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완의 혁명 4.19 민주혁명 61 주년 기념사
4.19민주혁명은 미완성의 혁명인가
4.19혁명은 시민과학생들이 外形的으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大都市위주로 전개되었고 마산상고 재학생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피지도못하고 김주열은 행방불명 27일만인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모습의 屍身으로 떠올랐고 이를 본 馬山시민들은 獨裁打倒를 외치며 2차 義擧에 돌입하게 된 3.15 부정선거 2차導火線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12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를 하고 野黨參觀人을 逐出하면서 투표함 바꿔치기와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多數의 死傷者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拷問을 가했다. 그리고 1960년 4월 18 일에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3.15부정선거 규탄대회 후 귀가 도중 이정재, 임화수, 류지광등 정치깡패들의 폭력으로 다수학생들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기시작하였다.
1960년 운명의 4월19일(화)오후 1시 40분경 景武臺 앞에서 武裝경찰이 첫발포를 하여 시민 21명이 射殺당하였고 172명이 중상을 입었다. 4.19일 전국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적에서 186명의 死亡者와 727여명 負傷者가 발생하게 되니 이승만은 非常戒嚴령을 발동하여 鎭壓하려고 戒嚴軍을 전국대도시에 배치하여 武力鎭壓을 꾀하였으나 軍人들마저 시위대 앞에서 友好的으로 나오기작하였다. 1960년 4월 25일 독재정권의 만행에 忿怒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14개항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示威에 同參하였다.
4월 26 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의 下野를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독재자 이승만의 후계자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양아들 황태자 이강석이 권총으로 가족 전부를 살해하고 자살을 하였다.
1960년 4월 26일 혁명의 완성 시위는 계속되어 4월26일 드디어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하야성명이 발표되어 제1공화국은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張勉 부통령도 사임하자 許政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비밀리에 도주하고만다. 한국전쟁시 서울을 버리고 야밤逃走를 하고 두번째는 머나먼 이국땅으로 줄행랑을 치고말았다.
제1공화국 이승만은 민중들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南山을 비롯한 곳곳에 건립된 동상들은 철거되었고 그의 이름은 독재권력과 殺人魔의 대명사가 되었고 영영 해외에서 不歸의 객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장면정권이 들어서고 학생들은 곳곳에서 혁명의 성공을 만끽하며 "오라남으로 가자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口號를 외치며 사회대변혁을 예고하였다.
진보당은 대학생들과 통일운동을 연계하기 위하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구성하고 2대악법인 한미경제협정(데모규제법.반공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전쟁전후에 이승만정권의 군경에 학살당한 백만피학살유족들도 10여년만에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전국피학살유족회를 창립하고 책임자처벌과 민형사상 배보상요구를 하기시작하였다.
제4대국회에서 민주당은 압승하였다. 유족회의 진상규명요구를 받아들인 국회는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5일동안 신청을 받았다. 불과 15일만에 113만여명이 신고를 하였다. 70년이 넘은 진실규명은 현재진행중이다.
그러나 장면정권은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국민들의 민주화 후속조치를 消化하지 못하였고 민주당 역사 新派, 舊派로 나뉘어 갈등이 加熱되어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틈을 타고 5.16 불법쿠데타발생 박정희가 主導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三權이 그들에 의해 장악되고 민주주의는 遙遠의 불길이 되고말았다.
박정희는 中央情報部를 조직하고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여 維新憲法을 제정하고 總統制 장기집권야욕을 드러내다 釜馬抗爭과 국민과 학생들의 蜂起로 민심이 洶洶(흉흉)한것을 파악한 김재규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阿房宮에서 遊興을 즐기다가 銃殺당하였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한 전두환은 5.18민주항쟁을 발판삼아 박정희가 심어놓은 遺産인 체육관대통령선거에서 단독출마 당선되었다. 이후 노태우가 정권을 물려받았으며 전두환 노태우는 부정축재와 광주5.18항쟁무력진압책임자로 死刑言渡를 받았으나 김대중정권의 特別赦免으로 석방되었다. 이명박, 박근혜는 민주주의를 抹殺하고 國政을 壟斷하여 촛불항쟁으로 심판을 받고 장기형을 宣告받고 服役중이다.
이승만은 除去되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심판을 받아 처벌되었지만 살아남은 旣得權층은 親美에 반공투사로 변신하여 親日過去行跡을 지워버리고 지금도 나라와 사회의 지도자이자 特權層으로 君臨하고있다. 이런 部類의 인간들과 그후예들, 그들에게 汚染되고 洗腦된 인간들이 뒤엉켜 살아가고있다.
일본이 비운자리에 미국이 남측에 들어오고 또 그들에게 기대어 太極旗와 星條旗를 묶어 흔들어대면서 권력을 탐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反共에 목숨을 걸고 南北對立을 부추기며 민족을 南北으로 東西로 갈라치기하고 安保를 按酒삼아 미국을 宗主國으로 섬기며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는 아이러니가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이제는 親日 賣國奴들에게 법적처리할 수 있는 시간적공간도 지나버렸고 그對象者들도 거의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4월민주혁명은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쿠테타세력과 전두환, 노태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져버렸다. 未完의 革命이 되어버린 것이다. 민주는 白日下에 막을 내렸고 무시무시한 鐵拳 軍部獨裁가 40년을 민주의暗黑期로 民衆들을 옥죄이며 헤아릴 수 없는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加害者는 반드시 斷罪되어야 再發을 防止할 수있다.
4월민주혁명 61주기!
다시 한 번 돌아보자
4월혁명에 김주열 열사가 있었고 6월10일항쟁에는 이한열열사가 있었다. 4월혁명의 숭고한 정신은 5.18항쟁과 6.10항쟁, 촛불항쟁으로 이어졌다. 결코 죽지않고 살아숨쉬고 있는것이다.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한 크고작은 民衆抗爭의 역사에서 수많은 人命들이 아까운 목숨을 바쳤다. 더 이상은 않된다. 오늘 4월혁명 61주기를 맞이하는 한국전쟁피학살유족들은 感懷가 남다르다.
축출당한 이승만을 그 後裔들이 수첩에서 끄집어내어 國論을 分裂시키고 與野는 둘로 갈라져 역사전쟁을 한치의 양보없는 一戰을 벌리고있다. "장군이요"하면 "멍군이요"하고 맞받아친다. 잘못된 과거는 淸算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헌법전문에 수록된 4.19혁명정신의 뜻을 繼承하는 것이고 헌법을 守護하는 것이다.
미얀마 군부독재에 항거하고 있는 미얀마국민들이 우리민중이 이제까지 겪어온 抗爭의 역사와 닮은꼴이다 자유의 소중한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과거를 잊게되면 또다시 불행한 과거가 우리를 덮치게된다.
국민이 원하는것은 올바른 歷史의 定立이다. 심판받은자는 말이 없어야되고 그 후예들은 自肅할 줄 알아야한다. 그들의 입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헙법정신을 위반하고 있다고 賊反荷杖으로 생떼를 쓰고 있는것은 누워서 자기얼굴에 침뱉는식이며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英靈들을 凌蔑하며 冒瀆하는 행위다. 과거의 獨裁로 回歸하는냐 민주주의를 지킬것인가하는 선택의 문제는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있다.
대한민국과 헌법이 살아있는 한 4.19민주혁명은 永遠不滅한 민족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날의 함성이 오늘날에도 귓전을 스쳐간다 소쩍새 슬피우는 오늘아침 4월 英靈들의 넋에 삼가 追募의 글을 남긴다. 永眠하옵소서
2021년 4월19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의장 윤호상 상임대표부의장 박남순(대전충남) 상임대표 이춘근(부산경남)박종래(충북)김만덕(대구)이성수(경북) 선용규(광주 전북)정명호(경기) 운영위원장 정국래(서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