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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
1958.11.07~1978.12.26.
학생 운동에 뛰어들다
“한국에서 대학은 필요악이다.
가난한 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로
덕을 입고 있는 대학인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은
불합리하게 혜택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난한 자와 함께
진정한 역사 창조의 대열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 -박기순의 일기 중
박기순은 1957년 1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성여중을 졸업한 후 광주에 위치한 전남여고에 진학했다. 전남여고는 3.1 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였다. 1929년 11월 3일, 일본인 학생의 성희롱에 분노한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明治)절 행사장을 박차고 거리에 진출했다. 이후 조선 팔도 198개 학교 5만 4천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 해방 직후, 광주여고보는 전남여고가 되었다. 박기순은 전남여고 재학 시절 교정에 위치한 ‘광주학생항일운동 여학도 기념비’를 보고 교지에 글을 남겼다.
“우리 어찌 잊으리 조국의 자유를 외치던 언니들의 외침을! 학생운동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전남여고와 더불어 그대(기념비)는 영원히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이 대목에서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이 남긴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주는 영향력이란 수치화되지 않았을 뿐, 엄청난 것이다.” 윤한봉이 광주일고(광주고보 후신) 교정에 위치한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광주일고 학생들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역사의 흐름에 작용했음을 회고하며 남긴 말이다.
1976년,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 (현 역사교육과)에 진학했고, 그 직후 사회과학서클 ‘루사’에 합류했다. 1971년 민족사회연구소 설립 이래 전남대에는 여러 사회과학서클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함께 공부를 하거나, 야유회를 다니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박기순은 또한 동료 활동가들에게 전설적인 선배였던 박형선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박형선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으로, 박정희 정권이 4월 8일까지 자수할 것을 권고하자 그 다음날인 4월 9일에 전남대 반(反)유신 시위를 감행했다. 박형선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이듬해에 풀려났다. 그러나 박기순은 스스로는 단 한번도 박형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느날 이를 의아하게 여긴 동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대의 시대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실로 주체성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전남대 제적과 위장취업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이 선언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해당 문건은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선언문에 서명한 교수 전원을 체포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 재학생들에게 알려졌다. 6월 29일, 전남대생들이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남대 활동가 노준현이 연설과 함께 집회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노준현은 교직원들에게 끌려갔으며, 경찰에 인계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중앙도서관 2, 3층을 점거하고 밤늦게까지 농성을 진행했다. 이날 100 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다음날, 전남대 측은 7월 5일까지의 휴교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날 시위는 박기순, 문승훈, 박석삼이 주동했다. 이들은 전남대 정문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계림동 녹두서점까지 행진했다. 이 시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헤쳐 모여’ 전술이 등장했다. 이들은 시위가 경찰에 의해 봉쇄될 경우에 대비, 차기 집결장소를 사전에 공지했다. 충장로 진출에 실패하면, 1시에 한국은행 앞에서, 4시에 조선대 정문에 집결하자는 게 이날 이들이 세운 전략이었다. 시위는 성공적으로 조선대 정문까지 진행되었다. 경찰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경악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과 관련하여 1주일간 지속된 시위 결과 전남대, 조선대 재학생을 비롯한 시위 참여자 500 여명이 연행되었으며, 이중 14명이 구속되었다. 전남대 3학년생이던 박기순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얼마 후, 박기순은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취업처는 광주 광천동에 위치한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하청업체 동신강건사였다. 1년만 더 학교에 다녔다면 교사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다. 광주 전남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이었다.
들불야학을 만들다
이보다 앞선 1977년 박기순은 광주 산수동에서 진행된 ‘꼬두매 야학’에 참여했다. 해당 야학은 운동성을 갖춘 곳은 아니었고, 검정고시 공부를 중점으로 운영되었다. 꼬두매 야학은 불과 10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박기순은 그곳에서 야학 운영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 박기순은 서울로 올라가 여러 노동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노동운동 동향을 살폈다. 특히 서울의 노동야학 ‘겨레터 야학’을 둘러보고 깊은 울림을 받았다고 한다. 1978년, 겨레터 야학 활동가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이 광주에 왔다. 셋은 모두 광주 출신이었다. 전복길과 김영철은 서울대 재학생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영영장을 받은 상태로 광주에 왔다. 겨레터 야학 활동가들이 광주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박기순은 이들을 찾아가 함께 야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네 사람은 뜻을 모았고,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박기순의 권유를 받고 신영일과 임낙평이 준비팀에 합류했다. 최기혁, 김영철은 고등학교 동창 나상진을 끌어들였다. 들불야학 1기 ‘강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박기순,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 신영일, 임낙평, 나상진. 여기에 입학식 이후 이경옥이 합류하여 들불야학 1기 강학은 총 8명이다.
이들은 함께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서 ‘페다고지’를 강독했다. 해당 책은 교육의 의미를 강조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동등한 주체로서 만남을 가질 때, 비로소 교육은 자유의 실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들불야학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진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들불야학에는 ‘강학’과 ‘학강’이 있었다. 강학, 배우면서 가르친다. 학강, 가르치면서 배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대체한 이와 같은 새로운 구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실천이었다.
들불야학의 이름 ‘들불’은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그는 유현종의 소설 ‘들불’에서 이름을 땄으며, ‘들불’이라는 단어가 ‘미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도 등장한다며 관련 내용을 제시했다. 노동절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였다.
“1884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5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오거스트 스파이즈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하지만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누구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박기순의 안은 가볍게 통과되었다. 다음으로 야학을 운영할 장소가 논의되었다. 노동야학에 걸맞게 광주 유일 공단지역인 광천동에 터를 잡자는 안이 나왔다. 그러나 공간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기순은 주변 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정을 들은 카톨릭 농민회 장두석이 친하게 지내던 조비오 신부에게 광천동성당 관계자를 연결받았다. 박기순이 직접 관계자를 찾아가 부탁했고,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광천동성당 교리학습실을 빌릴 수 있었다. 이어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었다. 첫 학기 홍보 결과 35명이 들불야학에 1기 학강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78년 7월 23일, 들불야학 입학식이 열렸다. 광천동 마을 운동가 김영철(동명이인)과 광천동성당 신부가 축사를 했다. 곧 1기 강학 전복길, 김영철이 군대에 입대했다. 예정된 일이었다. 새로운 강학이 필요했다. 함께할 사람을 수소문한 결과 전용호, 배환중 등이 대기강학으로 합류했다. 박기순은 대학 졸업 후 서울 주택은행에 취업했던 윤상원이 광주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에 성공했지만, 6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광주에 돌아왔고, 광천공단에 취업했다. 박기순은 윤상원을 찾아가서 들불야학 참여를 권유했다. 윤상원은 처음에는 박기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박기순의 삼고초려에 결국 들불야학에 대기강학으로 합류했다. 1978년 11월 8일, 전용호(2기 강학)는 이날 열린 대기강학 세미나에서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
1978년 12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들불야학 팀이 단체로 참여했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활동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단체로 공연했다. 해당 연극은 광천공단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능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박효선은 3기 특별강학으로 들불야학에 합류하여 ‘문화’를 다루게 된다. 윤상원이 들불야학에 합류하고 두 달 남짓, 들불야학은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들불야학 강학 및 학강들은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뒷풀이를 했다. 윤상원은 광천시민아파트에 방을 얻어 백재인 학강과 함께 거주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박기순과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광주 화정동에 뗄감을 하러갔다. 이들은 광주소년원 뒷편 야산에 올라 장작을 모았다. 그날 밤, 박기순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귀가했다. 당시 박기순은 오빠인 박형선과 윤경자 부부, 막내 박동준과 함께 주월동 국민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사돈에 해당하는 윤한봉이 자주 집에 찾아왔다. 그날도 윤한봉이 왔다. 박기순이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윤경자는 윤한봉에게 박기순의 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러나 곧 박기순이 왔다. 윤한봉은 큰 방에 가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윤경자가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도 박기순이 일어나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했다.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박기순이 문쪽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 즉시 전남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연탄가스 누출사고였다. 박기순, 스물 둘,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당시 가두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광주 전남 최초로 위장취업자가 되었던 활동가였다. 그리고 너무나 애석한 죽음이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전남대병원으로 모여들었다. 황망한 소식에 다들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대로는 못보낸다고, 통곡하는 들불야학 학강들도 있었다. 위대한 활동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지역 사회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장의위원회가 박기순의 장례를 준비했다. 영결식 이후 전남대를 거쳐 망월동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1978년 12월 27일, 노동운동가 박기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 광주 전남 지역 활동가들과 들불야학 관계자들이 집결했다. 황석영 작가와 문병란 시인이 조사를 낭독했다. 지난 2월, 박형선과 윤경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한 해를 시작했던 황석영은 박기순의 죽음과 함께 1978년을 마무리하는 현실이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되었던 홍승기 교수도 조사를 낭독했다.
“서석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하였습니다. 성탄의 밤은 그렇게도 조용하였습니다. 그 계절의 벼랑에서 저는 너무나도 슬픈,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살아왔습니다. 깊은 골짜기의 쓸쓸함 홀로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당신 앞에서 누가 감히 의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영결식에 참여한 가수 김민기가 노래 <상록수>를 불렀다. 당시 노동운동에 참여한 바 있던 김민기는 김상윤을 만나기 위해 녹두서점에 들렸다가 황망한 소식을 접하고 영결식에 참석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알고 있는 노래 <상록수>가 박기순이라는 어느 노동운동가의 장례식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려보내야 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운구차는 망월동을 향해 느린 걸음을 시작했다. 들불야학이 터를 잡았던 광천동성당에 들리자 박기순에게 교리학습실을 내주었던 오수성 미카엘 신부가 영결미사를 집전했다. 이후 운구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을 들린 후 망월동으로 갔다. 박기순은 그곳에 영원히 잠들었다. 박기순의 운구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던 그 길, 도로는 태극기로 가득했다. 다음날인 1978년 12월 28일, 박정희는 제 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독재자는 자신이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을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박기순의 장례가 끝난 후,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
영혼결혼식, 임을 위한 행진곡
박기순의 죽음으로부터 1년 6개월 후, 5.18이 우리에게 왔다. 들불야학 활동가들은 투사회보를 만드는 등 항쟁의 일선에서 헌신적으로 싸웠다.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과 박용준은 총을 맞고 죽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김영철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묘역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의 아내였던 윤경자가 박기순,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양가에 제안했기 때문이다. 두 집안 모두 영혼결혼식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양가 관계자가 함께한 가운데서 영혼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2달 뒤인 1982년 4월,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기념하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가 제작되었다.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얼마 후 비밀리에 녹음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카세트 테이프 2,000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약력
※ 1982.2.20. 윤상원 열사와 영혼 결혼식을 함.
※ 2005.8.26. 전남대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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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박기순 열사 탐방혁신보성교육의 정신을 찾아
현재위치포토뉴스
전라남도보성교육지원청(교육장 백남근)은 5월 18일에 우리 지역 출신 5·18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박기순 열사 생가 탐방을 직원들과 함께 실시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며 불리던 노래로 5·18민주화운동 중 희생된 윤상원 열사와 우리 지역 출신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1981년 만들어졌다. 시민사회 운동가인 백기완의 시 일부를 차용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썼으며, 윤상원의 후배인 김종률이 작곡하였다.
이번 행사는 박기순 열사 생가를 방문하여 헌화와 참배를 시작으로 열사 소개, 생가 둘러보기, 표찰 부착으로 진행되었다. 박기순 열사 소개는 열사의 학교후배이면서 보성교육참여위원회 위원장이 동행하여 열사에 대한 생생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전하였다.
그리고 탐방에 앞서 박기순 열사에 대한 도서를 팀별로 돌려 읽으며 열사에 대해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번 탐방에 참여한 직원(주무관 이재헌)은 “이제는 5·18기념행사에서 당당히 부르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유래를 알게 되었고, 우리 지역 출신이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스물두 살에 생을 마감한 박기순 열사의 짧고 강렬한 삶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하였다.
보성교육지원청 백남근 교육장은 “5·18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우리 지역 열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우리교육지원청이 나아가야 할 혁신보성교육에 대한 마인드를 제고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며 이런 탐방이 학생들의 체험학습 장소로 활용되어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도록 안내하겠다고 밝혔다.
<현장사진>
첨부파일 : 보도자료-5.18민주화운동 박기순열사 탐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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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1950.08.19.~1980.5. 27.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1980년 5월26일 마지막 남긴 말
세상에 눈을 뜨다
윤상원은 1950년 8월 19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천동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속하는 지역이다. 윤상원은 본래 윤개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고등학교 시절에 개명을 택했다. 그는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삼수 끝에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직후에는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평범하게 생활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곧 그에게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당시 군 복무 기간은 36개월이었다. 길었던 군 생활이 막바지에 이른 1974년 10월 윤상원은 아버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975년, 윤상원은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했다. 얼마 후 그는 친구 황철홍에게 김상윤이라는 이름의 선배를 소개받았다. 김상윤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가로 당대 활동가들에게 ‘이론적 기둥’으로 통했던 인물이었다. 1974년, 김상윤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이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며 학생들의 반(反)유신시위 준비를 정권 인수 시도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본인들의 수사 결과를 믿지 않았는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상윤은 1975년 2월 15일자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석방 직후부터 활동가 양성에 주력했다. 노준현, 김영종, 김금해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그가 만든 6개월 과정의 학습 소모임을 거쳐갔다. 윤상원 역시 김상윤으로부터 학습 소모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들이 함께 공부한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 노동문제의 구조’ 등이었다. 1970년대 경제발전의 이면에서 신음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삶을 인지하며, 윤상원은 사회 변화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들불야학에 합류하다
1978년 2월, 윤상원은 대학 졸업 후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취업했다. 2001년, 주택은행은 국민은행과의 대등 통합을 통해 KB국민은행이 되었다. 주택은행은 그만큼 건실한 직장이었다. 그는 한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차마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해 7월, 알고 지내던 후배 박몽구와 조봉훈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쫓기는 몸이었다. 이보다 조금 앞선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이 선언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해당 선언문은 박정희 군사 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는 선언에 참여한 전남대 교수 전원을 체포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남대 재학생들에게 알려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중앙도서관을 점거하고 격렬한 시위를 진행했다. 박몽구와 조봉훈은 해당 시위에 참여하여 쫓기는 몸이 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윤상원의 집에 머물렀다. 상원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갈 것을 결심했다.
그해 8월, 윤상원은 미련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광주행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김상윤이 운영하고 있던 ‘녹두서점’이었다. 1977년 7월, 1년 6개월간의 학습 소모임 운영을 마친 김상윤이 광주 계림동에 작은 책방을 열었다. 문병란 시인이 ‘녹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의 초상화가 벽에 걸렸다. 그곳은 곧 활동가들에게 이론을 보급하는 거점이 되었다. 여러 ‘금서’들이 녹두서점을 통해 광주 지역 활동가들에게 유통되었다.
얼마 후, 윤상원은 광주 광천동 광주공단에 학력을 숨기고 위장취업했다. 취업처는 한남플라스틱이었다. 그곳에서 상원은 은행원 시절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노동에 직면했다. 노동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솟아났다. 그즈음 광주 광천동에는 노동야학 ‘들불야학’이 위치했다. (노동야학은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는 곳이다) 1기 입학식이 1978년 7월 23일에 진행되었으니, 그가 광주에 오기 직전에 설립된 야학이었다.
1978년 10월, 들불야학을 설립한 박기순은 2기 ‘강학(교사)’ 모집을 두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주석1) 들불야학 1기는 8명의 강학(교사)과 35명의 학강(학생)으로 구성되었는데, 강학 2명이 군대에 입대하게 됨에 따라 신입 강학 모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박기순은 며칠 전에 녹두서점에서 만났던 윤상원을 기억해냈다. 기순은 상원에게 들불야학 2기 강학으로 활동해줄 것을 요청했다. 상원은 처음에는 기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의 삼고초려에 결국 들불야학에 대기강학으로 합류하게 된다. 1978년 11월 8일, 전용호(2기 강학)는 이날 열린 대기강학 세미나에서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2기 강학(일반 사회)이 되었다.
197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들불야학 팀이 광천동성당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행사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전남대 연극반 출신 활동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공연했다. 해당 연극은 광천공단 어느 노동자의 서사를 통해 당대의 노동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청의 무능함은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윤상원은 들불야학에 합류한 직후부터 백재인 학강과 함께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거주했다. 이날 들불야학 강학 및 학강들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며 뒷풀이를 했다.
이틀 후인 12월 26일, 들불야학에 황망한 소식이 전해졌다. 들불야학 강학 박기순이 불의의 연탄가스 누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들불야학 사람들은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장례 기간 내내 학강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박기순의 장례가 끝난 후,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두고 모든 사람들 서럽게 운다.”
오월, 그날이 오다
1979년, 윤상원은 6개월간 ‘일반 사회’ 강학으로 활약했다. 그해 말에는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준비팀’을 꾸려 직접 노동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윤상원은 이때 준비팀에 합류하여 함께 활동했던 전남대 법대생 박관현에게 들불야학 강학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관현은 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집권해온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18년만에 찾아온 자유를 만끽하며 노동조합, 학생회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30일, 윤상원은 인천에서 진행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식에 광주 전남 중앙위원으로서 참석했다. 이들은 전국 단위 노동단체를 설립하고자 했다. 훗날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는 이태복이 활동을 제안했다. 한편, 서울 주요 대학과 마찬가지로 전남대학교에도 총학생회가 재건된다.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박관현이 출마를 결심했다. 관현은 항상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상원은 그런 그에게 구두를 선물해주고,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양복을 맞추는 것을 도왔다. 민주화의 봄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의 바램과 달리, 소수 군부는 끝내 군대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군인들이 각지에서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김상윤, 정동년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전남대, 조선대 활동가들도 학교에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는 특수부대에 해당하는 7공수여단 33·35대대가 배치되었다.
다음날 아침, 이들은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충돌한다. 수많은 학생들이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시내에 해당하는 금남로까지 행진했다. 금남로로 달려온 군인들은 거리를 삽시간에 피의 바다로 만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55명이 중상을 입었고,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다. 군인들의 폭력을 마주한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학생 시위는 민중항쟁으로 변모했고, 5월 21일에는 시위 참여자가 10만명을 넘어섰다. 당황한 군인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바로 시위대를 향한 ‘집단 발포’였다. 수백명이 총에 맞았다. 군인들은 학살 직후 광주를 빠져나갔고, 도시 외곽을 철저히 봉쇄했다.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윤상원은 이 모든 것을 목격했다. 그는 군인들이 빠져나간 광주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언론’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상원은 들불야학 활동가들과 함께 유인물 ‘투사회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프린터가 없었기 때문에 ‘등사기’를 이용했다. 윤상원과 전용호가 글을 쓰면 박용준이 같은 내용의 글을 예쁜 글씨로 여러 장 적었다. 처음에는 광천동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제작했고, 5월 25일 부터는 YWCA에 위치하던 더 좋은 인쇄기구를 사용했다.
1980년 5월 23일, 제 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군인들이 광주를 빠져나간 이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한 차례씩 집회가 열렸다. 26일에는 오전과 오후 두차례 집회가 있었다. 전날인 22일에 진행된 집회는 현재 상황을 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진행된 약식 집회였으나, 23일 집회는 나름의 격식을 갖춘 채로 진행되었다. 희생자에 대한 묵념, 각 계층 대표자 발언 등이 있었다. 이날 집회는 윤상원이 이양현, 정상용, 박효선, 김태종 등과 함께 녹두서점에서 기획한 집회였다. 윤상원은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장을 맡은 김창길을 만나 집회 진행 관련 실무를 논의했다. 김창길은 ‘무기 반납’을 완강하게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당시 수습대책위는 무기 반납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었다. 불과 이틀 전에 계엄군의 총기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었으나, 일부 수습위원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군인들에게 다시 치안을 맡기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지배질서에 충실했고, 그만큼 많은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윤상원을 비롯한 청년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는 것은 살해된 시민들의 피를 파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무기 반납에 완강하게 반발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수파와 투항파의 ‘강온갈등’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5일, 광주 지역 민주인사들이 YWCA에 집결했다. 윤상원과 정상용은 청년대표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무기 회수를 중단하고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인사들은 고심 끝에 지역 명망가 위주로 구성되었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할 것을 결정했다. 곧 수습위원 25명 명의로 정부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윤상원은 학생수습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남선과 김종배를 차례로 만났다. 윤상원은 두 사람에게 새로운 도청항쟁지도부를 꾸리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무기 반납’을 주장한 김창길 위원장과 크게 갈등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윤상원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날 밤, 윤상원은 박남선, 김종배, 정상용, 윤강옥, 박효선, 김영철, 정해직, 이양현 등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을 규합하여 도청으로 갔다. 이들은 전남도청 2층 식산국장실에 진을 치고, 새로운 집행부 구성을 시도했다. 김창길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달려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도청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조직되어 있는 활동가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결국 김창길은 사의를 표명하고 도청을 빠져나갔다.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한 활동가들은 새로운 도청항쟁 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민주투쟁위원회’로 개편했다.
윤상원은 도청항쟁지도부 대변인을 맡았다. 1980년 5월 25일, 외로운 밤이었다.
최후의 항전
1980년 5월 26일 오후 5시, 윤상원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러 외신기자들이 회견에 참여했다.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지금까지의 피해 상황을 전달했다. 당시 회견장에 있었던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그의 눈빛이 그저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윤상원은 “우리는 오늘 패배한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밤이 오고 있었다. 광주는 이미 계엄군에 의한 최후 통첩을 전달 받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다음날 새벽 광주에 진입하겠다고 했다.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청소년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아 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리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이 싸워주십시오”
1980년 5월 27일, 도청에 남은 시민들은 오늘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끝내 도청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의지를 이어, 내일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나갈 것임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도청에 남을 사람들이 정리된 직후부터 정상용이 이들을 곳곳에 나누어 배치했다. YWCA, YMCA, 전일빌딩에도 수백명의 시민들이 남았다. 최후의 항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상원은 도청 2층 민원실에 이양현, 김영철, 윤석루, 이재호 등과 함께 남았다. 김영철은 들불야학 강학으로 윤상원과 마찬가지로 광천동시민아파트에 거주했다. 이양현은 윤상원과 함께 김상윤이 운영한 학습 소모임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마침내 군인들이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특수부대 3·7·11공수여단과 20사단, 31사단 소속 군인 2만명이 동원되었다. 도청에 진입한건 3공수여단 선봉대였다. 이들은 뒷문을 통해 도청에 진입했다. 잠시 후, 3공수여단 군인들이 도청 민원실 입구에 도착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M-16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군인들의 난사 직후 윤상원이 오른쪽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김영철과 이양현이 부축했지만, 윤상원은 김영철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김영철은 윤상원을 바닥에 고이 안치한 후 카빈 소총으로 자결을 시도했지만, 계엄군이 쏜 총탄 파편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곧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불과 3시간, 도청은 완전히 점령되었다. 시민 16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러나 이들의 장렬한 항전은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날로부터 ‘그 도시의 열흘’을 알게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윤상원의 말처럼, 그들은 결국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묘역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결혼식이 열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최한 ‘영혼’ 결혼식이었다. 신랑은 1980년 5월 27일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윤상원이었고, 신부는 들불야학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박기순이었다.
이로부터 2달 뒤인 1982년 4월,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기념하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가 제작되었다.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얼마 후 비밀리에 녹음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카세트 테이프 2,000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약력
※ 1982. 2. 20. 박기순 열사와 영혼결혼식 거행.
※ 1997. 망월동 신묘역에 박기순 열사와 합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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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518항쟁 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중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 재학 중 노동자 교육 운동 중 과로로 숨지다.
묘역번호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