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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9] [연재] 삼류무사-126
너무도 애달파서 일까?
그가 지른 괴성은 음습한 동굴을 가득 메우고 휘돌아 내려 모든 이들의 가
슴을 무겁게 적셨다. 그것은 촉촉한 단비같이 부드럽지 않았다. 광풍처럼
미친 듯이 밀려왔지만 오고 또 가는 바람과 다르게 일행의 몸속 깊은 곳으
로 무겁게 침전되었다. 비명은 꼬리를 모르는 유성처럼 긴 궤적을 그리며
언제나 까지 계속될 것 같았지만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적막은 더욱 괴기스
러웠으리라.
느닷없는 침묵, 예상치 못한 고요에 누구도 나서서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장추삼의 구부린 뒷등만을 말없이 쫓고 있을 뿐. 쉴 새 없이 떨리던 그의
어깨도 거짓말처럼 평정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이 안정을 의미하는 게 아님
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분노의 결정이 한곳으로 모여 완벽한 전이(轉移)가 된 상태. 이런 걸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난 우리형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죽을 죄였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옹호하려는 건 아니야.”
장추삼의 낮은 독백은 철저한 무감정을 밑에 깔고 있었다. 바탕이 무엇이든
그가 뱉어내는 말에서 인간의 오욕칠정 따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죽였어야 하겠지. 단칼에 죽이기 싫을 정도로 미웠다면 오체분
시라도, 그렇게 잔인한 방법이라도 택해야 한다면 할 수 없었겠지. 그런데...”
그의 고개가 쳐들려졌다. 울음기는 없어진지 오래, 눈가를 적시는 피눈물이
분장처럼 느껴지고 장하이를 받쳐 든 손의 떨림은 습관처럼 보였다.
“이건 뭔가. 어디 이 모습에서 사람이란 단어를 떠올리겠는가. 말 못하는
개, 돼지라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사람은 고사하고 삶을 꾸려가는 생명
체중 이런 몰골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선 장추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낮은 조소가 말의 가운데에서 불컥불컥
숨을 쉬었기에 몹시 듣기 싫은 어조가 되었으나 귀를 막고 외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발산하는 기운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일까? 아니면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공유되어서 일까?
“이십년이 지나 혈육을 만나게 되었던 나는 과연 인간이 맞는가. 애타는
부르짖음을 들었을 때도 남의 일이라고 여기고 외면하려는 귀를 달고 있다.
바닥을 기어기어 한 뼘이라도 다가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설마’
만을 외쳤던 눈으로 버젓이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한심하게도 죽어가는 형
에게 신변잡기나 늘어놓는 입과 혓바닥으로 아직도 부지런히 지껄이고 있다
. 이러고도, 이러고도 나를 인간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장공자...”
단리혜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들었음인가, 몸을 돌린 그의 품에 걸레처럼
구겨져있는 장하이가 슬프게 흔들거리고 장추삼의 발걸음도 따라 흔들렸다.
무너질 듯 걸음을 옮긴 그가 박옹 앞에 이르러 팔을 폈다.
“잠시만 형을 부탁해요. 잠시만 말이에요...”
“추삼이...”
“노인이라면 형을 맡길 수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요. 그저 잠시만
형을 데리고 있어줘요. 되도록이면 더러운 땅에 발끝이라도 닿지 않게 말이
에요. 무리한 부탁이라면 나중에 보상을 할게요.”
“자네...”
“부탁이에요. 잠시면 될 거에요.”
장추삼을 말없이 바라보던 박옹이 장하이를 받아들었다. 그의 노안에서 말
할 수 없는 착잡함과 함께 연민의 기색을 엿보았기에 장추삼은 얼른 돌아섰
다. 아직 그런 눈길을 받아서는 안 된다. 형의 몸이 식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은... 아니다.
“다녀올게요.”
짧은 말과 함께 몸을 돌린 그의 뒷등에서 아수라의 독아(毒牙)처럼 섬찟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스슥.
약속이나 한 듯 장추삼의 좌우로 북궁단야와 하운이 붙어 섰다. 이미 그들
의 손에는 검이 들려져 있었고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눈빛으로 전방을 쏘아
보는 기세가 자못 매서웠기에 고개를 돌려 둘을 번갈아 쳐다본 그가 쓰게
한마디 했다. 이들은 무어라고 해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의
이름이 우정이든 연민이든, 어떤 식으로 이름을 붙여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생각은 뒤로 미루자. 나에게는 물을 것이 있고, 들어야 할 대답이
있다. 뒤의 일은 뒤의 시간에 맡겨두는 거다.’
타오를 것 같은 분노가 식은 건 절대로 아니다. 아니, 분노는 구름이 되어
하늘을 뒤덮은 지배자처럼 오연하게 그를 감싸고 있다. 다만 거대한 장막처
럼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구름은 스스로의 모습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분신으
로 대지에 강림한다.
“뭐야?”
세 청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굴을 벗어날 무렵 몇 명의 무인들이 들이
닥쳤다. 이미 이들의 행보가 노출되었다는 것이니 치고 빠지려던 남궁선유
의 전략은 품처럼 부질없어 졌다는 말이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축!
그들이 닥치는 순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장추삼이 움직였고 최초로 달
려든 인물은 그 속도에 정비례로 튕겨나갔다. 이어 몇 번의 격타음으로 다
섯 명의 무인들은 상황파악도 해보지 못하고 그이 발만을 구경한 채 정신을
잃었다.
“갑시다.”
무덤덤하게 한마디 하고 동굴을 나서는 장추삼의 모습은 그래서 더 위압적
이었다.
“매복이 깔렸을 것이다.”
북궁단야가 사위(四圍)를 경계했다. 대저 모든 싸움에서 흥분은 금물이다.
이성을 잃는다는 건 전투에서 승리할 확률을 그만큼 갉아먹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남보다 한번이라도 대국을 돌아볼 수 있는 평정심, 이것이 바로 승리
의 기본 중 에서도 기본이라 하겠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이다.
“그들에게 애도를 보내야겠군.”
계단가에서 장추삼이 비틀린 웃음과 함께 갑자기 날아든 칼날에 몸을 날렸
다. 자살이라도 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찔러 들어온 상대의 팔목이 그
의 겨드랑이에 꽉 잡히고 그 상태에서 팔꿈치를 한번 틀자 장추삼의 손등은
한쪽 팔의 자유를 잃은 검수의 안면에 정확히 꽂혔다.
퍽!
얼굴을 가격당한 검수가 무너지려 했지만 무릎 뼈를 발뒤꿈치로 차 그의 몸
을 올려 세우고 몸을 빙글 돌리자 내리지 못한 검 날이 원을 그리며 달려드
는 다른 검수들의 돌격을 저지했기에 일순간 그들이 주춤하였고 반대편 팔
로 아직 잡고 있던 검수의 어깨를 짚으며 허공으로 양발을 들어 열여덟 번
의 발길질로 공간을 수놓았다.
파바방!
그렇게 일곱의 검수가 쓰러질 때까지 장추삼이 보인 행동은 지극히 작고 간
단한 것이었다. 다만 망설임이 없었으며 매우 빠르고 정확했다.
하운과 북궁단야는 미쳐 손 쓸 틈도 주지 않고 길을 뚫어가는 장추삼을 지
켜보며 적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공이 한 단계는 더 올라선 듯한
느낌 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착각이고 평소에 힘을 조절하던
그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싸움을 벌이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다시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 나왔으나 이번에는 북궁단야의 검이 날카롭게
사선으로 번뜩였고 반원형 선명한 검적이 번뜩이자 그들이 들고 있던 칼 자
체가 파괴되어 이리저리 비산된 파편을 뒤집어쓰고 바닥을 구르는 참혹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북궁형도 대단히 화가 나 있구나.’
그나마 가장 이지적으로 일행의 동요를 조율하려는 하운이었기에 두 사내의
분노와 기세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어려워서 행여 라도 발생할 수 있는 흥분 뒤의 틈새를 경계하는데 주력했다
스르륵.
여태까지의 무사들과는 사뭇 다른 기도를 두른 여섯 명의 복면인이 지면을
미끄러지듯 밟으며 다가오자 이제야 본격적으로 싸움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
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기에 무조건적인 돌진을 멈추고 붉은 복면의 인물들
과 팽팽히 대치하였다.
복면인들 중 이마에 타는 듯한 화염이 그려진 인물이 무참히 널부러져 있는
무사들을 한번 훑어보고 혀를 찼다.
“보고는 들었다. 너희가 남궁선유의 일행인가?”
순간 하운과 북궁단야의 시선이 짧게 허공에서 얽혔다. 이들은 일행의 행보
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박옹의 말대로 하남땅을 밟은 그 다
음날을 거사일로 잡을 만큼 신속한 행보였다는 거다. 이 말은 그들의 행적
이 하남에서 드러났을 리 없다는 것이고...
“언제부터 우리를 눈치 채고 있었나?”
북궁단야의 반문에 적면인(赤面人)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들을 대답은 들었
으니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다는 암묵적인 반응. 그러나 이들은 여타의 적
들과 차원이 다른 기도를 자연스레 발산하고 있었기에 두 청년검수는 이맛
살을 한번 찡그렸다.
어디서 이런 조직이 태동되었다는 건가, 이자들의 기세는 족히 군소방파의
수장급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그들의 답답한 마음과 관계없는 듯 장추삼이 주먹을 소리 나게 쥐었다. 아
무런 말없이 적들을 잠재우던 그로서도 이번의 인물들은 무언가 다르게 보
였을 것이다.
“무게 잡는 폼을 보니 뭘 좀 알겠군.”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흔히들 ‘씨익’ 이라고 표현한다고 하는데
장추삼의 미소는 철저히 썩어있었기에 일반적인 그것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내 하나만 묻자. 이곳 대가리가 누구냐?”
“음?”
화염 문양의 복면인이 일순 당황했으나 곧 말의 진의를 깨닫고 툴툴거렸다.
“곧 만나 뵙게 되겠지. 난입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 말이다.”
“대가라고 했느냐?”
장추삼이 낮게 반문했다. 이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평상시의 어투.
그 속에 형용키 어려운 한기가 스며있었기에 적면인들의 수뇌, 홍염(紅焰)
의 가슴에 스산한 무엇이 싹터 올랐다.
‘보고 대로라면 지금 말하는 놈이 장추삼일 것이다. 긴 머리에 거검이 북
궁단야, 그리고 나머지가 하운... 그렇다면 가장 약한 녀석도 장추삼 이어
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녀석의 기세는 이들 가운데서 단연 발군이다. 잘못
된 보고인가?’
저간 사정을 알리 없는 그로서 당연한 의문이었다. 지금의 장추삼은 폭발
직전의 화약과도 같아서 기세만으로도 고수 한 둘 정도는 질식시킬 수 있었
으니까. 허나 이들 여섯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상대방의 기세 정도로 꼬리
를 말기에 그들은 너무도 강했으니까.
팟팟!
동굴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뒤에 남아 있던 박옹들이 신법을 발휘하며 쫓아
오는 소리가 들렸다. 길은 뚫려 있었기에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고 쓰러
진 사내들은 그들에게 이정표와도 같은 역할을 해주어 빠른 시간 내에 세
청년을 따라 잡았던 것이다.
우뚝.
육대 삼의 대치를 보고는 그들이 신형을 멈추고 평상보로 걸어왔다. 박옹의
두 팔엔 여전히 장하이가 안겨져 있었으나 땟국물이 흐르던 얼굴이 대충
닦여 있어서 피골이 상접하고 산발한 얼굴이지만 그나마 사람다워 보였다.
‘음? 뇌옥(牢獄)을 들어갔던 건 알았지만 왜 한사람만 빼온 거지?’
홍염의 고개를 갸웃거릴 때 육인을 자세히 뜯어보던 박옹의 눈이 점차 커졌
다. 설마하고 생각해봐도 풍기는 기태와 독문적인 복장으로 볼 때 저들은
그가 추정하는 인물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무림은 저들을 잊었는지 몰라도
몇몇 노강호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각인되어 있는 자들이기에 그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저들이 이곳에 있다니!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인가!
“믿을 수가 없군. 저들은...”
“음?”
남궁선유가 의아한 얼굴로 그의 지기를 바라보았다. 육중한 분위기로 미루
어 고수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박옹은 그들을 알아보는 기색이 아닌가.
언제 강호에서 조우라도 있었단 말인가?
‘저들이 누구이기에 박옹이 놀란단 말인가.’
그의 친구는 녹록한 인물이 아니다. 녹록하다니, 그런 말은 그에 대한 모독
일뿐더러 박옹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자들이나 지껄일 얘기이다. 그러기
에 남궁선유도 육인의 복면인을 주시했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는 인물들이
없다. 다음 말을 기다릴밖에.
“믿을 수 없지만 저들은... 육천염(六天炎)이 분명하다. 남궁, 우리가 지
금 어디에 와 있는 거지?”
홀린 듯 말을 하는 박옹의 말에 남궁선유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육천염.
.. 육천염!
“설마 그 육천염을 말하는 건가?”
“육천염이 강호상에 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맞겠지.”
육천염.
이들은 잊혀진 이름이자 한때의 공포였다. 그 공포의 시간은 너무도 충격적
이었기에 전 무림인이 입을 모아 이렇게 불렀었다.
...... 불길한 꿈처럼 다가온 겁난(兇夢之劫)이라고. 다른 말로 제 2차 무
림 혈겁이라고.
물론 육천염이 흉몽지겁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그 거대했던 피의 제전
에서 한 축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많은 피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단지 한 개의 세가와 한 개의 문파를 무림 역사에서
지웠다.
이십 여 년 전이지만 아직도 뚜렷한 공포로 각인될만한 사건이다.
두 노인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장추삼은 홍염의 얼굴을 똑바로 쳐
다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노인들의 말이 안 들린 것도 아니고 육천염에 대
해 모르지도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차 묻겠다. 대가라고 했느냐? 대가가 뭔지를 알려줄까?”
홍염이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이놈은 뭘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이거나 절대
적으로 자신을 믿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불쌍하다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
“건방진 놈이로군.”
홍염의 좌측에 있던 인물이 냉소 지었다. 언제나 강호에는 범 무서운 하룻
강아지들이 물정모르고 짖어대곤 한다. 그리고 하룻강아지의 눈이 빛났다.
“훗!”
짧은 조소가 맺히는가 싶었고 장추삼의 몸이 그들의 시역(視域)에서 사라졌
다고 생각된 순간 입을 놀린 복면인은 서늘한 무엇이 명치께로 다가옴을 느
끼고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피한 자리로도 똑같은 기운이 다가오
기에 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손짓이지만 만근의 힘을 담고
있기에 뻗어오는 장추삼의 발이 스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으스러질 것이다.
파팡!
손과 발이 부딪치며 거센 반발력으로 둘의 거리가 벌어지고 시큰한 손목의
감촉을 느낄 사이도 없이 명치 깨에 둔중한 타격을 받고 헛바람을 토해내는
그의 목에 발 하나가 와 닿았다.
“건방지다?”
아득한 정신 속으로 그는 인간이 이렇게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분명 한번의 격돌로 인한 여파는 일정한 힘으로 작용하여 힘이 작
용한 반대 방향으로 몸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거늘 전혀 틈이 없이 상대의 발차기가 날아
왔고 외문기공으로 단련된 그의 명치 깊숙이 발이 꽂혔고 뒤이어 또 하나의
발이 희롱이라도 하듯 목을 받쳐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졌기에 나머지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아무것
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 사람들처럼 분분히 칼을 빼들었다. 그
만큼 갑작스러웠고 그만큼 빨랐다는 말이다.
“일호!”
순간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나 이어지는 연타가 없었기에 재빨리 한발을 물
러서며 일호라 불리운 복면인이 큰소리로 기합성을 토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으리라.
“짖지 말고 말을 해.”
전혀 조롱조의 음성이 아닌 낮고도 조용한 말투였지만 장추삼의 한마디 한
마디는 일호의 가슴에 비수처럼 틀어 박혔다. [16294] [연재] 삼류무사-127
허나 고수는 흥분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법,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조
차 조절하지 못한다면 어찌 강호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을까. 제 실력을 다
발휘하며 대전에 임한다 하더라도 어떤 변수가 싸움의 주변부에서 딴지를
걸지 모르는 게 강호의 생리다.
과연 일호는 잠시나마 흔들렸던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보고는 그저 보고
일 뿐이다. 절대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인정하기 싫어도 녀석의
몸놀림은 가히 전광석화와도 같고 한 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다. 과감
한 결단력과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추진력은 종종 상대에게 크나큰 부담으
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고 압박감을 받으며 벌이는 싸움에서 좋은 결과를 기
대하기 어렵다. 어린놈에게 한대 얻어맞았다는 자존심 같은 걸 품고 있다가
는 돌이킬 수 없는 경우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후우~”
그가 짧은 한숨을 토하자 당장이라도 달려들 모양으로 어깨에 힘을 주던 나
머지 인물들도 숨을 가다듬었다. 일단 빼앗긴 기선을 피해가자는 심산도 있
고 뒤에 등장한 세 명이 - 시체 하나는 제외하고 - 누구인지 알아본 탓이다
. 단리혜라는 계집아이야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남궁선유와 박옹은 그리 만
만한 상대가 아니다. 검정오존이니 무림십장같은 허명을 염두 할 필요도 없
이 표홀한 신법만으로도 그들의 공력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이것 참 우습군.”
장추삼이 두 팔을 벌리며 어이없어 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보여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건방지다면서 돼
지 멱따는 소리나 지른다면 다란 거야? 볼썽사나운 안면가죽 만큼이나 우스
꽝스럽구만 그래.”
“후후...”
일호가 낮게 조소했다. 순간적으로 방심해서 한반 보기 좋게 맞긴 했지만
그게 싸움의 전부는 아니다. 기고만장한 녀석에게 하늘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용의가 있다.
“콧대가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좋은 일이지, 아주 좋은 일이야. 그럼
찌른 하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봐라.”
스스슥.
무릎을 굽히지도 않고 방향을 튼 일호가 장추삼에게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그의 손에서 요광(妖光)이 번뜩이는 칼 한 자루가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파르라니 빛을 발했다.
선공이 장땡이라던 장추삼이건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까처럼 돌격을
자제하고 일호가 하는 양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보고 있었다. 마치 할 테
면 해봐라 라는 듯이.
일호도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육천염 모두가 냉랭한 시선으로 그들
의 주위만을 경계하고 있었다. 세 명의 청년만큼이나 두 노인을 신경 쓰면
서 누구 하나라도 뛰쳐나가면 곧바로 어우러질 준비를 한 듯 보이기에 장내
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꿀꺽!’
엄한 박옹이 침을 한번 삼키자 여태껏 그 신호를 기다린 사람들처럼 육천염
이 움직였고 물론 장추삼들도 응전을 했다. 훗날 강호에서 육염삼성(六炎三
星)의 결투라고 불리우게 될 싸움의 시작이었다.
스스슥.
육천염은 숫자에 꼭 맞추어 상대하겠다는 듯 세 청년을 둘씩 에워싸고 뒤편
의 두 노인을 견제하며 공세에 들어갔다.
하운과 북궁단야도 그들의 거리를 유기적으로 변화시키며 네 명을 상대했는
데 이건 누가 제의한 것도 아니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단 세 번의 실회
로 였지만 검을 알고 우군의 능력을 알기에 자연히 펼쳐지는 마음의 조화라
고 하겠다.
‘효과적이다. 저녀석들은 정말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군. 유한 가운데서
빈틈을 노리는 날카로움과 모든 것을 산산이 부셔버릴 것 같은 노도의 검결
속에 무언가 사색적인 깊이를 담은 선(線)이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최상의
이인연수합격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구나!’
남궁선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움직임을 쫓는 동안 박옹은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생에 이러한 대전을 몇 번이나 맞이하겠는가. 그러나
부탁이 있기에 한발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저런 녀석의 성격상 부탁을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을 테고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데서 적잖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육인이 만들어내는 검의 궤적들은 풀릴 길 없는 미로처럼 얽혀있었는데 전
혀 다른 양상의 전투가 그들의 앞쪽에서 전개되었다.
홍염은 물론 육천염의 수좌이자 이들 가운데에서 무공이 가장 높았다. 그가
참여한 쪽은 의외로 일호와 함께 장추삼을 상대하는 쪽이었는데 상대적으
로 병장기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선적인 제압대상으로 고려했음은 물론
이고 동요된 동료를 지켜준다는 의미도 있었으리라.
화르릉-
그가 검에 진기를 주입하자 검극에서 탁탁거리며 불꽃이 피어올라 서로 충
돌하며 콩 볶는 소리가 들렸다. 일호도 검이 빨갛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홍
염처럼 불꽃이 피어오르지는 않았다. 내공력의 차이에서 기인하리라.
“네가 세우삼십육도의 절반을 괴멸시켰다고 들었다. 혼자서 그들 열여덟을
상대할 무인이 현 무림에 있다는 것이 흥미롭구나. 우리의 홍왕검(紅王劒)
도 한번 그렇게 깨 보거라.”
절대로 깨지지 않을 자부심이 깃든 그의 말에 적잖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
다. 우선 세우삼십육도를 보낸 쪽이 무룡숙이란 걸 밝힌 것이고 그런 기밀
을 서슴없이 뱉았다는 건 이들 모두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니 살
인 멸구를 하겠다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내비쳤다 하겠다.
우드득.
장추삼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목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이른바 전
투준비 정도로 해석해야 할까?
뭐라 한마디 말로 이들의 심기를 건드릴 법도 한데 그의 입은 아교라도 발
라놓은 양 열리지 않았다. 어디에도 쾌활하고 생기 넘치던 장추삼의 모습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든 걸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 내려놓는 걸 좋아하기에 그의 생각
과 배치되는 모습이나 행동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우스운 것은 ‘
이래야한다’ 는 규정을 만든 것이 본인이면서도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발
생하는 부차적 사건이나 느낌을 탓하고는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는 것이다.
홍염과 일호는 폭발 직전의 화산과도 같은 장추삼의 모습에서 그들이 받아
들인 정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모든 생각은 싸움 뒤로
미뤄도 늦지 않을 테고 그들에게 승리의 확신이 있었기에 우선적인 문제의
처리부터 신경 쓰기로 했다.
스르륵.
무릎을 굽히지 않는 독특한 보법으로 미끄러지듯 쇄도하며 둘의 검이 허공
을 갈랐다. 유연한 가운데에서 충분히 빠른 검법. 그 선은 마치 미꾸라지가
유영하는 모양처럼 빠르면서도 매끄러웠기에 강철이 이러한 변화를 보인다
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파바박.
발을 구르면 언제나 나타나는 든든한 장추삼의 분신들. 천고의 보법 산무영
이 펼쳐지며 기형적인 선을 그리는 검날의 홍수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 기
경한 신법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경악어린 눈길로 다
가오는 네 명의 그를 바라보았으나 손이 쉬지는 않았다.
화끈!
검적(劍跡)이 아로 새겨지는 자리에서 불에 델 듯한 열기가 발산되었다. 그
기운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장추삼의 보법은 당연히 둔화되었고
정신적으로 적잖게 당황도 하였다.
통상의 검강 같은 강기공(剛氣功)은 기를 유형화하여 상대와의 거리나 사용
하는 무기의 재질을 무시한 공격을 가한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검강과 엄연히 다른 성질의 공격이었다. 무형의 기운 그대로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는 방법으로 거의 최상의 공격법은 자연의 성질을 그
대로 빌어 오는 것이겠고 그 기운들 가운데서 동물체에게 가장 직접적인 타
격을 입히는 요소라면 빙(氷)과 화(火)이리라.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한기와 열기는 표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고 그만한 타격을 몸에 받는 건 당연한 결과다.
‘으읔!’
오기로 버텨내보려 했지만 신체의 정직한 반응을 어찌하지는 못하여 주춤하
는 사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온 검기가 장추삼의 몸을 난자
하려는 듯 짓쳐왔다.
으드득.
이를 갈아 부치며 가까스로 신형을 이동시켰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검기
에 그의 양 어께가 갈라지며 핏물이 솟아올랐다. 그냥 갈라진 정도가 아니
라 화기(火氣)에 의한 상처이기에 불에 덴 듯 뜨거웠고 쓰라려서 신경을 쓰
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정신적으로 위축되었다. 피를 보는 것은 겁나지 않
았지만 처음 당해보는 자연기공(自然氣功)은 깡으로 살아가는 장추삼에게도
적잖은 당혹이었다.
본능적으로 화기를 피하려다보니 직접적인 충돌을 주저하게 되고, 몸을 사
리다 보면 과감성이 떨어진다. 직진충돌형(直進衝突形)의 장추삼에게 치명
적인 장애요소로 작용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고수들이 상대의 이러한 변화를 놓칠 리가 없다. 육천염의 가공할 위력은
검세의 절묘함도 작용하지만 화기에 의한 적의 무력화도 큰 몫을 차지했었다.
화르륵-
홍염의 검에서 한층 더 붉은빛의 기운이 어리며 어정쩡하게 몸을 놀리는 그
에게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차, 하여 급하게 신형을 틀어보려 해도 길
목을 지키던 일호의 공세가 그의 자유를 박탈하여 진퇴양난의 상태로 장추
삼을 몰아갔다.
이대로라면 힘 한번 못써보고 검날에 목숨을 맡겨야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산무영은 평소의 그것과는 눈에 띄게 차이를 보일만큼 둔했으며 추뢰보같
은 돌진보법은 전개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핏핏!
다시 팔뚝에서 몇 군데의 검상이 새겨지고 주춤 물러서는 그에게 불꽃의 기
운을 담은 공격이 이어졌다. 어차피 모든 승부는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
져야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것을 비겁하다고 욕한다면 전술의 기
본도 모르는 멍청이란 취급을 받아도 할말이 없을 터.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듯 둘의 공세는 한층 요란해졌고 우왕좌왕하며 연
신 비틀거리는 장추삼의 틈은 더없이 커보였다.
“타앗!”
한소리 기합성과 함께 일호가 크게 검을 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조용하게
상대를 옥죄던 때와 달리 자신감어린 음성과 검로였고 입가엔 비웃음도 언
뜻 내비쳤다.
‘보법 몇 수에 재간이 있더라도 애송이는 애송이일 뿐. 우리를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다.’
갑자기 웅혼해진 검세. 그야말로 강호초출의 애송이들이라면 허둥거릴 만큼
장중한 기세였고, 그 속에 담긴 힘도 추측불가일 만큼 기운이 넘쳤다. 이
런 기세를 정면으로 맞이한다면 철퇴에 강타당한 유리처럼 산산이 깨질 것
이다. 그리고 진퇴양난의 장추삼은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두 팔을 내리고 멍하니 서있는 그에게 광풍처럼 짓쳐드는 검세는 더없이 잔
인했다. 장추삼이 가만히 있었다면 말이다.
팍!
꺼지듯 그의 신형이 움직이며 일호가 접근한 그만큼만 움직였다. 또한 눈앞
의 변화와 같은 수의 신형이 솟아났다. 거의 싸움을 포기한 사람마냥 방임
상태로 보였던 장추삼 이였기에 돌발적인 반응은 그만큼 갑작스러웠다.
‘이익!’
잡아놓은 물고기를 요리하려 도마에 올려놓고 칼을 드는 순간 눈높이까지
뛰어올라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기는 단지 뛰어오르지
만 않았다.
치지직.
옷깃 타는 소리가 들리며 모든 걸 도외시한 사람처럼 순식간에 일호의 면전
에 접근한 그가 두개의 검상을 더 입었으나 그 대가로 일호와의 타격전을
벌일 수 있는 거리를 얻었다. 성인이 팔을 벌려 닿는 거리에서 주먹 하나가
더 들어가는 위치. 맨손으로 싸우기에 최적이 아니겠는가!
파바방!
오른팔을 위협하는 검세를 피하며 세 번의 발길질이 일호의 상, 중. 하단을
나누어 노리며 날아갔다. 상단은 그의 턱을 노리는 것 같았으며 중단은 검
을 쥔 손목을, 그리고 하단은 물론 단전 부위였다. 이렇게 세 방향을 동시
에 공격당하면 수비하는 측에서 매우 곤혹스러운 건 당연했다.
‘헉!’
처음 보는 신묘한 각법에 당황하여 어떻게든 검을 쳐내려 했으나 거리가 너
무 가까웠고 물러날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단전을 가격당한다면 그야말
로 재기불능의 타격을 받게 되기에 순간적으로 허리가 뒤로 빠졌고 그것은
검세의 둔화로 이어졌다.
그는, 아니 장내의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이 각법은 한때 천하를 울렸던 사
내가 사용했던 것이고 무림에서 그리 큰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는 어떤 표국
의 우두머리가 그의 조카와도 같은 청년을 위해 단 한번 시연해 주었었다.
삼음추란 이름으로...
피슛!
틈을 놓칠 장추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세 번의 발길질을 한 오른발
을 허공에 둔 그대로 왼발을 차올렸다.
통상의 이기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양발차기!
한번에 세 방을 날리고 다시 들어간 그의 발차기는 허리를 뒤로 뺀 수세의
일호가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빡!
어차피 노린 부위는 그의 손목이었다. 강력한 왼발은 움츠러든 일호의 왼
손목에 정확히 꽂혔고 그곳은 인체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맥(脈)이 통과하
는 위치인지라 의사와는 무관하게 칼을 움켜쥔 아귀가 풀려버렸다.
쨍그렁~
그리고 제차 날아든 그의 왼발은 일호의 명치를 즈려 밟듯 스치며 반발을
받은 상태에서 둥실 몸을 띠운 장추삼이 순식간에 홍염에게 쇄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연계기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졌기에 제아무리 홍
염이라도 어떤 도움을 주지 못했고 한 번의 보법과 두 번의 발길질로 동료
를 무력화시킨 청년의 진격을 대비해야만 했다.
화르릉.
그러나 일호와 홍염은 격이 다른 고수였고 칼질 한 번으로 장추삼의 접근을
순간적으로 저지시킴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시켰다.
빙글.
너무나 엄청난 열기에 당황한 듯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지면에 착
지한 장추삼이 퉁기듯 다시 한번 홍염에게 다가갔으나 예상하고 있었던 사
람처럼 뒤로 죽 물러서며 그의 칼이 소름끼치는 호선을 그렸다. 마치 불의
길로 이루어진 거미줄을 허공에 쳐 놓으려는 인면지주(人面之蛛)처럼 불어
난 칼은 부지런히도 움직였기에 그 열기가 천지를 뒤덮었다.
‘훅!’
감내하려 마음을 먹었지만 살인적인 열기에 숨이 막혀오는 것은 어쩔 도리
가 없었다. 열기의 대처방법이 마땅치 않았기에 몸을 던져서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고 크고
작은 검상은 명치를 부여잡고 기절해있는 일호의 모습으로 보상받았다.
그러나...
‘이건 도대체 빈틈이 없으니!’
그렇지만 넋놓고 있다간 아까와 똑같은 상황의 재현일 뿐이란 걸 잘 알기에
어떻게든 접근의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검적이 그려놓은 무형의 그물은 너
무도 완고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확산일로의 열기가 전체를 장악할 것이고,
그야말로 거미줄에 걸려 헛된 몸부림 속에 스러지는 나비처럼 버둥거리다
가 싸움은 종결될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그것이 모험이든 뭐든 말이다!
꾸욱.
두 주먹을 소리 나도록 움켜쥔 장추삼이 몸을 날렸다.
뜨거운 열기. 소름끼치도록 유연한 검적의 변화!
그렇지만 완벽은 없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하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홍염의 검세는 전설의 검막(劍?)처럼 촘촘하고도 빈틈이 없어보였지만 장추
삼은 한곳을 발견하였고 그의 팔은 맹렬한 주먹질을 시작했다.
파바방!
유성우임이 분명할진데 소리를 제압할 만큼 빠르지 않았다. 공기 가르는 소
리조차 선명하게 그의 권력은 뚜렷한 실체로 - 그렇다고 느리다는 것이 아
니다. 매우 빨랐지만 유성우같은 초쾌의 그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 한곳에
집중되었다. 힘이 빠졌기 때문일까?
그런데 유성우보다 느린 권력이 묘하게도 홍염의 열기를 반대편으로 밀어내
는 것 아닌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보려 생각할 사이도 없이 벌어
진 틈바구니로 쾌속한 무엇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큭!”
가슴을 한대 얻어맞은 홍염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억눌린 신음성을 토했
다. [16368] [연재] 삼류무사-128
그렇지만 충격과 동시에 최단거리로 선을 몇 개 그어 가장 완벽한 수비식으
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잊지 않는 기민함을 보였기에 장추삼도 무조건적
인 돌격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세의 고삐를 늦춘다면 다시 아까의 반
복이 될 것이다.
그가 권력을 느리게 발출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무언가를 쳐내는 방법
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끊어 치는 것과 밀어 치는 것.
끊어 친다 함은 대상을 가격할 때 타격점에 이른 순간 빠르게 힘의 근원을
거두어서 상대에게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는 방법이다. 가격의 근본적인 파
괴력을 내치는 힘의 근원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질이나 쳐내는 속도, 즉
그 빠르기에서 빌려오기에 알기 쉬운 공격법이다.
그에 반해 밀어 친다는 것은 대상을 가격하는 게 주목적이 아니라 밀어내거
나 타격점에서 어떠한 힘을 가하여 - 주로 침투경 계열의 암경 - 안으로부
터 상해를 불러오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어 치는 것과 다르게 근본
적인 파괴력을 병장기라든가 기타의 근원적인 물리력에 주안점을 두지 않을
뿐더러 빠를 필요도 없다.
장추삼이 유성우를 느리게 전개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유성우의
기본 속성상 제대로 된 공격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공기를 뚫을 정도의 속
도를 요하는 것이고 그 엄청난 빠르기에 상대방은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
고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공격은 장애가 없는 경우에 사용된다고 하
겠고 불의 장막과도 같은 그물을 뚫었다간 기존의 열기와 공기와의 마찰열
이 더해져서 그의 팔은 노릇노릇하게 익을지도 모른다.
말을 바꾸어 공기를 찢는다고 함은 최대한 빠르게 공기를 밀어내다가 그 벽
을 관통한다는 의미이니 뚫기 직전까지 대기를 밀어부치면 어떤 수단보다
유효하게 공기와 그에 함유된 열기를 밀어내게 되고 억지로 밀린 열기들은
그때까지 통제되던 힘의 기둥에서 벗어나기에 균일한 모양새를 잃은 것이다
. 그 틈으로 평상시의 유성우를 꽂아 넣자 미쳐 방비를 하지 못했던 홍염의
가슴에 한방이 격중되었지만 평상시의 위력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비
록 한걸음을 물러섰지만 수비식으로 자신을 보호할 여유는 찾았다.
꿈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양 팔의 근육이 갑자기 저려오는 통에 장추삼의 윗니
가 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도를 급작스레 바꾸어 전개한 유성우였기
에 인간의 신체구조를 뛰어넘는 전능지체로 몸을 단련한 그였건만 완전히
충격을 해소하지는 못했으리라. 동굴출도 후에 이러한 근육통증은 처음이었
다. 그렇지만 이것저것 돌볼 개재가 아니기에 팔의 이상은 우선 접어두었다.
스스슥.
전면으로 향한 검세가 부담스러웠을까?
장추삼은 본능처럼 홍염의 옆으로 파고들려 시도했다. 주먹을 앞으로 뻗는
것과 옆으로 뻗는 것은 가할 수 있는 힘의 차이 뿐 아니라 그 자연스러움에
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옆으로 향하는 팔의 움직임이 갖는 성
격 - 즉 두 번의 움직임이 요구되며, 일상생활에서 별로 필요치 않기에 자
주 사용하지 않아서 어딘가 낯설다는 특징의 - 때문에 팔이 매개수단으로
작용하는 검식 역시 같은 성질을 지닌다고 하겠다.
‘이런!’
깡패든 무인이든 싸움을 할줄 안다는 사람이라면 그가 좋아하는 위치가 반
드시 있는 법이다. 그래서 위치를 선점한 자가 그 싸움을 자신의 편으로 이
끄는 것이고 흐름을 타서 지는 대결은 없다. 홍염도 상대를 측면에 두고 싸
우는 기벽(奇癖)같은 건 없기에 몸을 틀어 그와 마주보고 싶었지만 반응은
한 발씩 장추삼이 빨랐다. 단지 촌각의 위치를 먼저 잡았을 뿐이지만 발생
되는 효과는 그저 위치라는 장소적 개념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에서 그 개념이 차지하는 본연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작은 부분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듯 자리라는 부수적인 싸움의 요소를
잃은 홍염은 전투와 무관하게 다급해졌고 그것은 그대로 검식의 허점으로
이어졌으나 그럴수록 집착은 더해만 갔다.
빙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아예 자리싸움이 전부인 양 고집스럽게 측면만을 파
고드는 장추삼은 그야말로 찰거머리와도 같았다. 보법은 모든 무공의 근간
이지만 그것만으로 공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에 수반되는 각법이나 여
하한의 상체운동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공격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근본이기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만약 보법만으로 ‘하나’를 이루는 존재가 있다면?
‘이놈!’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철저히 상대를 무시하듯 공격은 생각하지 않고 자
리만을 차지하려는 장추삼이 한없이 얄미워서 홍염이 무리하게 몸을 틀며
전력으로 홍왕도의 절초인 만추낙조(晩秋落照)를 펼쳤다.
깊은 가을, 지는 햇살마저도 붉어 천지를 뒤덮은 낙엽과 함께 온 누리가 타
오르도다...
화르르륵!
비길 데 없이 붉게 타오르는 열기! 이것이 과연 인간의 몸에서 발산된 내공
의 산물이란 말인가!
천지는 홍염이 발산한 붉은 화염의 통제 아래 붉은색이 아닌 무엇도 용납하
지 못할 기세로 타들어갔고 그 가운데 장추삼이 놓여있었다. 너무 강렬한
불꽃에 홀로 남겨진 나비처럼 말이다.
이 기경할 판도 변화에 검을 마주하던 육인도, 관전하며 혹시라도 몰려올
무룡숙의 지원세력을 견제하던 세 사람도 입을 딱 벌렸다.
현 무림의 열손가락에 드는 고수들조차 놀라게 한 미친 불꽃. 이것이 백 년
전에 강호를 떨쳐 울렸던 무림십좌중 하나의 독문절기인 광룡무(狂龍舞)의
진화형임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당시에도 거의 무적을 구가했다던
검초였건만 백년의 세월은 통제 불능의 난화(亂火)를 무섭도록 은근한 심화
(深火)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리고...
깊디깊은 화염의 지저(地底)속에 내던져져 있던 나비가 미약한 날개짓을 시
작했다. 불꽃의 기세가 하도 강렬하여 티도 나지 않았지만 작은 몸짓은 어
느새 구체적인 실체가 되어갔다.
파파팍!
둥실 허공으로 몸을 차올린 그가 몸을 돌리며 아까처럼 느린 유성우를 전개
했다. 유성우? 그런데 이건 유성우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은 쫙 펴져 있었으니까.
우우웅.
미약하던 바람이 조금씩 강대해지고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힐 무렵 어느새 열
기는 중앙에서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손바람으로 내공의 유형화를 밀어
내는 것. 말로는 쉽지만 지독한 열기 사이에서 손 한번 뻗기도 어려운 판국
에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손을 내치는 행위가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 증거
로 질기디 질긴 묵예갑이 푸석푸석하게 타 들어가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으아아~”
밀리는 열기에 분노했음인가. 홍염이 다시 한번 검을 떨쳐내려 했지만 또다
시 장추삼에게 측면을 내주고 말았고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안하
고 내지르는 그이 발차기를 막아내야만 했다.
파바방!
처음 사용하는 것이지만 삼음추는 그야말로 천고의 각법임에 틀림없었다.
웬만한 발길질 따위야 보법 한번, 검식 한번에 정리할 텐데 상, 중. 하로
동시에 날아드는 세 가지 힘은 충분히 홍염을 괴롭혔으며 수비식으로 가까
스로 버텨내는 게 고작일만큼 위력적이었다.
어쨌든 측면에 상대를 두고 싸울 수는 없는 터. 제차 검식을 펼치며 돌아서
는 홍염의 눈앞에 무언가가 불쑥 솟아나듯 나타났다.
‘헉!’
워낙에 돌발적인 출몰이었고 수비식에서 공세로의 전환이라 온전한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다소 어정쩡한 팔의 움직임. 그리고 튀어나온 장추삼은
아주 빠르게 일보(一步)를 딛어 순간적으로 홍염의 팔을 지나쳤다.
단 한 발자국의 접근!
칼을 든 오른팔을 스치듯 지나쳐 왼쪽 어깨가 홍염의 가슴을 그대로 때렸고
충격에 의해 뒤로 물러서자 그의 오른팔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퍼퍽!
왼팔을 들어 겨우겨우 유성우의 홍수를 감내하며 또 한 발자국 물러서는 홍
염에게 장추삼의 발이 날아든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리라. 각법을 전개하
기에 최적의 거리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두 번의 충격으로 뒤로 물러서는
상태에서 날아든 삼음추는 그야말로 공포와도 같았다.
퍽!
검식의 이동조차 허용하지 않고 날아든 장추삼의 발은 홍염의 턱을 여지없
이 날렸고 한 발을 더 붙으며 무릎으로 그의 명치를 내지르자 상황은 종료
되었다.
무섭도록 빠르고 정확한 연계타격! 짜놓은 것 같은 전개였고 그 결과가 홍
염의 패퇴였다. 허물어지듯 쓰러지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털썩.
크지 않은 소리. 그러나 그것은 한 시대의 공포가 종말을 고하는 의미였기
에 어떠한 비명보다도 소름끼치는 메아리로 장내에 남았다.
“후욱! 후욱!”
격전의 휴유증은 이리저리 찢긴 장추삼의 몰골에서도 잘 나타났다. 이리저
리 베인 검상들과 거친 숨소리, 그리고 팔 전체를 타고 흐르는 아련한 통증
.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아직 그는 묻지 못했다.
아수라같은 몰골의 그가 뒤돌아서 하운과 북궁단야를 일별하고 걸음을 옮겼
다. 그들도 말없이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뒤를 부탁하오.
...... 물론!
***
언제나 정문을 지나왔지만 이번엔 담을 넘었다. 곳곳에 켜져 있는 화섭자들
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숙에는 현재 육천염 이외에 믿을만한
고수가 없는 실정이다. 어차피 숙의 활용도 자체가 회에 필요한 인재양성소
였고 이곳은 주목을 받을 만큼의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너무 과신한 탓 일까!
보고서대로 라면 단리헤라는 계집아이의 오라비가 실종된 것 때문에 이들이
하남땅을 밟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비록 숙에 대한 의심을 가졌더라도
일단 여러 경로를 통해 사건을 취합했어야 했고 좀 더 신중한 모습을 보여
야 옳다. 박옹은 몰라도 남궁선유라는 존재는 그저 무림고수의 입장이 아니
라 강호에서 인정받는 세가의 대표자적인 처지이기에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 단 한번의 실수로 몰락의 길을 무림 세가가 한둘이었겠는가. 그런
데 그가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냥 의심하면서 숙의 주위를 맴도는 정도
였다면 좀 더 우아한 방법으로 이들의 관심을 돌렸을 것이다.
‘야간기습 이라니!’
이건 확실한 무엇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이란 없다고들 하는가.
표홀히 담을 넘는 기학의 모습은 언제 병약했나 싶을 만큼 유려했기에 작은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적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아군마저 속여야 함은
병법의 기본. 침입자들의 면면을 보고 싶은, 마주 싸우고픈 마음도 있었지
만 앞뒤 안 가리고 일을 벌일 만큼 바보는 아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줌에 처리해도 될 사안이 있는 법이다.
스르륵.
유령처럼 여유롭고도 은밀하게 신형을 움직인 기학이 여러 전각을 헤치고
이른 곳은 야산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작은 건물이었다. 일견 허름해 보이
는 이곳이 알고 보면 무룡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운조의 집무실이란
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여기까지 기습자들이 이른 것 같
진 않았기에 그가 서둘러 운조의 방으로 들어섰다.
“헉!”
이것저것 문서들을 챙기던 비염극이 깜짝 놀라 침입자를 바라보았으나 그가
기학인걸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품에 안고있던
두루마리들을 다 떨어트렸겠는가.
“여기까지 어쩐 일로...”
“바보 같은 질문은 관두세. 그래, 막지 못할 것 같은가?”
비염극은 특유의 염소수염을 한번 당기고는 눈을 굴렸다. 그가 알고 있던
기학과 지금의 모습이 도저히 겹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천고의 기재
였는지는 몰라도 기학은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함은 물론 일
반인 보다도 병약한 신세였다. 병든 닭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서있는 남자는 어디를 보아도 병 같은 거랑 연결짓는다는 게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한마디 뱉는 말에도 육중한 무게가 깔려 있으며 두 눈
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신광은 마주 보기 조차 버겁다. 절정고수까지는
아니어도 능히 무림에서 행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거늘. 이러한
기세는 운조가 일으킬 때나 고개를 조아리며 보았던 터였다.
‘일파종사의 기세!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의 의아함을 깨달았을까? 잔잔히 웃으며 비염극의 어깨를 두드린 기학이
말을 재촉했다. 진원진기 폭발의 첫 번째 문제가 생명에의 단축이라면 그
두 번째 치명적인 약점은 언제 힘이 다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내공이라 함은 체계적인 수련법과 도인법(導引法), 그리고
활용법이 있고 자신이 쌓아놓은 수위가 가늠 가능하다. 그러기에 수발이 가
능하고 보충이나 기타의 조절을 하기 용이하지만 진원진기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얼마만큼 몸속에 녹아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분출만 가능할 뿐 거두
어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한 번 사용으로 끝이다. 그 이후란 건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죽음으로의 항해...
“시간이 없어. 그렇게 멍청히 있지 말고 상황을 말해주게. 육천염으로도
막지 못한다는 건가?”
“그것이...”
비염극의 설명을 들으며 기학은 멍청히 고개를 한번 갸웃거렸다. 애써 사형
들은 그를 배제시켰지만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남궁선유들의 전력을 대충은
알고 있었고, 주시 대상으로 하운과 북궁단야라는 청년들을 꼽았다. 그런
데...
“홍염이 장추삼이라는 녀석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일호와 함께?”
“분명한 사실 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그자는 맨손이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믿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문서들을 챙기는 것도 다 그자 때문
입니다.”
여섯 명 이외에 조력자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비령대를
데려오는 건데. 그의 판단으로는 육천염과 일행의 전력을 백중, 또는 그들
의 약간 우세로 보았고 거기에 자신이 가세한다면 무게추가 기운다는 계산
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틀렸다. 육천염의 최강이라는 홍염이 숨어있던 변수
에게 패하다니.
‘판단이란 건 이렇게 허무하구나. 결과와 무관 아닌가. 하기야 이런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비염극은 부지런히 문서를 챙겼다. 크게 중요하
다 싶은 것은 따로 보관하고 비밀 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의 눈에 띄는 게 꺼
림한 것들은 소각을 하는 일방 눈을 굴리며 기학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무
리 같은 편이라고는 해도 숙의 식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
그 모습이 허탈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방을 나선 기학이 둥실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비염극을 탓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것이고 기학과 두 어 번 대면한 게 전부였다. 그들의 전력에서 완
전히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기학의 돌연한 등장이 의외로울지도 모
른다. 그래도 왠지 씁쓸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었구나, 나는.’
별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사연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수많
은 녀석들이 제각기 입을 연다면 들어주기 조차 벅차서 귀를 막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사연은 어디에 있을까?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지만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다른 이야기 같았고 그는 방관자처럼, 혹은
불청객처럼 그렇게 말없이 바라볼 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생각으로 이
난장(亂場)을 받아들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운조사형은 비록 다감한 편이나 그가 통제하는 숙에 관한한 어떠한 얘기도
해주지 않았다. 섭섭했지만 그의 성격을 익히 아는지라 별달리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외면하는 편을 택했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무룡숙이 교육기
관을 빙자한 무인 양성소라는 정도였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철저히 운
조의 소관이었다. 치밀하고 계산적인 운조였기에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고
그저 믿고 맡겼던 것이다.
기학이라고 눈치가 없겠는가. 아마도 숙의 성격상 선발된 인원들 가운데서
낙오자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비밀단체란 건 이래서 불편
하다. 뭘 해도 걸리고 아무리 교묘하게 숨겨도 마음이 불안하다. 태양을 그
리워해도 음지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녹아내리는 고드름처럼 위태롭게 강
호라는 처마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탈락자들은 어느 정도 숙의 비밀을
알 것이고 몇 백번을 약속한다고 하여도 사람의 입은 의지를 배신하는 경우
가 허다하다. 같이 가지 않는 이상 영원한 이별은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그래도...
‘역시 힘든 일이다.’
그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 나왔다. 정당한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수
단이라도 허용되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파생된 무엇이 또 다른 악으로 다
가와서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을까? 허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목
표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고 스러질 테니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한없이 외로워지는 마음에 기학은 두 눈을 감았다.
‘처음을 생각하는 거야. 한 점의 의심도 없었던 옛날을 말이야.’
그때는 정말 견고했었다. 어렵고 힘든, 일반론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목
표를 잡았기에 의심이나 고뇌는 그야말로 사치였다. 죽을힘을 다해도 어림
도 없어 보였던 그 옛날의 어느 맹서.
‘벌써 배가 불러진 건가.’
의심이란 유리에 그어진 첫 번째 균열과도 같아서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번진다. 한 점을 보며 나라가야 하는 사람들 이라면 회의(懷疑)란
단어와 함께 가장 멀리해야할 용어이리라. 또한 가장 자주 찾아오는 상념이
기도 하다.
왠지 처량해져서 아무 바위에나 주저앉은 기학에게 그가 보인 건 무척 희극
적이었다. 도대체 저 친구가 여기서 왜 서성이고 있나?
“어?”
일단 놀랬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음?”
상대도 마주 놀라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형장도 무룡숙 소속이었소?”
약속이라도 했을까? 둘은 똑같은 질문을 사로에게 했다. 무룡숙에는 대외적
으로 보이기 위한 교육생들이 있다. 그야말로 허접한 무공을 가르쳐주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무공보다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는데 더 큰 가치
를 두고 이곳에 머문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심사? 그건 어디까지나 간세를
가려내기 위한 요식행위다. 정말 할일 없고 뒷 배경 없는 이들을 받아들여
그 가운데에서 빼어난 자질을 보이는 몇몇을 포섭하고 나머지들은 저렇게
방임해 둔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운영방법이다.
‘이 친구 정도의 몸이라면 당연히 운사형의 눈에 들었을 터인데, 아직 신
입이라서 발탁되지 않은 건가?’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기학의 얼굴에 사심 없는 미소가 어렸다.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도 있소. 아무튼 사람 인연
이라는 게 묘하구려. 이런 곳에서 형장을 만나게 되고 말이오.”
그렇구나, 하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병약한 이 친구는 무룡숙의 식객이리라. 사실 이곳만큼 요양에 좋은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일하지 않아도 때 되면 밥 준다지, 뒤가 산이라 공기 좋지
. 더럽고 흉악한 음모가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면 무림의 명소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꿈틀.
기학의 눈썹이 움직였다. 반가워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눈앞의 청
년은 몸이 만신창이가 아닌가. 여기저기 베이고 찢긴 상처, 피곤에 지친 얼
굴은 꽤나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음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6566] [연재] 삼류무사-129
“그 상처... 어디서...”
벌떡 일어서며 놀라는 기학의 기세에 장추삼도 움찔했다. 주점에서 보았던
그가 아니지 않은가. 무언가 사람을 자연스레 포용하는, 그래서 알게 모르
게 만인을 압도하는 힘이 전신에서 왈칵 발산되었다. 이 사람이 과연 술 한
잔을 털어 넣지 못하고 빙그레 미소 짓던 어제의 남자란 말인가. 그리고
두 눈에 맺힌 경악과 당혹, 어떤 염려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
돌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뭘 그리 놀라요. 그냥 날파리들이 몇 대 문 정도라오.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안 좋네요. 그럼 이만!”
하고 돌아서는 장추삼을 기학이 조용한 어조로 불렀다. 그렇다. 심퉁스러운
친구의 안색은 전에 없이 딱딱했으며 온몸에의 상처는 흔치 않은 싸움의
결과다. 날파리? 은유적인 비교라고 한다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세상은 왜 이럴까? 왜 좋은 인연조차도 한순간에 악연으로 바꾸어 놓으려
하는가.
“잠깐만...”
“음?”
그 침중한 어조에 장추삼이 돌아섰다. 무시하기엔 너무 짙고 슬픈 울림이라
일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아직까지는 돌아가는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순수한 의문으로 그를 마주보는 청년을 마주 대하
기 어려워서 기학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이건... 너무 가혹하다.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하나밖에 없는 인
연조차 비틀어 놓는가! 꼭 이래야만 하는 건가!’
주화입마, 상승의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적이라는 이것이 여러 사형
제를 비껴가서 그에게만 내렸을 때도 액땜이라 생각하고 애써 웃음 지었었다.
나 하나로 이런 일이 없기를... 내 몫을 사형제들이 해주면 돼...
아쉬운 건 그들에게 짐이 되어 보살핌 받는다는 사실. 돕고 싶어도 따르지
않는 몸을 탓하며 한탄했지만 결코 세상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
허나 지금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몇 만 명의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져도 닿지 않는 게 사람끼리 통하는 ‘감
’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이친구가 좋았다. 사람들을 기웃거리며 우스꽝스
러운 표정을 지을 때도, 뭔지 모르지만 열 받아서 궁시렁거릴 때도, 그리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사내가 풍기는 자유스러움이, 그 순수가
좋아서 언젠가 잊었던 맑은 미소로 화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여기 서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자신의 뒷말을 기다린다.
‘나에게는 이 정도의 행복도 용인되지 않는가.’
그냥 보낼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못 본 체 하는 거다, 늦게 도착
해서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종료되었다고 해도 뭐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
을 것이다.
그럴까? 그래도 될까? 그럼 그의 마음은 편할 수 있을까?
아직 한 번의 기회가 있다. 그래, 한 번은 하늘을 믿어보자.
“생각해보니 우리는 아직 통성명도 안했구려. 난 기학이라고 하오.”
일어서서 포권을 하는 그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결과를 알면서도 무조건적
으로 외면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눈 찢어진 청년에게도 전달되었나보다. 이
름 하나 묻자고 이렇게 뜸을 들였다면 무언가 어색하니까. 그런데 왜 이렇
게 이름에 집착할까? 자구(字句)를 풀어서 사주팔자라도 봐주려고?
기학의 포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추삼은 그의 눈에 어린 여러 상념들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었기에 하늘가 먼 곳 어디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
한 날이다. 오늘따라 이름 석자가 갖는 의미에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누구나 쉽고 편하게 부르는 호칭 정도로 여겨왔던 정도인데.
“아... 생각해보니 그렇구려.”
뜸을 들이려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말이 나오지 않아서 쓸데없는 소리
를 주절거린 거다. 이건 분명 웃기는 일이지만 제 이름 석자 입에 올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는 미처 몰랐다.
‘젠장 이네, 진짜.’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 머리를 벅벅 긁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말 못할까?
"장추삼 이라고 하오. 호북 양양에서 왔소이다.”
쿵!
“장... 추... 삼...”
기학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한자 한자 분리되어 스며 나왔다. 기이한 여운
으로 장내를 부유하던 세 마디의 음절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리며 둥실둥
실 떠다니는 비누방울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기에 장추삼의 마음은 몹시 무
거워졌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인가?’
기학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어렸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슬픈 예
감은 틀리는 적이 없다. 그에 비해 기대는 언제나 실망이란 이름 앞에서 꺾
이고 만다.
“기형의 몸 상태가 어쩐 일인지 썩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씨익 웃고 장추삼이 그의 앞을 지나치려 하는데 기학이 그를 다시 불러 세
웠다.
“장형은 무슨 일이 있어서 무룡숙에 온 거요?”
“음?”
왜 왔냐고? 우연히 온 거다. 그리고 필연적인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런데 이 사내는 왜 자꾸 그런 걸 물을까?
어디선가 돌풍이 밀려와 적막한 대지를 휘감고 돌자 잡초들의 서로의 몸을
탐하듯 부딪치며 흡사 비 오는 소리를 냈다. 주점에서 만났을 때와 지금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음인데 그들 사이에 놓은 이 거대한 간극은 어디서
온 것인가. 흔히들 얘기하는 운명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어이없지 않은가.
“이곳을 왜 왔느냐... 뭐 어쩌다 보니 왔소. 그리고...”
장추삼의 두 눈에서 귀화와도 같은 불꽃이 타올랐다. 저도 모르게 불끈 쥔
두 주먹은 금방이라도 어떤 대상을 향해 분출될지 모르는 적의를 담고 있었
기에 기학의 몸이 주춤 떨려왔다.
“아주 멋있는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되었지. 강호 전체를 뒤져봐도 나보다
극적인 혈육과의 해우를 한 사람은 없을 거야. 이런 기회를 제공한 무룡숙
의 관계자들이 너무 고마워서 피눈물을 다 흘렸다는 거 아니겠소? 나는 지
금 이 훌륭한 자리를 마련해준 그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 몸이 떨려온다오.
킥킥거리며 조소하듯 말을 잇던 장추삼이 꽉 쥔 오른손을 들어 엄지손가락
으로 콧등을 한 번 문질렀다.
“주체할 수 없으리만치...”
마지막 말이 얼마나 섬뜩했으면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완전히 관통
하는 기분을 느껴 슬퍼지는 기학이었지만 정신을 차렸다. 아까의 쾌활한 모
습이 사라진 데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니? 멋진 혈육과
의 해우... 이건 무언가가 있다. 지극히 우발적이면서도 사람이라면 참지
못할 만큼 슬픈 어떤 일이.
“그게 무슨 말이오?”
어떤 걱정이 가득담긴 기학의 표정에 장추삼은 그를 무룡숙과 관련지을 생
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번의 만남이지만 기학의 마음속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보았다고 스스로 판단해서일까? 이런 추악한 세계에 그를 대입시키는 건 장
추삼이 바라본 기학으로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었으니까. 마음이 급했지만
염려해준다고 판단했기에 장추삼은 되도록이면 짧고 간단하게, 그리고 감정
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동굴에서의 일을 회고했다. 아무리 자제하려
고 해도 격동의 그림자를 모두 가리지는 못했는지라 담담하려고 애를 써 봐
도 순간순간 말이 떨려왔기에 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
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통곡을 할 것 같았다.
“... 이제 내 말을 이해...?”
나직한 탄식과 함께 그가 말을 맺으며 기학을 바라보다가 의아한 얼굴이 되
었다. 같이 슬퍼해주는 건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표정은 너무 처절하지
않은가.
“어째 나보다 더 슬퍼하는 것 같구려.”
그래도 기학은 대답하지 못했다. 처연한 얼굴로 장추삼을 바라보다 한숨만
쉬는 게 고작이었을 뿐.
이때 집무전에서 문을 밀치며 한 사람이 머리를 내밀었다. 말할 것 없이 비
염극 이었는데 서류를 챙기는 와중에도 대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기학과
말을 나눈다고 함은 분명 우군이라는 얘기다.
내가 모르는 회의 무인이군, 하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바라보는 그는 곧 이
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학이 데려왔다면 그보다 높은 위치
에 있는 무인은 아니다. 위 서열들은 비염극도 모두 만나는 보았으니까 말
이다. 그런데 두 청년은 수평적인 관계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느낌으로 말이다.
“ ? ”
장추삼 역시 툭 튀어나오듯 고개를 내민 비염극의 행동이 의아스럽기는 마
찬가지였다. 한층 더 굳어지는 기학의 표정 역시. 이해가 안가는 건 입술에
아교라도 덕지덕지 바른 사람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아니, 입을
여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 어색한 공간의 가운데에 끼어있던 기학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원
하지는 않았지만 이건... 그의 몫이었다.
‘이제 더 이상 원망할 대상도 없구나.’
크게 심호흡을 한번하고 몇 번을 더 머뭇거리던 기학이 입을 떼었다.
***
육천염의 나머지 네 명은 어이가 없어서 들고 있는 검의 무게에 짓눌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도대체가 검이 박혀야 뭘 하든지 할 터인데 몸과 병장기
가 허공에서 따로 놀고 있으니 의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여기서 검이 박힌다 함은 사람의 살을 파고든다는 게 물론 아니다. 만약 그
렇다면 싸움은 끝날 테니. 무슨 말이냐 하면 검을 움직였을 때 느낌이 손에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
만 말이다.
“차아앗!”
답답한 마음의 발로인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기합성을 지르며 맹렬히 검을
떨쳐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두 명이 하나를 맡아 제압하려고 했거늘
하운과 북궁단야는 그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교묘하게 검로를 섞어서 각
자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하지 않는가.
‘이건 단점의 보완 정도가 아니라 장점의 극대화다. 둘의 나이라 봐야 많
이 쳐줘서 서른 남짓이거늘 이렇게 노련하게 싸우다니.’
먼저 쓰러진 홍염과 일호를 대신하여 싸움을 이끌고 있는 이호의 미간에 주
름이 잡혔다. 개전(開戰)후에 단 한번도 승기를 잡아보지 못했음은 물론 주
도권 자체도 두 청년이 쥐고 있었으니까.
스르릉.
뛰어오르던 하나도 하운의 유연한 검결에 방금 전의 기세 같은 건 어디에
두었는지 뒤로 물러서며 수비식으로 몸을 보호하기에 바빴다. 동료의 비세
를 보고 또 한명이 도움을 위한 측면 공격을 감행했지만 난데없이 쏟아지는
벼락의 검기.
쿠르르르.
기다렸다는 듯 북궁단야의 검이 둔중한 호선을 그리며 하운이 지나간 자리
를 효과적으로 메워주고도,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그 위력적인 기세는 흡사 땅이라도 파일 것만 같았기에 이호를 비
롯한 두 명이 더 달려들어 검로를 봉쇄해야 했고 달리던 말이 땅에 끌리는
흔적을 남기며 겨우 질주를 멈추는 모습으로 노도와도 같았던 검세가 사그
라들 무렵 한줄기 빛살처럼 유연한 기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 하
운이었다.
이런 식의 연속이니 뭐가 분리공격이고 뭐가 각개격파인가. 어떻게든 둘의
검로를 만나게 하지 않으려 기를 써 봐도 그들의 생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처럼 따로 놀다가도 합쳐지는 하운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만 있으니 네 명의 검수들은 맥이 다 풀릴 지경 이었다.
“젠장!”
원래 하운을 담당했던 사호가 폭갈을 터트리며 짜증을 낼만도 할 것이 그렇
다고 해서 이들의 공세가 거칠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지치기를 기
다리며 슬슬 하는 모양새. 그러다보니 이들은 평소에의 싸움법조차 잊어버
리고 있는 자신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싸움의 절반 이상은 심리가 좌우한다. 가진 힘의 일백 모두를 끄집어 내려
면 정신적인 안정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
감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대국을 넓게, 또 자신이 염두 한 바 대로 이끄는
것이다. 또한 고수라면 행하고 있던 불찰을 빨리 발견하여 수정하는 사람이
다.
이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한때의 추억에서나마 전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
던 인물답게 지금의 싸움이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것
을 알아채고 무조건적인 격돌이 상대방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뒤로 빠져!”)
빠른 전음으로 동료들을 일깨우는 한편 스스로도 검을 크게 떨쳐내어 거리
를 확보하고 뒤로 물러선 그가 지그시 하운들을 바라보았다.
무시했었다. 얕잡아 보았고 금방 끝낼 싸움이라 판단하여 아무런 대비도 없
이 무조건적으로 달려들었었다. 결과는 보이는 바와 같고. 그렇지만 이대로
끝낼 수야 없지 않은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육천염이 아니다!’
이호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그리도 그들에게도 한
수 정도는 남아있다. 한때의 무림을 놀라게했던 절기가 말이다.
화르릉.
네 명의 검신에서 홍염과 일호가 보였던 열기가 스믈스믈 피어올랐다. 여태
껏 보여주지 않았던 지옥의 합격기(合擊技)가 말이다.
그들의 기세가 전에 없이 강화됨을 느꼈음인지 하운도 검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까지는 네 명의 검수들에게서 합격다운 공격을 받아보지 못했었다. 그
렇다고 만만한 모양새도 아니라 틈을 노리며 그들의 균열을 유도했었거늘
갑자기 일변한 기세에 적잖이 당황하였다.
북궁단야는... 그저 희미하게 조소를 보냈다. 그들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걷지 못한 무의 길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는 정도는 알았지만 매일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적에게도 동료에게도...
네 명의 기세가 더없이 깊어질 무렵 치고나간 건 놀랍게도 하운이었다. 이
대로 두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상대방도 검
을 마주 쳐내었다.
휘르릉!
검식에서 기인한 파공성일진대 대기를 모조리 사르려는 화염처럼 네 가닥의
검기가 제각기 머리를 치켜들며 서로를 타고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우웃!’
달려 나가던 하운도 열기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만큼 이 합격은 무
서운 위력이 있었고 또한 효과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방위에 우선하는 것은 사방(四方)이다. 동, 서, 남, 북으
로 이루어진 네 개의 방위야말로 인간이 인지하고 움직이는 활동범위의 기
본이라고 하겠다. 이곳을 흡사 네 마리의 화룡이 차지하려는 것처럼, 한순
간에 뻗어나가는 검기가 장악하려 들었기에 뒤로 밀리는 하운을 대신하여
북궁단야가 강맹한 일초를 사선으로 비껴 그었으나 네 마리의 용은 거칠 것
없는 승천의 기세로 그의 사무귀일을 삼키며 내달았다. 이대로 방위를 내
어 준다면 앞으로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16663] [연재] 삼류무사-130
그러나 천고의 자질을 타고난 두 청년검수들은 일단의 공세에 당황보다 우
선적으로 해야할 일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네 마리의 용이 휴화산에서 돌연
뛰쳐나오듯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잠식해 들어오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
들이 내어준 부분은 극히 적고 싸움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이다.
“하앗!”
내리 그었던 검을 반대편부터 사선으로 치켜 올리자 그토록 견고했던 용의
검세가 어느 정도 둔화되는 감이 왔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사무귀일
의 변형형이고 북궁단야 역시 처음 시도해보는 변화이나 나름대로의 검로를
읽고 행하였기에 검식에 무리가 없었다. 무리는커녕 아래에서 위로 박차고
오르는 효과가 담겨있기에 힘은 들었으나 그만큼의 효과를 거두게 되어 마
냥마냥 거세져가던 상대의 공세는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번쩍!
이호의 눈에서 섬전과도 같은 빛이 토해졌다. 역시 이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지금 네 검수가 펼친 검식은 육망용섬(六網龍閃)이라 불리는 육천
염의 합격진 가운데 제 1초 마방용수(魔方龍首)를 두 명을 제외하고 펼친
것인데 비록 두개의 방위가 비워져 있다고는 하지만 네 사람 만으로도 그
위력은 놀라운 것이라 일반적인 고수들은 감히 받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
던 검식이었다.
‘그래, 이렇게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은 했었다. 과연 숙에서 신경을 쓸 만
큼의 모습을 보여주는 군.’
조소인지 미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웃음이 언뜻 입가에 스쳤다. 왜냐고 물
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반드시 이유가 따르지는 않
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비록 두 명
을 네 명이 합격하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대전은 무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일전이었고 후회는 없다.
사실 필승의 자신도 있다. 이제 그것을 보여줄 때가 왔다. 이호도 나머지
세 명의 검수들도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경직되는 마음을 다잡
으려 노력했다.
갈 길이 막힌 용의 머리가 힘을 잃고 그 기운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려는 형
국. 이때 그들의 검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급격히 진로를 바꾸었다. 제각기
나뉘어져 공간을 점하려던 힘이 역할 분담을 포기하고 둥지로 귀환하여 서
로의 몸을 비비며 지친 마음을 달래듯 고요한 기운이 천지를 감싸 안았다.
‘이건 뭐지?’
하운이 움찔하여 앞으로 나서려다 이해하기 어려운 안온속의 불쾌감에 주춤
발을 멈췄다. 안온속의 불쾌감... 말이 안 되는 감정이지만 어쨌든 느꼈고
때로는 이성의 판단보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스스로를 돕는
경우가 있다.
(“북궁형!)
다급한 전음으로 북궁단야의 돌격을 저지시키며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일념
으로 허공에 세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하운은 그가 그토록 되찾고자했던
화산의 검공 삼성조화를 무의식중에 개량시켜 펼쳐내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
했다.
쿵쿵쿵!
소리는 나지 않았다. 삼성조화의 기운은 분명 아무런 기척도 없이 떠올랐다
. 마치 달처럼 말이다. 그런데 육천염들에게는 어떤 굉음보다 요란하게 앞
을 가로막는 것 같아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따땅!
떠 올라있던 세 개의 원과 무형의 어떤 기운이 충돌하면서 마치 금속성 물
질들이 부딪쳤을 때 발생하는 마찰음이 대기를 찢어발길 것처럼 울려 퍼졌다.
육망용섬의 제 2초 천포장룡(天抱藏龍)은 이름 그대로 숨은 용이 하늘을 안
듯, 조용하면서도 은밀한 검세가 목표물의 지척에서 폭발하듯 발현되는 검
식이다. 장법으로 친다면 침투경 계열의 암경이라 하겠다. 검법으로 암경을
쳐낸 그들의 실력도 놀랍거니와 본능적으로 인식하여 막아낸 하운의 조예
역시 만만치 않은 경지일 것이다.
그래도 네 명의 기운을 혼자 감당해낸 하운이기에 비틀거리며 두 세 걸음
뒤로 물러서며 충격을 완화 해야만 했다. 만약 힘으로 상대하려 들었다면
더 큰 낭패를 보았을 터.
‘좋아!’
이호가 이를 악물며 크게 검을 떨쳐내자 나머지 셋도 방금 전과 다르게 큰
소리 기합성으로 화답을 했다. 이제 육망용섬의 최후 절초인 용명무극(龍鳴
無極)을 펼칠 때다. 여태까지는 용명무극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끼이이-
어디선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성 싶은 괴조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
는 처음에 하나였으나 곧 두개로 불어났나 싶었고 어느 사이 천지사방을 수
놓아 도대체 어디서 울려 퍼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햇갈릴 판이었다.
끼이이이-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듣기 싫은 불협화음이기에 처음 접해본 하운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었고 분명 발출되었을 검세건만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위험하다!’
박옹과 남궁선유가 동시에 느낄 만큼 기이한 성질의 검식. 여태까지는 사방
을 경계하느라 나서지 않았지만 이런 모양새라면 문제가 된다. 아무리 고절
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일천한 경험은 큰 화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팍!
발을 띠는 순간 하운의 전음이 꽂히듯 날아들었다.
(“잠깐만!”)
우뚝.
놀라운 일이지만 이 노고수들은 전음에 담긴 박력이 너무도 위압적이라 그
대로 굳어버렸다. 위험한 상황이라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그들의 발걸음
을 막을 만큼 하운의 목소리엔 절대적인 무엇이 담겨있었다.
‘ ! ’
‘ ! ’
두 노인은 그저 하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왠
지 서글픈 마음이 솟구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젊은 날의
그들이 일장대소와 함께 무림을 종횡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념의 뜰은 언
제나 열려있을 테니까.
괴이한 소리의 가운데서 한 발 앞으로 나선 하운이 두 팔을 벌렸다.
자, 내게 말해보라
그대들이 무엇을 토로하고 싶은지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 이렇게 슬피 울부짖는지
나는 비록 작고 미천하나 그대들의 통곡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
두려워말고... 말하라
그는 눈까지 감은 상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감(五感)을 철저히 무시했
다. 이런 절대암경을 감각으로 잡아낸다는 건 자살행위다. 느꼈을 때 이미
지척일 것이다.
끼이잉-
급박하게 들려오는 소음의 그물 속에 내던져진 하운의 모습은 누가보아도
위태로웠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불협화음 가운데서 낯선 소리 하나가 그의 귓전을 두드렸다.
...... 선이란 무엇인가!
하운의 입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 각자의 믿음일 것이다.
소리가 화답했다.
...... 그런가, 나도 나의 선을 지키리라!
선한 청년검수의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 나를 딛은 후에 생각할 일이지.
소리는 이제 지척에 이르렀다.
...... 널 부셔버리겠다!
하운의 몸이 한바퀴 빙글 돌았다.
“거기였는가!”
꽝!
텅 빈 허공에 칼질을 했는데 폭음이 들리며 하운이 퉁기듯 뒤로 물러섰다.
그곳은 결코 ‘허공’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고 무언가 위험하면서도 엄청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비록 하운이 천고의 깨달음을 가지고 이들
이 발출하였던 무형 잠력을 깨트렸다고는 하나 원체 강력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고 네 명의 기운을 혼자서 감당하였기에 적잖이 낭패를 본 것이다. 그
나마 네 개의 기운을 관통하는 틈을 찔렀기에 망정이지 무작정 부딪쳤다면
크게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한쪽이 받았으면 다른 편에도 여파가 감은 정한 이치이다. 네 명의 검수들
도 손목을 타고 흐르는, 아니 전신을 관통하는 충격에 비척거리며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을 기다렸을까? 북궁단야가 물러서는 하운을 보호하는 걸 잊지 않으
며 크게 검을 떨쳐냈다. 견고하게 쳐놓은 결계가 부서진 마당이었기에 그의
거검에 담긴 위력은 고스란히 네 명에게 쏟아져 내렸고 결과는 참혹했다.
쿠르르르-
“크헉!”
“컥!”
방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방비는커녕 제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판
국에서 날아든 무시무시한 그의 일검에 네 검수들은 돌풍에 휘말린 가랑잎
처럼 허공을 훌훌 날아 지면에 쳐 박혔다.
“괜찮소?”
다급하게 묻는 북궁단야를 보며 옅게 미소 짓는 하운의 모습은 모두에게 기
이한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북궁단야는 더욱 마음이 심란했다.
사실 육망용섬의 제 3초 용명무극이 발동되었을 때 그는 사무귀일 다음의
초식을 쓰려고 했다. 느낌으로도, 기세 면으로 보아도 이번에 날아드는 초
식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사무귀일로 맞상대한다면 당랑
거철(螳螂拒轍)의 결과를 초래할게 뻔했다.
문득 바라본 하운의 얼굴. 흡사 구도자와 같이 양팔을 내리고 눈을 감은 그
의 얼굴에서 어떤 소리를 읽었다면 북궁단야만의 착각이었을까?
...... 내가 막는다. 그것이 천둥일지라도!
그리고 천둥보다도 무서운 암경은 하운의 손에 간단히 - 사실 간단히는 아
니다. 초췌한 그의 얼굴에서 이번 일수의 교환이 얼마나 흉험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니까 - 와해되었기에 북궁단야의 검이 먹힌 것이다.
“내상은? 정말 괜찮은 거요?”
북궁단야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던 하운이 천
천히 앉았다. 실핏줄이 흐르는 입가를 보지 않더라도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심호흡을 한번 하고 걱정 어린 북궁단야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하
운이 쓸쓸하게 웃었다. 이게 정의다. 상대편은 피곤죽을 만들어도 동료의
터럭 하나가 상하는 것에 마음이 아픈 건 감정의 모순일까, 아니면 당연한
일일까.
“북궁형...”
“ ? ”
그의 물음에 지는 낙엽의 안타까움이 배어있어 북궁단야도 쪼그리고 앉았다.
“저들에게도 선(善)은 있나보오...”
“음?”
종잡기 어려운 말. 이 친구는 또 무엇을 느꼈단 말인가?
하운의 얼굴은 뭐라 형용키 어려운 표정으로 천천히 그만의 세계로 침전되
었다. 누구라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납득시킨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하운의 탄식은 더 힘이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대적인 소외감? 그럴지도...
***
“뇌옥이 있었군.”
기학의 낮은 독백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던 비염극은 곧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절박한 판국에 무슨 뇌옥 타령인가. 언제 남궁
선유의 패거리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거늘.
“그건 별로 중요하지...”
“다섯번째 옥에 갇혀있던 수인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예?”
“뇌옥 다섯번째 옥에 갇힌 수인 말이다. 눈을 파내고 한 팔을 자르고, 그
것도 모자라서 양 발의 힘줄을 잘라냈던 수인 말이다. 기억 못하는가!”
쿵-
비염극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지만 장추삼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되었
다. 그의 말은...
“정말 웃기는 일이군.”
고개를 모로 틀고 장추삼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쿡쿡거리던 작은 웃음이
어느새 소리의 파고가 높아졌고 마침내 장내를 쩌렁쩌렁 울릴 무렵 비염극
은 상황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한 발을 빼려했다.
“아직 정리해야할 서류가 많아서...”
“비. 각. 주.”
기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음성에 담긴 힘은 차지하고라도 한자 한자 끊어
부르는 기세에 모골이 다 송연할 지경이라 비염극의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대. 답. 해.”
무저갱에서 끌어올린 유령의 호곡성이라도 이보다 무시무시하고 이보다 차
가울까.
“그, 그는 본 회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죠. 외부로 기밀을 누설하
려 했습니다요.”
“하아~”
예상은 했었다. 그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잔인한 형벌을 주었을 리는 만무
하다. 피와 살육에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은 아니라고 자부하는 기
학에게 장추삼의 얘기는 마치 거짓처럼 다가왔었으니까.
“죽였으면 되잖나.”
넋두리일 지도 모른다. 그 일은 분면 존재했었고 돌이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 그래도 이렇게 말이 이어지는 건 아쉬움이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 아니
겠는가.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비염극은 계속 주절거렸다. 그들로서도 노
옥의 존재여부는 분명 꺼림직 한 일이었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리고 싶기
에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을 주저 없이 늘어놓게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우군에게 들킨 치부는 적에게 알려졌을 때의 그것보다 더 수
치스러운 법이다.
“그자는 스스로를 오갈 데 없는 떠돌이라고 했습니다. 저희들로는 액면 그
대로 믿을 도리밖에 없었습죠. 근골도 좋아 보이고 무엇보다 성취욕구가 강
해 보여서 무룡숙의 얼간이들과는 달리 취급을 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무렵 숙의 내부사정을 말해주며
가입을 권했습죠.”
“거부한다면 죽였겠군.”
장추삼의 빈정거림에 비염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상하긴 하지만
정체를 묻지 못하니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비꼬기까지 하자 배알이 뒤
틀린 것이다. 허나 기학의 위치를 생각해서 꾹 참기로 했다. 어쨌든 그는
숙주의 사제이지 않은가.
“그건 당연한 말이고... 아무튼 그자는 기꺼이 가입을 하였습죠. 무공을
익히는 속도도 마음가짐도 다른 무사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에 숙주께
서도 총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 그자는 당최 모질지
못한 성격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늘 얘기했었다. 네 둘째 형은
어딜 가도 다른 이의 피눈물을 보지 못할 성격이라고. 목표를 위해서 수단
을 등한시 할 만큼의 냉혈한이 못되었나보다.
낙오되는 동료들의 이유 없는 실종을 캐 들어가던 장하이는 곧 조직에 환멸
을 느꼈고 탈출을 감행했으나 붙잡혔다고 한다. 처음에는 징벌방, 그러나
또 한번의 탈출감행... 눈이 패여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장님인 상태에서
의 탈출기도... 한쪽 손... 그리고...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본보기라고 했다. 누구든지 숙을 배신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결국은 이런 몰골이 되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생을 영위하게 될 거라고.
“가끔 불쌍하다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숙의 장래를 위해서 살려
둔 것이지요. 희생양이라고나 할까요.”
“희생양?”
형은 결코 희생양 같은 것이 아니었다.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절대적인 힘
에 반기를 들었으며 두 눈을 잃고도 용감하게 운명과 맞섰으며 그 투쟁은
한쪽 팔이 잘리우고 양 발의 힘줄이 끊긴 후에도 계속 되었기에 더욱 빛나
는 게 아닐까.
이제야 형의 초상이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엔 뇌옥에서 힘없이 기던
패배자의 모습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했던 한 사내의 고집스러운 오
기가 밝은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기에 장추삼의 어깨가 저절로 펴졌다.
“누가 뭐래도 형은 최고였어.”
첫댓글 희생양?
장관을 지키려는
소방서장인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빚은 반듯이 되값아야 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