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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하느님을 향한 훈련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요한14:8).” 이에 예수가 대답을 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Lord, show us the Father; that is all we need. Those who believe in me will do what I do- yes, they will do even greater things,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필립보는 예수의 제자로 하느님 아버지를 보려는 열망이 큰 제자였습니다. 눈앞에 예수가 계시니 확실하게 믿게 된 필립보입니다. 눈에 보이니 믿을 수밖에요. 한 번 봄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세상은 보면 믿는다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필립보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표단수로 예수께 질문하는 듯합니다. ‘보면 믿겠으니 하느님 아버지를 보게 해 주십시오.’라는 이 질문에 예수의 답은 ‘보게 해주겠으니 믿음을 더 확고히 하거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믿으면 하느님 이버지가 보인다.”는 예수님의 답변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신앙생활은 “보고 난 다음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난 다음에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보이고 하느님의 움직이신 기적이 보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사랑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길이 곧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하느님을 보게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보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을 우리의 전부로 아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전부가 하느님이라고 믿는 그 믿음으로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께로 간 이후에 큰일을 하는 성공회라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 큰일은 예수가 하셨고 우리는 작은 일을 하였는데 예수가 하늘로 가신 이후에는 우리가 예수가 하셨던 큰일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같이 예수가 계실 때 믿었고 이제는 예수가 떠나서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예수를 믿는다니 이제부터는 더 큰 일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대학교 일학년 때의 일입니다. 정부영선배와 강희창선배, 이후영선배의 작업으로 대전시내 중고등학교와 대전 인근의 도시인 논산 등의 학교를 방문하여 전통국악공연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정부가 국악을 천시하던 때였습니다. 악기를 들고 중고등학교를 방문하며 연주를 하면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신기해 하며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국립과 시립과 도립으로 국악관현악단이 세워져 있지만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그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한 동아리가 국악선양을 위하여 시간을 내서 청소년들에게 국악을 알렸던 것입니다. 마침 제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국립장대극장에서 해금을 연주했던 실력이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강은일 해금교수가 후배신도와 춘천국악원장이신 선배신도부부가 서울대성당에 계셔서 기쁩니다. 이건용교수신도가 우리 성가를 고품격으로 높여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거문고와 수금 타며 하느님을 찬미하여라(시편150:3).” 이후 뉴욕에서 해금연주로 황조가를 하였고 런던의 람베스궁에서 복음을 전통가곡으로 노래를 하게 되었고 로스앤젤레스 교구청의 성당에서 판소리로 복음을 소리하게 되었습니다. 슬픈소리의 단조의 해금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다니 저를 놀랍도록 사용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고개를 넘으면 청벽에 있는 금강의 너른 백사장이 보입니다. 여명회라는 모임으로 33인이 청벽에서 모였었습니다. 암울한 시대에 우리끼리 한껏 젊음의 자유를 추구하던 자리였습니다. 후에 6인이 더해져 39인이 된 여명회가 되었습니다. 청벽에서의 모임은 각자 선한 삶으로 선한 세상을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모였고 이후 그렇게 각 처소에서 서로 도우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당에 배고픈 신학생을 일년간 배고픔을 가시게 해주신 분이 한기온 여명회 회장이셨습니다. 청벽모임 이후 다른 한 모임을 하고 집에서 자려 할 때 이상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고 조사받는 경찰서까지 와준 한기온 선배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 일로 군훈련소에 들어갔습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포로가 된 사람이 사도 바우로입니다. “이방인 여러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가 된 나 바우로(에페3:1)”처럼 경찰의 포로가 되었고 군대로 이송된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이 아닌 특별한 방식으로 군에 가는 삶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다는 의미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명회는 착한 사람들 모임입니다. 이런 모임에 참여한 것도 이상합니다만 사람들이 좋아서 모인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군에 들어 간 것입니다. 이상한 시대에 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상한 방식으로 사는 경험을 통해 군대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다른 모임은 많이 사라졌는데 여명회는 지금까지 존재하니 역시 착한 사람들 모임입니다.
일을 하는 중에 자신은 잘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전체가 망해가는 길로 들어간 경험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전체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보는 총괄적인 시각이 중요합니다. 부분으로 잘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교만한 것입니다. 전체가 망해가는 중에 부분이 잘해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5명이 조를 잘 짜서 저를 안전처로 데려다 주고자 교정 밖에 교문 앞의 주차장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한참 시내를 향해 버스가 가다가 갑자기 버스가 늘 가는 노선을 벗어나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경찰서 앞마당에 버스가 주차되었고 그곳에서 제가 체포되었습니다. 버스가 꽉 찼었는데 대다수가 경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안내하는 학생동료들을 경찰이 모르고 일반학생으로 알았기에 조용하게 경찰서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경찰의 타킷이 저 혼자였음을 알았고 저는 혼자 체포된 것입니다. 경찰서에 갇혀서 저는 이 상황을 수없이 복기하였습니다. 다시는 잡히지 않는 길을요. 우리가 일정은 잘 짰지만 저들이 우리를 보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잡히고서 저 스스로 좌절에 빠졌지만 총괄적인 시각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총괄적인 시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대한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믿음 단 하나를 가지고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하니 전체를 보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군에서 보초를 서면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한 대수의 “바람과 나”입니다. “끝 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 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이 노래를 좋아한 것을 본다면 저는 낭만적인 사람이지 치열한 혁명가는 못 됩니다. 하지만 이 노래가 제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할 일이 많았었는데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군에 오다니 동료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종이니 일과 이후에만 중대의 군종병으로 잠을 잘 시간에 한 시간을 내서 한겨울 전방 철책선의 추위에 보초를 서는 동료군인들을 찾아가 뜨거운 커피나 미숫가루를 탄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습니다. 한밤중에 보초서는 병사를 향하여 큰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담고 걸어갈 때가 예수의 제자가 된듯한 착각을 많이 갖고 힘차게 걸었습니다. 이때 감신대 출신의 대대 군종병이 계셨는데 하느님께 열정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은 사도 바우로 같은 열정으로 보였기에 그분에게 신앙생활의 열정을 많이 배웠습니다. 어디선가 목회자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에서 아주 부끄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저보다 작은 키의 동료군인과 제가 배치를 받고 육사출신의 합리적인 판단을 겸비한 조규덕소대장이 결정을 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관단총은 무겁고 소총은 가볍습니다. 키가 큰 제게 기관단총을 담당하고 키가 저보다 작은 동료군인에게 소총을 담당토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자신도 모르게 소총을 담당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소대장이 큰 눈으로 저를 한참 보셨는데 무진장 창피했습니다. 학생군인이 동료군인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바로 시정하고 기관단총을 담당하겠다고 정정했습니다. 이후 군대생활조차 자신을 주님을 향한 사람으로 단련받는다는 것으로 여겨 자신 안의 이기성을 없앨 수 있도록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내면이 하느님의 자비심으로 채워진다면 그 영성으로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순천의 돌산도 출신의 작은 키의 동료군인에게서 성실성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수가 많은데 걱정이 될 것이다(신명7:17). 그러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파라오와 온 이집트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아라(신명7:18). 그들을 두려워하여 떨지 마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지 않니하랴? 그는 크고 두려운 신이다(신명7:21).” 군대 생활은 나보다 훨씬 크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육체훈련을 통해서 내면이 훈련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제 옷깃에 달린 액서서리에서 제 삶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을 훈련에 의해서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북대 안헌수의 숙고하는 삶과 김원중의 활동적인 삶은 제게 많은 배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군에서도 많이 배우는 학교로 제게 다가온 것입니다.
농고 2학년 중퇴한 자로 서류를 만들어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노동자의 삶을 통해 학생으로의 삶은 무참히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은 논리적일수록 부분을 본다는 점에서 노동자의 전체적인 삶을 통해서 비논리지만 총괄적으로 보는 훈련을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특별한 부분을 안다고 하여 인간 전체를 이해한다는 학생으로의 시각이 비참하게 부서지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 노동자의 삶이었습니다. 총괄적인 시각을 통해 인간이해를 깊게 하게 되어 온전한 인간이해를 하게 되고 인간의 존중을 위하여 사는 노동이야말로 가장 값있는 삶이었음을 순전히 노동자로부터 배웠습니다. 예수가 제자선발로 조직을 꾸리셨는데 대다수 노동자출신으로 제자 구성을 한 것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된 부분입니다. 일을 하느라 정확하게 세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늘 공부할 학생으로 겸손히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국민들의 동의를 많이 받는 길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됩니다. 겸손은 서로서로 연결하며 사는 길을 모색하게 합니다. 노동자의 삶을 통해 겸손함을 익히게 하여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의 하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종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게 하시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공장 다니면서 대전대성당을 다니는 것은 꿈길을 걷는 시간처럼 제게는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1965년 태백에 대천덕신부님이 세우신 공동체 예수원의 구호가 붓글씨로 예배당 안에 제단 옆에 액자로 걸려 있습니다. “노동이 곧 기도요. ‘기도가 곧 노동이다 Ora et Labora’.”입니다. 이는 성 베네딕트수도원장의 가르침으로 예수원 공동체의 모토로 삼으신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공동체가 다 부서진 비참한 삶일 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을 적용하는 수도원적인 예수원 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맺기, 인간과 인간이 신앙 안에서 관계맺기, 인간과 사회와의 신앙 안에서의 관계맺기를 목표로 하여 공동체로 삶의 질을 높여가는 신앙공동체가 예수원입니다. 지금은 기존의 예수원 공동체적인 삶도 있고, 아처토리신부의 아들인 벤토리사제를 중심으로 북한선교를 지망하는 외국인들이 수십명이 와서 기도하고 배워가는 중입니다. 노동이 기도라는 성 베네딕트의 원리를 예수원 공동체에서 밴토리사제가 꽃을 피우는 중입니다. 이후 예수원의 모델로 한국인이 세운 수도원에 가 보면 너무 인위적이고 자연스러움이 적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대천덕신부의 자유를 향한 자기 소유를 공적으로 내놓고 사신 자유가 예수원에 스며 있기에 자유스러움이 흐르는 예수원이 됩니다. 매년 한 번씩 방문하여 하루 밤을 자면서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벨기에의 노동사제가 쓴 “우정일기”가 제 책상에 있어 자주 보곤 합니다.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 영적일기로 자신을 성찰하는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리고 일본식민지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삶의 규칙이 기억나곤 합니다. “노동을 하라. 노동을 할 수 없거든 노동자를 만나라. 노동자를 만날 수 없거든 꿈에서라도 노동을 하라.”는 원칙을 가슴에 새겨놓고 노동자를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의 선교도 이와 같다고 봅니다. “선교하라. 선교할 수 없거든 선교하는 이를 만나라. 선교자를 만날 수 없거든 꿈에서라도 선교하라.”라고 노동의 글자 대신에 선교를 넣어 묵상하곤 합니다. 이제 선교로 마지막 시간을 수놓아 하느님께 찬미를 바칠 것입니다. 시편 150편의 마지막 절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숨 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시편150:6)”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노동을 한 것이기에 하느님 찬미를 먼저 바칩니다.
공장을 나와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기숙사비를 내라던 요한학장신부에게 “이 건물 모두를 노동자가 지었는데 노동자에게 기숙사비를 내라 하시다니, 이곳이 신학교가 맞습니까?” 라는 억지 대답을 하였는데, 이요한신부께서 제 얼굴을 보시더니 지갑을 열고 기숙사비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기숙사비를 내게 되었습니다. 공장활동을 마치고 나니 제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공장 다니며 번 돈을 공장활동에 다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지학생을 받아 주신 이재정학장신부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피선주교가 되었다고 원로사제가 불러 큰 백화점에서 제게 음식을 사주시고 가슴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가슴십자가는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제게 주셨습니다. 가브리엘신부께 감사를 올립니다. 다양하게 저를 경험하게 하셔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쓰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뜻에 감사를 바칩니다. 하느님께 꼭 붙잡혀서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부제가 되고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고 대주교(의장주교)가 된 것입니다. 무지한 한 사람에게 부어주신 은총이 너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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