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알랜드의 미모의 무용수 로라 몬테즈(본명은 일라이저 길버트. 친척집에서 예쁘게 자라자 나쁜 엄마가 늙은이한테 시집보내려고 불렀지만 자기 성격을 맘에 들어한 의붓아버지한테 천 파운드를 받아 배타고 도망감. 음란한 춤을 추는 댄서가 되자 그녀의 엄마는 딸이 죽은 것으로 생각해 상복입고 검은 테두리 두른 편지만 썼다) 는 음악가 리스트를 비롯해(리스트의 동상 제막식 때 초대 받지 않고 파티장으로 달려가 식탁위에서 요리들 사이를 누비며 춤을 추자 같이 살던 리스트가 질려서 로라 잠든 틈에 보따리 싸 문까지 자물쇠로 밖에서 잠그고 야밤도주함. 지나가던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2층에서 가구들을 밖으로 집어던지는 로라를 구경할 수 있었다. 힘도 좋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다가 느닷없이 뮌헨으로 갔다.
그녀는, 스페인 태생의 천재 무용수라는 것을 선전하면서 예술 애호가인 왕 루드비히 1세에게 회견을 청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왕은 그녀의 미모와 풍만한 자태를 보고 치근거렸다.
"음 미인이군. 한데 그 멋진 가슴은 진짜겠지 ? ”
그러자 로라는 귀여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드레스 위로 예쁘게 부풀어오른 가슴 언저리를 나이프로 찢었다.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폐하”
드러난 멋진 가슴을 본 왕은 당장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국왕으로부터 호화로운 저택과 백작 부인의 지위를 얻은 그녀는 왕을 카톨릭 교도로 만들고 예수회를 쫓아내려 제 세상인 양 궁정을 드나들었고, 정치에 참견할 정도로 권력을 쥐었다. 불독과 채찍을 들고 예수회를 보면 덤벼드는 그녀에게 돈을 탕진하고, 점점 정치를 소홀히 하는 왕에게 국민의 반감은 차츰 높아져 갔다. 결국 뮌헨 대학의 학생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로라를 추방하라고 국왕에게 촉구하였다. 루드비히 1세는 결국 폐위되고 로라는 결국 입은 옷 그래로 궁전에서 몰래 도망쳐 나와야 했다. 이것이 그녀의 불운의 시작이었다. 그 후 런던에서 결혼하여 스페인에서 이혼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연을 하다가 프롬프터를 발로 걷어차고 자신도 걷어차였으며 자신의 춤이 추잡하다고 혹평한 기자를 채찍을 들고 쫓아다니다 다시 결혼했는데 중혼죄로 고소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너무 남자 관계가 많았던 탓인지 30을 넘기자 갑자기 나이를 먹어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그후 갑자기 너무나 얌전해져 결혼했는데 상대를 밝히지 않았지만 남편은 훗날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1세로 밝혀졌다. 그리고 43세때 맨하튼 빈민가의 다락방에서 뷰캐넌 부인의 간호를 받으며 부인에게 돈과 보석을 다 뜯기고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아(엄마는 로라의 돈과 보석을 뺏으러 왔다가 15달러만 주고 갔고 뷰캐넌은 로라를 더러운 하숙방에 내버렸다) 혼자 외롭게 죽어 갔다고 한다. 숨을 멎은 그녀의 베게밑에는 장미꽃이 장식되었고, 지난 날의 모습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진 얼굴에는 엷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포사
은나라 주왕과 달기(딸기...-_-안 죽고 주공의 시녀가 되었다던가...)를 죽이고 무왕 희창이 태공망(봉신연의의 주인공...)과 더불어 주나라를 세운지 몇 백년이 지나 태어난 서주 시대의 마지막 왕인 유왕은 성격이 난폭하고 주색을 좋아하며, 유흥에 묻혀 사는 인물이었다.그 어머니 강후(羌后)가 이를 걱정하여 자주 타일렀으나, 유왕은 듣지 않았다. 더욱이 강후가 죽은 후로는 여색에 빠져 더더욱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이때 포(褒)라고 하는 소국이 주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주 왕국에 미녀를 바쳤다. 그 미녀는 포사라고 하는 절세 미인이었다. 그런에 이 포사라는 여인의 출생에 관해서는 이상한 전설이 있다.
옛날 하 왕조가 쇠퇴하였을 무렵, 지금의 삼서성 근처에 사는 백성 두 명이 갑자기 용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 하나라 왕궁에 떨어졌다.두 마리의 신룡(神龍)은 ‘나는 포의 이군(二君)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용이 사라진 자리에서 거품(용이 토하는 정기)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절대 손을 대지 말고 간수하십시오. 훗날 복이 있으리다"라고 말해 이것을 그릇에 넣어 광에 간수해 두었다. 하가 멸망했을 때 이 그릇은 은나라에 전해졌다가 다시 주나라에 전해졌다. 이 세나라가 교체되는 천년동안에 아무도 그릇을 열어보는 이가 없었다. 여왕 말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것을 열어보게 되었다. 그러자 거품이 뜰에 흘러 내려가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지우기 위해 점을 쳐보니,‘여인을 벌거벗겨 큰 소리로 외치게 하라’는 점괘가 나와(그 때는 나체의 미녀들이 악을 쫓는다고 믿었고) 곧 그렇게 하였더니 그 거품은 검은 거북으로 변하여 왕의 후궁으로 들어 갔다. 마침 후궁에는 아직 이도 갈지 않은 6세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거북의 발자국을 밟았다가 출가도 하기 전이었으나 자꾸 배가 불러오자 여왕은 그녀가 외간 남자와 통간한 줄 알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가 죽고 뒤를 이은 왕도 그녀를 석방하지 않아 그녀는 옥에 갇힌지 40년만에 계집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절세 미녀 포사이다.
아이를 갖다버리게 한 왕에게 이런 노래가 들려왔다.
"가는 풀로 화살통을 짜고 뽕나무로 강한 활을 만드니
주나라도 더이상 남아있지 못 하리라"
진노한 왕은 그 활통과 활을 만들어 파는 자를 사형에 처하게 했는데 멋도 모르던 시골 부부가 그것들을 만들어 팔러 왔다가 부인은 참수당하고 남편이 도망치다가 거적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여왕이 내다버린 아기가 들어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새들이 무리지어 그 거적의 네 귀퉁이를 물고 물속에서 끌어내며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후에 주 왕궁에 바쳐진 그녀를 포나라에서 왔다고 하여 이름을 포사(褒사)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포사가 유왕의 눈에 띄어 유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된 것이다. 유왕은 포사에게 완전히 빠지고 말자 차츰차츰 나라가 망한 일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유왕은 신후의 딸을 정비로 맞아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 희이구를 이미 태자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유왕은 포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황후가 낳은 의구를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죽이게 한 다음(그러나 총명한 희의구는 목숨을 건짐)황후마저 폐한 후 포사를 왕후 자리에 올려놓고 포사가 낳은 아들 백복을 태자로 봉하였다. 거기다 희이구를 황후의 아버지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이구를 죽이게 하자 이로 인하여 황후 부녀는 유왕을 원망하게 되었다. 폐태자의 외조부는 외손자를 차마 죽일 수 없어 유왕에게 그 명을 물리라는 청을 했다가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반역을 준비한다.
기이하게도 절세 미녀 포사에게는 웃음이 없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유왕은 태자를 바꿔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좀처럼 웃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유왕이 포사에게 물었다.“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보아야 웃겠느냐?”하였다. 그러자 포사를 주워다 기른 그녀의 의부는 "포사는 어릴 때부터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좋아했습니다"라고 전했고 이 말을 들은 유왕은 그날부터 매일 비단 백필을 가져다가 하녀를 시켜 찢게 하였다. 그러나 포사를 활짝 웃게 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슨 실수로 봉화대에 봉화가 피워 올랐다. 일찍이 유왕은 봉화대의 큰 북을 성밖에 두고 외적의 침입 시에 이로써 급변을 제후에게 알리기로 하고 있었다. 봉화가 올려지자 원근 제후들은 군대를 이끍고 황급히 왕궁에 모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제후들은 맥이 빠지고 무장한 군사들은 투구 따위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분개했다. 이 모습을 본 포사는 비로소 허리를 잡고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이때부터 유왕은 간신 괵석보의 말에 따라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자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렸다. 제후들은 그때마다 모여들었으나, 번번이 허탕만 치다가 결국 나중에는 봉화가 올라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딸이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그 일로 인하여 유왕을 원망하던 신씨 일족은 증, 서이, 견융 등 변방의 유목 민족들과 합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의 수도 호경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놀란 유왕은 중신들과 의논 끝에 제후들의 구원을 청하기 위하여 봉화를 올렸으나, 이틀이 지나도록 제후들은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마침내 유왕은 포사, 백복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끝까지 추격해오던 견융족의 추장에게 이산의 산기슭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태자인 백복도 살해되었고, 포사는 견융족의 추장이 자기 여자로 삼았다고 하나 그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주장도 있는데 포사는 신후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도 없이, 그녀는 이국 땅에 잡혀간 최초의 중국 황후로 기록되어 있다.
3.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명군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랑스 왕실의 피를 이은 독일 귀족 프란츠 슈테판 1세(둘다 미남미녀로 소문난..)의 딸(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이었으나, 그 어머니와는 달리 사치와 환락을 좋아하여 국고을 탕진시킨 ‘적자 부인’이라는 혹평을 들었으며, 결국에는 국민들의 국왕 일가에 대한 불만은 차츰 놓아져서 혁명을 일으키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패션과 미용의 중심이 되어 그녀가 입는 드레스나 머리 모양 등 모든 꾸밈새 하나 하나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일으켰다.
그러면 과연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녀의 시녀를 지냈던 한 여성이 남긴 증언으로는 「훤칠한 키, 눈부실 듯 하얗고 봄 장미의 신선함을 섞은 듯한 피부, 하늘의 푸르름을 흠뻑 머금은 듯한 눈, 풍성한 블론드 머리칼과 기품있는 코... 이것이 왕비의 모습이었다. 단 한군데 빠지는 곳이 있다면 아랫입술이 약간 튀어나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왕실의 특징이다.」 그녀는 앙투와네트의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주걱턱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녀가 처형되는 날 형장에 끌려가는 모습을 재빨리 스케치한 화가 다비드의 그림에서 그녀가 그와 같은 얼굴 특징을 하고 있었음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지 못 생기게 그렸음)
그러나 이렇게 꽃도 무색할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지만,루이 16세가 폐위되고 사형에 처해진 후, 옥에 갇혀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옛날의 왕비일 뿐이었다.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사형에 처하게 한 결정적 죄상은 그녀가 특히 사랑했던 장남(루이 17세)과의 근친상간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 때 8세의 소년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마리는 가끔 소년과 침대를 같이 하면서 수상한 행위를 하고 마스터베이션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마리는 처형 전날 콩셰르쥬리 감옥에서 시누이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그런 자신의 아들을 용서해달라는 것과 딸 마리 테레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썼다.(결혼 전에는 오빠인 요제프 2세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아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는 결혼 7년만에 남편이 불임을 극복해 마리 테레즈, 루이 조세프 그자비에, 루이 17세, 소피 엘레네 베아트릭스를 낳았지만 루이 조세프와 소피 엘레네 베아트릭스는 어릴 때, 루이 17세는 생사 불명이 되어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살아남아 숙부 샤를르 10세(루이 16세의 동생 아르뜨와 백작)의 아들인 사촌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과 결혼해 앙굴렘 공작부인이 되었다.
왕비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비제 르블렁 부인은 "왕비님의 살결이 너무나 곱고 아름다워 어떤 물감으로 그려도 제 색이 나오지 않습니다"라고 자조하듯 왕비의 아름다움을 감탄했다고 한다.(그러나 베르사이유 장미에 나오는 가냘픈 앙투아네트를 상상하신 분은 실제 앙투아네트 초상화를 보면 환상에 금가는 소리가 들리리라 확신함)
4.디안 드 푸아티에
디안 드 푸아티에는 16세기 프랑스 절세 미인으로 ‘달의 여신 다이아나 ’로 비유되기도 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앙리 2세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정부였다가 앙리 2세가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의 결혼 때 '아들을 남자로 만들어 달라'는 왕의 부탁을 받고 결혼 선물로 앙리에게 넘겨져, 20세나 연하인 왕 앙리 2세의 정기를 몽땅 빼 버렸다는 색녀였다. 늙을 줄 모르는 그 미모는 마법의 화춘약이라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이 쑤군거릴 정도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아침마다 슈농소 성의 찬 샘물로 하는 세수가 비결이고 미녀의 이상이라 하여 프랑스 안에 다음과 같은 기준을 남겼다.
하얀 것 세 개 ...... 피부, 치아, 손
검은 것 세 개 ...... 눈, 눈썹, 눈꺼풀
장미빛 세 개...... 입술, 볼, 손톱
가는 것 세 개 ...... 입술, 허리, 발목
부드러운 것 세 개 ...... 몸통, 머리카락, 손
작은 것 세 개 ...... 유두, 코, 머리
풍만한 것 세 개...... 팔, 허벅지, 엉덩이
앙리의 아내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탈리아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마지막 적자손)가 시집오자 디안은 사람들 앞에서는 궁정예절에 익숙치 않은 어린 황태자비의 가정교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고 황태자비가 아플 때 간호하고 대신 행사를 지도했으며 분만 중에도 카트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서는 늘 황태자비를 밀어내고 보이지 않게 공개적인 모욕을 주었으며 카트린 대신 상석을 차지하고 자신 파벌인 기즈 가를 등용해 국사를 농락했다.
결혼 9년 동안 아이가 없자 열린 비밀 가족 회의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이혼시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앙리가 왕위에 오르자 카트린을 제치고 참석해 왕비의 특권인 즉위식 때의 특별세도 하사받은 사람도 디안으로, 궁정 사람들과 '장사꾼의 딸 이탈리아 여자' 카트린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일을 즐겼다. 거기다 국왕 부재시 왕비의 섭정권이 카트린에게 주어지는 것까지 막았고 카트린에게 그 모욕을 직접 낭독하게 했지만 왕비는 극단적인 자제력으로 미소를 지으며 참아냈다고 한다.
디안의 괴롭힘은 끝이 없어서 출신과 가문으로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모자라 카트린이 프랑수아, 샤를르, 엘리자베스, 클로드, 앙리,마그리트(마고) 프랑수아 에르큘 등을 차례로 낳자 아이들의 유모장이 되겠다고 우기고 산후 조리를 맡는 등으로 궁정과 황에게 "왕비에게 베푼 선하고 훌륭한 행동"으로 칭찬과 돈을 받아 챙겼던 것이다. 그리고 장남 프랑수아 2세의 아내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기즈 가의 조카)에게 "당신의 시어머니는 이탈리아 인, 그것도 장사꾼의 딸입니다. 비교가 되지 않지요, 경멸받아 마땅합니다"라고 시어머니 카트린을 경멸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카트린은 메리를 아껴 '우리의 작은 스코틀랜드 여왕이 미소만 지어도 프랑스 인의 마음은 설렙니다'고 칭찬하고 프랑수아 2세가 죽고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 종조부(?)인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준 7개의 희귀한 진주를 선물한다.
디안은 키트린이 아들 샤를을 낳은 지 사흘만에 왕실의 예를 어기고 왕을 데리고 아네로 가버리고 자신은 앙리 2세와 화려한 아네와 슈농소 성에서 마법처럼 지내는 동안 카트린을 12년 동안 궁중 한 구석 한적한 곳에 있게 하여 왕비 카트린은 부친을 닮아 무능한 아들들과 딸들, 며느리 교육에 힘썼다.(세 딸은 모두 어머니를 경애했으나 막내 아들 프랑수아 에르큘은 골치를 썩이고 마르그리트는 말썽쟁이로 카트린에게 자주 맞았다고 한다-_-;;; 카트린은 아들 중에서는 3남 앙리를, 딸 중에서는 둘째 클로드를 편애했다. 앙리는 형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자기주장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베네치아 대사 콘타리니는 '제위 초 왕비는 왕이 여공작을 사랑하는 것을 참지 못했으나 이제는 왕을 위해 절박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질투심을 버리고 참으며 지내십니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이렇게 예언했다.
"젊은 사자가 늙을 사자를 쓰러뜨리리라.
불꽃튀는 경연장에서
젊은 사자의 창이 늙은 사자의 황금 투구 속의 눈을 찌르고
두 상처는 하나가 되어 늙은 사자를 쓰러뜨리리라"
그가 예언한 대로 스페인과의 평화 회담으로 16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36세의 펠리페 2세의 결혼 축하 창 시합에 참가한 앙리 2세가 몽고메리 백작의 창에 눈을 찔려 뇌손상까지 겹쳐 죽자 보복심리를 드러내지 않는 메디치 가의 덕성을 지닌 왕비 카트린은 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디안을 다시 보지 않게 된 것을 기뻐했지만 앙리의 죽음으로 권력상실,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디안과 그 딸들의 궁정 출입 금지와 왕이 디안에게 준 슈농소 성과 쇼몽 성의 교환,왕이 실수로 선물해 버린 왕관에 달린 보석을 돌려달라는 요구 외에는 디안을 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5.네페르티티
네페르티티는 이집트의 왕 아케나텐의 왕비이다. 네페르티티라는 이름은 ‘미인이 왔다’라는 뜻이다. 몇몇 학자들은 네페르티티 왕비가 외국인이었다는 추측도 하지만 사실이 아니며, 그녀의 이름은 전형적인 이집트 이름으로 그녀가 맡았던 성스런 역할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도 네페르티티 왕비의 부모 이름이 나와있지 않다. 가장 현명한 가정은 네페르티티가 궁중 출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투탕카문이 죽은 뒤 파라오에 오르게 될 아이와 같은 고관의 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몇몇의 비문 중에는 왕의 성에 그의 이름이 아닌 왕비의 이름을 집어넣은 것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 네페르티티가 참여하지 않고서는 어떤 신성한 행사도 치를 수 없었다. 왕내외는 아텐 신 앞에서는 둘 다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아텐에게 기도를 드렸고, 제물을 바쳤으며, 향을 피어올렸다.네피르티티가 왕비 이상의 역할을 했으며 혼자 나라를 다스렸다는 가설도 있는데 그녀가 쓰는 특별한 왕관이 하 이집트의 적색 왕관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아텐 의식의 여신관이었던 그녀는 ‘라의 그림자’라는 특별한 성지를 갖고 있었다. 아마도 왕은 아침의식을 주재하고, 왕비는 저녁의식을 주재했을 것이다. 네페르티티는 혼자서 의식을 주재하고 아텐에게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네페르티티 왕비가 왕의 전차처럼 활과 화살로 무장한 자신의 전차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특권이다. 보스턴 예술 박물관에는 더욱 놀랄 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왕관을 쓴 네페르티티가 왕의 배 위에서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곤봉을 휘두르고 있는 장면이다. 카르낙의 돌덩어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개 이 의식적인 몸짓은 파라오만이 취할 수 있다.몇몇 이집트 학자들은 이와 같은 단서들을 근거로 하여 네페르티티가 하트셉수트처럼 여성 파라오였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내용 또한 불분명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부부는 여섯자매를 두었다. 세 딸은 아케나텐 통치 6년 이전에, 나머지 세딸은 6년과 9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러나 아케나텐이 즉위한 지 12년이 조금 지났을 때 둘째 딸 메케트 아텐이 죽었다. 죽은 딸의 침상앞에서 눈물짓는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네페르티티가 사망한 날짜나 상횡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게 없으나 다만 그녀가 아케나텐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일 뿐이다.
6.비앙카 카페로
16세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대공비 비앙카 카페로는 미녀였지만 악녀로 더욱 유명하다. 비앙카는 베네치아 상인의 딸로 태어났는데 15세때 애인과 함께 도망가 버렸다. 애인과 몰래 숨어 살고 있는 중에 어느 때부터인가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의 눈에 들 게 되어 머지 않아 그의 것이 되게 되었다. 비앙카의 전 애인은 대공의 가신으로 등용되었으나 얼마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는데 토스카나 대공과 비앙카의 공모살인이라고 한다.
그 후 토스카나 대공의 정실부인 조반나(오스트리아 황제의 딸)도 갑자기 변사하게 되는데 이것도 그녀에게 질투했던 비앙카가 독살한 것이라고 한다. 점차 비앙카는 요부, 독부로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몇사람을 산제물로 바치고 지난친 음욕에 빠졌던 토스카나 대공과 비앙카도 그 보복인지 마지막에는 그들 자신의 독약을 먹고 죽게 되었다.(엥?)
1587년 어느날 밤 피렌체 교외의 토스카나 별장에 대공의 동생 페르난도 추기경을 비롯한 엽우회 멤버가 모여 있었다. 물론 비앙카도 호스테스로서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견 화기애애한 모임이었지만 사실은 서로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토스카나 대공의 동생 페르디난도 추기경은 형을 폐하고 자신이 대공의 자리에 앉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 참석자들은 쥐죽은 듯이 흠짓흠짓 요리를 입에 넣었다. 당시에는 독살 등은 일상 다반사였다. 페르난도 추기경은 독을 발견하는 힘이 있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 반지에는 독물이 가까워지면 색이 변하고 희미하게 흐려진다는 것이다. 그는 반지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디저트로 비앙카가 만든 과자가 나오자 대공은 사람들에게 꼭 그녀의 자랑거리인 과자를 맛봐 달라고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나 모두들 애매하기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페르디난도의 반지 색이 점점 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과자는 별로 인기가 없군. 그렇다면 내가 하나를...”이렇게 말하고는 대공은 과자 한 조각을 잘라서 순식간에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비앙카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는 이 과자에 독을 넣어서 시동생 페르디난도에게 먹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벌써 늦었다고 판단한 그녀는 곧바로 자신도 그 과자를 먹고 남편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페르디난도 추기경은 두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면서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즉각 식당 출입을 금지시키고 두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은 총으로 쏘겠다고 선언했다. 독이 완전히 퍼져서 두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이 광경에 허둥대면서도 감히 페르디난도에게 대들려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토스카나 대공과 비앙카는 바닥을 뒹굴다가 끔찍한 형상으로 숨이 끊어졌다. 그 후 페르디난도는 당당히 제 3대째 토스카나 대공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메디치 가 이야기에는 이런 얘기가 없던데..)
7.베아트리체
16세기 이탈리라에 프렌체스코 첸치라는 악역무도한 방탕자 귀족에게 베아트리체라는 딸이 있었다. 14세가 된 베아트리체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자 프란체스코는 그녀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저택의 한 방에 가두어 놓았다. 그리고 어느날 밤 마침내 우격다짐으로 베아트리체의 육체를 뺴앗아 버렸다. 아버지에게 농락당한 베아트리체는 깊히 앙심을 품고 언제가 복수해 주리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동정했던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그녀에게 반해있던 집사의 도움으로 어느날 밤 마침내 아편으로 아버지를 잠재워서 죽여 버렸다. 일이 끝나자 어머니와 딸은 시체를 시트로 말아서 정원의 무성한 나무 근처에 던져 버렸다.
베아트리체는 머진 않아 밀고되어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온갖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용감하게도 무시무시한 고문에도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견디어냈다고 한다. 처형 당일 로마의 산 탄젤로교 앞의 광장에 단두 대가 설치되고 전 이탈리아의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절세의 미녀라는 베아트리체를 한번이라도 보려는 것이리라. 베아트리체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는 가볍게 단두 대로 올라가서 도끼 아래 가는 목을 내밀었다. 이때 불과 16세. 참으로 불행한 처녀의 생애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귀드 레이니 작의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보고,스탕달은 한눈에 반해서 마침내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첸치 일가족》을 썼다고 한다.(앙투아네트 죽기 직전 스케치보다 훨씬 예쁨..)
베아트리체의 초상화 보고 싶으신 분은 제 이름 검색해서 찾아보세요.
첫댓글 너무 잼있게 읽었습니다~ ^^
아~ 초상화보구잡다...흐미~~ㅇ.ㅇ;
아, 보고파;ㅁ; 궁금궁금+ㅁ+
올려주세요+ㅁ+ 글 읽고 나니까 보고싶네요-_-!
얼마전 네페르티티를 디스커버리에서 봣엇는데...파라오와 거의 같은 위치엿을걸루 추정하더라구요...참 거기서는 모습이 둘이 넘 흡사해서 남매일꺼란 추정도 있던데...암튼 이쁘긴햇나봅니다..
앙투아네트는 기회가 있어서 본적이 있는데 정말 구리더라구요-_- 내가 훨 낫지
그런데 포사가 아니라 낭사 아닌가요? 제가 본 책에서는 그렇게 나왔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