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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예레 26,1-9
복 음 : 마태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예레 26,2) 전하라고 하시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실로처럼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실로에는 여호수아 시대와 판관 시대에 성소가 있었지만, 심판을 받아 버려졌습니다.
이제 예루살렘도 그렇게 멸망하고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라고 비난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멸망을 선포하실 수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이 결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뿐, 심판을 말씀하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하느님의 행동 범위를 인간이 제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움직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착각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들의 착각이 깨지려면 성전이 무너져야 하였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그 성전을 무너지게 두셨습니다.
복음서의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부모와 형제를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그 평범한 사람,
목수의 아들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오는 통로를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명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떤 경로로 말씀하시더라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에 가면 어머니께서
“신부님! 성사 좀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아들인데, 아들에게 고해성사 본다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제가 더 어색해하며 성사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고해성사 후, “아들에게 성사하는 것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한테 고백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니?”
아들이 자기 죄를 알면 부끄럽지 않을까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모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종종 신자들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고해소에서 목소리 들으면 누군지 알죠?”
이분은 하느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닌, 인간인 저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동창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봅니다.
처음에 고해성사 볼 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가장 저를 잘 아는 동창 신부에게 성사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제게 맞는 훈화를 해 주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솔직히 고해 들은 것이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종 “지난번에 성사 봤던 사람인데요. 기억나시죠?”라고 말씀하시지만,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력 나쁜 머리를 주셔서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그 모든 죄를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이 세상을 제대로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음이니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고향 나자렛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믿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놀라운 손길이 드러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상대방의 믿음을 보고 이루어졌음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존경과 사랑으로 사제를 대하지만, 종종 특정 사제를 향해
“저 사람은 사제도 아니야.”라면서 적의를 표현하고 또 폭력까지도 행사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뽑아 사제로 세워주셨음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 믿음 없음이 과연 자신을 행복하게 할까요?
믿음 없는 곳을 하느님께서는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확실히 알아야 힘이 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채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 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주인을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난다.’는 말도 비슷하고,
‘방귀뀐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사실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지자 오히려 수산나를 거짓으로 고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노인들의 거짓과 욕망을 들추어냈습니다.
40억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등장한 시간은 30만 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긴 지구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작은 시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적반하장으로 지구에 사는 많은 생명을 못 살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시간 머물다 가면서 마치 주인처럼 지구의 생태계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적반하장의 인간을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 주시지만,
감정이 없는 자연은 임계점이 넘게 되면 무섭게 되갚아 줄 것입니다.
배은망덕(背恩亡德)이란 말도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오히려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는 말도 비슷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려는 인간의 배은망덕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하시면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찾는다면 그 역시 배은망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회당은 악의와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들끓었다.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한 것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것은 예수님을 헐뜯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우리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하고 몰아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희망과 열정의 포르치운쿨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포르치운쿨라 축일
어제 그리고 지난 10일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일까?
특히 올해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올해 축일을 지내는 곳이 이곳 아시시 마을이기 때문이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지내기 때문입니다.
원래 올해 저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제주에서 하려고 했는데
이곳 아시시 마을에서 서울 3개 지구 합동으로 축제를 지낸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곳을 향해 행진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 이름을 아시시 마을이라고 하고,
이곳에서 포르치운쿨라 축제를 지낸다고 하니
이곳이 서울 지구 형제회들의 아시시와 포르치운쿨라가 되겠구나,
아니, 더 나아가서 되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되도록 저와 우리 행진단이 일조를 해야겠구나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 10박 11일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행진 중간쯤 주례와 강론을 제게 부탁하는 메일을 받고는
이런 저의 마음을 주최 측에게 들킨 것 같기도 하고, 이신전심인 것 같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엮어주시는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묘했습니다.
아무튼 아시시 마을은 서울 지구들의 포르치운쿨라가 되면 좋겠다는
영감이 떠올랐고 그래서 회원들, 특히 초기 양성기 회원들이
프란치스칸 원천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서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포르치운쿨라 축일의 의미부터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많은 회원이 이 축일을 전대사 얻는 축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대사를 얻는 축일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전대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칸의 고향과 원천을 찾아가 쇄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고백성사를 본 것도 전대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프란치스칸답지 않았던 잘못을 뉘우치고 쇄신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전대사는 축일을 통한 쇄신의 결과로 주어지는 은총이지
축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전대사가 목적이라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꼴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이 행사 계획 당시 이곳 아시시 마을에서
이 축일을 지내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됐고,
전대사를 받을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축일을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또 어제 걸으면서 보니 우리의 행진이 순례와 기도와 쇄신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걷는 내내 세상 얘기만 하는 분들이 있고 그래서 기도하는 분위기가 깨어졌습니다.
더위의 고통과 발이 아픈 고통을 봉헌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일생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며 겪었던 순례자와 나그네의 불편을
같이 겪으려는 그런 마음이 부족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한 것처럼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불평으로 토해냈습니다.
그리하여 불편이 봉헌이 되지 못하고 불평으로 끝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쇄신을 하려면 자기 성찰
곧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 보기 힘들었고 어제 고백성사를 볼 때도 기다리면서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하는데 잡담을 하여 다른 사람의 성찰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절에 가는 의미를 묻습니다.
불공을 드리고 염불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올해 이곳 아시시 마을의 첫 번째 포르치운쿨라 축제에서
희망도 보았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가 첫 번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또 할 것을 전제로 한 말이고,
앞으로 할 때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부족했던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이곳이 지금 생각하는 피정의 집이 되고,
아시시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이곳이 여러분에게 아시시가 되어야 하고
이곳을 포르치운쿨라로 만들어 가려는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실망스러운 모습 대신 포르치운쿨라로 만들어 가는 희망과 열망이 있기를!
오늘 강론은 경기도 마석 글라라의 집에서 있는
서울 3개 지구 합동 포르차운쿨라 미사 때 할 강론을 대신합니다.
지식이 끊기면 은총도 끊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고 묻습니다.
분명 그들이 아는 부모나 형제, 자신들에게서 그 능력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해를 추구하거나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그 은혜의 근원인 대상과 그 은혜에
내가 합당한 자세가 있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하며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믿습니다. 그리고 알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려고 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은총이 주어집니다.
당신을 알려고 하루 5분도 투자하지 않는 이에게 그들이 청하는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교만만 커져 하느님을 자신들의 종으로 여기게 됩니다.
6.25동란 당시 피난 중 물에 빠져 간신히 살아나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다가
열일곱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세탁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이철호씨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했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미군들이 맡긴 옷가지들에서 때가 잘 빠지지 않으면 삶아 빨았습니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포격으로 파편을 맞아 그 수술 때문에 여차여차 노르웨이에서 살게 된 그는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다 배가 너무 고파 요리사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요리를 배우려면 주방에서 2~3년씩 감자만 깎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요리의 종류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도록
감자를 여러 모양으로 깎아 놓았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6개월 후에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공부와 일을 하고 대학은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노르웨이 라면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백만장자입니다.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일을 하다가 거의 30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라면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르웨이에 라면을 팔아보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그들은 라면을 수세미라고 부르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스프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농심에 자기 이름을 딴 라면 브랜드를 만들어 노르웨이에 팔았습니다.
우스운 모습으로 CF 광고에 직접 출연하고
요리사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라면 시식을 직접 해 주었습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의 저자 세이노도 현재는 1,000억 대의 자산가이지만,
자신이 파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미군 부대에 있는 대학을 다녔을 때 먹고살고자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화장품이나 식료품들을 가방에 넣어갖고 부유층 아파트들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그런 물건들은 아줌마들이 팔았고
나 같은 남자 대학생은 전혀 없었기에 경비실을 통과하기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문을 열어 준 고객들에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우선 나는 모든 상품에 붙은 영문 라벨들을 사전을 찾아가며 모조리 외웠다.
바세린 연고 하나를 팔더라도 눈 화장을 지울 때 사용하면 좋다는 내용도 잊지 않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눈 화장을 지울 때는 면봉을 사용하라고 하였고 면봉도 함께 팔았습니다.
스팸 햄을 팔 때는 새로운 요리법들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한 명의 고객을 만나게 되면 얼마 후 그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하여 주었는데
정말 그 숫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났으며 사전 주문도 생겨났습니다.
은총은 알려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더는 우리에게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계기가 현재 제가 받는
은총의 거의 모든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선입관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필립보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나 사도까지 되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전의 내가 가진 지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지금 모습대로 살고 싶어 변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은총을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태오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못마땅하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불쾌하다.’
‘기대, 희망,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거북하고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나자렛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어서 빨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동기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뎌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경탄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말씀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들, 마음 깊숙이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 54-56)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릇된 질문, 그릇된 의혹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여야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전력투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방성의 결여’였습니다.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앞에
우선 마음과 영혼, 정신을 활짝 개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인간 측의 활짝 열린 마음과 깊은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을 계승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은 우리를 심각한 자아 성찰로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