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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3:1-15절) 영적 성숙
우리는 어린 시절에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좋은 추억도 만들고, 좋은 친구도 사귀고, 또 크고 작은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이 아름다운 이유는 생각하는 것이 순수하고,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짐승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나운 사자나 표범, 하이에나 늑대도 새끼 때는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짐승들이 새끼 때는 좋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다면, 결국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
즉 새끼로만 있으면, 매일 장난을 치고 놀 수는 있지만, 사냥을 못해 굶어죽거나 사나운 다른 짐승이 공격해 오면, 물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순수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는지, 자라지 않는지,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신앙이 순수한 것이 좋다고 해서 자라지 않은 채로 정체되어 있다면, 나중에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것이 곧 우리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목회자 중심으로 많은 추종자가 생기기도 하고,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즉 교회의 목회자가 바뀌면, 교인들이 옛날 목사님과 새 목사님 중심으로 갈라져서 싸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2,000년 전 고린도 교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인도 사도 바울이 떠난 뒤, 갈라져서 싸우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바울 파와 아볼로 파가 가장 치열하게 반목(反目)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자신도 아볼로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싸움이나 파벌이 일어나는 이유는 고린도 교인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Ⅰ.그리스도인의 성숙
3:1절)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성경 본문을 보면 *신령한 자...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신령한 자는 원래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자이고, 영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도 많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육신적인 사람, 즉 세상 사람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반응하고, 느끼는 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성숙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즉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나 엘리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쓰신 사람으로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야보고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약5:17-18절)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엡4:13절)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도 제대로 믿음이 자라기만 하면, 예수님의 장성한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신령한 자와 육에 속한 자*를 완전히 구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는 영에 속한 자이고, 신령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성숙한 사람과 미 성숙한 사람이 있는데,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법>이라는 작은 소책자를 보면, 그리스도인이지만 성령을 받았느냐? 의 여부에 따라 *성령충만한 사람* 과 *육에 속한 사람*을 나눕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성령을 받았거나, 성령 체험의 여부를 가지고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나누고 있질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여 믿고, 성령을 받으면, 모두 다 *영의 사람이고, 빛의 사람이고, 영적 세계에 속한 사람이지만, 믿음 안에서 성숙 여부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소중하고, 저마다의 가치가 있지만, 어른과 어린 아이 사이에는 아는 것이나 힘, 그리고 경제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사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배워야 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으며,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고린도 교인에게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신앙적으로 어린 사람은 세상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뿐, 깊이 있는 하나님 생명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 이야기를 하면, 관심도 없고,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물론 이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적인 사람이지만, 영적으로 성숙하는데 실패해서 언제나 신앙적으로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제대로 성숙했다면, 성숙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본 성경 연구원의 1단계(필수과목)을 소개합니다. 신앙 출발이 귱형있게 되어야 성숙이 바르게 잘 됩니다. 반대로 *출발이 잘못되면, 나무처럼 재목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얼마나 열성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했는지,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는데, 그때 청년 유두고가 창문에 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밤새도록 자지 않고, 소곤거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때는 때가 덜 묻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호기심이 많아서 밤새 이야기해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숙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말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아직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까 재미가 없어서 졸립니다.
3:2절)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갓난아기는 단단한 양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엄마는 젖을 먹이다가 좀 더 자라면, 부드러운 식감의 이유식을 먹입니다. 아기한테 이빨이 나서 자기 스스로 음식을 씹을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조금씩 단단한 양식을 먹입니다. 여기서 *밥* 은 의역인데, 단단한 양식이나, 고기류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젖이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고린도 교인은 어려운 구약 성경 강해라든지, 방대한 성경 지식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에게는 주로 젖을 먹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같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도 질이나, 내용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똑같은 하나님 말씀이라 해도 내용이 부드러운 젖이 있는가 하면, 유동식이 있고, 단단한 고기나 딱딱한 현미 밥 같은 양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은 사도 바울의 사정으로 유동식만 먹었던 것입니다. 결국 많은 은혜를 받고, 부흥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장성한 신앙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은 지금도 아직 단단한 양식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고린도 교인은 옛날에만 자라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성장하지 못해서 계속 신앙에 있어서 어린 아이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고린도 교인은 성장이 멈춘 살태였던 것입니다.
Ⅱ.영적 성장의 비결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에 어린 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신앙이 있는데, 그 차이가 엄청나다고 말합니다. 장성한 신앙과 어린 아이 신앙의 차이는 모세와 그의 인도를 받으면서 툴툴거리고 매사에 불평하며, 따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3:3절)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이 성장을 멈춘 신앙인지, 장성하게 잘 자란 신앙인지, 보여주는 기준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래도 관심이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많이 집중됩니다.
물론 신앙이 어린 자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사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성공이나, 자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또 대화 내용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많고, 자신이나 자녀가 성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까 기도의 응답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잘 알지 못하고, 사탄의 세력과 대적해서 싸우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시기*입니다. 여기서 *시기(猜忌)*는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잘 되거나 유명해지면, 화가 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시기(猜忌)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하고,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사람은 시기심이 있기 때문에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이런 시기심에 덜 빠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시기심을 이기지 못합니다.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거나, 아름답게 자라게 될 때, 그리스도인이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면, 한창 아름답게 성숙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비방할 수 있는데, 이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면, 자꾸만 싸우게 되고, 다툼에 끼어들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다른 점이 많은데, 이때 신앙이 어리면, 이런 차이점을 자꾸만 부각시키고, 자기 자신이 더 옳다는 주장을 내세우다가 싸우게 됩니다.
어렸을 때 보면,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는 자주 싸웁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서로 사랑해서 목숨까지 내놓기도 합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사람을 너무나 추종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3절 끝을 보면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이 *어른을 죽자고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으로부터 떨어지면, 죽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는 학교만 보내면, 너무나 울어서 나중에 정신치료까지 받았는데, 알고 보니까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아이가 자라면서 그런 불안이 사라지자 더는 울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쳐준 사람을 죽자고 따라다니지만, 어느 정도 성숙하면, 슬슬 홀로서기를 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 사람을 능가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사람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성장하지 않으면서 죽자고 다른 사람을 추종하고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 사이에서 자신과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으로 분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도 바울도 아무것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4절)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하나님의 백성이 성장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많은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가 성장하면, 유치원 선생님이 아무리 좋아도 초등학교에 올라가야 하고, 또 중·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때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괴팍한 선생님을 만나서 고전하기도 하는데, 자라는 과정이기에 이런 어려움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도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사실 한 두 사람의 도움이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어른들도 직장을 옮기면서 또 다른 영적 지도자를 만나서 말씀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위험성은 자기에게 절대적 영향을 준 사람을 거의 영적 아버지로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따르거나, 오랫동안 목회했다는 이유로 교회를 자기교회로 여겨서 자신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입니다.
3:5절)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린도 교인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고, 아볼로라는 목회자의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가 절대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주어진 역할만 감당했을 뿐이지, 주인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3:6-7절)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복음의 씨를 뿌렸다고 말합니다. 농사를 지으려고 하면, 당연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씨를 뿌렸다고 해서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물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볼로는 고린도에 와서 물을 잘 주었던 목회자였습니다. 보통 농사지을 때, 씨 뿌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이 같지만,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준 사람과 씨를 뿌린 사람이 식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밭의 주인(主人)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밭을 가진 주인은 사람을 고용해서 씨도 뿌리고, 물도 주게 합니다. 그러면 그 사역자는 주인으로부터 품삯을 받는데, 그 모든 열매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교회는 담임 목사의 것도 아니고, 설립자의 것도 아니고, 헌금을 많이 해서 예배당을 지은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오직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목회자는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자꾸만 자기로부터 떼어놓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명 목회자의 경우, 수만 명의 교인들을 모이게 하고 더 나아가 목회자 중심으로 파벌이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교인을 성숙시키는 데, 실패한 증거입니다.
교인이 자라면 자랄수록 목회자는 감춰지고,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영적으로 어른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젖도 먹어야 하지만, 단단한 양식도 먹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영양가 없는 밀 껍질 같은 양식은 아무리 먹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 생명의 양식을 가능한한 많이 먹고, 잘 소화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위대(胃大)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엄청난 세계입니다. 이 안에는 산맥도 있고, 바다도 있고, 호수도 있고, 들판도 있는데, 그 안에 깊이 들어가 하나님의 축복을 캐내어 전부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우리 속을 하나님의 진리로 가득채우는 것이 일차적으로 성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Ⅲ.영적 성숙의 결과
어른이 되면 힘쓰는 것이 달라지고, 지혜가 달라지고, 많은 일을 감당할 능력이 생깁니다. 또한 어른이 되면,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키우고, 세상이 망하지 않도록 굳게 세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신앙 역시 자라면서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고, 더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를 세우고, 셀(cell)공동체를 섬기며, 강건하게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웠으면,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실제로 다른 사람들 안에서 부흥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그릇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성전을 짓는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만약 하나님의 종들 중에 집은 짓지 않고, 소속도 없이 기웃거리며. 헷갈리게 만들고. 정치에 빠져 지내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들은 전부 잘못된 길로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숙하면서 다른 성도를 하나님 말씀으로 세워서 영적 능력이 충만한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을 만드는데 성공해야 합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먹는 것보다 더 은혜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으로 우리 속을 채우는 것은 자신이 위대한 건축 재료가 되는 것이라면, 실제로 주일학교라든지, 개척교회라든지,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집을 지어서 부흥을 체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3:9-10절)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농사짓는 밭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집을 짓는 건축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생명의 말씀으로 열매 맺는 것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보석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끌고 오기 위해 우리는 이제 밭에서 믿음의 집 짓는 것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개인적 능력을 넘어서 출애굽기에 나타난 것과 같은 능력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불이시기 때문에 성전을 올바로 짓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먼저 타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핵 원전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뛰어난 기술이고,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말합니다. 이는 건축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터를 닦는 것이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즉 그는 바울 서신을 통해 복음의 기초를 닦고, 교회를 세우고, 장로나 감독을 세웠습니다. 이제 모든 사역자는 이 복음의 기초 위에 자신의 믿음의 성전을 지어야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전을 짓는 기초나 재료를 올바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11절)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하나님 생명의 말씀 외에 다른 기초는 없습니다. 만약 건축하는 사람이 다른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운다면, 불법 건축물이 되어서 철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재료입니다.
3:12-13절)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건축 재료를 쓰는데, 좋은 재료를 쓰는 건축자가 있는가 하면, 나쁜 재료를 쓰는 건축자도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건물을 지을 때, 부실한 철근을 쓰기도 하고, 모래의 성분이 좋지 않은 것을 쓰기도 해서 건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비가 오면, 물이 새기도 했습니다.
사실 건축할 때, 빨리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은 불이신 하나님을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재료를 보석종류로 써야 합니다. 즉 철저하게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재료로 써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된 살아있는 성도들로 지어진 집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신뢰로 결합될 때, 밑에서부터 성령의 능력이 차올라오면서 놀라운 기적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반면 이런 보석이 아니고, 세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속성으로 집을 짓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제대로 짓는 것은 원전 수억 만 배 되는 에너지를 가지는 것인데, 이것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이것에 실패하고, 오히려 교회를 통해 자기 이름이 드러내고, 세상적 인기를 끈 사람은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는 사람을 치료하지 못하는 병원을 짓는 것과 같고,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등대를 지은 것과 같아서 한평생 쓸데없는 무익한 짓만 실컷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로써 각 건물을 시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13절)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온갖 정성을 다 들여서 건물을 지었는데, 불이 나는 바람에 모두 다 타버리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습니다. 잘못하면, 허무한 정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불로 시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건축 재료를 쓰지 않은 건물은 스스로 부패해서 썩어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자신이 불이시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일어나고 나중에 영원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는 것을 아주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교회의 리더(leader)가 되는 사람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으며, 하늘 문에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숙한 신자가 되어 영원히 무너지지 않고, 불타지 않는 좋은 믿음의 성전을 잘 짓기를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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