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웅 선수는 공주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 부산 경성대 - 한화이글스에서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키는 187이고, 체중은 80킬로 전후입니다.
원래는 공주교동초등학교에 다녔으나 육상대회에 참가했다 공주중동초 야구부 감독님의 눈에 띄어 중동초로 전학을 가서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주로 유격수로 출전하며 중심타자로 활동했으나 중 3 때 180까지 자라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투수로 전향합니다. 유격수 시절 빨리 송구하던 습관이 남아 장신임에도 볼을 위에서 내리꽂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고교시절 선수생활을 햇죠.
고 3 때, 동기생 강준기, 이보형, 1년 후배, 박찬호, 홍원기, 오중석 등과 함께 공주고를 전국레벨의 팀으로 올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감독과 말못할 트러블이 있어서 8강을 완투하고 4강에 내보내지 않는 등 우여곡절을 거칩니다.
청룡기 8강에서 위재영의 동산고를 맞아 완투하며 팀을 4강으로 이끌었으나, 준결승에서는 손혁이 완봉승을 ㅣ기록했고 결승에서는 김종국, 박찬호, 손혁, 노장진까지 등판했지만 신재웅은 끝내 등판하지 못했습니다. 9회말 투아웃에서 대타로 등장했으나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박현승의 경남고에 우승을 내주고 맙니다.
이후 당시 감독에 반기를 들고 1년 후배들이 집단으로 선수단을 이탈하면서 감독문제가 수면에 올랐고, 2학년 선수들이 복귀하면서 전국체전에서 우승하면 감독을 경질하겠다는 이상한 약속을 받게 됩니다.(즉 선수들이 우승해 주면 선수들이 원하는 대로 감독을 교체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전국체전 1회전에서 청룡기 우승팀 경남고에 맞서 홈런을 포함한 투타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준결승전에서는 안희봉 정민철의 대전고를 맞아 선발등판하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2루타 두방으로 2타점을 올려 3:0 승리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신재웅 이후 박찬호가 경기를 마무리했죠.
결승전에서는 심재학의 충암고를 맞아 5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이어 등판한 박찬호가 1점으로 잘 막아 졸업 직전 공주고에 전국대회 두번째 우승이라는 선물을 남기고 경성대에 진학합니다.
경성대에 진학한 후 장신을 살리는 내리꽂는 투구폼을 익힌 신재웅은 엄청난 노력으로 일약 신데렐라로 부상합니다. 첫 등판이던 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강호 연세대를 맞아 12삼진을 뺏어내며 1실점 완투로 존재를 알린 후 여러 경기에서 김경환과 함께 팀의 에이스로 활약합니다. 이 때의 활약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2학년때는 김경환, 신재웅, 염종석, 최정환이라는 최강의 투수진을 구축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경성대에서 훈련하던 염종석이 돌연 롯데에 입단하면서 과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결국 허리부상으로 2학년 초반에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상에서 복귀한 첫 대회인 천마기에서 팀에 우승을 안기며 우수투수상을 거머쥐고 3학년이 되면서 다시 국가대표에 선발됩니다. 당시 국가대표가 2팀으로 편성되었는데, 1진은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2진은 대륙간배 대표팀이라고 봐야 합니다. 신재웅은 대륙간배 대표팀의 에이스였고, 1진은 지금도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호화멤버들
(조성민, 임선동, 위재영, 박찬호, 차명주, 전병호, 심재학, 홍원기, 최경환, 박재홍 등)로 구성되었고 대륙간배 대표에는 신재웅을 포함하여 최원호, 최영필 등이 선발되었으며 타자로는 이숭용이 있었습니다.
대륙간배 1회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최영필을 구원등판 6이닝 동안 9삼진을 솎아내며 팀에 승리를 안겼습니다. 다음 경기인 최강 미국과의 경기에서 8이닝 동안 16개의 탈삼진과 154km의 강속구를 뿌리며 홀로 분전했지만, 타격과 수비의 침체로 5실점하며 패전투수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 박찬호와 함께 신재웅의 영입도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마지막 대학 대회에서 이종범의 건국대를 맞아 9회말 2사까지 2실점으로 호투하며 우승을 눈앞에 뒀으나 평범한 플라이볼을 외야수가 놓치며 급격히 흔들려 이종범에게 마지막 대회 우승컵을 내주고 맙니다.
4학년이 되면서 박찬호 등의 추천으로 찾아온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영향인지 시즌 초반 특유의 강속구가 살아나지 않아 고생했지만, 사실 메이저 스카우트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국내대회에서 많은 경기를 던진 후 바로 대표팀에 선발되어 또 던지는 살인적인 일정이 이 시기부터 신재웅의 구위에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투수력이 약하던 한화는 단국대의 특급좌타자 심성보와 신재웅을 두고 고민하다가, 신재웅에게 2억의 계약금을 안기며 입단시킵니다. 하지만 대학시절 부상을 앓고 있던 신재웅은 전반기에 거의 등판을 하지 못하다가, 후반기에 양준혁, 이승엽 등 홈런타자가 즐비하던 삼성을 5안타 완봉으로 잠재우며 차세대 한화 에이스임을 알립니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이 되지 않았기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고, 힘을 앞세운 강속구투수였던 신재웅 선수는 부상임에도 강속구를 던지기 위해 투구폼을 더 크게 해서 오히려 몸이 더 망가지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이후 2년간 서서히 부상에서 회복하며 대학 시절의 명성을 회복하던 신재웅은 1998년 130이닝을 던지며 6승을 올리는데, 6승이라는 숫자보다 당시 한화 팀이 많이 약한 편이었습니다. 문제는 99년 시즌을 앞둔 겨울 훈련에서 당시 투수코치를 하던 계모씨의 주사를 한용덕 선수와 함께 항의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두 선수 모두 99년 시즌을 망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한화는 우승을 했죠.
2001년인가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재기의 날개를 펴려고 했는데 경기 중 양현석 선수가 친 타구에 무릎을 정통으로 맞아 실려 나가는 불운을 겪으며 다시 한번 날개가 꺾이고 맙니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신재웅 선수는 2002년 개막전에서 정민철을 구원등판했으나 불안한 피칭으로 1군에서 내려가고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웨이버로 공시되어 한화 선수생활을 마치게 됩니다.
이후 자신의 볼에 자신있던 신재웅 선수는 모 고교에서 투수코치를 하면서 몸을 추슬려 직구 148킬로미터를 회복하고 다른 프로팀을 알아보던 중 모교인 공주중학교에서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오자 고심 끝에 지도자의 길을 택하여 현재까지 공주중학교 감독으로 재직 중입니다.
선수시절 주무기는 빠르고 묵직한 직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였는데, 다른 선수들은 그의 직구를 치면 손바닥이 아프다고 할 정도로 무게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좀 원망스러운 것은 경성대학교의 투수기용입니다. 지방팀이라서 투수 수급이 원활치 않은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전일수 - 김경환 - 신재웅 - 최정환 - 이대성 - 정원욱까지 90년대 경성대 에이스로 활약했던 선수들은 공교롭게도 프로 들어올 때 최고대우를 받고 입단했으나 이미 대학 시절 많이 혹사당한 몸으로 대학시절의 명성을 살리지 못하고 프로생활을 너무 짧게 마감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눈물날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던 신재웅 선수는 비록 아쉽게 선수생활을 마감했지만, 제 마음 속에 신재웅 선수는 영원한 공주고 에이스로 남아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인 & 엠엘비 파크 펌^^
첫댓글 정말 솔직히 어려서 박찬호선수와 그런 활약은 했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씩 신재웅 선수 경기도 다 찾아서 보고 그랬는데......부상이 너무 아쉽네요......하지만 지금이라도 야구의 관련된 일을 하시니까 더 행복하실수도 있겠네요 힘내세요 신재웅코치님^-^
좋은글이네요..
어... 이거 내가 쓴 글인데...
박찬호 선수에 대해서 고교 시절엔 되게 못했는데 미국 가서 날았다라는 등의 소문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사실 박찬호 선수 고교 시절에도 결코 못하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방팀으로 매스컴을 덜 탔고, 박찬호 선수가 고3때 팀케미스트리에 문제가 있어서 막강 전력을 가지고도 전국대회에 출전을 못해서 박찬호가 덜 알려진 것 뿐이죠.
신재웅선수 오랜재활끝에 돌아와서 삼상대로 선발나와서 호투하면서 데뷔전 승리하던거 아직도 기억납니다. 단지 이후 분석당해서 별로 재미 못봤었죠.
공주고짱
제가 대전에서 직장인 야구하는데염 연습 구장이 부족해서 공주 중학교 가서 연습을 자주 하는데 가끔씩 뵙곤 한답니다..실제로 보면 덩치가 산만하시구염 솔직히 산적 필이 좀 났어염..ㅋㅋㅋ 근데 싸인두 받구 그랬답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봤습니다. ^^
공주고에 손혁도 있고 노장진도 있지 않았나? 신재웅,손혁,박찬호,노장진. 하고 누구 하나 더 있어서 이름있는 투수가 동시기에 있었던것 같은데(박찬호는 손혁이랑 동값이었든가?) 일설의 박찬호와 부자집 아들래미인 손혁.
제가 신재웅 선수랑 친분이 좀 있는데~~~ 박찬호가 메이저리거 돼서 공주에 박찬호기 야구대회대 신재웅이 먼저 인사를 했는데~~~ 찬호가 개무시했다던데요~~~ 그래서 신재웅 선수는 찬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박찬호의 인격을 감안할 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ㅡㅡ;;; 박찬호선수가 선배를 개무시한다뇨 이건 무슨 신재웅 선수와 친분이 있긴 있나요 ?
근거없는 낭설 하지마세요
김기중이라고 제 친구도 그러던데요 싸가지 없다고!!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아직도 강하게 기억이 남는건 큰 모션에 투구폼이였던거 같아요... 정말.. 고교 및 대학시절 혹사로 인해 아까운 선수 단명 시켰습니다. 그때만 아니였다며 송진우ㅡ 정민철 ㅡ 구대성 ㅡ 문동환 ㅡ 신재웅- 최영필... 정말 대박..이였을 듯
위에 신재웅 선수 얘기 사실인가요? 찬호 별로 안 좋아한다는.. 박찬호는 신재웅을 최고의 투수라며 항상 치켜세워졌었는데... 예전에 메이저리그가서 한국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더 있는데 그가 바로 신재웅이다.. 라고 했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는데요..
앞에 명단은 유니버스이다 대회 대표인 1진이고요(조성민, 박찬호 등), 최영필, 이숭용 등이 대륙간배 대표팀 명단이었습니다.
당시 공주고의 투수들 뿐 아니라 타자들도 좋은선수들이 많았습니다. 시즌타율 .491로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던 강준기 선수가 주장이었고요. 투수는 신재웅, 박찬호, 손혁, 김종국, 노장진이 주축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름있는 투수 한명 더라고 한다면 이대성 선수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그러나 이대성 선수는 고교시절에는 투수로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구요. 대학 진학 후 195의 장신을 이용한 파이어볼러로 명성을 날렸죠. 훗날 쌍방울에 2차 1번으로 지명되어 1차지명인 오상민(1억 8천)보다 더 많은 2억을 받고 입단했으나 어깨 삼각근 손상으로 한경기도 뛰지 못하고 은퇴했습니다.
김종국이라면..기아 김종국?
아닙니다. 기아 김종국은 아니구요. 고교 졸업후 당시로는 드물게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었습니다. 삼성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아서 대만에 임대도 하고 했었는데 소리소문없이 선수생활을 그만둔 선수입니다. 당시 신재웅과 박찬호는 강속구 투수이면서 공이 약간 가벼운 면이 있었습니다. 손혁 선수는 강속구라고 하긴 어려운 구속이었지만 공이 묵직했고, 커브를 잘 던졌구요. 김종국 선수는 체격이 크기 않고 변화구를 다양하게 잘 던졌지만 공스피드는 앞서 말한 세 선수에 비해 떨어졌습니다.
신재웅 선수의 투구폼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 투구폼이 커서 도루를 많이 허용하긴 했지만, 그의 실력은 최고였습니다. 박찬호가 인정한 정말 훌륭한 선수였는데 끝내 멋진 날개을 펴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접어 아쉽네요. 지도자로서 좋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정말 아까운 선수에요.....
제가 알기로도... 박찬호선수 메이져에서 뛸때.. 외신인터뷰도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물엇는데... 신재웅이라고 햇엇죠... 투수인데 자기보다 훨씬 잘던진다고도 햇고... 그래서.. 도대체 신재웅이 누구냐며.. 난리 낫엇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