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단추 (외 3편)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나무의 수사학 6
공원 화장실 옆에 신갈나무가 있다
누구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기기라도 한 듯
이파리 듬성듬성한,
화장실 청소도구함 속에서 아낙이 밀걸레를 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하늘을 쓸고 왔나
싸구려 파마기에 빠져나간 올올
청소가 끝나길 입구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쩌다 아낙의 발뒤꿈치를 바라보는데
해진 양말 밖으로 삐져나온 뒤꿈치가
갈라 터졌다 속살이 다 보일 듯 불가뭄이 들었다
저 마른 살에 바셀린 로션이라도 발라줘야 하는데
아직도 세상 어딘가엔 양말 속에 축 나간 알전구를 받쳐 넣고
수명이 다한 전구빛 살려내듯 실을 풀어내는 여자가 있지
기운 양말을 신고 구석구석 방 소제를 하시는 어머니가 있지
갈라진 발뒤꿈치에 찰칵, 들어온 불이 꺼질 줄을 모르는 화장실
살갗 터진 나무도 꽃등을 켜들고 서선
올 나간 머리카락 흐린 하늘을 민다
수채
어딘가로 번지기 위해선 색을 흐릴 줄 알아야 한다 색
을 흐린다는 것은 나를 지울 줄 안다는 것이다 뭉쳐진 색
을 풀어 얼마쯤 흐리멍텅, 해질 줄 안다는 것이다
퇴근 무렵 망원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맞은편 건
물 벽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간다 어디선가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뿜어대던 열기를 삼키며 제 색
을 조금씩 허물고 있는 모양이다 삘딩으로 뒤덮인 거리,
둘러봐도 해는 보이지 않는데 지는 해가 분단장을 하듯
붕어빵집 아주머니의 볼과 생선비늘 묻은 전대를 차고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아낙의 이마에 머물렀다 간다 남루
하디남루한 시장 한 귀퉁이에 지상에 없는 빛깔이 잠시
깔리는 시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성미산 너머 북한산 쪽으로 간다
한강에서 날아오른 물새 두엇이 물풀 냄새를 끼치며 선
교사 묘지 위로 날아간다
버스가 오기 전 둘 데 없는 눈으로 나는 바닥에 구르는
모래알을 보고, 모래와 모래가 등을 부비는 사이의 반짝
임, 흩어지면 사라지는 틈을 보고, 여위면서 바래가는 가
로수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깨어진 구두코에 내린 어둠을 구두약처럼 슬슬 문질러
대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오
는 아내와 시래기 마르는 처마 아래서 나물을 다듬는 어
머니의 집 간난도 설움도 불빛 하나로 단촐해진 지붕을
찾아가리라
저를 얼마쯤은 놓칠 줄 안다는 것 묽디묽은 풍경 속에
서 멈칫, 흐릿해질 줄 안다는 것 색을 흐린다는 것은 그러
니 나를 아주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아주 지우
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다만 물끄러미 놓쳐본다는 것이다
빛의 감옥
가로등 어디에 틈이 있어
날벌레들이 그 속을 파고드는 모양이다
입구를 잃어버린 날벌레 한 마리가
램프를 감싼 유리등을 두드리고 있다
유리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다
저 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파닥거리며 왔던가
무덤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던가
비명으로 꽉 찬 유리 속에 간신히
둥지를 튼다
쿵, 이삿짐을 풀고 내다보는 거리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는 대신 감추고 있는,
유리알 속에 아침마다 눈곱이 낀다.
— 시집 『나무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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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1998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당선. 시집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나무의 수사학』. 현재 실천문학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