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세기 유럽을 매혹시켰던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2】
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그들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경질자기를 18세기 초가 되어서야 만들 수 있었을까?
18세기 이전까지 중국에서 고품질의 자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도자기를 만드는 흙과 도자기를 굽는 온도에 대한 비밀을 중국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이외에도 활발하게 도자기가 생산되었던 지역으로는 이슬람 지역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잘 깨지고 무른 연질자기만을 생산할 수 있었다.
비밀의 열쇠는 카오린(Kaolin)이라고 불리는 고령토에 있었다.
잘 깨지지 않는 견고한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1350℃에 이르는 높은 온도에서도 견딜 수 있는 흙이 필요했다. 고령토를 제외한 흙은 모두 800℃ 이상 온도가 올라가면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깨져버린다. 고령토와 도자기 소성온도의 비밀을 알지 못했던 유럽인들과 이슬람인들은 17세기까지 도자기를 꽤 많이 생산했지만 마조리카, 파이앙스, 델프트와 같은 연질자기만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은 징더전이나 덕화요 등지에 자기 제작에 적합한 다량의 고령토가 매장되어 있어 이를 바탕으로 고품질의 자기를 제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령토와 더불어 그릇을 굽는 소성온도 또한 자기 제작에 중요한 요소이다. 나무만을 지펴 1300℃ 이상으로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을 가두는 장치가 필요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가마를 이용하여 고온을 가두고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유럽은 18세기 초까지도 우리의 항아리와 같은 옹기 수준의 그릇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도자기는 17세기경부터 유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도 역시 예술성 높은 자기문화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 도자가 일본으로 전파된다. 이 전쟁을 통해 끌려간 우리의 도공들이 420명에 이르고 이들은 일본 자기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임진왜란을 ‘Ceramic War’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궁극적으로는 도자기와 관련된 전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7세기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교역으로 수많은 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하게 된다. 더욱이 명나라는 국내 반란으로 1600년대 후반에 자기 수출이 불가능해져서 일본이 거의 독점으로 공급했다.
100년 동안 무려 수천만 점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유럽의 부가 상당 부분 자기를 매체로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음을 알 수 있다.
1710년 유럽 모든 나라의 열망이었던 경질자기가 독일 마이센에서 탄생하면서 유럽 도자기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마이센에 이어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당대 문화계의 리더였던 마담 퐁파두르가 로코코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세브르 도자기를 만들었다.
또한 1740년경 영국에서는 고령토에 동물 뼈의 재를 혼합하여 만든 본차이나가 등장한다. 이는 영국이 전 세계 도자기 시장을 주도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의 도자기 산업은 화려한 장식과 색깔이 더해진 콜포트(Coalport)사의 제품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빅토리아 여왕이 특히 좋아했던 민턴(Minton)사의 꽃무늬 찻잔은 당시 모든 주부들이 갖고 싶어 하던 것이었고
그 명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핸드페인팅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도자기는 ‘전사요법’이라는 문양 복제기술의 개발 덕분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도자기는 영국의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발로 부를 쌓은 많은 중산층들은 재산목록 중 하나로 도자기를 집집마다 소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