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품어 주는 것 ♥
생명의 삶 QT 2021. 11. 6
욥기 19:21~29
배구의 여제로 잘 알려진 김연경 선수가 등장하는 한 광고 영상에서 그녀가 지니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거기! 거기! 드루와 다 드루와 내가 다~ 받아줄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상하게 그 목소리에 끌려 여러 차례 영상을 보고 또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영상에 끌리게 된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은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녀에게 다가가면 그 안에서 포근한 느낌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의 모본(模本)은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나의 약점도 허물도 융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하시고 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그 친구들에게 하소연합니다. 욥 19:21에서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겪는 아픔의 상처는 희생적인 사랑으로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상대의 고통을 내 안에 품고 함께 울어주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인생들의 아픔을 껴안고 대신 울어주셨던 것입니다.
인생이 겪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진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빛은 세상에 밝히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진리는 광명천지에 온전하게 드러나 있지만 감춰져 있습니다. 이유는 사람의 마음에 담긴 죄로 인하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은 심한 고난의 늪에 빠져들면서 진리 되신 대속자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하소연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있더라도 이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대속자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난이라는 흑암의 터널(tunnel)에서 드디어 자기를 구원할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욥 19:26,27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라는 고백에서 진리 가운데 자유를 얻는 사람이 외치는 환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은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나의 무지와 허물 그리고 죄를 발견하므로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때 우리는 빛의 세계로 이끌림을 받아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 상처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아픔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저들의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울어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고난은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 의미가 깨달아지고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