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이 먹어서 내 처지에 정치인의 연설에 가슴뭉클한 것을
느낄수가 있다니
괜찮않다
뒤틀리고 냉소적이지 않을수 없게 만드는 이 사회의 모든
운명적인 왕재수들 속에서
마치 기이한 존재같은 그 노무현씨
그가 말했듯이 그것은 그의 승리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위선적이고 기만적인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승리가
될것이다
그의 생생히 살아
통통튀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재수없는 것들이 철옹성을 구축하고 나대는
이 사회이지만
놈들이 쉽게 쓰러뜨리거나 정신을 꺾거나 그의 태도를 180도로 바뀌게 만들긴
힘들지 않겠나 싶다
로마인 카이사르따위보다도 그의 앞선 선택과 열정과 투명한 마음은
이 민족의 등불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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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메리 ) 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친일파가 설립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
예전에 친일파의 시와 소설, 그림을 좋아했고,
친일파의 노래를 배웠으며
지금도, 친일파의 신문을 본다.
공각기동대를 쓴 일본만화가가 죽기 전에 그랬다더군
난 인간들을 믿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키우는 개를 더 믿는다
내게 꿈깨우는 소리였다
친일언론, 친일인이 세운 사학재단 , 친일인들이 철옹성을 구축한
한반도에서 내가 바라보는 사회는 더욱 그렇다
사람다운 놈이라면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이랫다 저랫다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은 자신이 누구의 이익을 어떤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가장 자신의 득표에 유리할 것인지를 보수적(이뜻알어?) 으로
주판알을 튀기며 꼼꼼히 자신을 포장한다 어떤 놈은
겉으로 들어낸 것과 그 뱃속심중은 전혀 달라 술집작부보다
하릴없다(이를테면 케이준햄버거이지)
이시점에서 내가 애증을 갖는 그 사람 노무현
쥐뿔도 없는 것들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나서왔던 그
군벌 아니 공룡같은 거만함의 친일명문신문족벌과 재벌들의 눈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이제 경쟁의 규칙을 바꾸겠다고 떠드는 그사람
노무현의 경쟁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소양(사디즘적인 권위)이
그치에게 전혀 결여되었다는 것에 대해 놈은 확실히 우리와 다르군
하구 병신같은놈 하구 수군댄다
그는 멍청(*?)하게 해양수산부장관시절에 부서원들과 난상토론을
할때면
장관신분을 벗고 일개토론자로서 임해부서과장이 그에게 면박을
즐때도 있었다 한다
이런 인간이다 보니
이인제가 국가안위를 걱정할만하겠제 !
아참 그 그지같은 놈이 후보사퇴했다카든데
난 진부한것 제일 싫어한다
규칙을 잘 따르는 인간 특히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는 정치인 따위는
1초도 관심을 갖는게 부담스럽다
우습게도 이회창씨도 엊그제 자기도 원조보수는 아니라고
손사래쳤다
온건개혁이라던가
참내 !
처음이 항상 중요하다
그들이 출발선에 섰을 적에
아니 그 오래전부터 노무현은 일관되게 자기의 노선을 견지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좌파란 바로 빨갱이이다
그를 조중동과 문화일보등이 심히 못마땅해하며 빨갱이로
사회주의자로 몰지못해 광분하고 있는 이땅에서
친일파가 만든 학교에서 친일파의 문학(?!)을 읽고
친일파가 펴낸 신문을 읽는 그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낙인(!)을
찍고싶어하는 정치인 바로 노무현이다
나도 그 친일파의,
국토를 뒤덮는 조중동에 심취한 수없는 민들레홀씨들이 가련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 (돼지에겐 이념이 필요없다)
그들의 모양새(?!)에 가장 어울리는 장식물은 혹은 굴레는
바로 가난이다
난 매우 냉소적이라 한20억만 있다면
내가 커온 성장과정따위는 그 사고치던 반항적이던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오던
그 따구들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조중동이,이문열따위가, 군벌이 아니 참 재벌이(특히 어줍짢은 현대)아무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해도
개들아 개들아 열심히 짖어라
나는 내길을 간다 했을텐데
사회가 비민주적이고 군림하겠다는 새깨들(누굴까?)을 반길때
20억가진 작은 돼지에게도 꽃비가 내릴터이다
내가 부자라면 시민의식따위를 제일 경멸해줄 터이다
하긴 나같은 놈이나 되니까 쥐꼬리월급받는 주제여도
한개도 기죽지 않고 그 2만원이라도 다달이 시민단체에 내지
내가 작은돼지라면 정치의식따위는 변소에서 오줌싸고 나올때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렸을텐데 작은 아쉬움
공상이지만 나는 한번 재수없어하는 인간은 끝까지 재수없다고
변하지 않는다고 보아 그런인간들을 상대할땐
진심따위는 돼지목에 진주이지
아 돼지 돼지 하니까 돼지고기먹구싶다
에이 시간이 남아도는군
하여간에 난 쓰레기들과 화합(?)하는것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기서 또 나뉘어야 한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그제서야 자기 옆에 있던 사람이
사실은 상종못할 놈임을 알게 된다
사람을 찬찬히 살펴서 사귈만한 사람끼리 사귀어야 한다
그렇치 않은 놈과의 사귐은 재앙이 될 터이다
그럼 무엇으로 판별하냐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서 벌어지는 살륙에 대해 고 싸가지없는
조중동과 그 민들레홀씨들은
에 미국의 이라크패죽이기에선 그 아프가니스탄개박살내기에선
머 말안해두 그 심정 다 안다 에비에미 형제자매들이 다 입을모다
다 쓸어버려라 그랬다구 음 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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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를 뒤덮는 조중동에 심취한 수없는 민들레홀씨들이 가련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
‘바보 노무현’의 외길
민주당 후보 노무현 해부
가난과 싸우던 반항아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
제주 국민경선을 20일 앞둔 지난 2월19일. 여의도 경선캠프에서 만난 노무현 후보는 아주 다급해 보였다. 당 선관위가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 전력 시비를 제기한 그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여론 지지율도 좀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난해부터 이인제 후보를 추격해 곧 뒤집겠다고 장담했는데, 왜 노풍은 불지 않냐고 묻자 거칠게 되물었다. “바람을 만들어야 할 그들이 구경꾼인데…. 내가 도대체 어디서 바람을 만들라는 말이오.” 개혁성향 의원들조차 자신의 도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현실 앞에 낙담하고 지쳐 있었다. 스스로 다짐하듯 그는 말을 이었다. “정치, 왜 해요? 시류에 편승해 금배지 하나 달고 적당히 누리자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투신하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투신하다 깨지면, 의미 있고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다음 사람이 투신하고 또 투신하고 투신하고….”
그로부터 두달. 그는 국민경선을 통해 협소한 입지를 뒤집고 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는 저력을 보였다. 주말연속극 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정치인 노무현의 도전을 무모하다고 말해왔다. 보통 부산사람 눈에는 ‘덩크슛’ 한방 정도로 보일 3당 합당을 거부한 채 자신을 발탁한 YS를 “변절자”라 공격하며 DJ 깃발을 들고 부산으로 달려가고, 모든 정치인들이 피해가는 <조선일보>와 정면승부를 계속하는 모습.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란 평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신이 뚜렷하다. “가능성 있는 도전, 또는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분명히 하겠다.”
가난에 대한 열등감과 유년기의 반항
그의 삶의 궤적엔 무모해 보이는 도전과 실패, 극적인 반전이 뒤섞여 있다. 그는 1946년 8월 경남 진영읍 봉화산 자락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순례씨는 당시 41살, 이미 4남매를 두고 있었다. 그는 ‘돌콩’으로 불렸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탓이다. 그러나 제법 똑똑했다. 여섯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웠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1등을 도맡았다. 중학 2학년 때는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씨가 한국 최초로 만든 부일장학회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거친 반항아였다. 자존심과 우월의식도 무척 강했다. 초등학교 4학년, 반장이던 그는 누이가 물려준 찌그러진 필통이 창피스러워 어리숙한 짝을 꼬여 새 필통과 맞바꿨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시켰고 결국 필통을 되돌려주는 수모를 겪었다. 공인으로서 도덕성에 관한 첫 심판이었다. 6학년 때는 교내 붓글씨대회에서 2등을 하자 상을 반납하는 당돌함을 보였다. 잘못 쓴 것 같아 다시 쓰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종이를 바꿔주지 않아 그냥 제출했다. 그런데 옆반 시험장에서는 종이를 바꿔줬고, 그 아이가 1등을 한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중학 시절 반항아 기질은 한층 강하게 나타난다. 진영중학교에 시험을 치른 그는 입학금이 없었다. 친구로부터 ‘입학 때 책값만 내고 봄 농사를 지어 갚기로 하고 입학허가를 받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교감을 찾아갔다. 교감은 농사나 배우라며 거절했다. 서럽고 분한 마음에 눈물만 떨어뜨리는 어머니. 그는 그 자리에서 입학원서를 북북 찢었다. 그리고 “가요! 이 학교 아니면 학교가 없나” 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우여곡절끝에 입학은 했지만 1년 만에 또 일을 저질렀다. 4·19혁명의 씨앗인 3·15선거가 임박한 60년 2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을 거부하고 백지원고지를 내자고 선동했다. 미운털이 박힌 그는 1주일 정학을 당했다.
고지식할 정도의 원칙주의, 거침없는 도전, 파문에 휩싸이면서도 계속되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언행들. 노무현을 형용하는 이런 기질들은 어린 시절부터 발현되고 있었다.
방황의 나날 부산상고. 그리고 출구 없는 고졸인생
가난 앞에 그는 조숙했다. 중3 때 이미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남몰래 5급(현재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큰형의 강권에 이끌려 부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른다. 장학금과 졸업 뒤 은행취직이 보장된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교 시절은 방황의 나날이었다. 농땡이 치고, 머리를 안 깎으려 시험시간에 도망을 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성적도 중간 수준. 졸업 뒤 농협에 취직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친구 3명과 함께 학교에서 추천해준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취직했다. 한달 월급 2700원. 하숙비도 안 되는 급료 앞에서 그는 고졸인생의 앞날과 한계를 절감하고 한달 반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고시를 통한 수식적인 신분상승을 꿈꾼다.
고향 산비탈에 직접 토담집을 짓고 ‘마옥당’(磨玉堂)이라 이름붙였다. 고졸 출신인 그는 먼저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치러야 했다.(당시 고졸출신은 시험자격이 없었음) 그러나 은행에 취직할 것이라 자랑하던 어머니 체면은 완전히 구겨졌고, 적잖이 눈칫밥도 먹었다. 결국 동네 친구들과 울산 노동판에 뛰어든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한창 건설 중인 한국비료 공사장. 일당 180원, 하루 세끼 밥값 105원을 제하면 75원 벌이였다. 다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삶은 팍팍했다. 이때 소설 같은 일들이 전개된다. 한창 돈벌 궁리를 하던 그는 작은형 건평씨와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김해 농업시험장에서 감나무 묘목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묘목을 싸들고 온 신문지에서 예비시험 공고를 본 것이다. 다시 공부에 전념해 4개월 만에 예비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책값을 벌려고 다시 찾은 공사판. 떨어진 목재에 얼굴을 맞고 이빨이 3개나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불운을 겪는다. 결국 68년 입대한다.
사법고시 합격,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다
71년 제대하고 돌아오자 집안 형편이 좀 피었다. 두 형이 잇따라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그해 4월 공부를 시작했지만 보기좋게 낙방했다. 마을 처녀 권양숙씨에게 마음을 빼앗긴 때문이다. 잡념을 떨치려 한동안 절에 들어가 ‘수석합격’이라는 표어까지 내걸고 정진했지만 허사였다.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친다. 이번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불거졌던 권씨 아버지의 좌익활동 경력이 문제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연좌제에 걸려 임용이 안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 앞에 눈먼 그는 “물불 안 가리고” 밀어붙였다. 73년 1월 결혼에 골인해 그해 5월 아들 건호를 낳았다.
결혼은 고시공부에 도움이 됐다. 당시 그와 권씨는 판검사, 변호사가 되면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나게 살자고 다짐했다.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대를 개발해 실용신안 특허 출원을 내는 여유도 보였다. 75년 17회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고졸 출신인 그의 합격은 당시에도 화제였던 모양이다. 그는 <고시계> 75년 7월호에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는 장문의 합격기를 썼다.
부끄러운 초임 판사, 변호사 시절
처음부터 전문 변호사를 꿈꿨지만 가족과 아내를 의식한 그는 임용이 안 됐다는 의심을 받을까봐 판사에 지원한다. 첫 임용지는 대전지방법원. 그러나 단조로운 판사 생활에 큰 흥미를 못 느꼈고, 별로 훌륭한 법관도 아니었다.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4, 도서출판 새터)에서 그는 “당시 잘못된 분위기에 휩쓸려 변호사들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다니는 등 부끄러운 짓도 많이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1년도 못 채우고 판사직을 내던졌다.
78년 5월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는 데 골몰했다. 개업 직후 부끄러운 기억들도 숨기지 않는다. 사건수임 계약금을 반환하지 않기 위해 당사자 간에 합의가 가능한 사건을 서둘러 처리하고, 법원과 검찰 직원들에게 알선 커미션을 건네고, 판검사들에게 술을 산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렸고, 82년에 후배인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하면서 커미션까지 완전히 끊었다. “새로 시작하는 후배 앞에서 차마 추한 꼴을 보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 그리고 변신
81년 인생을 바뀌놓는 ‘부림사건’과 마주한다. 57일 동안 경찰에 구금돼 고문당한 학생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 시커멓게 죽은 그들의 발톱을 본 그는 돈벌고 요트를 취미로 즐기던 별 생각 없는 변호사 생활을 마감한다. 이후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으로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났고, 85년 송기인 신부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아예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87년 9월, 노동자 대투쟁 때 최루탄에 맞아 죽은 이석규씨의 사인규명 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다. 그러나 곧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88년 4·26총선(13대)을 앞둔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5공 실세 허삼수의 저격수로 그를 전격 영입한다. 그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영입’으로 보상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말해왔다.
무모한 도전과 반전이 거듭된 정치역정
행운은 한동안 지속됐다. 금배지를 단 그는 88년 11월7일부터 단 사흘 동안 열린 5공특위 일해재단청문회를 통해 스타로 떠오른다.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일해재단 성금의 강제성을 증언해주면서 신군부에 돈을 빼앗긴 피해자로 조명받았다. 국회의원들은 그런 정 회장을 깍듯이 예우했다. 그러나 그는 정 회장을 시류에 영합해 정경유착으로 이익을 챙기고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인물로 몰아세웠다. 한풀이를 원했던 국민은 그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곧 위기가 닥친다. 89년 3월17일 여당인 민정당이 5공청문회 참석을 거부하자 의원직을 내던졌다. 격려가 잇따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역풍이 불었다. 그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내몰려 고립됐다. 17일간의 잠적 끝에 당 지도부에 이끌려 국회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는 ‘잔인한 봄날’로 기억하며 “정치를 너무 순진하게 봤다”고 회상한다.
90년 1월 3당 합당이 시작되면서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다. YS는 신사고를 부르짖었고, 대다수 의원들이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며 뒤따랐다. 그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김정길, 이철 등과 함께 또 의원직을 내던졌다.
정말 춥고 배고픈 시절이 시작됐다. 92년 총선에서 허삼수씨와 다시 맞붙었지만 “노무현을 밀면 DJ가 대통령이 된다”는 부산정서 앞에 무릎꿇어야 했다. 95년 부산시장, 96년 총선도 패배였다. 98년 서울 종로보선에서 어렵사리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4·13총선 때 “지역구도 극복”을 내걸고 다시 부산으로 향한다. 참모와 가족들 모두 말렸지만 그는 고집스러웠다. 이번에 밀어주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에게 무참히 꺾였다. 바보처럼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은 그에게 네티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노사모를 결성해 열성적인 지지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정치적으론 위기에 몰렸다. 그의 영남 득표력은 더욱 의심받았고, 모두들 2002년 대선을 이회창과 이인제씨의 맞대결 구도로 전망했다.
그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왔다. 2001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장관시절 그는 조직의 리더로서 행정경험을 쌓았고, 이를 통해 중량감있는 대선후보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래도 민주당 국민경선이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 노무현의 반전은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였다. 그는 기자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 되기가 어려워 그렇지 후보만 되면 이길 수 있다”고 외쳤지만,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애달픈 독백처럼 들렸다. 그러나 두달 동안 상영된 국민경선이라는 주말연속극은 ‘바보’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물론 그의 영광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노무현 자신의 말마따나 “삶 속에는 성공과 실패가 언제나 하나였고, 패배는 승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경선후보로 떠오른 노무현 후보의 열기는 인터넷에서 더 뜨겁다.
노 후보의 공식홈페이지(www.knowhow.or.kr)를 통해 지난 2월말 민주당 경선이 시작된 이후 후원금을 낸 `개미 지지자'들의 모금액이 15일 8500만원을 넘어섰다. 5천여명이 참여해 1인당 1만2천원씩 낸 셈이다. 경선 시작 전 에이알에스(ARS)로 참여한 후원금까지 포함하면 1억25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노 후보의 백원우 사이버팀장은 “최근 들어 하루 평균 150여명이 약 300만원 정도를 후원하고 있다”며 “휴대폰이나 신용카드 소액 결제 방식으로 보내주는데,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바라는 30~40대 직장인 지지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노 후보의 홈페이지의 방문자수도 지난 12일 1천만명을 돌파한 데 이어, 15일 현재 1270만명을 넘어섰다. 1월말에 100만, 3월말에 2백만을 돌파했던 속도에 비춰보면 가히 폭발적이다.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직원이 카운터(방문자 집계 프로그램) 고장을 의심했을 정도다. 하루에 10만여명이 찾아 약 7천개의 글을 남긴다고 한다. 최근에는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인기가 좋았던 글이 책(<그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으로 묶여 나왔다.
그러다보니 `노무현'은 각종 검색사이트에서 수위에 오르는 인기 검색어가 됐다. 4월 들어 포탈사이트인 네이버 뉴스분야의 인기검색어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인기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뉴스검색사이트인 카인즈에서도 `월드컵'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노 후보쪽은 이런 열기가 18일부터 시작되는 민주당의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인터넷 투표'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백 팀장은 “네티즌들에게 인터넷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며 “굳이 노 후보 지지를 호소하지 않아도 노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김보협 기자bhkim@hani.co.kr
임준호님은 정말 사소한것을 물어보시는군요
제가 적은 소리는 라디오에서 들은 것이지요
공부하다가 주로클래식방송을 듣는데
어데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아무튼 그가 죽었다는 것은 틀림없는것이야요
임준호님에게서 제가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는것을
알았어요 물론 노무현씨를 지지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빼앗긴것에 대해
음 뭐랄까
전 나이도 많고 크게 희망적이지도 않지만
부질없다손 쳐도 자신을 위해 열심히 하는 편이지요
그 시간을 반토막내서 인터넷에서 그를 지지하는 글을 올리고
신경쓰고 전화해서 후원금결제하고
오늘도 케비에스서 머 환자들 아파요 해서 2번이나 700서비스
때렸는데
도대체가 내가 그렇게 선선할 정도로 많이 벌고나 하는
짓거리인지
가끔 내자신이 바보스러울때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