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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31
“형... 이라니...?”
멍청하게 반문하는 비염극은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여
기서 왜 ‘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가. 누가 형이란 말이고 최고였다
는 건가.
“이거 봐, 내가 재미있는 사실을 가르쳐줄까?”
장추삼이 우스워서 못 참겠다는 얼굴로 어리둥절한 그를 쳐다보았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인데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미소
따위가 아니었다. 철저히 썩어 비틀어진 웃음도 미소 축에 속한다면 그렇게
명명해도 되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짓는 얼굴 표정을 한 가지 단어로 정의
내린다는 게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억지일 것이다. 어떤 인간이라도 액
면에 그의 생각을 전부 담아낼 줄 아는 재주 따위는 없을 테니까.
“당신들은 그 사람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이름 정도는 있었겠지.
당연하잖아? 뭐라고 하던가, 그 사람이 말이야.”
기분이 나빠서 대답하기 싫었지만 어쩐지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비염극은 억
지로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저 사나워 보이는 청년은 그냥 묻는 정도의 일
상적인 질문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무엇보다 기학
의 모호한 태도도 그의 마음을 헷갈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자는... 음... 장씨 성을 쓴다고 했고... 굉장히 쉬운 이름이었는데...
음... 외자였었지. 외자였는데...”
“촉망받았다며? 당신들 바보야? 그런 인재의 이름 하나 기억 못해?”
무척 쉬웠던 이름. 그래서 더 기억이 안 나는지도. 그래도 정보각주라는 직
책에 걸맞게 비염극은 곧 그 수인(囚人)의 이름을 아득한 옛 추억에서 되살
려 낼 수 있었다. 맞다. 그건 이름이 아니었다.
“이제야 기억나는군! 숫자였다, 숫자! 그러니 떠오르지 않았지!”
장하군,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장추삼이 불쑥 한마디를 던졌
다. 음성 에서도 묘한 비틀림이 있었기에 비염극의 기분은 점점 나빠졌으나
놀라운 건 그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딱 맞춘 심통 녀석의 한마디였다.
“이(二)였지? 둘이라고 했을 걸?”
“아니! 그걸 어떻게?”
“후후후...”
웃음인지 탄식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목울림이 장추삼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
다. 형은 자신을 숨겼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도 집안에 해를 끼치지 않으
려는 마음이 아닐까 짐작이 되었고 그래서 더 형이 보고 싶다.
“이제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주지. 당신들이 나와 우리 형님의 관계를 의심
하지 않은 이유를 말이야.”
“누구길래...”
“형의, 아니 다섯 번째 죄수는 장이(張二)가 맞긴 한데 가운데 한 글자가
빠져 있지.”
의아해하는 비염극의 말을 자르고 그가 못내 유쾌한 사람처럼 낄낄거렸다.
아주 재미있지 않은가. 만약 형이 본명을 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夏)자야. 왜냐고? 우리형은 몹시 더웠던 8월의 초순에 태어났다고 하
더군. 모르긴 해도 울 어머니 고생 깨나 하셨을 거야. 둘째니까 당연히 이
자를 쓴 거고. 참고로...”
비죽 웃는 장추삼의 얼굴에서 비염극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꼈으나
그 마음이 채 자리를 잡기 전에 그의 말이 앞질러 나왔다.
“난 가을에 태어났고 우리집안의 셋째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추삼... 장... 장... 장추삼!”
몇 번 마을 곱씹어 보다 소스라치게 놀란 비염극이 펄쩍 뒤로 물러섰다.
‘장이 녀석의 동생이 장추삼 이었다니! 이런 낭패가...’
그런데 장추삼과 기학은 무슨 관계이기에 담소 수준의 대화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분명 보고를 받았다면 그가 숙의 불법침입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리고 기학은 지금 놀라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장추삼 이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거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학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어떤 식 으로든 주워 담을 수 없다. 아니, 물은 주워 담을 방법이 있을지
도 모르지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방법은 없다. 설사 살린다고 하더라도
장추삼과 숙의 관계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도 하나 물어야겠군.”
목을 좌우로 소리나게 꺾으며 장추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지점은
묘하게도 기학과 비염극의 딱 중간이 되는 지점이라 세 명의 거리는 약속한
사람들처럼 벌어져있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위치지? 뭐하는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
“나, 나는...”
바보처럼 비염극이 버벅거렸으나 기학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물음의 대상
이 누구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난 이곳 책임자의 사제요.”
“아! 그렇군, 사제! 이 냄새나는 동네의 대장이 술집에서 당신이 침이 마
르도록 칭찬했던, 그 잘난 사형중의 한 분 이시고?”
정말 멋지군,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는 것으로 조소의 뒷마무리를 하
는 장추삼을 바라보며 기학의 마음은 더없이 서글펐다. 이제 그는 호칭까지
변해 있었으니까. 솔직히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되돌
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간이 아닐 것이다.
“아아...”
말이 나오지 않아서일까. 억눌린 신음성 같은 모호한 언어를 토해내며 기학
이 고개를 돌렸다.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장추삼이 성큼 걸음을 옮겨
비염극이 나온 별채로 들어가려 하지만 않았다면 언제까지라도 굳은 나무처
럼 제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촹!
비염극이 칼을 빼들었다. 비록 험악한 기세에 겁을 먹었더라도, 상대가 육
천염의 우두머리와 일호를 잠재웠다고 해도 그는 이곳의 정보각주이고 집무
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 그도 무인이다.
“비각주 자리를 피하시게. 여기는 어떻게든 내가 막을 터이니.”
기학의 부름에 장추삼과 기학을 번갈아 바라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던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다. 숙주의 사제이고, 한때
누구보다 찬란한 미래를 보장받았었다고는 해도 그건 과거의 이야기일 뿐.
지금의 기학은 반송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저 손으로 닭 한 마리나 잡을
수 있을까.
“예? 예...”
피식.
말로는 대답을 하고 여전히 장추삼을 꼬아보고 있는 비염극의 마음을 모르
는바 아니었기에 헛웃음을 한번 흘리고는 기학이 팔을 들었다.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것 같은 가녀린 손을.
우웅-
“으헉!”
보이지 않는 암경이 홀연히 비염극의 가슴을 때리고 버텨보려던 그가 휴지
조각처럼 별채로 빨려 들어갔다.
빙글.
몸을 돌린 장추삼이 기학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하아...”
“내가 보건데 당신은 이번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하니 뭐라 하지는 않
겠지만 한 번 더 나서면 가만두지 않겠어. 빠지라구. 난 저 염소수염에게
들어야 할 것이 남아있어.”
“장형...”
장추삼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오늘은 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
을 때 최악의 날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날은 죽치고 앉아 마음 맞는 사람들
과 술잔을 기울여야 하는데.
“당신이 왜 그쪽에 서 있는 거지?”
너무 작은 웅얼거림이었기에 잘 들리지 않았다. 기학이 반문했지만 절레절
레 고개짓을 하고 그가 다시 한 발을 옮기자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와서 장
추삼의 발목을 잡아챘다. 부드럽게 감싸면서도 충분히 무게감을 실은 암경
을 조절한다는 건 보통의 능력 가지고는 턱도 없는 일일 것이다. 침투경 계
열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장추삼도 이런 기운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기
학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보았을 정도로 방금 전의 한 수는 고절한 수
법이었다.
“훗! 알고 봤더니 고수양반 이었군. 깜빡 속았지 뭐야?”
기학의 마음을 적시는 건 비틀린 장추삼의 말투가 비수처럼 그의 마음을 찔
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유쾌할 것만 같았고 웬만한 일이라면 한
잔 술로 삭일만한 마음의 그가 입은 상처. 치유되기 어려운 깊이를 헤아렸
기에,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무엇보다...
'우린 이렇게 다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정녕 이럴 수밖에 없는 건가.'
움켜쥔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지만 언제 그랬었나 싶게 풀려버리는 손
가락. 냉소적인 장추삼을 막을 명분도, 그렇다고 절대적인 명제도 없다. 이
건 너무 가혹하다. 왜 그여야만 하는가. 무얼 그리 잘못한 게 많아서 가람
을 끝간 곳 없는데 까지 몰아 부치는가.
그러나 기학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고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
는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단 한번이라도 사람으로 구실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피를 부르는 살육의 현장이라도 말이다. 장추삼이
집무전으로 향한다면 무조건적으로 막아야 하리라. 더욱 안타까운 얘기는
정말 사형들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는 거다.
누구나 선택을 하고 그것이 모든 판단을 주도한다. 삶은 비록 유한하나 가
치관은 무한한 힘으로, 꼬리 잘린 도마뱀이 스스로를 돌보는 것처럼 끊임없
이 자신을 위한다. 각자의 생각이기에 기준도 없을뿐더러 특별히 구애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가치관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시야에서 보
고 느낀 것이 토대가 되어 조각조각 모인 부분들이 전체를 이루어낸 그림처
럼 태생(胎生) 적으로 한정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을
미루지 못할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때라는 게 한없이 기학을 슬프게
했지만 이건 꿈이 아니다. 깨고 나면 웃고 치워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장형..."
부름과 함께 그의 손에서 뼈 부딪치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기학의 마음
을 대변하는 장송곡일까. 부들부들 떨리던 손가락은 이내 한자리에 모였고
한 번 결심한 이상 물러서지는 않는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버
려야 함은 정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휘르릉-
두 주먹을 움켜쥔 것만으로 기학의 기세는 일변했다. 펄럭이는 장포를 차지
하더라도 완벽한 무인으로의 변신을 보여주듯 일점(一點)의 망설임 없는 모
습은 강호인의 전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순간이리라. 이제 그에게 어떠한
번민도 존재하지 않았다.
"뭐야?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불쾌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낸 장추삼의 말을 흘리며 기학은 석상처럼 자리
를 지키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기도에 장추삼도 적잖게 당황
하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불과 몇 시간이 지났거늘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가. 아니면 그가 처음부터 숨겼다는 건가.
'이건 무언가 다르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맞붙었던 무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무림 십장 가운
데 하나라던 모추, 오대산에서 손을 겨루었던 권력의 사내, - 십이뢰성인의
삼호였지만 호칭을 모르기에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 그리고 방금 전에 맞
붙었던 두 검수... 모두 무시 못할 무인들이었고 승리를 취했다고는 하나
힘겹게 얻었었다.
그리고 기학이 서 있다.
한번의 인연 때문에 주저하는 마음 같은 것이 아니다. 이런 건 위험신호라
고 불러야 한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면 반발심으로 치
고 나갔을 것이다. 광오하게 굽어보며 껄껄거렸다면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서라도 달려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기학은 아무런 느낌 없는 기운을 조용히
흘릴 따름이었다.
꿀꺽.
실없는 소리는 필요 없다. 그의 의지는 피부를 통해 가슴 깊숙이 파고들고
있고 장추삼으로도 물러설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래. 당신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부딪쳐서 체험해주지. 그 잘난 이상
도 겸해서 말이야.'
장추삼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문득 박옹이 해주었던 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하지 못할 바에야 일찍 겪는 게 낫단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면 말이다.
"죽어도 비키지는 않을 거 같군."
기학이 손을 들어 가슴에 대었다. 절대적인 자신감. 불쾌할 법도 한 데 무
언가 자연스러운 기품이 흐르는 건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얘기다. 마
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이 전체를 장악하기 전에 무언가 해야만
한다. 그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 이다.
파박!
예고도 없이 장추삼이 튀어나가며 발을 들었다. 천고의 추뢰보는 여전히 위
력적으로 그를 도와 목표물과의 거리를 최단으로 줄여주었다. 추뢰보를 처
음 접하면 누구나 깜짝 놀라게 된다. 애초에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거리라
는 개념 자체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적에게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
디 있겠는가. 기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생각도 못해본 몸놀림에 일순간 허를
찔릴 뻔했다.
'헉!'
가까스로 신형을 이동하여 장추삼의 공격권에서 벗어났으나 그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파바박!
순식간에 넷으로 불어난 장추삼의 신형. 몸을 돌릴 사이도 없이 달려드는
네 명의 장추삼은 분명 위력적인 기세로 그를 압박하였고 당최 이러한 몸놀
림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뒤로 물러나기에 급급한 지경이었다. 상대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육천염이 무너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장형은 그저 그런 주먹질
을 하는 권각가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물러서는 기학을 바짝 따라붙으며 한순간에
손이 번쩍이자 빛살처럼 무언가가 뻗어 나왔고 양손을 들어 공세를 막아내
려 하자 열 여덟 번의 충격이 두 팔을 짓이기듯 타고 흘렀다. 열 여덟 번이
라니!
찌이익-
뒤늦게 울리는 파공성! 소리를 제압하여 공기를 찢어버렸다는 말이니 그의
주먹이 얼마나 쾌속했는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광경이다.
팍!
또다시 전개된 추뢰보. 이제 장추삼은 산무영과 추뢰보의 결합을 떠나 그
두 가지의 장점만으로 연환공격을 시도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분열과 돌
진의 정신 없는 교차 속에 송곳 같은 유성우가 빈틈을 노리고 호시탐탐 기
회만을 엿보는 형국. 이렇게 물러서기만 한다면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타아!"
한소리 회침과 함께 기학의 양팔이 기묘하게 교차를 이루자 무작정 달려들
던 장추삼에게 어떤 암경이 다가가서 진로를 막아섰다.
'어?'
분명 어디선가 접해 보았던 공력. 직접 맞받은 적은 없지만 본 적이 있다.
'록미랑?'
그렇다. 이 공력은 록미랑이라는 제 3암루의 도박꾼이 보였던 속임수, 아니
암경 가운데에서도 가장 무서운 기법이라는 암영기(暗影氣)였다.
'제기랄! 그 여자도 한패였다는 거야?'
일단 다가오는 기운을 해소시키는 게 급선무라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이
짧은 순간으로 무작정 몰리던 기학은 한 박자 여유를 찾았고 장추삼으로도
무조건적인 접근은 힘들게 되었다.
단 한 수만으로 대세를 바꾼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다. 정확한
순간에 적절한 힘으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안목.
우우웅-
같은 기도건만 처음의 그것과 어쩐지 다른 느낌이라 장추삼도 슬쩍 몸에 긴
장을 풀며 기학을 주시했다. 이맘때쯤이면 상대는 병장기를 꺼낼 것이다.
모추야 무림 십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법이 위주였지만 나머지 무인들은
약속한 것처럼 무기를 꺼냈었다. 권법을 쓰던 삼호는 예외로 두고 말이다.
장추삼 본인에게도 병장기를 드는 무인들이 상대하기 편했다. 어차피 거리
로 승부를 보는 싸움 형태였고, 다구빨(?)로 나온다면 자신이 있는 터였다.
조금 숙여져있던 기학의 목이 천천히 올라갔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서 전의를 느꼈기에 장추삼의 눈도 타올랐으나 사실 기학은 그런 상태가 아
니었다. 잠력을 한번 더 끌어올려서 충만한 몸과 착잡한 마음이 교차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시간을 버는 그의 노력을 장추삼이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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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그였다면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기학의 상태가 무언가 비정상적이
라는 사실을 말이다. 제아무리 천고의 영약이라도 단 몇 시진 만에 사람을
이렇게 돌려놓지는 못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기학의 상태는 건강
을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가히 절정고수를 압도하는 기세였고 그건 통상적
인 방법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기학의 상태를 세세히 관찰할 만한 정신
적인 여유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오호라~ 이제야 한번 제대로 어울려보고 싶은가보군. 물러설 내가 아니니
사양치 말고 오시오. 밟아줄 테니까 말이야.”
꼭 뒷말을 덧붙였어야 할까?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헤집어봤자 별로 나아
지지 않는 기분일 텐데.
차라리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으면, 생각이 들어서 기학의 눈망울에 옅은 물
안개가 차올랐다. 장추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서있지도 않
았을 것이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숙으로 발걸음을 옮겼을까. 이곳에 올 염두나 들었을까.
단단히 골난 시어머니처럼 장추삼의 독설은 가뜩이나 지친 그의 전신을 난
도질하기에 충분했지만 기학은 애써 초연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무슨 말
이 더 필요하겠는가. 힘으로 묻고 힘으로 답하면 된다. 그 뿐이다. 이야기
는 먼 옛날의 추억처럼 덧없어졌고 나누었던 대화는 비누방울처럼 터져나갔
다. 흔적조차 없이 말이다.
팍!
느닷없이 달려드는 기학의 얼굴은 석고로 만든 가면처럼 무표정했다. 일체
의 감정을 접고 주먹으로만 대화를 나누기로 해서일까. 아니면 깨져가는 몸
과 마음의 균열을 보이기 싫어서일까.
보통의 접근처럼 별다른 변화도 없고 빠르지도 않았지만 암영기를 밑바탕에
깔아두어서인지 무언가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기학이 흘리는 암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기에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 산무영을 전개하였다. 한번도 장추삼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던 분신
들이 언제나 처럼 나타나 제각기의 모습으로 기학을 압박하고 전진하던 그
가 움찔 신형을 세웠다, 고 보았는데...
스르륵-
중력이 없는 허공에서 - 물론 이 시기에는 중력의 개념 같은 건 없었지만 -
자유롭게 유영하는 사람마냥 기학이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나의
장추삼을 젖히는가 싶더니 두 번째의 장추삼도 스쳐 지나가고... 무려 여섯
명의 장추삼을 가볍게 뿌리치고 일곱 번째, 즉 변환의 축인 진 장추삼의 앞
으로 무리없이 다가섰다. 한순간에 일곱 번의 방향전환을 해내었다는 얘기
인데 보법의 변화를 차지하고라도 그 모습의 유려함은 마치 연못에서 한가
롭게 노니는 잉어처럼 자연스러웠다.
‘ ! ’
이럴 수가 있는가! 방금 전의 몸가눔은 장추삼 자신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
하다. 흡사... 똑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럼 무엇이 다를까. 그 대답은 기
학이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다.
슥-
앞으로 반 보 접근 했을 뿐인데 장추삼의 전면은 기학의 공격권역에 고스란
히 노출되었다. 거리를 벌려보려고 신형을 뽑아 올리려 할 때 무언가 거대
한 암경이 닥쳐 그는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파방!
장력과 권력의 자유자재란 지금의 기학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최초의 한방
은 주먹으로 때리고 목을 꺾어 피하는 순간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어느새 펴
져 장력을 날려대니 장추삼은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항상 그의 공격은 적재적소란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결정적인 순
간만을 노려서 수세에서 벗어나려 해도 틈을 주지 않았다. 방법은 그보다
빠르게 움직여서 한 수 앞으로 가는 거다. 속도라면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종목 아닌가. 그렇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한번의 시간을 벌게 되겠지만 다시
공격을 받게 되겠고 기학의 화려한 공세에 또 당할 것이다. 최선의 수비가
공격이라고 했던가?
촤라락!
장추삼 만의 절기, 희대의 추뢰무영이 말려있던 비단천이 일시에 펴지듯 전
개되자 어디가 실체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지 모를 여덟의 장추삼이 기학을
압박하였다. 그야말로 화려하다는 말 이외에 표현할 길이 없는 천고의 보법
. 일시에 많은 힘을 요하고 근육의 무리를 초래하나 그만큼의 보상을 주는
추뢰무영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웬만한 인물이라면 변화만으로도 질려
서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훅!”
기학의 입에서도 경악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사전 정보 없이 추뢰무영을
대했을 때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분신술에 준하는 움직임.
흔히 분신(分身)이 어쩌구 잘도 떠들어 대지만 직접 분신술 비슷한 것이라
도 본 무인은 거의 없다.
진정으로 무서운 건 제각기의 분신들이 그저 잔상처럼 제자리에 머무는 것
이 아니라 하나하나 살아 숨쉬는 존재인양 스스로의 움직임을 보이는 착각
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각자가 따로 노는 것도 무섭거늘 알고 보면 그
동작마다 서로 유기적인 보완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동작을 뒷받침하는 모
양새. 형태로는 보법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가장 완벽한 공격식이니 그 누
가 저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대는 기학이었다. 장추삼은, 아니 전 무림인들은 모른다. 병약해
보이는 이 청년이 가진 힘을. 그 무게와 연원을 말이다.
경악성은 추뢰무영에 바치는 예의였을까? 기학의 눈썹이 꿈틀 올라가는 순
간 그의 신형은 최초의 장추삼을 일별하며 지나치고 제2, 제3의 추삼을 슬
쩍 흘리듯 스쳐 지나쳤다. 추뢰무영의 장점과 단점을 훤히 꿰고 있는 사람
처럼 앞서의 다섯을 무시하고 나머지 세 명을 마주했다.
파박!
‘이럴수가...’
세 명의 장추삼을 맞이한 건 한명의 기학. 동시에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나
제각기의 시간대에서 찰라의 차이 속에서 공세를 취하는 장추삼의 세 분신
을 들어오는 순서대로 차례차례 봉쇄하는 기학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
워서 처음부터 짜 맞추고 벌이는 비무와도 같았다.
정말 자존심 상하고 열 받는 일은 이번의 공수교대가 언젠가 한 번 겪었던
싸움의 재판이라는 사실이다. 월영전대에서 여섯 대의 혈시를 산무영으로
받아냈을 때와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차이라면 주체와 객
체가 뒤바뀌었다는 것이고 화살보다 위력적인 육탄공세가 저지당한 정도랄까.
한마디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에서 보란 듯이 깨졌다!
꽝!
세 명의 공격을 여유 있게 받아내고 지른 기학의 발차기를 오른손으로 겨우
막아냈지만 그 충격은 팔뚝을 타고 흘러 머리까지 울릴 지경 이었고 정신
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받았기에 그의 표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추뢰무영이 깨졌다!’
장추삼이라고 모를까. 자신이 그저 그런 삼류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라는 사
실을 말이다. 얼마나 대단한지는 수치적으로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무림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고수들이 그의 몸 움직임에 경악을 하고 실질적
으로 그들과 겨루어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것이 별 볼일 없는
삼류무공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상이 아니다. 눈치 빠른 장추삼이 그 정도를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을 터.
천성이 나서기 싫어하고 무림과 얽히는 것 역시 사절이다. 남들이 알아채면
그만, 이번 일을 끝내고 표국에서 일이나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었기에 흐
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던 일이나 은근히 쌓아올린 자부심만은 어쩔 도리 없
다.
추뢰무영이 발동되었을 때 그의 앞을 막아서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
이 바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우뢰를 쫓다쫓다 끝내 흩어지고만 안개의 그림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이름 그대로 허공에서 산산이 스러졌다. 언제나 든든했던 그의 분신들도 아
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의 모든 분신을 와해하고도 모자라 기학의
손이 한번 꿈틀거리자 천지를 손에 담을 것 같은 장법의 폭포수가 몰아쳤다.
쿠르르-
단 한줄기의 공세지만 망설임 없이 똑바로 짓쳐오는 그의 장세는 기세나 힘
에서 여타의 그것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다. 자체만으로 완벽
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변화가 필요할까?
일반적으로 장력을 생각할 때 무책임하게 한번 쏘아내고 마는, 힘으로 쳐내
는 바람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큰 오해다. 어떤 식 으로든 피
할 구석이 있으면 날아오는 장력을 가만히 앉아서 맞아줄 바보가 어디 있겠
으며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속도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건데 장력을 사용하려
면 기본적인 예비동작이 필요할 터이고 그렇게 속도만을 중심으로 공세를
취하게 된다면 다른 부분에서 빈틈이 생기게 됨은 불문가지.
솔직히 속도만으로 놓고 본다면 장력은 검법이나 도법에 비할 바가 못 되고
권법에도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력의 사용자들은 변화를 중시하
여 상대방의 퇴로를 끊어놓고 결정적인 한방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는 경
우가 많다. 그런데 기학의 이번 일장(一掌)은 너무 정직한, 어쩌면 장력의
기본을 무시한 듯한 느낌이었는데 장추삼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 건 왜일까.
으드득!
그의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빨까지 갈아붙이며 전력을 다해 펼친 추뢰보
는 그야말로 빛과도 같았기에 발동 순간에 이미 자리를 떠난 것 같았지만
기학의 공세를 간발의 차이로 흘리는데 만족해야 했다. 방금 전의 추뢰보는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그가 펼쳐냈었던 여타의 추뢰보 보다 빠르고 정확했
었다.
팍!
그 결과가 간발의 차이로 기학의 이름모를 장력을 피한 게 전부였기에 허탈
한 심정이 들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그가 아니다.
‘좋다! 얼마나 빠른가 보자!’
장추삼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기학은 갑자기 찾아든 두 가지의 힘을 감지해
야만 했다. 이번 것은 그리 만만하지도 않을뿐더러 속도와 위력 면에서 나
무랄 데가 없었기에 그도 아연 긴장하여 무조건 힘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급
급했다.
단 한번의 변화를 보인 추뢰무영!
여러 번의 변화를 주면 그만큼 상대를 현혹시키고 다각도의 공격을 퍼부울
수는 있겠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한 가지 힘이 분산되어 파생한 결과물이기
에 그 위력이 반감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영리하게도 장추삼
은 이점을 잘 숙지하였고 방금 전의 폭포와도 같았던 장세를 그대로 도입하
여 위력과 속도를 중시한 추뢰무영을 전개한 것이다.
다수와 붙었다면 일일이 그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한편 상대에의 공격을 모
색해야 하겠지만 일대일의 싸움은 그럴 필요가 없다. 제아무리 난다긴다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사람이고 그가 둘이 되는 마술을 전개하지 않는
다면, 타격을 받고 무너지는 피와 살을 가지고 있다면 승산은 있다.
‘단 한번만!’
한번만 속이면 된다. 한순간 시선을 뺏으면 되는 것이다.
뒤러 물러서는 기학에게 어떤 쪽이 진정한 힘인지 어떤 쪽이 허초인지 분간
해 내길 바라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장추삼이 보인 단 한번의 변화는 그
렇게 허술하지 않았으니까.
스르륵.
물러서던 기학이 느닷없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신형은 장추삼처럼 돌발
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기에 화려함으로 볼 때는 어쩐지 떨어졌다. 그
러나 장추삼은 기학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아니, 너무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눈으로 똑바로 관찰하면서 고스란히 당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파바방!
오른쪽을 파고들던 장추삼의 신형이 삼음추를 전개하기도 전에 기학의 웅휘
로운 장세를 막아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뛰어들던 제 2의 장추삼도 유성우
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다시 한번 나타난 기학을 맞이해야 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기학은 동시에 두 장소를 점유하였던 것이다.
“크헉!”
주먹을 들 사이도 없이 빠르게 반보 다가선 기학에게 거리를 허용했고 느려
보이나 더없이 적절한 그의 장세를 손으로 막아냈지만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는 충격을 받으며 장추삼의 눈은 경악으로 하얗게 채워졌다.
장추삼과 기학의 몸놀림을 누군가 보았다면 무척 닮았으며 어딘가 다르다는
걸 바로 알게 된다.
그건... 자연스러움이다.
일견 장추삼의 돌발적인 보법은 그 의외성과 폭발적인 전개에서 높은 점수
를 받게 되겠지만 어딘지 위태로운 과격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에 비해 기
학이 전개하는 몸가눔은 보법에 국한되지 않는 자연스러움, 즉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으며 그것이 당연한 인상까지 풍겼다. 마치 처음부터 움직임을
상의하고 그 자리에 미리 가있는 사람처럼 장추삼이 달려드는 곳엔 기학이
지키고 있었다는 거다. 이런 경우 상대방은 정말 맥이 빠짐은 물론 싸울 의
지조차 상실하게 된다.
한수 앞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싸우는 사람에게 무슨 전의가
생기겠는가.
가슴을 부여잡고 분노의 얼굴로 기학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 어처구니없게도 처음 상대할 때 보다 혈색이 더 좋아보였다. 당연히 힘이
빠질 수밖에.
그런데 상식적으로 아무리 잠력을 폭발했다고 하더라도 격렬한 싸움을 치르
고 나서 오히려 몸이 괜찮아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진원진기란 게 분명
신묘한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러듬은 정한 이치. 그렇다고
기학의 진원진기가 무슨 공전절후의 수준에 이른 것도 아니다. 그의 나이에
아무리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기본 바탕이 되는 진원진기가 같이
성장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기학은 얼마간 남겨두었던 마지막의 힘까지 분출한 것이다. 아마도 이 싸움
을 승리로 이끌어도 그는 평생을 누워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더 나쁜 경
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대충할 거
였다면 애당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내가 장형에게 보내는 최선의 예의는 전력을 다해 상대하는 것일게요. 비
록 가는 길은 다르다고는 하나 우리는 사나이니까 말이오. 서로 간에 한점
의 후회도 없는 싸움이 되길...’
우르릉-
두 주먹을 쥐고 팔을 들며 공력을 운기(運氣)하는 기학의 전신에서 무엇이
라도 찍어 누를 것 같은 패도적인 기세가 솟아났다. 이제 싸움을 마무리 지
을 때가 되었음인가. 고양이가 쥐를 어르는 모양새의 싸움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투(鬪)라는 말로 칭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상황을 빨
리 종식시키는 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힘의 차이는 명확하다. 정신적인 면에서 장추삼이 아무리 기학을 압도한다
고 해도 사람의 일에서 의지만으로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제길! 제길! 제길!’
피라도 토하고 싶었지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장추삼이 할 수 있는 전
부였다. 상대는 바위처럼 단단하며 물 한 방울 샐 틈이 없으리만치 견고하
다. 솔직히 저 발을 따라잡을 자신이 없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한없이 나
약해지는 자신이 싫었지만 현실은 눈앞에 펼쳐져있다.
‘이제 끝낼 시간이오.’
스르륵.
에의 그 유려한 몸 움직임과 함께 기학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섰다. 아랫
입술에서 피가 나오도록 입을 다물고 전의를 불태우는 장추삼의 눈은 패기
로 충만해 있었지만 기학이 손을 들자 상황은 절망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팟!
앞으로 조금 나선 것처럼 보이는 짧은 돌진이었는데 기학의 손은 어느새 장
추삼의 전면을 점유하였다. 발을 들어 삼음추를 전개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손은 장추삼의 가슴팍을 노리기에 할수 없이 뒤로 물러섰지만 딱 그만큼의
거리를 따라오는, 아니 이미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 같은 기학이었기에 그
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속력으로 유성우를 펼쳐보려 팔을 들었다.
팡!
“크헉!”
팔을 치켜든 상태에서 가슴을 가격당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장추삼
을 고요한 눈빛으로 따라붙는 기학의 기세는 너무도 차분하여 흡사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으아악!”
비명인지 기합성인지 모호한 외침은 도무지 국면전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몸통에서 전신을 타고 흐르는 고통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서는 그
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학의 손은 다시 한번 번쩍였다.
파바바-
미쳐 산무영이 발동되기도 전에 기학의 냉엄한 손속은 장추삼의 사방을 결
계처럼 에워 쌓아 어디로 가도 그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판이었다. 전면으
로 나설려치면 전면에서, 후면으로 물러나려하면 후면으로, 어디든 기학은
쫓아갈 것이고 어디에도 그의 발길이 이르지 않을 곳은 없을 것만 같았다.
쿵쿵!
다시 두 방의 장력을 얻어맞고 퉁기듯 뒤로 물러서는 장추삼의 입에서 어느
새 가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타격당하는 순간마다 교묘하게 몸을 틀어
완벽한 정타를 피하고는 있지만 기학의 장력은 매우 둔중한 것이라 비껴 맞
은 것만으로도 그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그 여파는 둔하게 반응하는
발과 자신감의 결여, 그리고 불쑥불쑥 치솟는 토혈로 나타났다.
‘도대체 뭘 해야만 하나!’
모든 움직임이 완벽하게 봉쇄당한 장추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갈 무렵 기
학의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졌다. 이 이상 괴로워하는 그를 보는 것이 안쓰
럽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이제 쉬는 편이 좋겠소.’
첫댓글 기학과 장추삼.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