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와 과거사기본법 서명운동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강점기시절부터 해방이후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찾이한 역사의현장이다.서대문 감옥(西大門監獄)은 1907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1908년 의병탄압을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세워졌던 경성감옥을 시초로 하고 있으며,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활용되다가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박물관, 문화재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그 건물에 독립공원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한국전쟁.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다른 이름은 서대문 구치소였다. 경성감옥으로 불리기도 한다.
혹독했던 일제강점기시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루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해방이후 통일열사,민주열사.노동열사들이 조국의자유와 민주화를 위하여 몸부림친역사의현장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명칭을 바꾸어 보존하여 운영하고있다느것이 퍽이나 다행스러운일이다.
서대문 형무소 안으로 들어가면 여죄수감방,옥사내부,독방,노역장,빨래터.우물,사형장.고문도구등이 그때의 악독했던 재소자들의 고통을 느끼게할수있는 시설이 현장감있게 보존 유지되고있어 휴일이되면 지방의 학생들과 탐방객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있다.
지난 2016년 6월11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 추모위원회 관계자들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는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앞에서 통일열사.희생자정신 계승 거리행사의 일환으로 관련단체들이 모여 부네굿 공연을 관람하였다.
"부네굿"은 동, 서, 남, 북을 다니며 전쟁, 환경오염, 재해, 이념적 갈등 속에서 신음하는 지구촌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여 덜어주고 도와준다. 그를 대지에 묻고 그 대지에 물을 뿌리고 씨를 뿌리고 사방의 경계를 허물고 액을 태우며 지신을 밟는다. 해가 뜨고 ‘부네’는 떠난다.
민중들의 차별 문화에 대한 응어리를 풀어내고 해체된 공동체를 통해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제의연극이다. 부네굿공연배우(장소익)는 신들린듯한 춤사위로 한마당 한마당을 뛰어다니며 원혼들과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며 공연을 하였다.
이 부네굿 행사에는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유족들이 참여하여 숨을 죽이고 공연을 관람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있는모습이 눈에 띠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치안유지법위반 재소자들의 학살문제는 지금까지 거론된적이없다. 다만 진실화해위원회가 소극적인조사로 밝혀진게 전부일따름이며 오히려 축소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시국사범 재소자들은 전쟁의 상황에서 아무런 법적절차없이 국인과 경찰에의해서즉결처분되였다.그러나 형무소의 특성상 학살에대한 진실규명작업은 더욱 어렵다. 재소자명부가 불태워지고 은폐되었기때문이며 또한 가족들도 9.28 서울 수복후 자연스럽게 월북을했거나 서울에 잔류하였던 유족들은 부역혐의자로 처형되었기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예비검속 명령이 전국에 내려졌으며, 6월 26일 김삼룡과 이주하가 총살당했으며, 6월 27일과 28일 서빙고 강변에서 200여 명의 형무소 재소자가 총살당했다는 증언이 있다. 경무대 경찰서 근무자 이씨(이범열)는 “인민군이 의정부에 진입했을 때까지 후퇴명령을 받지 못하다가 헌병의 소개 명령에 의해 후퇴했다. 대통령 이하 상관들은 이미 비밀리에 후퇴한 상태였다.”라고 증언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는 1949년 8월 서울형무소에는 재소가 8,623명이, 전쟁발발 당시에는 7,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형무소사건 중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서대문형무소였다. 당시 형무관이었던 백씨(백광벽, 29)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하자 김종원이 지휘하는 헌병대에 의해 주요 좌익인사들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26일 처형되었는데, 헌병사령부 뒷문 500미터 지점의 두 소나무에 매달아 놓고 진행되었다. 6월 28일 서빙고 강변에서도 육군 헌병들이 200여 명의 좌익수를 처형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김진구는 ‘모두 165명이 6월 28일 새벽 2시 육군형무소로 갔다가 서빙고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같은 자료에는 이승만정부가 후퇴하면서 서울에서만 1만 2천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형무소의 후퇴로 풀려난 재소자들 일부는 수원, 대전 등에서 다시 체포되어 총살당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는 전쟁발발 직후의 사건에 대해 모두 15명에 대한 진실규명신청이 있었는데, 조사결과 2명이 희생추정 판단을 받았으며 나머지 13명은 형무소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진실규명 불능의 판단을 받았다. 이처럼 서대문 형무소 재소자들의 학살의진실은 미궁속에 빠져들었다, 밝혀진 내용은 빙산의 일각이며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이날 부네굿 공연을 보는 한국전쟁유족들의 감회는 남달랐을것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유족들은 격주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출입구에서 국회과거사기본법(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고있다. 실타래와같이 얽힌 불랙박스속에 갇혀있는 학살의진실을 풀어보기위해서이다.
오늘도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앞의 미루나무는 하늘을 향해 말없이 원혼들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고있는 부네굿을 공연하고있는 우리들을 지켜보고있다.
201년 7월19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사무국
첫댓글 이글은 추모연대 8월호 소식지에 게재하고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윤의장님에게 부탁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유족회소식지에도 게재할예정입니다. 의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좋은글 잘보고갑니다.인간의생명을 이처럼 허무하게 앗아간 나라각 원혼들이 얼마나 원망하고있겠습니까.빨리 진상을 규명하여 억울한사연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