 팔에 힘이 오른 홀어머니가 벼리의 옷섶을 헤집으며 연꽃 씨앗을 골똘히 찾는다. 연꽃 씨앗이 보이지 않자 벼리의 웃옷을 툴툴 털어 보기까지 하던 홀어머니는 웃옷을 바닥에 내팽개친 다음 속곳까지 풀어낼 양으로 다시 덤벼들었다. 벼리도 더 이상은 저항하지 않는다. 이내 하얀 연꽃으로 뒤덮인 무덤 같은 대궐이 어른거린다.
업이다. 미르와 벼리는 어쩌면 같은 업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군장의 집 노비로 들어가는 것이나, 아도간의 가옥에서 하는 시녀생활이 다를 게 무엇인가? 초우는 깨트릴 수 없는 업의 굴레를 생각하며 다시 몸을 떨었다. 치가 떨렸다. 약초로도, 죽음으로도 다스릴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업……. 연꽃 씨앗처럼 질기고 모진 것이 업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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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이 준비되고 있다. 지름이 20여 미터는 넘는 원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이 파였다. 주인공에게는 온갖 의식을 갖추고 예를 다해 정성스럽게 입관을 해서 관보까지 씌워졌다. 주인공이 누운 관 주변으로는 부장품으로 평소 즐겨 쓰던 장신구며 다기, 음식 그릇들이 군데군데 놓였다. 무덤 밖에 있는 여섯 명의 순장조들은 북쪽을 향해 둥근 멍석 위에 앉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릴 듯, 말 듯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만 낼뿐이다. 그들 앞에는 각기 작은 상이 하나씩 놓여있다. 상 위에는 독약이 든 백색 사발이 하나씩 놓였다. 그 옆에서 칼을 빼들고 있는 건장한 두 명의 사내 눈에서는 섬뜩한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섯 명의 순장조들을 감시하는 듯한 사내들은 미동조차 않고 그들을 주시할 뿐이다. 제사장은 고깔모자를 쓰고 허리에 두른 새끼줄에 울긋불긋한 헝겊과 탈곡하지 않은 곡식을 줄기째 치렁치렁 매달고 있다. 왼손에는 소나무 가지를 들고, 오른손에는 동물 뼈를 들었다. 순장조를 위해 제사장이 베푸는 한바탕의 이별의식이 진행될 모양이었다. 구경꾼들조차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제사장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슬픔에 사무친 작별의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는 사람을 위한 환영의 무대라는 인식이 더 깊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업장을 소멸하고 새 인연을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떠나라는 의식인 셈이다. 이윽고 제사장이 몸을 움직인다. 의식이 시작된 모양이다. 순장조 앞에 선 제사장은 천지팔양신주들에 고하는 주문을 외운 뒤 순장조들의 이름과 생시가 적힌 종이를 불에 태운다. 화천소천, 화력공양이다. 제사장의 의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이어 순장조들이 고개를 들어 백색 사발을 입으로 가져갔다. 부축을 받아 무덤 속으로 들어선 순장조들은 각기 데려다준 자리에 반듯하게 눕는다.
초우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울음을 그냥 토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억센 손으로 다 훔쳐낼 수가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과 후회가 가슴을 후벼 파고 들었다. 벼리가 걱정돼 산으로 갈 수가 없었다. 간밤 악몽 끝에 뜬눈으로 지샌 피곤한 몸은 녹초가 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초우가 움막을 벗어나 거적때기 앞에 앉아있는데 벼리가 불쑥 나타났다. 초우는 벼리를 쳐다볼 수가 없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움막 속으로 들어갔다. 벼리도 따라 들어섰다.
벼리는 군장의 집 노비로 있다가 순장을 당해 죽은 사람 중에 어머니가 있었다고 했다. 지금 그를 키워준 어머니는 죽은 어머니의 쌍둥이 동생이었던 이모라고도 했다. 초우는 벼리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가슴 떨리는 말이었다. 초우가 긴장을 한 탓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새 벼리도 긴 숨을 몰아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시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때문에 붉은 연꽃 씨앗을 갖게 됐고 한참 후에 아기를 잉태했다. 어머니는 군장의 집에서 노비생활을 하고 있는 쌍둥이 동생이 임신을 하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갖고 있던 붉은 연꽃 씨앗 하나를 몰래 나누어주었다. 벼리가 태어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했을 무렵 군장의 집에서 노비생활을 하던 쌍둥이 동생도 임신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벼리의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궁리에 궁리를 한 끝에 한밤중 딸을 바꿔치기 해버렸다. 초우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이를 낳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르에 대한 이야기를 벼리에게 전해들은 초우는 기가 막히는 현실 앞에서 어안이 벙벙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며 식은땀이 났다. 숨까지 턱 막혔다. 천장만을 쳐다보며 한숨을 짓던 초우는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앉았다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동안 시렁 위 항아리 속에 감추어 두었던 붉은 연꽃 씨앗 5알을 꺼내 벼리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움막을 나섰다. 눈알이 빠질 듯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노랬다. 이내 모든 것이 흐릿하게, 형체조차 몰라볼 정도로 산산이 흩어졌다. 뭉쳐진 구름이 하늘가를 떠돌다 저절로 흩어지듯이…….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2년 · 하반기 제7호
정유제
경북 성주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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