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 세 차례 지어졌다. 제일 처음에 솔로몬에 의해서, 두 번째 스룹바벨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헤롯에 의해서 지어졌다.
(1). ‘솔로몬 성전‘(제1성전):
출애굽한지 480년(다윗의 아들 솔로몬 즉위 4년2월)인 B.C.966년(왕상6:1)에 모리아 산(왕상6:38)에 세워졌다. 7년에 걸쳐 B.C.959(왕상6:38) 화려하게 지어졌던 성전은 B.C.586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손에 의해 철저히 파괴당했다.
(2). ‘스룹바벨의 제2성전’:
B.C.536년(스3:8)부터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나 기초공사 2년만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14년간 중단되었다가 B.C.520년에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재건을 외치자 다시 시작하여 4년만인 B.C.516년에 재건했지만(스6:15) 알렉산더, 프톨레미, 셀루시드의 헬라 시대를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3). ‘헤롯 성전’:
로마시대 유대 분봉왕 헤롯(BC.40-AD.5)이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BC.19년에 스룹바벨과 느헤미야가 BC.516년에 세웠던 제2성전을 복구했다. 당시 46년간 보수하고 완공까지는 83년간(B.C.20~A.D.63) 소요되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요2:20). 옛 성전 터 위에 B.C.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 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A.D.70년에 완공된지 불과 수년 후에 로마에 파괴되었다. 오직 성전 서쪽 외벽만 역사를 위해 남겨 두었는데, 이 벽은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의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70년 계산: 다니엘이 사로잡혀간 1차 포로(B.C.605년)부터 고레스 원년의 포로귀환(B.C.536년)까지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특히 구약-성전이라할 때는 성막 (출 25-29장과 35-40장)과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설계과 스룹바벨 성전건축 (학 2:15)과 헤롯 성전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솔로몬 성전을 제1성전으로, 학개의 이후를 광의(廣義)의 범주로 제2성전으로 보고(각주1) 제 2 성전과 관련하여 스룹바벨 성전과 안티오크4세의 성전훼파를 다룰 수 있으며, 헤롯의 성전재건 그리고 다시 성전이 로마에 의해서 파고되는 기간을 다루기로 하겠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솔로몬 성전을 「최초의 성전」이라 불렀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성전하면 솔로몬 성전을 제 1성전, 스룹바벨 성전을 제2성전이라 하고 헤롯 성전은 헤롯에 의해서 이 제2 성전이 대폭 증축(각주2), 개조된 것으로 이후 주 후 70년 로마 Titus장군에 의해서 파괴되기 까지를 말한다.
1. 솔로몬 성전개관
솔로몬 성전에 대한 언급은 구약 23권, 신약 11권에서 인용되지만 주요 출처는 성경 왕상 5-8장과, 역대하 2-7장 그리고 에스겔 40-43장의 기록은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기억이 반영되어 있다. 에스겔서는 미래에 건축될 대한 환상으로서 여기서는 제외한다.
솔로몬 성전의 현저한 특징은 그 성전안에 신상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법궤위에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를 그늘지게 하는 그룹 (히:케루빔)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 분열왕국시대에 성전의 역사를 보면 특히 유다왕국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서 관심을 갖었는지를 알 수 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분열왕국이후 450년의 역사 속에서 6번 즉 매75년마다 한번씩 치욕을 당한다.
솔몬 성전의 착공 연대는 왕상 6:1절과 역대하 3:2절은 솔로몬 통치 제 4년에 성전 건축이 시작 된 것으로 기록한다. 성전이 지어진 장소는 모리아산 이었다 (대하3:1). 솔로몬 40년 통치의 원년 (대상 11:42)을 B.C. 971/970으로 본다면 선전 건축은 B.C. 967/966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2. 솔로몬 성전이후 분열왕국시대의 성전역사 개관
2.1.
유다에서는 르호보암 통치 5년에 (왕상 14:23, 24 : B.C 925/926)에 백성들의 대대적인 배도행위가 늘어나고 그후 하나님의 심판으로 애굽왕 시삭이 치러 올라와서 (대하 12:2, 5) 솔로몬이 만들었던 300개의 금방패를 포함하여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아 간다 (왕상14:25-26).
2.2.
요하스왕의 통치 이전에 아달랴와 (대하24:7) 제사장들의 무관심 (왕하12:1절 이하) 때문에 성전 경내가 황폐해지고, 이 상태는 요하스왕 23년에 그가 성전 수리 경비의 계산을 위해서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부를 때가지 (6절) 계속된다.
2.3.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도 아달랴의 우상숭배 영향은 계속되어 백성들은 요하스와 더불어 여호와께 배도를 행하고 (24:17절 이하), 선지자 스가랴가 요하스와 그 왕비를 꾸짓을 때 (대하 24:20) 그들은 성전 뜰 안에서 그를 돌로 쳐 죽인다 (21절). 요하스의 아들인 아마샤의 통치 기간중에는 북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가 유다를 침입하여 성전과 곡간의 모든 기명을 취하여 간다 (14:13).
2.4.
그러나 웃시야는 예루살렘성을 재건하지만 그는 교만에 빠진 성전의 제사장 기능을 빼앗으려 한다 (26:16 이하).
2.5.
아하스는 이스라엘과 수리아 동맹을 막기 위해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Ⅲ세 (B.C.745-727)에게 성전과 왕궁 곡간의 보물을 취하여 보내고, 그는 북쪽으로 옮긴 (14절) 솔로몬 성전의 놋단 앞에 새 단을 두고 그 단에서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성전 문을 닫고 (대하 28:24) 성전 기구를 훼파한다.
2.6. 히스기야왕의 성전재건
그러나 히스기야왕은 아하스의 이러한 정책과는 반대로 성전 정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앗시리아의 제사장을 폐하고, 앗시리아형 종교 상징물들을 제거 하였다 (예배의 정화). 뿐만 아니라 그는 지방에 있는 모든 성소를 중지시키고 예배를 예루살렘에서만 드리게 하였다 (예배의 중앙 통일화). 그리고 그는 닫힌 문을 열고, 레위인에게 명하여 성전의 청결을 요구한다 (대하29:5). 또한 백성들에게 헌물과 제물을 가져오라하고 (31:4절이하) 이러한 헌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성전 터위에 저장실을 짓는다 (11절). 이렇게 해서 히스기야왕때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유일한 예배장소가 된다 (왕하 18:4-6,22 ; 이사야 36:7, 대하32:12).
2.7. 므낫세의 배반
그후 므낫세는 부친과는 정반대로 행한다. 므낫세 시절에 다시 산당들이 성행하게 된다. 그는 성전 뜰에 우상을 새우고 성전 안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새웠다 (21:3절 이하 ;대하33:3절 이하). 그후 그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다 (33:11).
2.8. 요시야왕의 성전 수리
요시야는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성전의 수리를 명한다 (22:3절 이하 ; 대하34:8절 이하). 석조 건축물을 보수하고 (34:11), 성전의 아세라상을 없애고 그 이전의 왕들이 두었던 태양 수레 (11절)를 불사른다. 그러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2.9. 솔로몬 성전의 종말
여호야김 통치중에 느브갓네살이 올라와 성전의 기구들을 (7절)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그후 여호야긴 왕 3개월만에 다시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솔로몬 성전의 기명을 다 깨드려서 가져간다 (13절). 그후 시드기야 통치중에 솔로몬 성전은 종말에 이르고 B.C. 586년에 예루살렘은 함락 당한다.
3. 학개이후의 성전
3.1. 스룹바벨 성전
B.C 539년에 페르시아왕 고레스 2세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또한 갈대아 즉 신바빌로니아 제국도 제압하는 한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을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편입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제국들과는 달리 사면령을 발표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정치적 반란을 꾀하지 않는한 자신들의 종교의식을 행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조치로 유대인들은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다스리던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이때에 느브갓네살이 솔로몬 성전에서 가져갔던 그릇들은 유다방백 세스바살 (스 1:8-11 ;세낫살[?] 대상 3:18)과 여호야김의 아들들에게 돌려졌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파견대를 스룹바벨과 함께 (스2:2) 인도하였다 (1:11). 고레스는 세스바살을 유다의 총독으로 삼고 (스1 :8,11) 백성들에게 어느정도 지방 자치권을 허락한다. 포로에서 돌아온지 2년째 되던해 (3:2), 7월에 세스바살은 전의 기초를 놓고 (5:16), 후에 스룹바벨 (3:8)과 건축자들 (10절)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이후 학개 선지자가 ‘백성들은 판벽한 집에 살면서도 「여호와의 집」을 건축하는데는 늑장을 부린다’ (학 1:1-4)는 학개의 설교를 듣은 통치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공사를 시작한다 (14-15). 이 스룹바벨 성전 역시 솔로몬 성전과 같은 부지에 건축되었고 설계와 규모는 솔로몬 성전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나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도 길게 500년 동안 존속했고, 이후에 언급될 화려한 헤롯 성전 보다도 오래 존속했다.
성전 재건 역사는 다리오왕 6년인 (B.C 525년? 혹은 515년) 아달월 3월에 끝내고, 큰 기쁨으로 봉헌한다 (스6:15). 그러나 이러한 봉헌 행사도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 볼 때는 매우 간소한 것이었다 (왕상 8:5 ; 대하7:5). 이러한 스룹바벨 성전은 후에 헤롯이 성전을 재건할 때 없어지지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헤롯 성전으로 이어진다. (스룹바벨성전에 대한 기록에서는 다소의 연대상의 혼동이 있다)
3.2. 성전훼파
예루살렘 성전은 페르시아 시대에서의 2세기 동안에는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는 도중에 팔레스타인들은 아무 저항없이 그의 수중에 들어간다 (B.C. 333) 이 시대 (Hellenistic period)의 유대 사회의 종교적인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유대 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헬라적인 요소가 점점 스며들었다. 유대인 상층 부류에서는 헬라주의(각주3)자와 종교적인 순결을 지키려는 자들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3.2.1. 안티오크 4세: 셀류쿠스 왕조 하의 성전
특별히 이 시대에 강력하게 헬라화를 추진한 왕은 안티오크 4세 (B.C. 175-163)(각주4)이다. 그는 수리아를 통치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으로서 선조들의 전통, 즉 헬라 문화의 사도라 할만큼 제국의 모든 힘과 희망을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그리스 문화의 선봉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B.C. 169년에 애굽에서 2차전쟁-애굽과는 4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에서 돌아온후 그는 이러한 유대인들을 노예로 팔거나 4만명이나 죽이고 성소로 침입해서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물들을 노략한다. 그는 이어서 B.C 167년이후 칙령을 발표해서 모든 유대인들은 수리아의 법과 관습, 종교를 추종하게 한다. 이때의 상황를 보면 성전의 기명(器皿)들은 돼지고기에서 취한 육즙으로 뿌려지고 성전뜰은 술꾼들의 체류지가 되고, 성전에서의 모든 행위는 금지된다. 여기에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한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 히브리서는 11:35- 3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고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2.2. 마카비가(家)와 하스모니안가의 성전
이러한 탄압과 헬라화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마카비 일가-마타디아스와 5명의 아들-가 주도하는 싸움으로 발전하고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행동으로 변한다. 이러한 행동은 B.C.164년 유다인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모든 이방적인 것을 제거하고 이전의 제사를 다시 드림으로해서 성전은 일부분 회복된다(각주5). 그후 B.C 142년(각주6)에 아들인 시몬에 의해서 욥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국도는 장악되고, 성전이 아름답게 꾸며지고 모든 이교들의 행위로부터 정결케 되면서 성전 재복원은 이루어 진다. 수많은 위협에 있던 조그만 도시국가인 예루살렘은 통일왕국으로 성장하면서 메시아강림에 대한 소망과 신앙심이 일어나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에서 하스몬가(家)라고 부를때는 일반적으로 마타디아스의 아들 시몬의 시대부터 B.C. 63까지의 대제사장 가문을 일컫는데 사용된다. 그것은 이가문에서 마카비의 꿈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해롤드 회너).
하스모니안가(家) 또는 왕조는 마카비가의 아들인 시몬이 살해되고, 시몬의 아들도 죽고 그 아둘중 하나인 요한 힐카누스가 도피한후에 수리아의 왕위 쟁탈전 때문에 이후에 상황이 좋아지면서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알렉산더 얀내우스(B.C. 103-76) 때는 영토상으로는 절정을 이루어 다윗 솔로몬 시대와 거의 같게 된다. 그후 살로메 알렉산드라(B.C. 76-67)는 여자였기에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가 없어서 그녀의 장자인 힐카누스 II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알렉산드라 통치 동안에 중요한 점은 모든 이스라엘인은 성전 유지를 위해서 인두세(polltax)를 부담해야 했고, 바리새파는 인정을 받게되고 사두개파는 세력을 잃는다.
3..3. 헤롯의 성전재건
로마 원로원이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자 헤롯은 하스모니안가(家)의 최후의 인물인 안티오쿠스를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성과 성전에 대한 공격을 할 때에 성전을 더럽히지 말 것을 명한다. 그리고 장차있을 약탈에 대비해서 군인들과 관리들에게 돈을 주고 내 쫓는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서 헤롯이 통치한지 18년도 안되어서 성전은 발전한다.
스룹바벨 성전은 요새의 형태를 취했기에 헤롯의 입장에서 보면 성전 재건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 성소와 지성소의 재건 공사는 헤롯 통치 제 18년에 시작된다 (B.C 29-19).
헤롯 성전의 묘사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고,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성전에 대한 언급이 100여회 나오기는 하지만 건물자체의 치수나 외양에 대한 정보를 제시해주는 구절은 거의 없다. 성전에 대한 특수한 건축구조는 마태 4:5절에 묘사된다.
요세프스에 따르면 헤롯은 솔로몬 성전의 높이가 120규빗 (참조: 대하 3;4)이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기록한다. 헤롯은 이러한 부족을 보충하여 이 전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원해서 천대의 마차, 만명의 일꾼, 성전의 거룩한 부분의 공사를 위해서 다로 훈련된 천명의 제사장, 탁월한 목수들을 동원하면서 새심한 배려를 했지만 건물구조상의 난점으로 인해서 솔로몬 성전의 높이인 120규빗에는 미치지 못하고 100규빗으로 건축 되었다.
3.4. 다시 성전 파괴 -로마시대
성전과 관계되는 역사적인 사건은 요세푸스 플로루스 (G. Florus: 주후 64-66)의 지나친 욕심이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을 조장하게 된다. 그 이전에 헤롯 아그립바 1세 (주후 41-44)때는 예루살렘 성전안에 칼리굴라가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하였을 때 이것을 저지함으로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그후 열심당원들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살해되고, 그후 주후 66년에 플로리스가 유대인의 성전에서 보물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로마제국은 유대인의 항거를 제압하기 위해서 장군 베스파니안을 파병하게 되지만 그 때에 악명높은 네로가 죽고, 베스파니안은 로마로 돌아가서 황제가 되고 대신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4개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침입하는데 이 때가 마침 유월절 기간 이었다. 주후 70년 8월 29일에 성전 안뜰이 포위된다. 처음에 한군사가 낭실에 횃불을 던지자 티투스는 불을끄라고 명하지만, 또다른 군사가 횃불을 성소에 던져 지성소까지 불타면서 5개월민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고 수십만의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된다. 아렇게 해서 성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종교적, 민족적 하나됨을 이루는 중심지가 사라짐으로 절기마다 성전으로 모이던 순례의 길은 끊기고 희생제사는 더 이상 드려지지않는다. 이를 대체하는 유대인의 신앙방식으로 회당과 랍비를 중심한 성경연구와 그 적용으로 성전의 의미는 지속된다.
각주
1. 일반역사와 정치사적으로 보면 분명히 그당시 총독인 스룹바벨의 지도아래 성전이 재건된 것이 맞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귀환후 일곱째 달이 되는 B.C. 587년에 완전히 훼파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그후 B.C. 537년에 페르시아 왕의 교시에 의해서 성전건축이 멈추게 되지만, B.C. 520년에 신앙의 새힘을 불러넣은 학개와 스가랴에 의해서 다시 시작된 성전은 B.C. 515 년에 완공된다.
2. 여기서 학자들중에는 논리적으로 스룹바벨을 2성전, 그리고 헤롯성전을 제3성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본인은 헤롯 성전도 스룹바벨 성전을 증개축한 것으로 보고 그 연속선상에서 넓은 범주로 해서 제2성전으로 하겠다 (stipulative definition).
3. ‘헬레니즘’이라는 말이 그리스를 뜻하는 ‘헬라스’에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의미에서 헬레니즘 세계가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적 문화의 특색이고 그들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기에 이미 거기에는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4. 안티오쿠스 4세는 셀류쿠스 4세의 동생이며 에피파네스 (Epiphanes)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나 역사가 폴리비우스 (Polybius)가 그를 “현명한 신”이라는 뜻의 에피파네스 보다는 “미친사람”이란 뜻의 에피마네스 (Epimanes)라고 명명할 만큼 그는 사악하고 괴팍한 왕이었다.
5. 이때에 종교의 자유와 새로운 제사장이 임명되는 것을 축하하면서 하누카 축제가 약25일 열리는데, 성경 요한복음 10:22에서 우리는 이런 기록을 보게된다.
6.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립일을 이 때부터 계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