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삐릭’ 소리가 들리더니 문자메시지 하나가 빠르게 흐른다. ‘ㄱㅇㄱ회원상...’ 종종 듣는 소식이지만, ‘상(喪)’이란 글자에 마음이 살짝 어두워진다. 아마도 수백 명 회원을 가진 영농조합에서 언제나처럼 보내온 것 같다. 한데, 이름이 내 친구를 닮았다. 잘못 봤나? 철수 영희 이상 흔한 이름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애써 무시하며 바쁘게 하던 일을 계속한다. 잠시 후 메시지가 또 뜬다. ‘ㄱㅇㄱ회원상 천안…’ 천안? 불길한 예감이 휙 스치고 지나간다.
결국, 자판 두드리기를 멈추고 전화기를 열어본다.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고향 친구의 부음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명을 달리한 친구가 여럿이지만, 유난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떨린다. 아마도 얼마 전에도 여러 친구와 어울려 건강을 지키기 위한 지혜를 나누며, 천연덕스레 많은 얘기를 나누었기 때문인가 보다. 정초에는 여느 때처럼 신년하례도 했다. 나이 한 살을 또 먹은 것이 별로 반갑지 않다는 얘기도 하긴 했지만, 죽음은 재수 없는 사람들의 얘기인 듯 치부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다.
그 친구는 평소 이렇다 할 지병도 없었던지라 본인도 가족도 별걱정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을에는 친구들을 풍광이 수려한 전원으로 초대하여 유유자적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여주니 친구들이 큰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것도 유난히 허전한 이유의 하나이리라. 잠시 후면 들이닥칠 검은 그림자를 못 보면서도 그런 것은 남의 얘기라는 듯이 껄껄 웃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났다가는 헤어진다. 그저 곁을 떠나는 것이야 못내 서운해도 언젠가는 또 만날 수도 있지만, 죽음이 갈라놓는 것은 참으로 황망하고 슬프다. 늙었거나 병약한 사람이라면, 마음의 준비가 있을 것이니, 그 아픔을 어느 만큼 달랠 수도 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그도 신의 섭리를 어쩌지 못하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 돌아갔다. 어디로 갔을까. 근래 먼저 간 두어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 물어보기도 했지만, 아직도 답을 받지 못했는데, 이 친구도 또 갔다. 어느 날엔가는 나도 같은 길을 가겠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다만, 뒤에 남은 사람들은 인연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다.
장례식장 한편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린다. 미망인과 식솔들도 부둥켜안고 오열하니, 제법 대범한 척하던 친구들도 눈가가 붉어지고, 장례식장 분위기는 일순 숙연해진다. 아마도 부음을 듣고 달려온 동기간인가 보다. 슬퍼할 만하다. 울어야 한다. 예전처럼 형식적으로 울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슬프다면 소리치며 울어도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울음을 잃어버렸다. 장례식장에서조차 듣기 어렵다. 나도 어머니가 운명하시던 날, 아직은 체온이 남아있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소리쳐 울고는, 엊그제 못난 생모의 가혹한 핍박에 절명한 세 살 어린이의 죽음과 원영이 같은 어린이의 슬프디 슬픈 죽음에 가슴을 들썩이며 울어준 게 다다.
그는 친구 모두에게도 우정이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니, 가족에게도 의당 그랬으리라. 내가 첫 수필집을 발표했을 때도, 두 번째를 내놓았을 때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책을 묶음으로 사 지인에게 나눠주며 나를 칭찬하고 격려했다.
언젠가 작성한 초등학교 동창 66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얼굴을 떠올려 본다. 공부를 잘하고 미남이었던, 노래를 잘하고 얼굴이 예쁜, 늘 씩씩하고 운동도 잘했던, 나 같이 키가 작은, 바지랑대처럼 큰 친구…. 그중 벌써 저세상으로 간 친구가 스무 명이 넘는다. 병고에 시달렸거나 사고로 운명한 친구가 많지만, 어떤 친구는 삶이 부질없다고 스스로 갔다. 모진 사람이지만, 남은 우리는 종종 그들을 떠올리며 그들과의 인연을 그리워한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 같은 성인은 물론이요, 중국의 최대 권력자 진시황 또한 피하지 못했다. 하물며 중생들이야 오죽하랴.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기에 그토록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가기 싫어하는 것일까. 골똘히 생각해 보지만, 확정적 증거가 없는 종교적 논리를 배제하면 쉬이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인연은 무수히 생겨난다.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든 아니든. 이 인연들과 어우러져 숲의 한 그루 나무가 되고, 나뭇잎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어울려 강을 만들며 한 생을 살아간다. 첫 만남은 부모이고, 가장 긴 인연은 형제자매나 부부이리라. 대체로 죽음이 갈라놓지 않는 한 떨어지지 않는 혈연은 귀하고 귀하다.
혈연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가장 빠르고 긴 인연은 초등학교 친구이리라. 더욱이 우리는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매달고 입학한 이래,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 들기까지 육 년을 한 반 한 교실에서 공부한 벗들이다. 의당 친구들의 성격이며 살아온 내력과 가족관계까지도 두루 안다. 이후 여러 학교와 직장 동료나 사회에서 맺은 인연도 소중하지만 비교하기 어렵다. 혈연에 버금갈 귀한 인연이니, 애통하고 절통하다.
옛 어른들의 짧은 삶에 비하면 우리 나이도 적지는 않다. 다만, 오늘날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83세를 넘고 여자는 87세에 가까우니, 여기저기서 ‘100세 시대’를 외친다. 기대수명까지 십여 년이나 남은 그가 느닷없이 목숨을 잃었다.
남의 죽음을 종종 목격하지만, 아직은 저 멀리 있는 듯하더니, 기대수명의 기대완 다르게 주인도 없는 검은 그림자는 이미 옆에 다가와 어슬렁대고 있다. 언제 우리도 목숨을 빼앗길지 모를 일이다. 이것저것 한 생의 정리가 필요한 시기인가 보다. 재삼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의 슬픔에 위로를 드린다.
(2023.1.14.)
첫댓글 우선 친구분의 명복과 정암의 애타는 마음에 위로를 보냅니다. 생로병사의 마지막 지점이 역시 죽음인가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과제를 잘 마무리해야 하는데... 늘 두렵고 걱정입니다. 어쩌겠습니까? 누구나 당해햐 할 일인 것을 ... 사는 날까지 욕 먹지 말고 많이 사랑하고 많이 웃으며 살아갑시다.
많이 놀랐습니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작에 써 놓고는 이런저런 사유가 겹쳐 이제 올렸습니다.
예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친구가 먼저 갔을 때가 제일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슬퍼 마시기 바랍니다~~^^
삼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_()_
고맙습니다.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절친을 잃은 아픈 마음 에 위로를 전합니다.
평소 건강한 일상 생활을 하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요즘 시대에는 많은 것 같습니다.
서구화된 식사문화 때문이라는 설도 있구요
나이 70 중반을 넘으면 생로병사에 관심이 커지면서 걱정 많이됩니다
기대수명이 크게 느는 가운데 안타까운 죽음 또한 많아지는가 봅니다. 저야 마음의 상처지만, 가족이 느끼는 고통은 더욱 클 것 같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박선생님.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언젠가는 친구들 부모님들의 상을 들었는데 언젠가부터 본인상 부음을 많이 듣습니다.
하물며 후배들의 부음 소식까지 겹치니 이젠 젊은 나이가 아님을 실감합니다.
수천명이 넘는 조직/단체 속에서 이틀에 한번 꼴로 부음을 받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이젠 속된 말로 '낄끼빠빠'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가야할 곳이 아니라면 그냥 마음으로 조의를 표할 뿐...
고인의 명복을 빌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시길 기원합니다.
완연한 봄날입니다.
건강 살피시고 행복한 삶 가꾸소서.^^*~
기대수명이 크게 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근처에도 못 가고 절명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병고에 시달리거나, 사고 또는 돌연사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겠죠.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