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 탈출 16,2-4.12-15
제2독서 : 에페 4,17.20-24
복 음 : 요한 6,24-35
그때에 24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집트의 고기 냄비는 ‘옛 인간“의 생활방식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충만하지 않습니다.
광야 길에 지친 이스라엘이 이미 잊은 듯하지만,
이집트는 설령 먹을 것이 있었다 하여도 종살이하던 집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억눌려 부르짖었기에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해방을 잊고 음식이 주는 쾌락을 찾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람을 속이는 욕망“(에페 4,22)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눈에 들어옵니다.
욕망, 어떤 것을 좋다고 여겨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람을 속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애써 예수님을 따라간 이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청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분을 떠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옛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음식을 구하려고 수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찾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그 빵이 생명을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옛 인간을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마치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여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처럼,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배까지 마련하여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찾고 있는 것은, 옛 인간을 만족시키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세상에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실수한 사람에게 “왜 그랬어?”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냥”이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이 무책임한 단어에 화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무책임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되겠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자기가 만든 ‘나’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남이 만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갖 불평불만을 다 쏟아내곤 합니다.
부모님 탓, 조상 탓, 형제자매 탓, 친구 탓, 회사 동료 탓, 환경 탓,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남이 나를 만들었을까요? 큰 착각입니다.
자기가 만든 ‘나’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면서 책임감 없이 사는 우리입니다.
그 결과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고유한 ‘나’를 만들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 탓, 조상 탓, 환경 탓, 하느님 탓 등을 하고, ‘그냥, 어떻게 되겠지.’ 등의
무책임한 말로 꽁꽁 싸매고 사는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 혼자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기 위해 생명의 빵을 매 미사 때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은 빵을 배불러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저 주어지는 빵을 계속 먹고 싶어 했기에 하느님의 일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해야 예수님의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계속 베풀어주신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무상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에도 암 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정채봉).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또 다른 생명,
곧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 명을 먹여 살리는 육체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러난 은총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분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
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 하느님의 영을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참례를 한 다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개인 일이 급해 주일을 궐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을 앞세우는가에 따라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 하는지요?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습니다.
웰빙 식품을 먹으려 애씁니다. 영양보조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빵인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썩어 없어질 빵과 생명의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체를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하면 좋겠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 못 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더 바람이 없겠습니다.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영이 맑으면 영이신 주님과 통합니다.
성시간에 참여하는 어린이 복사들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달콤하게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앞세워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파리들이 지하실 바닥에 쏟아진 꿀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먹다 보니 발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도저히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죽어가면서 파리들이 말했습니다.
“한순간의 달콤함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를 탈출 해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인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먹은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선포하시며,
제2독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고,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후에
군중을 피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오자, 그곳까지 몰려온
군중의 세 가지 질문과 한가지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군중의 질문은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6-27)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 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군중의 질문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곧 ‘믿음’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27)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세 번째 그들의 질문은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그러나 이 빵은 더는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빵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곧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동시에 이 빵을 먹는 사람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마침내 군중은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사실 물질의 빵과 생명의 빵인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의 양식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살과 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이번 주 목요일에 돌아옵니다.
건강하게 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휴가를 갔습니다.
당시에는 월요일에 가서 금요일에 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주일을 껴서 휴가를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여름 행사를 마치면 주로 바닷가로 가서 스쿠버 다이빙을 했습니다.
겨울 행사를 마치면 산으로 가서 스키를 타거나, 산행을 했습니다.
시간도 흐르고, 세상도 바뀌어서 요즘은 주일을 포함한 휴가를 가곤합니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휴가를 즐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휴가는 몸이 떨릴 때보다는 마음이 떨릴 때 가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지나치게 바쁘면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 휴가를 떠나라!’
셋째는 여유입니다. 휴가를 가려면 비용이 필요합니다.
휴가 중에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에게 휴가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넷째는 친구입니다. 혼자서 휴가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친구와 함께 휴가를 떠납니다.
저도 피정은 혼자서 간 적이 있지만, 휴가는 늘 친구와 함께 다녔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서 몸과 마음을 여유롭게 재충전하는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휴가는 주차장이 아닙니다. 휴가는 주유소와 같습니다.
주유를 마치면 차는 다시 목적지로 떠나기 마련입니다.
휴가라는 주유를 마치면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은 주차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당에 와서 영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성당에 와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영적인 주유를 마치면 가정으로,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영적인 충만함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의 눈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먹을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늙게 되고,
뜻하지 않지만, 병이라는 친구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삶의 시계가 멈추고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운명입니다.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은 ‘인생’이라는 짧은 휴가를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인생이라는 휴가에서 영적인 주유를 잘 마치고 우리의 본향인 영원한 생명에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신앙이 깊어도, 오랜 수도생활을 했어도
우리는 이 짧은 휴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야 할 곳을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양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새 인간을 입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을 존경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빵의 기적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감사와 찬미보다도 호기심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군중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마음을 두고 있다(참조: 마태 12,28; 사도 10,38; 에페 1,13; 4,30; 2코린 1,22).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 신뢰를 얻도록 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스도, 하느님의 일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27절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빵을 위한 빵만을 찾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기적보다도
만나의 기적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여기서 만나는 참된 빵이 아니며, 빵의 상징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한 현세적 양식이었고,
빵의 기적도 현세적인 배고픔을 면해준 것으로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는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이 빵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구체적인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빵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참된 빵과 동일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빵이며, 하느님의 선물 그 자체이시다.
신앙만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인간”(에페 4,24)이다.
그리스도를 택한다는 것은 죄로 물든 “옛 인간”(에페 4,22)을 벗어 버리는 것과
또한 성령에 힘입어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될 수 있도록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2코린 5,17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를 “새 인간”이라 한다.
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끊임없이 변모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분을 닮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일용할 양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정해진 양식,
필요한 양식,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할까?
풀어서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먹어야 할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다 청해서 먹어야 할까?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만나를 줄 터이니 일용할 양식만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만나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입니다.
거두는 수고를 인간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한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그 수고가 헛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베드로가 고기잡이할 때의 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최고의 어부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과 만나는 그날처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고기를 잘 잡아서 고기를 많이 잡고,
자기가 애를 많이 썼기에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지요.
능력과 노력이 그것인데 신앙이 없는 인간은 보통 자기에게 능력이 있고
거기에 노력까지 다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베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만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하니 많이 잡게 되었고,
이때 그는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주님임을 깨닫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기를 써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만나에 담긴 또 다른 뜻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달리 말하면 정해주신 대로 거두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청하는 것을 불허하시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는 가난에 관해 얘기하면서 필요가 곧 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필요해서 청하는 것과 욕심으로 청하는 것은 다르다고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청합니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조금 필요한데도 많이 필요하다고 필요에 거품이 없습니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다시 말해 하루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천년을 써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욕심부림으로써
결국 필요가 아니라 욕심으로 청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내게 더 필요하다 하진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으로는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래를 위해 많이 쟁여두지는 않습니까?
성찰 없는 성공이 곧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무실에 직원이 없는 관계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들의 고충과 애환을 120퍼센트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대체로 안 그러시지만, 일단 내려 까고 시작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니다.
주방에서, 분리수거장에서, 들판에서 땀흘리며 일을 하고 있노라면,
일단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도 느낍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척결하고 극복해야 할 측면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감정 노동 종사자들,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 요식 업소 종사자들,
그 얼마나 소중한 일에 종사하고 계시는데,
보다 존중받아야 하고 배려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정말 우리에게 큰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 주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직종에 상관없이 기쁨과 열정을 갖고 하면,
그 일이 바로 주님을 위한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과 내면, 영혼과 본질을 우선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럴싸한 말과 결과에만 몰두합니다.
그 끝은 언제나 실망과 허탈함과 좌절감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 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쓰신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듣는 신앙 공동체로 하여금 聖餐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 복음은 성찬의 의미를 깨닫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 복음에 이어 기록된 부분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이 보도한 기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는 것은 標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 말씀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먹인 것은 그분이 주시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으로 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衣食住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12)고 이미 선포였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찬에서 먹는 빵이 있고,
그것을 먹어서 발생하는 생명과 그 생명이 하는 실천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게 하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초능력 현상을 상상합니다.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능력을 우리는 神通力이라 부릅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兒童을 우리는 神童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이 은혜롭게 주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느님 앞에 處身을 잘하여 많은 혜택을 얻어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처신은 律法을 잘 지키고, 祭物 奉獻을 잘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기 마음에 들면 聖恩을 망극하게 베풀고,
괘씸하게 보면 벌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根源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그리스도인이 먹어서 생명을 얻는 빵은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수한 관계 안에 계십니다.
그 생명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이런 말씀도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16,15)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보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찬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킵니다.
그래서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찬은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피로 변하게 하는 奇蹟이 아닙니다.
성찬은 우리를 기적적으로 변하게 하지 않습니다.
성찬은 우리의 자유와 상관없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성찬은 우리가 먹어서 힘을 얻는 빵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지닌 힘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쇠고기를 먹은 사람이 소의 힘을 발휘하지 아니하고,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이 돼지의 삶을 실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은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합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을 배부르게 해 주는 성찬이 아닙니다.
‘몸’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인간관계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간관계를 배워 자기 안에 실현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시천하는 인간관계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들은
「복음서」들 안에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면 고쳐주고,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을 만나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사랑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간관계를 우리도 살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인간이 만드는 差別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높은 사람을 떠받들어 높이면서 그 앞에 비굴하게 처신하고,
낮은 사람을 순종하라고 짓밟으며 虛勢를 부리는 행동은 차별의 질서를 사는 것입니다.
그 차별의 질서에서는, 나에게 혜택에 되는 사람은 잘 대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차별의 질서를 떠나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를 다하고 ”쓸모없는 종이었다.“(루카 17,10)고 말하면서
물러설 수 있는 성숙한 자유를 권장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당당하고 성숙한 사랑을 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생색도 내지 않고, 보상도 바라지 않는 성숙한 인간이 사는 사랑입니다.
어떤 시인(이경희)은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박수도 없이,
관객도 없이
혼신으로 지켜온
당당한 인기 ....
그 당당한 고독.“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그런 헌신과 고독이 있는 당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 시대 경건하다는 유대인들은 그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도 차별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에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을 돌보아 주며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를 넘어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사랑의 생명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하는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배불리 먹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고,
주변의 생명을 자유롭게 섬기고,
그 섬김이 끝나면,
물러서는 당당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사랑입니다.
넓고 넓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우리의 생명을 삼아,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는 聖事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