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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예레 31,1-7
복 음 : 마태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모호합니다.
가나안 부인이 뒤에서 부르짖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지도,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가나안 부인을 강아지라고 부르시는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 전체 안에서 이 단락을 비추어 보면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장의 족보에서부터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또 마태오 복음서에서, 아기 예수님을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예루살렘이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죽이려고 할 때,
먼 동방에서 온 이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그분께 경배합니다(2장 참조).
그리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기에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만으로 충분히 낫게 하여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결국 그 여인은 자신이 청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강아지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병행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이 이방인들은 구원의 한몫을 누리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텍사스대학교 제임스 패너베커 교수 등은 개인 블로그 3만 5천 개와
학생들의 에세이 1만 5천 개를 분석해서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들은
질병, 외로움, 신경증, 우울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면 긍정적인 단어를 다채롭게 구사하는 이들은 직장생활과 여가 활동 등에서
성실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당연히 몸도 더 건강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이 1950년에 입회했던 수녀 180명의 입회 청원서를 분석했습니다.
이 청원서에서 긍정적인 단어를 별로 쓰지 않은 수녀들 가운데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34%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 ‘매우 행복한’, ‘정말로 기쁜’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 수녀 중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무려 90%나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을 줄이고 긍정적인 말, 희망의 말을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모두 공짜라는 것입니다.
좋은 단어라고 해서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돈을 지불 하지 않습니다.
공짜이기에 기왕이면 모두에게 유익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말과 희망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도 커집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려고 합니다.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따라서 삶에 대한 기쁨도 줄어듭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와서 마귀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서는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말하면서, 여자를 쫓으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는 것처럼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여인의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로 낮추면서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예수님께 믿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야 믿음이 커질까요?
아닙니다.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커지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고 맙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환히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마태15,21)고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예수님을 안내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튼튼한 만큼
충만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어 간사한 마음을 다스리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 (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착잡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 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받아 놓은 날은 꼭 오기 마련입니다.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내일이면 돌아옵니다.
남은 일정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여행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던 둘째 아들을 큰 사랑과 자비로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두 팔을 벌려서 환영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희망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어느 성당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성당에 다닙니까?’라고 누군가 물으면 저와 비슷한 대답을 할 겁니다.
지금 성당은 '2111 Camino Lago Irving TX 75039'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2017년에 완공했습니다.
그전에는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창고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성당 전에는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당은 건물과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당에 주보성인을 정해서 공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당은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다운타운 성당이 팔렸어도, 창고 성당이 팔렸어도,
언젠가 아름다운 지금의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계속된다면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옥중에서 쓴 서한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짝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품과 비슷하지만 가짜입니다.
예전에 ‘비가 올 때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가면 짝퉁,
가방을 가슴에 품고 가면 진품’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진품인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르는 것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짝퉁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진품 신앙은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품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자캐오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린 마리아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식탁에서 흘린 것은 개도 먹는다며
주님께 자비를 청했던 이방인 여인처럼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품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신다.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한다.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15,28)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큰 성서인 자연의 이치를 더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한 이해도 더 심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나안 여인에 대한 태도는
예전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딸의 병고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가나안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15,22)라는 소리를
못 들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15,23) 그런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제자들은 그 여인의 성가심에 시달리다 귀찮아서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15,23)하고 여쭙니다.
그런데도 고작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말씀이 비수가 되어 그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팠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해받지 못한 설움에 이방인이라는 거부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물러서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서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15,26)하고
마지막 시험의 문제를, 질문을 그녀에게 던집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깊은 절망의 시간과 자리를 견디어 낼 때만이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에서 참으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참으로 참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그녀는 개 취급받아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그런 무시와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 따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을 강아지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더 처절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원망보다는 오직 자녀의 치료를 위해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라고 절규합니다.
언감생심이란 말뜻처럼 감히 겸상兼床은 바라지도 않으며
다만 주님께서 자녀들과 잡수시다가 혹여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족하고 족합니다, 는 그녀의 진솔한 마음을 예수님은 듣게 됩니다.
당연히 밥상에서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자부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낮춤과 신뢰에서 솟아 나온 의탁의 마음 소리를 듣고서야,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서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 28)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런 것을 기대하고 갈망하면서
그녀를 모질게 대하셨고 상처받을 말씀을 하셨지만,
이 또한 그녀의 마음 깊이 숨겨 내재 된 보물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의도이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순간은 단지 그녀 딸의 치유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도 구원을 받았으며,
이미 천상의 식탁에 앞서 이 땅에서 말씀의 식탁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관심을 쏟고
은총의 치유와 기적을 보고서도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느꼈을 실망과 안타까움을
이 이방인 여인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인간적인 위로와 희망을 보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우려는 예수님의 극단적인 교육 방법이
마침내 그녀를 통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빠 하느님께서 그녀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
이끌려 온 그녀를 통해 하늘나라의 구원 의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15,28)
“주님, 저희 또한 가나안 여인이 당신에게서,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하신 칭찬의 말씀이 저희를 흔들어 깨웁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저희 또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은총이며 사랑의 안배임을 감사하면서 살아감으로써
‘너희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칭찬받는 오늘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강아지’도 교회의 일원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에 사로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는
노예 생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 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으로부터 해방 시켜줄 메시아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리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로마 군인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판을 치며
자기 백성들을 억압하여 자유를 박탈해 갔을 때 더욱 고조되어 갔다.
자유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빨리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제국을 무찔러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고
메시아 친히 자기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 군인들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스스로
“나는 왕으로 군림하러 오지 않고
오히려 봉사하러 온 종이다.”라고 하신다.(마태 20,28; 마르 10,45)
모세의 율법에만 얽매여 형식만을 중요시하던 백성의 지도자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그분을 참된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예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마다 꼬투리를 잡고
올무를 걸어 씌우고 모함하여 결국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로 고발하여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하고 만다.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께서 오늘은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멀리 지중해 연안의 이방인들의 도시인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귀가 들린 딸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인의 도시 구석에 사는
가엾고 불쌍한 남편도 없어 보이는 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이 갖지 못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것으로 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부자다.
예수를 알아보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주인공이다.
예수께 대한 그녀의 태도는 選民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비난받던 한 이방인 여인의 전 생애를 건 마지막 희망이기에
이는 참된 믿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예수께서 분명히 구해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 속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여인의 계속적인 애달픈 간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의 차가운 모습을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분은 좀 더 지체하시면서 그 여인의 마음과 믿음을 살피신다.
자꾸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는 여인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께 언질하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하며 맞장구를 치신다.
예수의 이 말을 곁에서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사뭇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도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시는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예수께 다가와 꿇어 엎드려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차가운 말씀을 던지신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나누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인 것이다.
예수의 부정적인 이 말씀 가운데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강력한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바로 이어지는 여인의 장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인의 믿음에 찬 항구한 간청이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강한 믿음인가.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장한 믿음에 탄복한 예수는
그녀의 소원대로 딸을 치유해 주신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구원관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분께 믿음을 주는 자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세례를 받고
미사 때마다 그분의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바로 새 이스라엘 백성이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른다.
오늘부터 이 교회에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