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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6일 화요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제1독서 : 다니 7,9-10.13-14 또는 2베드 1,16-19
복 음 : 마르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혀 줍니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께서 본래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장차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셔도,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마르 9,9)
이 변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겪는 이들의 처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의 시점에서 다시 복음을 읽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수난받으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수난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전능하신 분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셔야 하였는지
인간의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모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가 이를 보여줍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 떠나실 일”(루카 9,31)을 이야기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난 그 순간에, 그분의 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까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의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참으로 하느님께서 오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표지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들의 증언이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법정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지난 7월에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가진 해외 성지순례였기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낮 기온이 44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에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44도가 되면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집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일정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순례에 임했습니다.
순례를 모두 마치고서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그늘을 찾아가면서
‘쉬고 싶다’라는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지만, 순례를 마쳤을 때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고생했기에 더 행복도 크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편하고 쉬운 것만이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 타볼산에 초막을 지어 머무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 안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 행복은 편하고 쉬운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늘의 구름 속에서 들렸던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이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좋은 것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터에서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 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체험을 함부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지를 알려 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이무기가 용이 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뱀이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용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무기도, 용도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3가지를 배우고 수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지식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영성을 닦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해 체력을 키웁니다.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도 신심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신심이 깊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능력과 신심이 좋지만, 건강 때문에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지만,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모른다면
나비가 원래는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생이 사제가 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본당으로 파견되어 사목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모임의 자리에서는 상석에 앉게 됩니다. 한 말씀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배식을 받습니다. 버스에 탈 때도 앞자리에 앉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1인실을 사용합니다. 사제이기에 존중받고, 사제이기에 존중받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존중을 받는데, 익숙해지면 나비가 애벌레의 시기가 있었음을 망각하듯이,
왜 사제가 되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에 바리사이의 자만과 율법 학자의 교만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어가고 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빛이 났고, 옷은 새하얗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곳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그리고 하나는 주님을 위한 천막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무기가 용이 되는 성공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성품성사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걷는 표징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준다.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 영광에 오르셨다.”
(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 때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의 상징이다.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약성경의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 주는 말씀이다.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성장하며,
그 안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
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변모 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희망의 증인으로 뽑힌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오늘 감사송인데 뽑힌 증인들 앞에서 십자가 죽음을 대비하여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음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을 증인으로 뽑힌 우리로 정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앞두고,
그러니까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신적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신 것인데 여기에 의도가 있습니다.
변모의 의도는 간단명료합니다.
당신이 돌아가셔도 절망하지 말라는 것이요 희망을 보라는 것이요,
가장 참혹한 순간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눈앞이 캄캄하다. 앞이 캄캄하다.
이처럼 현재의 암울함이 눈을 멀게 하고 미래를 캄캄하게 하기 마련인데
이때 암울한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미래의 눈, 희망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암울한 현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고 현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현재의 암울함은 직시하고 인정한 다음,
그다음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죽었는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들은 훨훨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제자들이 당신 죽음을 보고 부활을 내다보라고
당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세 제자에게만입니까?
왜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십니까?
그 의도와 이유도 분명합니다.
희망의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어느 공동체 건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미래 희망을 볼 줄 알면 증인이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증인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는 미래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재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우리 가정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누가 우리 공동체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는 암울하지 않다고요?
현재에 감사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현재 암울하다고요?
그리스도인인 내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희망의 증인입니다.
선별된 제자들과 신적 영광 체험
박상대 마르코 신부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께서 곧 다가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선별된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받게 될 영광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자기 계시적 사건으로서
공관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습니다.(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이와 같이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복음서상의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공관 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내용을 보면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 복음의 원전을 놓고,
일단 그 내용과 구조를 따르면서 고유의 특성을 살려 이 대목을 편집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예수님의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즉 사건의 주요 내용은 같을 수 있으나 제각기 약간의 수정, 변질, 첨가, 삭제 등의
편집 방식으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놓고 세 복음서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이 사건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력에 따라 오늘,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에서,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에서, ‘다해’에는 루카 복음에서
이 대목을 복음으로 봉독하는 것입니다.
각 복음서의 외형상 차이를 살펴보면,
오늘 복음인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9,2-10)을 베끼면서
베드로와 제자들의 위상에 흠집이 날만 한 구절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마르 6절)와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물어보았다.“(마르 10절)는
부분을 삭제해 버립니다.
또한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변한 모습(얼굴과 옷)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루카는 이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예수께서 기도하는 동안에 모습이 변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저자 특유의 의도를 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의 복음이
어느 복음서에서 봉독 되든 간에 이 축일의 핵심 사상은
부활하신 예수와 지상 삶의 예수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서 누리는 영광은
이미 지상 삶의 예수 안에 묻혀있다는 것인데,
그 영광은 사실 모든 인간의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그 영광을 애써 숨기시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인간에게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첫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박탈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가지고 있는 메시아적 능력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하여 적어도 제자들로부터 검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아직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는데,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의 하느님으로서의 영광이
드디어 몇 명의 제자들에게 체험되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체험이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허락된 것은 아니고,
변모 사건 전에 사전 준비가 있었는데,
복음서를 살펴보면 세 복음서 모두가 변모사건을 위해
일련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관정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을 통해 묵상한 바와 같이
①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②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③ 예수 추종의 길, ④ 종말의 시기에 관한 단절어,
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순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카 9,18-9,36)
예수의 일행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도착합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세운 도시로서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인데,
여기서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부터 이어지는 대목이 오늘 복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이 겉으로는 정확하고 장황하였으나 그 실속을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통하여
자기들이 고백한 메시아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했고,
그 길이 자신들 또한 가야 할 길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받고 죽어야 하며,
그러나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지존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으로
우뚝 서게 되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순서대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미리 볼 수 있는 특권은 단지 몇 명의 제자들에게만 오늘 허락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 산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도시가 헤르몬 산맥 아래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헤르몬산이나 그 산맥에 속하는 산일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보여주시는데,
이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은
특별히 뽑힌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말씀으로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내용을 실제로 보여주시는 것인데,
말하자면 예수께서 이론적 가르침을 뒷받침 할 만 한
일종의 산 체험이나 견학 내지는 실습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거룩하게 변한 예수님의 얼굴과 옷),
자신의 귀로 들으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에게 감추어진 신적 품위를 얼마 동안 향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모세(출애 33,18-23)와 엘리야(1열왕 19,9-13)도
거룩한 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믿음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인데,
이들은 구름이 일자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사랑받는 아들이며,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의 성취자로 계시되며,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 홀로 제자들이 들어야 하는 주님으로 계시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까지는
철저하게 함구 되어야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오늘 일은 말로만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참다운 제자 됨의 추종으로 살아야 하고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모습은 우리가 지향하는 구원의 목표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영광을 받게 될 그 찬란한 모습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그것을 이해시키시려고 직접 체험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면서
영광을 받으신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래서 아름다우신 주님께 관한 체험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받았던 수많은 은총의 시간들과 그 체험들은
주님을 이해하고 믿는 데 소중한 추억이며 신앙의 힘입니다.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받았던 은총의 체험,
또는 피정이나 신심행사를 통해 체험한 것도 있을 것이며,
생활 안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받았던 소중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생생한 체험이 그분의 마음과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