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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예레 26,11-16.24
복 음 :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말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는 요한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는 못하였지만,
요한이 지닌 능력을 인정하기는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요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만 군중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아보았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요한을 죽이는 사람은 결국 헤로데입니다. 핑계를 대어도 소용없습니다.
헤로디아 때문에, 살로메 때문에 죽였다고 말하고 싶었을까요?
헤로디아의 딸에게 약속하고 맹세한 것도 헤로데이고,
요한의 목을 베라고 끝내 명령을 내린 것도 헤로데입니다.
그는 진리를 알고 있었으나 자기 손으로 진리를 죽입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마음에서 80퍼센트 정도 진리를 따르고 하느님을 따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순간에 진리를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양보할 수 없는 나머지 20퍼센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려놓을 수 없는 무엇이 남아있을 때 그 진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목숨을 사람들의 손에 맡깁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보다,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였고,
80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를 그 말씀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따름은 ‘전부’를 요구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유치원생이 쓴 시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좋다.
바둑이는 나와 놀아주니까 좋다.
냉장고는 먹을 것이 많이 있으니까 좋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이 마지막 문장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우리집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합니다.
바쁜 직장생활로 집에 밤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아빠 만날 시간이 아이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이 유치원생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또 주님께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의미도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 없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활이 칭송받을 만한 때에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러한 겸손을 갖추고 있어야 의미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또 세상에 나를 높이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 영주 역시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데만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기 의미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대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넘겨줍니다. 그 결과는 스스로에게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합니다.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 자기 존재 의미를 깎아버리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주님의 일을 했을 때 환하게 드러납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았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 세상 안에서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죄인이 아름답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방법으로 속임수로 돈을 챙겼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 잔치에 흥을 돋우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대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반대편에는 참수 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으며,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나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지만,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결국,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시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태 14,4)
주님!
제 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혀가 헛된 맹세와 거짓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불평과 비난이 아니라 진리와 의로움을 증언하게 하소서.
오늘, 제 혀를 말씀에 묶어 두고
온몸이 혀가 되어 삶으로 외치게 하고서.
온몸으로 외치는 십자가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억울(抑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시기와 질투로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강한 사람에게 아무 말 못 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은 주로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성서에서도 억울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인에게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아벨은 억울할 겁니다.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나봇도 억울할 겁니다.
왕에게 충성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죽어야 했던 우리야도 억울할 겁니다.
우리 시대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던 박종철 열사도 억울할 겁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던 사람도 억울할 겁니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수사자료를 경찰에 넘겼지만,
항명죄로 1년이 넘게 재판을 받아야 하는 수사단장도 억울할 겁니다.
살로메의 춤판에 희생되어서 죽어야 했던 세례자 요한도 억울할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알아주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던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억울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부자는 평생 떵떵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의 집 문간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하느님의 공정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아하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오게 하였다.
조욱현 토마 신부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요한 세례자가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요한 세례자는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로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헤로데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륜을,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도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봉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의 사명과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파견받은 자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도성이 잘살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하느님 뜻대로 잘살았다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파견하셨겠습니까?
잘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니 파견된 예언자는 잘못 살고 있다고 쓴소리해야 하며,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이 도성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힘없는 사람은 억지로 참지만,
힘이 있는 사람은 그리고 집단은 가만히 있지 않고 심지어 죽여 버리지요.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바로 그런 자들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이고,
요한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면
그래도 그랬을까? 나라면 어떨까?
하느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 니네베 임금과 백성들처럼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언자를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니 내게 쓴소리한 사람을 예언자라고 믿고 싶겠습니까?
성질이 나쁜 놈이요 배배 꼬인 놈이라고 매도하거나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게 쓴소리하는 사람을 특히 예언자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파견한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예언자로 받아들일 겁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이 사람을 내게 보내셨는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을 내가 교만 때문에 몰라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제가 이번 행진하면서 그리고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앞두고 저의 죄를 성찰하면서
제일 크게 반성한 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사랑을 더더욱 강하게 믿지만
하느님 사랑을 너무 내 식으로 믿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다 오냐오냐하실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역시 제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것인데
오늘 저는 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저의 믿음을 반성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권자였습니다.
두 지방을 합해봐야 경기도 정도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주, 분봉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아첨하며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둘의 관계는 참으로 묘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두렵게 여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 세례자 요한이 곤경에 처할 때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건네는 날카로운 직언에 힘겨워했지만,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치도 않았던,
기가 막힌 일 -세례자 요한의 참수- 을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모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잔머리를 너무 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은 꼼수와 권모술수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동 쪽에 위치한 나바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하자
힘이 딸렸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와 협상을 체결합니다.
작은 강아지가 큰 개를 만나면 배를 발랑 뒤집어 항복을 표시하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레타4세 왕 앞에 깨갱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왕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헤로데 필립보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합니다. 갖은 감언이설로 꼬셨겠지요.
허영심이 가득했던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륜을 저버리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레타 4세 왕의 딸은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헤로데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난 딸 살로메를 데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품에 안깁니다.
당대 비리와 악행을 자행하던 고위층 지도자들의 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공연하게 천륜을 거스르는 두 사람의 악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듭된 고발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끄럼 없이 패륜의 길을 걷던 헤로디아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위협도 해봤습니다. 설득도 해봤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전도차 애논을 떠나 갈릴래아로 건너온 세례자 요한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 에브론 건너편에 위치한 마케론데 성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서기 28년경 참수 당함으로서 짧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고민 끝에 찾아냈다는 나라의 중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한숨만 터져 나옵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어린 양들을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웃이 쓰러지든 말든
내 앞길만 헤쳐 나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플라톤의 동굴과 이냐시오의 동굴
박재찬 안셀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정의를 외치던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체면 때문에 죽이고 맙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욕망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무지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협력합니다.
그들은 체면과 욕망, 무지의 동굴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마음속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이를 단죄하기도 하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맹신하는 경우는 없는지 반성하며
우리 안에 있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그 딸과 같은 어둠의 동굴로부터
주님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 오늘 강론은 딱 여러분의 수준에 맞는 글 같습니다.^^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영성적이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번 강론을 통해 “동굴”의 진정한 영적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여기에 지하 동굴이 있다. 동굴 속에는 죄수가 갇혀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두 팔과 두 다리가 묶인 채로 동굴 벽만 보고 산다. .....
죄수의 등 뒤 위쪽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죄수는 횃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 첫대목입니다.
동굴에 사는 이 속박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이지만, 그들은 진짜라고 믿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진짜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불완전한 세계이며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
참된 본체의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핵심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는 우리 모두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말하듯이 우리 모두가 과연 동굴에 갇혀
허상만을 쫓고 있는 죄인들일까요?
눈에 보이는 현상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할까요?
동굴 밖에만 참된 세상이 존재하는 걸까요?
하느님께서는 왜 이 그림자 같은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을까요?
여기에 스스로 동굴에 들어가 그 동굴에서
참된 진리와 세상을 발견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이 되어
전장에서 싸우다 다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병상에 누워 투병 중에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감동하여,
자신이 추구하던 명예가 허상이요 그림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치료를 마친 그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찾아가 그곳 사제에게
사흘 동안 자신의 죄를 적어 총고해를 합니다.
그리고 수도원 성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 자신의 칼과 갑옷을 봉헌한 후,
무릎을 꿇고 밤새도록 기도를 바칩니다.
입고 있던 비단옷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순례자의 의복을 입고
수도원을 떠나 만레사로 가서 깊은 동굴 하나를 찾아
그곳에서 수개월 동안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왜 동굴로 갔고, 동굴은 그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었을까요?
먼저 동굴은 자신이 과거 추구하고자 했던 세속이라는 그림자를 버리고
하느님을 찾는 생활을 하는 상징적 장소이자
거짓 자아와의 투쟁이 벌어지는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손발톱도 머리도 깎지 않고 단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침묵과 고독 가운데 그는 자신의 내면을 더욱 깊이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레사에서 지낸 처음 몇 달, 그는 영적 위로를 체험,
내적 평화와 깊고 충만한 기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적수행이 그러하듯이
곧이어 내면의 거짓 자아와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내적 공허, 낙담, 고독, 지루함, 영혼의 무감각, 절망, 우울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심지어 자살 충동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를 인내로이 견디어 냅니다.
그러자 예전과는 다른 더 큰 평온과 큰 위로가 내면에 자리하게 됩니다.
명예와 허영에 사로잡혀 살던 한 젊은이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동굴에 머무는 동안 극심한 고행 속에서 깨달은 영적 통찰을 매일 써 내려갔습니다.
이 기록들은 훗날 그 유명한 「영신수련」이라는 책으로 엮어지게 되는데,
오늘날에도 많은 수도자와 사제, 평신도들이 이 책을 통해
영성 생활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그가 바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과 이냐시오의 만레사 동굴은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플라톤에게 동굴 속은 참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동굴 밖이 참된 세상이었습니다.
배움을 통해 의식이 깨어나고 스스로 동굴 속에 있음을 자각하고
그림자로 가득한 동굴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참된 이데아는 동굴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어느 정도는 이냐시오 성인의 깨어나는 과정과 유사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동굴이 아니라 세속의 허영과 그림자를 쫓으면서도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던 이냐시오는 만레사의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세속이라는 그림자의 동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그는 자신이 그림자의 동굴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동굴 밖으로 나와
새로운 참된 세상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내면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만레사는 실제 동굴이면서 동시에 이냐시오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하느님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영적인 내면의 동굴이었습니다.
만레사 동굴에서의 참회와 수행의 시간들은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동굴 밖 세상 속에서 참된 실체인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난 하느님은 이데아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
저 멀리 있는 분이 아니었씁니다.
오히려 세상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만날 수 있는 하느님,
모든 것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이냐시오 성인에게 있어 동굴은 동굴 밖 세상,
과거에 자신이 그림자만 보아왔던 그 세상이
바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임을 깨닫게 해 준 곳이었습니다.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림자들이 진짜라고 믿었기에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하느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참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허상의 그림자를 쫓는 동굴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동굴인지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니 그것이 허상인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쫓아가니 나도 덩달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고 그 길에서 서로 다투며 지쳐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갇혀 주님이 없다고, 나를 외면하신다고 불평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런 우리에게 오늘 이냐시오 성인은 내면의 동굴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만레사의 동굴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제대로 눈을 뜨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속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동굴 속에 들어 가 정화와 비움의 시간을 가짐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나는 세속의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을 쫓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나는 참된 내면의 동굴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어둠을 견디어 내고 있습니까?
나의 내면의 동굴로 가기 위해서는 이냐시오 성인처럼
다른 이를 공격하던 날카로운 이기심의 칼과
자신을 방어하던 무거운 허영심의 갑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욕심도 자존심도 복수심도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드리며 내면의 동굴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옷을 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동굴에 고요히 머물며 인내로이 견디어 낼 수 있는 은혜를
지금 마음속으로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