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3(수)■
(마태복음 22장)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가장 큰 계명(막 12:28-34; 눅 10:25-28)>
(묵상/마 22:34-40)
◆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조문을, 신약은 사랑을 삶의 규례로 삼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인듯 보인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율법이 이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런데 이 계명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미 율법이 명시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새계명인가?
사랑이 새계명이 되려면, 사랑하라라는 명령으로 끝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율법과 다를 바가 없다. 진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는 강력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계명이 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요 13:34). 그렇다. 바로 이 말씀때문에 사랑이 새계명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게되며 아무 조건없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단순히 내가 노력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내 속에 사랑이 생성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의붓 자식을 미워하는 의붓 어미에게 자식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과연 자식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가? 아마 위선적으로 사랑하는 척하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복음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복음적으로 살지는 못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것까지는 매끄럽게 설명했다. 그리고 심지어 사랑이 어떻게 신자들 속에 생성될 수 있는지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지는 못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여전히 율법에 불과했다. 내 속에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답게 보이기 위한 포장된 사랑이며, 의무적인 사랑에 불과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인줄 모르는 자들에게는 함부로 대했다.
내가 수십 년을 주님을 믿었지만, 주님을 별로 닮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바리새인처럼 종교적으로는 세련되었지만, 교만하고 지적질이나 하며, 늘 위선적이었다. 겸손해도 겸손한 것이 아니며, 어떻게 겸손한 척해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지를 잘 아는 교활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천국의 필수조건인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잃었다.
매주 말씀을 전하고 제법 그럴싸한 글도 쓰지만, 그게 뭔 대수인가? 나도 주님을 닮지 않고, 청중도 주님을 닮지 않았다면 그런 수고가 무슨 상이 있겠는가? 오히려 나는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하는 대역죄인이 될 뿐이다.
사랑하라는 계명 자체가 율법의 완성이 아니다. 사랑 바로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이 둘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셈이다. 이 사랑을 어디에서 얻는가? 이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왜 모르는가? 그래서 신약의 성도의 삶의 규례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사랑이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새계명이 된 것은 내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하면, 바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이 사랑이 내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오, 이 놀라운 믿음의 신비를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사람들은 믿음만 가지고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제 믿음은 충분하고, 행위를 강조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냥 율법적인 삶에 장식으로 믿음을 추가한 것 뿐이다.
율법적으로 반듯한 부자 청년은 주님께서 재산을 나누어줄 것을 말씀하자 오히려 주님을 떠났다. 그러나 탐욕의 화신이었던 삭개오는 주님께서 전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재산의 반을 내놓았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다.
내가 아무리 겸손해도 주님께서 겸손하신 것에 비할 수가 없으며 내가 아무리 희생적으로 봉사해도 주님의 희생에 비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을 묵상하면 할수록 고개가 더 숙여질 뿐이다.
주님, 제가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어떠하심을 더욱 더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외식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진정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