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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예레 28,1-17
복 음 : 마태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예레미야는 하난야의 말에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예레 28,6)라고 말합니다.
그는 멸망을 바라지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을 선고하라는 것이었기에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난야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임금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물리쳐 버립니다.
내 마음 안에도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명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알면서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거짓 예언자가 나를 속이는 순간에는,
정말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속아 넘어 갑니다.
사람들이 하난야의 말을 따라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부수시고
성전 기물들을 되찾게 하여 주신다는 말이,
그들이 믿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마음으로 속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속삭입니다.
식별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도식에 따라 간단하게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난야에게,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말이 이루어져야 참 예언자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멸망을 예언할 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 선고를 들은 이들이 회개하면 그 심판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진실하게 깨어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책에서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이의 전사 요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소개합니다.
“해보겠다고? 해보겠다는 건 없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만 있을 뿐!”
솔직히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참 많지요.
그러나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과연 변하는 것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런저런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소망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과연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용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해야 한다.”
불가능한 상황이어도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만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게 제일 좋은 것은 써보지도 못한 채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생활에서 하는 사랑의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간다면
큰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하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면서
불가능하다고 항변합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만이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향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얹어 놓아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사랑으로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2024년 통계자료는 7억 3,3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인구의 9%에 해당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 아동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가운데 은총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건너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셨다.
외딴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역시 외딴곳에서 음식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갔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늘 복음은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입니다.
제자들은 굶주린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주님께 제안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는 않고 그러나
“그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무라시지는 않고 새로운 길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새로운 길이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긴 하지만 실은 당신이 주시는 방식인데
지금까지 제자들은 이렇게 줘 본 적이 없고 어쩌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줍니까?
사실입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결과를 놓고 보면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줄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진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주거나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형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나눠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도 받는 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선 받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가운데 받는 것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줄 마음이 없이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받아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제게 많은 후원을 해 주시는데
그것으로 제 주머니 채운다고 생각하시면 후원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넙죽넙죽 잘 받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저의 가난을 생각하며 안 받으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다 받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께 받으신 것을 오늘 제자들처럼 나누시도록
제가 다만 통로가 되어 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입니다.
제자들의 시비지심과 예수님의 측은지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래아에서 자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마태 4,12) 예수께서
오늘은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시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마 요한의 죽음을 哀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육로를 통해 몰려들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디든지 이렇게 사람들로 붐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란했을 터인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청을 들어주시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그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다.
타인의 어렵고 가엾은 처지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사람다운 사람’의 가장 기본 태도이다.
性善說을 주장했던 孟子(BC. 372-289?)도
이미 사람이 타고난 착한 본성의 발로를 四端으로 보았다.
사단은 君子가 행해야 한다는 네 가지 품성인 四德에 해당하는
仁, 義, 禮, 智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사단은 곧 仁에서 우러나는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惻隱之心,
義에서 우러나는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羞惡之心,
禮에서 우러나는 남을 공경하고 겸손히 사양하는 辭讓之心,
智에서 우러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릴 줄 아는 是非之心이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맹자가 정리한 사단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한층 돋보이는 대목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려오고 스스로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시자 때는 저녁이 되었다.
동시에 제자들에겐 끼니 걱정이 함께 엄습하였다.
제자들은 그나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군중을 해산시켜 끼니를 각자가 해결하도록 할 참이었다.
시비지심의 발로인가?
그러나 제자들의 시비지심보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앞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뿐, 자기들이 먹기에도 부족한데,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께 청하여 사람들을 헤쳐 물리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鳥足之血도 안되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란 말인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태오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다.
4복음서 전체를 살펴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2-44; 마태 14,13-21; 루카 9,12-17; 요한 6,1-15)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8,1-9; 마태 15,32-39)의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알다시피 오천 명의 기적은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으나,
사천 명의 기적은 마르코와 마태오만 전하고 있다.
물론 마르코복음이 口傳이나 예수 어록의 原典에 충실했을 것이고,
마태오와 루카 복음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다소 수정을 가하였으나,
요한복음은 원전의 기적 사회를 토대로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펼치고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 비유 설교(13장)와
공동체설교(18장) 사이에 등장하는 주된 모티브는 ‘빵’이다.
적어도 마태오 복음 14,13에서 16,12절까지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빵’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우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4,13-16)으로 시작하여,
그 가운데 사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5,31-39)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두 가지 빵의 기적에 대한 의미해석(16,9-12)으로 마무리된다.
복음이 전해주는 빵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성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다니면서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였다.
자신들의 평범한 이론과 습관들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예수님은 마치 평범한 일처럼, 그냥 우리가 늘 생각하고 행하는 패턴처럼 여기신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단순한 빵의 기적을 가지고 생명의 빵(성체성사신학)을 구상하거나(요한 6장),
마르코복음에는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들’(21절)을 끌어들여
누구나 참여하는 미사성제를 마태오 복음사가가 구상하든지 간에,
오늘 예수님의 福音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간에,
있는 것으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모자라는 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채워 주실 것이다.
오늘은 빵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셨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죽음과 부활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실 것이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는 빵의 모티브를 통하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서서히 예고 하시려는 것이다.(마태 15,13 이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