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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구약이 하느님과 만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했다면 신약은 역사적이면서도 역사를 뛰어넘는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귀한 책입니다. 또 예수님을 만난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식을 함께 듣게 된 이방인 신자들의 족적을 증언한 책입니다. 끊임없이 이방인, 이민족과의 대결 속에서 야훼를 찾았던 유다인들의 기록인 구약에 비해 어떤 종류의 타자(他者)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신약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공통적인 울림을 줍니다. 어떤 민족인지,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어떤 성별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조건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좁은 편견과 차별의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려 애썼습니다. 누군가에게 회의가 들 때 무언가 잘 풀리지 않아 좌절할 때, 또 정의롭지 못한 사건에 분노를 느낄 때 신약을 읽다 보면 꽁꽁 얼었던 마음이 풀리고 다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천 년이 넘은 과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지만, 특히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들도 보이기 때문에 예전과는 좀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정신 건강 의학과 의사로서 일한 지 40년이 되어가고, 융 분석가가 된 지 2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사람의 마음에 대해 모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의학이나 심리학의 설명 역시 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인과응보나 신상필벌 같은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여러 가지 불행들, 또 아직까지 과학으로도 도저히 규명되지 않는 인생의 과제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왜 죄 없는 아이들과 사람들이 전쟁과 폭동으로, 또 살인강도로 다치고 죽어 가야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갑작스러운 사고와 죽음, 그리고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누구나 겪게 되는 노화와 질병,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대처하고 준비해야 할까요. 의학과 심리학으로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의논한다 해도 그런 인생의 근본적인 숙제들 앞에서는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종교는 유일하게 매달릴 마음의 동아줄이 되어 줍니다.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릇이 작은 탓에, 제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 앞에 쩔쩔 매고 좌절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경과 교리, 성직자들, 그리고 성인 성녀의 가르침은 큰 힘이 됩니다.
무엇보다 오로지 끝없는 사랑만 실천하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신비롭습니다.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고, 어쩌면 그 상황을 피할 만도 한데, 사랑 때문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비탄이나 억울함,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시고, 용서하시며 배려하시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까지 남기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놀랍습니다. 부활의 과정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을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감동에 말을 잃게 됩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예수님께서는 못난 인간들의 세상을 그다지도 사랑하고 아끼실 수 있었을까요. 저의 좁은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신비입니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경외의 사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참 많은 상상과 추측을 하게 됩니다. 기록된 분량이 워낙 소략한데, 그 상징과 내용이 방대해 구절 하나하나에서부터 장면들까지 해석도 다양합니다. 모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연관시킬 수 있는 주제들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주제를 분석심리학에서는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부모, 탄생, 죽음, 사랑, 일, 친구 등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게 되는 대상들과 그 대상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들입니다. 인류가 이런 상황에 대한 공통의 경험을 언어로 공유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역사에는 문화도, 진화란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형적 개념이 녹아 있는 장르로 흔히 민담, 전설, 신화를 이야기하지만 문학 등 모든 예술 작품에는 이런 원형적 상징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한데 종교 경전에도 이런 원형적인 상징들과 관련된 내용이 보입니다. 특히 인류의 고전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 사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도 아주 좋은 연구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 지면에서는 성경의 내용을 심리학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대신 저의 주관적인 성경 체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수수께끼 같은 대목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는 계속하겠지만 저의 생각들은 검증된 객관적인 주장이기보다는 검증의 영역과는 다른 주관적 체험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신앙과 예술은 주관적 체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포용해 주는 영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가차 없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과학의 영역에 비해 상상과 추측과 감정의 소중함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어쩌면 살아가는데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흔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의미를 ‘가르치고(teaching), 강론하고(preaching), 치유하는(healing) 기적’으로 이해합니다. 제 잘난 맛에 겨워 스스로의 심각한 오류에 대해 무지한 우리들처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도대체 깨달은 것이 없는 무지한 대상을 가르치고, 강론해야 했으며, 그들을 치유해 주기 위해 애쓰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무지와 비겁과 욕심들은 바로 나 자신의 무지와 비겁과 욕심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스스로를 보며 살피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나마 예수님이 살아계셨던 시기가 어떠했는지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내 삶의 오류를 탐색하고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기는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위기와 격동의 시기입니다.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동방 원정군 사령관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다시 파르티아인들이 팔레스티아를 점령해서 마카베오 왕조의 마지막 왕 안티오코스를 후원합니다. 당시 권세가였던 헤로데는 일단 로마로 피신해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후 약 33년간 팔레스티아를 다스리는 위치에 섭니다. 이미 전란과 침략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살림은 돌보지 않고 헤로데는 자신이 살 왕궁과 허세를 부릴 예루살렘 성전 증축 공사를 단행합니다. 유다인도 아니면서 로마를 등에 업고 왕이 된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키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허세 가득한 로마 문화에 찬탄하며 흉내 내기 급급했을까요. 정권과 결탁된 토호들과 토건족의 배를 불려주기 위함일까요.
어쨌건 헤로데 왕의 성전 건축 전후의 행동을 보면 신앙심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까 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기록이 된 것을 보면(마태 2,17 참조) 헤로데는 국가나 민족보다는 자신의 안녕에 삶의 목적을 둔 부패한 권력자로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윤리적인 면은 또 어떤가요. 헤로데는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는데, 이는 유다 법상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지적하는 요한을 미워한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이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자 얼른 요한을 죽여 버립니다.(마르 6,25 참조)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율법과 전통을 무시한 권력자가 전횡을 휘둘렀던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요. 이후 헤로데 일가는 팔레스티아를 분할 통치하면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각 지역에서 공물을 뜯어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어땠을까요. 외세인 로마와 정통성을 잃은 왕가에 대한 반감이 깊었을 것입니다. 열혈당처럼 테러와 혁명을 꿈꾸는 사람부터 에센파처럼 아예 사막으로 칩거한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빛이 될 것 같던 세례자 요한은 그러나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길을 잃은 백성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고 격려와 위로를 보내며 병을 낫게 해 주는 예수를 오해해서 그를 중심으로 그 세력이 결집될 수 있다고 꿈꾸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죽음, 부활 이야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세속의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석심리학적인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물에 대중들이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자신의 생각을 투사(Projection)한 것이지요. 누구에게는 그저 최하층 계층인 목수의 자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랍비, 메시아, 새로운 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민족을 실망시킨 가짜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오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하느님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신약이 아닐까요.
다음 호에서는 그 당시의 이른바 엘리트인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왕과 귀족들이 어째서 예수님을 그리 두려워했는지, 또 혁명을 꿈꿨던 열혈분자(Zealot)나 일반 대중들이 왜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렸는지에 대해 상상해 보려고 합니다. 종교사학자도, 주석학자도 아니니 그다지 권위는 없을 추론입니다. 다만 현대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사회적 과제들에 대한 생각과 연결시키면서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봅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 (1)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의 위정자들도 세계사의 다른 정치 지도자들처럼 백성의 희망과 행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들 역시 율법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어떻게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 안식일에 알곡을 따 먹는다고 시비를 걸고, 아픈 사람 치유해 주는 예수님까지 비난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냉혹한 사람들일까요. 잡다한 율법 규정들이 무겁고 힘겨운 짐이라면(마태 11,28; 사도 15,10) 당연히 그 짐을 덜어 주는 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의무인데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위치에 있건, 누군가를 이끌고 가야 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강하고, 똑똑하고, 계산 잘하고, 말도 참 잘하지만, 사실은 자기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는 지도자들을 너무 많이 보며 살게 되는 터라,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 한마디가 더욱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지도자 대신, 오만함에 취해 전쟁과 폭력적 상황을 만들고, 오로지 자기만 아는 지도자들이 넘치는 시대라, 내게 와서 쉬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과연 가능할까, 놀랍다 못해 낯설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이천 년이 넘어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으로 현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당시 왕과 귀족들이 누리지 못하는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마음은 오히려 더 퇴보한 것 같습니다. 에어컨과 보일러 상하수도의 편리함을 누리지만, 그런 문명의 이기가 없었던 이천 년 전보다 과연 더 행복해지고 더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을까요. 미디어의 발전으로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의 비도덕적인 자취들에 너무 많이 노출된 탓인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해 보려 하지만, 쓸데없는 자극이 너무 많아 그런 노력조차 쉽지 않습니다. 편리한 기계들, 화려한 매스 미디어, 인공 지능(AI)에 둘러싸여 살지만 정작 우리를 위로해 주고 보듬어 주면서도 잘 가르쳐 줄 어른과 지혜로운 현자는 없으니 심정적으로는 마치 사막에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다시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들(마태 21,12-14; 마르 11,15-19; 루카 19,45-48; 요한 2,13-22)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셨던 것처럼 과연 우리도 내 안에 있는 욕심과 허영들을 뒤엎을 수 있을까요.
세상을 개혁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세속적 어두움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온유한 예수님이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거만한 이들, 도시들에게는 가차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않고 두려워 하는 것이 그 답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4)라고 예언하신 대목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예언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티로, 시돈 같은 도시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뉴욕, 도쿄, 파리 같이 번성해 화려한 도시입니다. 나자렛, 갈릴래아 같이 가난한 시골 마을하고 대비가 되는 곳들입니다. 그런 땅들이 앞으로 지옥처럼 변한다니요. ‘거짓말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유적지들을 자주 다니신 분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폼페이 유적들, 둔황의 신전들, 그들 유적지 앞에 감탄만 하지 말고, 그 찬란한 도시의 현재가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상상해 보면 뉴욕과 파리, 도쿄와 서울의 미래가 어찌 될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지방 소멸의 시대라면서 걱정합니다. 대도시들의 집값은 그대로지만 작은 시골 마을은 버려진 집들의 황량한 폐허가 되는 것도 실제로 많긴 합니다. 도시로 이사 갈 수 없는 노인들, 농촌 일손을 돕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다면, 이미 많은 지역이 텅 빈 황무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미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래서 앞으로 몇 년 후면 어느 지역에는 결국 아무도 살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한데 정말 그렇게 되는 게 최선일까요. 또 만약 그런 상태가 된다면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이미 세계적으로 높은 자살률, 특히 노인과 청소년들의 높은 자살률과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면 지방은 소멸하고 도시는 번성하고, 빈자는 더 가난하게 되고 부자는 더 부유하게 되는 전망은 우리 모두에게 해로운 미래인 것 같습니다. 국가가 망해가는데 나 혼자 부자이면 뭐하나요. 베트남이 망했을 때 대부분의 부자들은 기껏해야 보트피플이 되어 남의 나라 땅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그랬습니다. 부유함과 권력을 자랑하며 화려한 궁궐과 성전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착취한 재물들을 창고에 쌓아 두었던 헤로데 왕가, 가짜 사제들, 총독 일가와 로마에 빌붙었던 이스라엘 귀족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불과 몇십 년 만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망해 버리고, 빈부와 권력 여부를 떠나 이스라엘 전 세계로 떠도는 난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로 이주하는 이들도 증가하고, 다른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옮겨옵니다. 왕국이 망하게 되는 조짐이 보이는 시점입니다. 정치적 불의는 경제적인 쇠락도 함께 몰고 옵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빈부 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권력층은 멋대로 불의를 저지르면서, 되지도 않는 영웅심으로 평화보다 전쟁을 도발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이 한반도 역시 당시 팔레스타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와 지금이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월간 빛, 2024년 2월호,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 심리학]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 (2)
사랑의 예수님이시지만,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마태 21,12; 마르 11,15; 루카 19, 45-48; 요한 2,13-17)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을 때의 모습이 어쩌면 그런 상황을 막고 다시 평화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열쇠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 복음서에 이렇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광경은 많지 않습니다. 성전을 다시 되살리라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지, 상인과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예수님의 일갈을 성경은 아주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침략한 로마인들과 왕, 귀족들의 억압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리 일해도 병들고 가난해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성전에서 물건을 내다 파는 이들 역시 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쩌면 바로 그런 소소한 이기적인 선택들이 모이다 보면 우리 공동체 전체가 타락할 것이라고 예견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뒤엎으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로마에서 주조한 화폐들의 유통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도 물질주의로 흐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나 화폐는 개방, 세계화, 자유 경제와 무역 등을 상징하는 표상들이었던 것입니다. 기도와 성서읽기로 성스러워야 할 성전을 이런 것들로 오염시킨 사람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현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비유나 가르침을 알아들을 귀와 머리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을 진실과 도덕적 삶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투사했습니다. 예수를 질투하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열혈당,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료들, 왕족과 귀족들은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부추겼습니다. 당시의 불의와 불공평한 사회의 모순들을 예수라는 인물을 죽임으로써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중세에서 근세까지 계속되었던 마녀사냥이 당시 부패한 지도층들에 대한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렸던 장치였던 것과 마찬가지였겠지요. 각성하지 못했던 대중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어리석은 군중심리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 시대에도 불행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시스템을 정의롭게 차근차근 정비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죄를 물으면 마치 자기들의 책임은 다한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권력의 사주를 받는 검찰, 경찰, 군대 등 총칼을 가진 이들이 공포 정치를 하게 되는 기저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구조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가짜 지도자들에게 세뇌되어 우상을 섬기면서 살게 됩니다. 명철한 이성과 따뜻한 사랑으로 힘든 이웃을 포용하는 대신 ‘누군가를 감옥에 넣어라, 사형시켜라.’ 같은 살벌한 언어들만 난무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답답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유다인들과 우리가 같은 이유입니다. 꼭 몇몇 정치 지도자들만의 문제라고 단순화하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우리보다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함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가해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면,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기 보다는 일단 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아주 미숙하고도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가 아닐까요. 내가 누리는 행복과 즐거움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은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도시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 아닐까요. 약한 사람, 힘든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할 크고 작은 지도자들이 각자도생, 적자생존 법칙, 우월한 유전자 같은 말들만 입에 담으면서 힘센 사람에게는 더 힘을 보태어 주고 약자는 더 약하게 만들고 있다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별다른 보호장치도 없이 사는 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울까요. 그리고 그런 이들이 많은 사회가 과연 부자들에게 안전할까요. 강도당할까 봐 개인적으로 총을 사고, 보초를 세우고 담벼락을 높이는 미국, 필리핀, 중남미의 부자들만 봐도 그런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큰 재난이 되는 선택인지 자명해 보입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아프고, 가장 헐벗은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상상해 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좋은 유전자, 편안한 성장 과정과 교육 환경, 훌륭한 스승과 제도 덕으로 성공했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일군 줄 착각하는 “능력 제일주의”를 외치는 냉혹한 현대인들과 비교가 됩니다. 굳이 왜 나를 비천한 것들과 비교하냐며, 자신은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이들도 한 번 떠올려 봅니다. 그들의 생각이 아무리 비합리적인 착각이라고 말해 봐야,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처럼 전혀 인정하지 않겠지요. 성전에서 화를 내시던 예수님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며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생명을 바쳐 무지한 우리를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선택은 여전히 제대로 알지도 닮을 수도 없는 신비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참된 지도자와 지혜로운 스승의 모습을 우리에게 철저하고 명확하게 보여 주셨지만, 끝내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는 못된 우리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유익한 심리학] 아담의 원죄와 인간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다(창세 3장). 그 결과 인간은 더는 하느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죄로 시작된 곳으로 죄악이 넘치는 곳이다. 죄악은 형제 살육과 바벨탑 사건으로 점차 커지고 마침내 하느님은 홍수로 징벌하기에 이른다.
원죄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죄의 뿌리’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간교한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창세 3,5)이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그 나무열매를 먹은 인간은 눈이 열려 자신들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려워 숨는다(창세 3,10 참조). 죄악의 결과는 분열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분열이요, 인간과 인간의 분열이요, 인간 자신과의 분열이다.
눈이 열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문제는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narcissism)’이 아닐까? 우리가 선악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평가하고 판단하게 된다. 자신을 평가하여 열등감에 빠지기도 하고 타인을 평가하고 비난한다. 문제는 평가와 판단 행위가 자신을 절대적 위치에 세우는, 즉 하느님만이 심판자요, 절대자이신데 원죄는 그 경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악을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심지어 잘못된 행동(악)을 지적하며 그 사람과 동일시하는 만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마치 절대적 심판자인 양 자신의 판단대로 상대를 규정해 버린다. 심지어 타인의 행위에 ‘자신의 느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단죄하고 비난한다.
어딜 가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꼭 있다. 다 좋은데 꼴 보기 싫은 사람이 꼭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내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런 감정이 내 안에서 일어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까닭이다. 어느 철학자는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누군가 악을 행하면 우리는 측은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또 인간의 악으로도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께서 지금 그 사람에게 악을 허용하시어 더 큰 은총으로 예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르지 않은가? 누가 누구를 단정 짓듯이 단죄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하느님의 뜻을 잘 살아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악을 피하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서 빠져 길을 찾아 헤매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 하나도 예외 없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마음을 ‘양심’이라고 해도 좋고 인간의 자기실현 경향성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해치는 것이 있으니 ‘나르시스’(narcisse)다.
많은 심리학자가 어느 시대보다 현대인의 ‘나르시스’가 강하다고 말한다. 물질화, 세속화와 관련이 되겠지만, 우리 내면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내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과정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타인의 행위와 존재를 분리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나쁜 사람’, ‘불편한 사람’, ‘부담스러운 사람’ 등의 거짓과 악을 만들어낸다. 많은 공동체가 이러한 거짓과 악으로부터 신음하고 분열된다. 이 악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해치는데 우리는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의 존재에 관한 규정(심판)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며, 우리는 다만 서로에게 ‘형제-사랑’일뿐이 아닐까?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네 복음서의 배경과 맥락
이번에는 네 복음서의 역사적 맥락이 독자인 저에게 어떤 울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렸을 때는 신약을 펴면 마태오 복음이 맨 처음에 나오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이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을 제일 빨리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십이 되어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배우기 시작해서야 성경의 편찬과 편집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분석가 훈련, 아이들 교육 등과 병행하느라 세세한 연대까지 꼼꼼히 따져 보지는 못했습니다. 집필된 시기의 중요성이나 저자의 특징들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고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성경의 역사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게 되면서 제 독서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나 깨닫게 되었지요. 지금도 성경에 대해서는 일천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지만, 정신과 의사라는 점을 내세우며, 육십이 훨씬 넘은 나이 핑계를 대며 감히 이렇다 저렇다 권위도 없는 이야기를 써 보게 됩니다.
우선 네 복음서 중 첫 기록인 마태오 복음입니다. 신약 전체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앞부분에 편집되어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흔히 편년체의 역사서에 익숙해서 제일 먼저 시작된 일부터 기록하는 반면에 성경은 일어난 사건의 시간별로 편집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보다는 교회사에서 혹은 신학적으로 제일 중요하다는 부분이 맨 앞에 등장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 다른 사료가 있으면 다시 그 부분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어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이 신약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교회에서 중요하고 교회로부터 받은 권위가 크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마르코 복음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들도 많아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 다른 복음서 자료들(편의상 Q source, 혹은 M source라고 부릅니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매우 객관적인 시각에서 집중적으로 기록한 마르코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은 어린 시절과 공생활 전후의 세세한 에피소드들이 다채롭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많이 상상하게 만듭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전에는 마태오사도가 쓴 것이라고들 생각했었지만, 저작 시기나 문체 형식과 에피소드들로 추측컨대 유대 전통과 법률에 익숙한 후대의 신자가 그 저자가 아닐까 하고 주장하는 성서학자들이 다수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다 떼어 버리고 담백하게 수난과 부활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일설에는 성경 저자가 베드로의 통역이었다고도 하고, 또는 베드로가 바로 전한 것은 아니고 전승의 하나라고도 합니다. 누가 되었건, 확인할 수 없는 사생활에 대해서 언급을 피한 것을 보면 매우 철저하고 엄정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신약 성경에 비해 바울로의 영향이 가장 적고 현대인은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고대의 과장된 수사와 묘사도 없습니다. 어쩌면 바울로가 활발하게 공생활을 하기 전에 이미 기록된 경전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서기 70년의 독립전쟁 실패로 처참하게 성전이 파괴된 시점에 집필된 것이기 때문에 과장되고 아름답게 문학적 묘사를 해낼 여유가 없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 봅니다. 조금 과장되고 자신을 내세우는 바울로에 비해 모든 것이 완벽한 예수님을 수백 배 이상 좋아하는 저로서는 마르코 복음을 읽을 때가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루카 복음도 사도행전이 완성되기 전 먼저 집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로가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루카 복음의 특징으로 병자를 포함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의 치유 기적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의사인 저로서는 예언자나 구원자 이미지보다 치유자로서 예수를 받아들일 때, 개인 생활에 적용하고 메워 나갈 부분이 많습니다. 예컨대 인종, 지위, 성별, 재산 같은 세속적인 조건들과 전혀 상관없이 모든 병자들을 다 애틋하게 여기시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기술은 의사로서의 삶에 회의가 들 때 특히 위로가 되고 자칫 흐려지는 판단과 인식을 다시 제자리에 놓게 만드는 책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은 아마도 가장 늦게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그 저자는 아닐 것입니다. 묵시록의 저자와 확실하게 동일하다는 증거 또한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학자들이 연구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공관 복음이 사건 중심인 것에 비해 요한 복음이 심층적으로 재해석한 영적 영역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면, 영적 스승으로서의 저자 요한은 그 당시 특출한 능력을 가진 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예수라는 인물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특별한 아들이자 성령의 육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게 도와주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의 주류가 아닌 영지주의 문헌에서도 많이 인용된다고 합니다. 공관 복음, 즉 내용이 비슷한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과는 확실히 다르게 신앙의 비밀스런 핵심을 알려주고 양육해 주는 특별한 복음서입니다.
네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고대 유대 문명이 붕괴되고 있던 시점의 절박함과 고통들이 행간에 또 문장 곳곳에 뿜어져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이끌어 줄 지상의 왕에 대한 군중들의 기대와 달리 “하느님의 나라”라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희망을 말씀하셨고, 적과 싸워 이기라는 폭력적인 선동 대신 “내 평화를 주고 간다.”는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남기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깊은 죄책감도 아프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 감정들은 아마도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과 이별한 이후, 인류에게 면면히 내려오고 앞으로도 지속될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픔과 좌절과 외로움을 묘사하는 어떤 문학적인 수사나 관용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마음 깊이 아픔의 파도가 이는 까닭이 되겠지요.
복음서가 쓰여진 역사문화적 배경을 몰랐을 때는 복음서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 그렇다면 과연 이 문헌들이 철저하게 고증을 거친 정말로 가치 있는 사료에 근거하는 걸까 하고 회의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이나 필기도구가 귀했던 고대, 주로 사람의 구전을 통해 불완전한 기억을 딛고 많은 사료들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네 복음서가 철저하게 동일하다면 오히려 더 위작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한때 성경 무오류설을 주장하면서 모든 문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주 창조조차 일주일 안에 끝났다고 주장했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성서학자와 교회학자들이 성경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제공되면서 21세기에는 미처 생각 못했던 또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어차피 각 개인이 생각하는 “진실과 오류”라는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마련이라는 사실, 또 자신이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말들도, 우주를 관통하는 진실에 비하면 티끌 안의 한 원자나 분자보다도 작고 그 시효와 크기가 짧고 작습니다. 그러니 복음서가 진실인지 어떤지 왈가왈부할 시간에 그것을 읽는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마 그 성장의 과정조차 얼마나 성실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앞에 두고는 살지만, 성경 독자로서의 저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조차 벅차다는 느낌 말고는 사실 아무것도 말할 형편이 못 됩니다.
[유익한 심리학] 용서에 대한 심리 산책 (1)
용서는 어떤 것일까?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내면은 어떤 부정적인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에 빠진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 내면은 억울함이나 서러움 등의 부정적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 등으로 상처를 받는다. 평화로웠던 내면은 혼란과 고통에 빠지게 된다. 겪은 일이 클수록 그에 대한 우리의 내면은 더 큰 혼란과 고통에 빠진다. 어떤 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무너지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잠을 못 이루고 분노에 짓눌려 가까운 가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은 ‘나’인데 그 부정적인 영향으로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나’인 셈이다.
용서할 일이 많은 사람의 내면은 어떨까?
늘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 사람, 매일매일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일이 일어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이 고역이요,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의 마음은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니고 누더기 옷을 걸친 것처럼 산뜻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날도 기쁜 일이 있어도 순간순간 그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이 불쑥불쑥 일어나 그의 마음은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억울함에 속상하고 부당함에 밉고 나만 이러한 일을 당하나 싶어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더욱 용서하기 어려워지고 미움과 증오와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 가면서 마음은 더욱 무너져 내린다.
“일곱 번”(마태 18,21) 용서하면 될까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성경의 용서는 제한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놀라곤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어쩌라는 거야?’ 하며 부당한 요구를 받은 양 불편하다. 그런데 용서와 관련된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니 성경의 가르침이 이해된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부당한 일로 너의 마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누군가의 잘못으로 너의 성심을 상하게 하지 마라!’, ‘용서함으로써 너의 평화와 성심을 회복하여라!’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부당함으로 주님께서 주신 평화와 우리의 내면이 무너지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악’을 방치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용서의 덕에 대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원죄로 인한 세상의 부당함, 사람들의 불의함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은 더는 ‘에덴동산’이 아니다. 오래전에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 하느님의 부재라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겪는 온갖 부당함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고 온갖 부정적인 느낌, 감정 그리고 생각들로부터 견디어 내고 이겨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에덴인 하늘나라를 회복해야 한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용서는 덕(德)이라기보다 더 큰 은총에로의 초대인 신앙이다.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김정민 라자로 신부(아중성당)]
[유익한 심리학] 용서에 대한 심리 산책 (2)
금년 전례력에는 흔치 않은 연중 10주일이 있었다. 제1독서(창세 3,9-15 참조)에서 아담은 알몸인 것이 두려워 숨었다고 고백한다. 어찌 알몸이 두려운 일일까?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릴케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만약에 내가 나를 만난다면 나는 거기에서 도망치고 말거야!”라고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일까? 뱀은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라며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은 “먹음직하고 …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에덴에서 쫓겨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공정한 세상을 기대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거듭해서 상처를 준다. 착하게 살아도 복이 오지 않더라. 악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억울하고 서럽고 슬프다.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 대부분은 차라리 죄악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하고 짙은 어둠에 빠진다.
아무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여기며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싶지만, 세상을 통해 비추어진 자기 모습은 참으로 처량하고 비참하다. 세상은 돈과 권력, 학벌과 지위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이를 무시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길이다. 이때 용서란, 삶의 기술 중의 하나다. 세상의 관점과 평가에 대하여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자신의 결단이다. 물론 이 결단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알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세상이 얼마나 두려울까? 세상이 무서운 것이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의 내적 부끄러움이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만든 것이다. 어쩌면 용서란, 자기 수용에서 출발하는 삶의 기술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자기를 수용하는 데서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타인의 내적 부끄러움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상 의미 없으며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자기 존재성보다 세상의 비교평가와 판단에 의한 것을 자기 존재인 양 믿고 사는가? 결과적으로 인간은 세상이 두려워 세상의 기준과 가치평가에 자신을 맞추어 살게 된다. 우리의 내면은 생존 문제를 비롯하여 출세, 성공, 재물과 재산, 학벌과 능력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재구성된다. 인간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신의 내면세계를 잃어버린 셈이다. 자기를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자기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수치심이라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을 극복해야 한다. 세상의 논리로는 점점 갈등과 불화에 빠져들 뿐이다. 사람 사이에서의 용서는 화해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지만,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용서는 자기 가치의 회복에 관한 일이다. 용서는 덕(德)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초대인 신앙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