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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일곱 번째)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제2회)
글쓴이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4.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다.
진나라 만리장성은 BC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기존의 진장성․조장성․연장성 등을 연결보수하여 완성한 장성이다. 고조선과 진나라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경계로 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단을 통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알 수 있다. 현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 위치에 대하여 대략 4가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첫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설이다. 필자를 비롯한 심백강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다. 아래의 <그림 1>에서 ‘갈석산 1’이 위치한 지역이다.
둘째,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昌黎설이다. 윤내현을 비롯한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다. <그림 1>에서 ‘갈석산 2’가 위치한 지역이다.
셋째, 현 중국 요령성 요하설이다.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요령성 요하일대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으로 현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통설이다.
넷째, 한반도 평양설이다. 중국과 일본의 대다수 학자들 및 대한민국 강단사학계 일부가 주장하는 설로 <그림 1>에서 ‘갈석산 3’가 위치한 지역이다.
그런데 중국의 각종 사서에 나타난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진나라 만리장성은 <그림 1>의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이다.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자.
<그림 1>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 위치
(1) 『회남자』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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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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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으로 위만조선(BC 194 ~ BC 108)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다.『회남자』에 나오는 사료 A-1은 현재 전해지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만리장성이 ‘북쪽으로 요수와 만나고, 동쪽은 조선과 연결되었다’고 하였으며, 사료 A-2에 따르면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이 시작되었다. 사료 A-1, A-2를 종합하면 만리장성은 북쪽으로 요수와 만나고 동쪽으로 갈석산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2) 연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대의 요수는 현 중국 하북성 북경유역을 흐르는 조백하이다. 그리고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으로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요수(조백하)에서 갈석산(백석산)까지 이르는 장성은 지금도 그 유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회남자』의 기록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사기』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B-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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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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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사기』「몽염열전」(사료 B-1)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만 여리에 이어졌다.”고 하였다. 만리장성의 서단인 임조는 지금의 감숙성 정서시 민현岷縣 일대로 학계의 이견이 없다. 그런데 만리장성의 동단은 ‘요동’이라고 막연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기정의』는 사료 B-1에서 나오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요동’에 대하여 사료 B-2와 같이 주석하였다. 만리장성의 동단은 ‘동쪽으로 요수에 닿고,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진나라 만리장성이 요동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축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림 1>에서 보는바와 같이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르는 장성이 요수(현 조백하)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갈석산 1’까지 이어졌다.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석산 1’은 고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으로 고대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여러 사서에서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요동’, ‘갈석산’, ‘수성현’, ‘바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요동에 갈석산이 있고, 갈석산이 수성현에 있으며, 고대에는 수성현이 바다와 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곳이다.
『사기정의』(사료 B-2)에서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이 <그림 1>에서 보듯이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어진 장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설에서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동단들은 모두 ‘요수에서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이어지는 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3) 『후한서』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C-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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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C-1은 후한의 효장제 원화(元和, AD 84~87) 3년에 천자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북쪽을 순행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2월 무진일에 중산으로 행차하여 장성을 나갔다가 계유일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장성에 대하여 당나라의 장회태자 이현은 주석하기를 “『사기』에 몽염장군이 진나라 장성을 쌓았는데, 서쪽의 임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무진일에서 계유일까지는 5일간으로 하루에 평균 50여리를 간다고 하더라도 중산으로부터 왕복 250여리 이내에 진나라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산은 <그림 1>에서 ‘갈석산 1’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중산에서 5일 이내에 나갔다가 올 수 있는 장성은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어진 장성뿐이다. 다른 장성들은 모두 중산으로부터 왕복 1,000리가 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후한서』(사료 C-1)의 기록을 충족할 수 없다.
(4) 『태강지리지』‧『수경주』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D-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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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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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강지리지』(사료 D-1)와 『수경주』(사료 D-2) 등에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갈석산으로 기록하였다.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태강지리지』(사료 D-1)의 갈석산은 고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으로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수경주』에서는 갈석산을 2개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상서우공』에 말하기를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산해경』은 말하기를 ‘갈석산은 승수가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尚書禹貢』曰:夾右碣石入于河. 『山海經』曰:碣石之山, 繩水出焉. 東流注于河.).”라고 하는 구절에 나오는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우공갈석’으로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다른 하나는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라고 하는 구절에 나오는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발해의 바다속에 빠져서 사라져 버렸다는 갈석산이다. 『수경주』에서 만리장성의 동단을 갈석산이라고 하였는데, 요서 임유현의 갈석산은 바다속에 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단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수경주』(사료 D-2)에 기록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도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5) 『진서』‧『통전』‧『무경총요』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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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통전』‧『무경총요』등에서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수성현遂城縣으로 기록하였다. 『통전』(사료 E-2)과 『무경총요』(사료 E-3)에서 만리장성의 동단인 수성현을 전국시기 무수현武遂縣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은 학계의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진나라 만리장성은 <그림 1>의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어진 장성이다.
(6) 『통전』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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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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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 사서들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AD 801년 편찬된 『통전』으로부터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하여 혼란이 발생하였다. 사료 F-1의 당나라 북평군(또는 평주) 노룡현에 위치한 갈석산이나, 사료 F-2의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는 갈석산은 모두 ‘우공갈석’으로 <그림 1>에서 표시한 ‘갈석산 1’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사서들은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통전』의 사료 F-1과 사료 F-2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이곳이 아니라 고구려의 옛 강역에 위치한 좌갈석까지라고 하였다.
『통전』이 말하는 좌갈석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그림 1>의 ‘갈석산 2’를 가리킨다. 하지만 창려현의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 시기의 대대적인 지명 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 등 3단계의 왜곡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갈석산 1)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며 이곳을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본 것은 『통전』의 착오이다.(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 참조)
『통전』은 앞에서 사료 E-2에서 보았듯이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武遂현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여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료 F-1, F-2에서는 진황도시 창려현 일대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통전』의 사료 E-2와 사료 F-1, F-2는 서로 모순되는 기록이며,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의 갈석산으로 본 사료 F-1, F-2는 잘못된 기록이다. 창려현의 갈석산에는 장성의 유적도 없으며, 단지 갈석산의 100여리 북쪽으로 지나가는 장성이 있으나 그 장성은 진나라 만리장성과는 무관한 명장성이다.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다.
지금까지『회남자』‧『사기』‧『후한서』‧『태강지리지』『수경주』‧『진서』‧『통전』‧『무경총요』등의 만리장성 관련 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AD 801년 편찬된 『통전』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의 ‘우갈석’과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昌黎의 ‘좌갈석’ 등 2곳으로 기록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후 『통전』의 잘못된 기록을 인용하는 사서들이 생겨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통전』의 잘못된 기록을 또 다시 왜곡하여 ‘우갈석’을 진황도시 창려현의 갈석산으로, ‘좌갈석’을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으로 주장하면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까지 끌고 왔다. 현재 중국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까지 그리면서 동북공정의 핵심근거로 삼고 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에 위치하였던 본래의 진나라 만리장성 동단을 무려 3,000여리나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일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5. 기타 학설에서 보는 만리장성 동단의 위치와 문제점
(1)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설’의 문제점
윤내현을 비롯한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은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일대로 보고 있다. 그 핵심 근거는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려현의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 시기의 대대적인 지명 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 등 3단계의 왜곡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다.(‘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 참조) 그러므로 이곳은 낙랑군 수성현이나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다.
각종 사서들의 기록을 통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사기정의』(사료 B-2)에 의하면 만리장성은 동쪽으로 이어져 요수에 닿고, 그리고 서남쪽으로 바다로 이어졌다. 윤내현 등은 요수를 난하로 보고 있는데, 현재 난하 부근의 장성은 난하를 넘어 동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기정의』(사료 B-2)의 요수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과는 방향이 맞지 않다.(<그림 1> 참조) 더구나 난하 방면의 장성은 진장성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에 축조된 명장성으로, 학계의 이견이 없다.
2) 『후한서』(사료 C-1)에 의하면 진나라 만리장성은 중산(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으로부터 왕복 5일 이내에 행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임조에서 진황도시 창려현(갈석산 2)까지 이어진 장성은 가장 가까운 곳도 중산으로부터 왕복 1,000리가 넘으며, 왕복하려면 20여일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이므로 『후한서』(사료 C-1)의 기록과 맞지 않다.(<그림 1> 참조)
3) 『태강지리지』‧『진서』‧『통전』‧『무경총요』등 수많은 사서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수성현遂城縣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역사서에서 수성현遂城縣 설치 기록이 나타나는 곳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 유일하다. 진황도시 창려현 일대에는 수성현이 설치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없으므로 이곳을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윤내현 등이 진황도시 창려현 일대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비정한 것은 갈석산의 지명이 이동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지명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현재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진황도시 창려현 일대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2,000여 년 전의 사서에서 기록된 갈석산과 동일하게 보고 역사를 해석하면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다. 갈석산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알려면 갈석산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 ‘요령성 요하 유역설’의 문제점
노태돈을 비롯한 현 강단주류사학계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요령성 요하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노태돈의 주장을 살펴보자.
“갈석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단인 산해관과 근접한 지역에 있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현존하는 장성은 후대의 것이다. 연‧진대의 장성은 그보다 훨씬 북쪽에 설치되었음이 그 유적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요령성 지역의 장성 유지는 두 개의 줄기를 이루며 동서로 길게 뻗쳐 있다. 북쪽 성벽의 유지는 화덕현 동쪽에서 영금하 북안을 거쳐 적봉, 오한기, 고륜의 남쪽 등을 거쳐 부신현 동쪽에 이르며, 남쪽 성벽은 객라심기와 적봉 남부를 거쳐 노합하를 넘어 건평현 북부와 오한기 남부를 지나 북표현에 이른다. 능선을 따라 전개되어 있는 긴 성지의 자취는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그리고 장성의 자취가 이어지는 군데군데 요새가 존재하였고 그곳에서 연‧진‧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일찍이 40년대에 동주신에 의해 일부분이 조사 보고된 바 있다. 60년 초 북한에서의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 사실이 지적된 바 있었으나, 외면하고 재요령설이 정설화되었다. 근대에도 이 유적에 대해 그것은 기껏해야 한나라 때 변경에 설치된 간단한 장새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의해 원거리에 걸쳐서 축조된 장성의 유지로 보아야만 한다. 『사기』에서 전하는 연‧진 장성의 동단이 오늘날의 요하선에 이르렀음은 실물 유적을 통해 확인되는 바이다. 따라서 연‧진대의 장성이 요서의 갈석산에 이른다는 설과. 그것을 전제로 한 위에서 제기된 낙랑군 및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에 대한 비정은 부정된다.”(노태돈 저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11-13쪽 참조)
노태돈이 연‧진 장성의 동단을 요령성 요하 일대로 보는 주요 근거는 요령성 지역에 위치한다는 장성의 유지이다. 중국학계에 따르면 요하 서쪽의 요령성 지역에 동서로 길게 뻗은 두 줄기의 장성유지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연․진․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장성유지를 연․진 장성 유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에 따라 만주일대에 성터 유지가 있으면 무조건 연‧진시대의 장성유지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학계가 요령성의 연‧진 장성유지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그냥 돌무더기가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것으로 장성 유지라고 보기도 민망한 것들이다. 그리고 유물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한 것으로 연․진․한대의 유물이 나왔다고 그것을 연․진 장성 유지라고 보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각종사서에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일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 요령성 요하일대는 각종사서에 등장하는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기록들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강단사학계가 중국측이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하는 유물들을 근거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요령성 요하 일대로 비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역사연구 방향이 아니다.
(3) ‘한반도 평양설’의 문제점
1982년 중국에서 공식 간행된 『중국역사지도집』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까지 그리고 있다. 그 근거로는 아래의 사료 D-1, 사료 E-1, 사료 F-1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들 사료에 기록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이며, 한반도 평양일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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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사료들이 말하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다시 살펴보자.
1) 『태강지리지』(사료 D-1)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기록은 『사기색은』에서 고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을 주석하면서 인용한 구절이다. 따라서 ‘낙랑군 수성현’과 ‘갈석산’ 및 ‘만리장성의 동단’은 모두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황하 하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일대 보다 동쪽으로 흐른 적은 없었다. 따라서 갈석산은 하북성 천진시 서남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에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고, 고대에는 황하하류가 그곳으로 흘렀으며 갈석산(백석산 또는 낭아산)이 있고, 만리장성의 유지도 남아있다. 『태강지리지』(사료 D-1)는 황하 하류의 갈석산을 설명하고 있는데, 황하하류로부터 동쪽으로 무려 3,000여리나 떨어진 한반도 평양에서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찾는 것은 옳지 않다.
2) 『진서』「지리지」(사료 E-1)의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기록에서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진서』「지리지」의 평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서진의 ‘낙랑군 수성현’은 평주에 소속된 군현이었기 때문에 서진의 평주 위치를 알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서』「지리지」에 의하면 서진의 평주는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 지역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서진의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평주에 속한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도 당연히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북성 지역에서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남아있고, 그곳에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었음은 위에서 『태강지리지』(사료 D-1)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따라서 『진서』「지리지」(사료 E-1)의 기록 또한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임을 나타내는 사료이다. 『진서』「지리지」에 나타난 서진의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그 평주에 속한 ‘낙랑군 수성현’을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지 한반도 평양 일대에 비정하는 것은 명백한 사료왜곡이다.
3) 『통전』(사료 F-1)의 기록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사료의 해석이 불명확하며, 이 기록을 가지고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통전』(사료 E-2)의 또 다른 기록에서 “(역주)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현이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통전』(사료 E-2)에 기록된 역주易州 수성현遂城縣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과 같은 지역이다. 따라서 『통전』의 저자 두우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사료의 해석이 불명확한 『통전』(사료 F-1)의 기록을 근거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해석이 아니다.
이와 같이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하면서 그 근거로 제시한 『태강지리지』(사료 D-1)와 『진서』지리지(사료 E-1) 및 『통전』(사료 F-1)의 기록들은 모두 낙랑군 수성현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사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3천 여리나 동쪽으로 왜곡하여 한반도 평양 일대로 그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과연 중국의 학자들이 관련 사료들을 올바로 해석할 줄 몰라서 그럴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평양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 지역으로 왜곡하여 통설로 확정하였고,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강단사학계가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학계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한반도 평양 일대라고 주장하는데, 중국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까지 왜곡하여 그리는 것이다. 현 강단사학계의 잘못된 통설이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하루속히 잘못된 통설을 바로잡아야 한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