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빙점>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 이야기
일본의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평생을 갇혀 살아야 할 무인도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져가겠니?”
학생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책이나 당시 유행하던 소설, 유명한 고전과 같은 책을 말하자 선생님이 덧붙였습니다.
“사실 선생님은 너희가 성경이나 백과사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한단다.”
이 말을 감명깊게 들은 한 여학생은 졸업을 한 뒤 결핵에 걸려 10년이 넘게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적막한 시간을 보내다보니 마치 무인도에 있는 것 같았고 학창시절 선생님의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백과사전이 아닌 성경을 손에 들었습니다.
매일 깊이 묵상하는 성경은 인생의 외딴 섬에 빠진 것 같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습니다.
훗날 성경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힘, 죄를 씻는 능력, 하나님을 찾는 겸손, 살아갈 능력’을 찾았다고 말한 그녀는 그 깨달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작품 ‘빙점’으로 일본 문학계를 놀라게 하고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미우라 아야코의 이야기입니다.
★미우라 아야꼬(1922-1999)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와 그녀의 남편 미우라 미쓰요(三浦光世)는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평생을 산 일본의 대표적인 크리스천이다
인구 36만명의 아사히카와(旭川)는 일본 홋카이도 북부의 중심 도시다
조금만 달리면 오호츠크해에 다다르는 이 도시에서 유명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사람들은 아사히카와 동물원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온다
또 다른 하나는 미우라 아야코의 흔적이다
아야코는 일본이 자랑하는 여류 소설가. 국내에서도 이름이 높다
1964년 7월 10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조간 1면에 42세의 주부로
잡화점을 운영하는 아야코가 1000만엔 현상소설 공모에 1위로 뽑혔음을 알렸다
소설의 이름은 <빙점> .
https://www.youtube.com/watch?v=vNQOu90pP7g
아야꼬는 96편의 소설을 썼다
아야코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일본의 기독교는 소수종교에 불과하다
주일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개신교 신자의 수가 26만명에 불과하다
일본 기독교계에서 아야코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복음의 메시지가 현대의 언어로 녹아 있다
아야코는 사랑과 윤리, 이상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나 문제를 다루며
소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아야코의 문학세계를 <기도문학> <복음증명의 문학>
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아야코는 폐결핵과 척추 질병 등으로 13년간 병상에서 생활했다
처절한 고통의 삶을 살았다
그녀가 고통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된 데에는
남편 미우라 미쓰요의 헌신이 있었다
미우라 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다
아사히카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미쓰요는 1955년 6월
우연히 투병을 하던 홋타 아야코의 병문안을 가게 된다
침상에 고정돼 움직일 수 없었던 아야코에게 미쓰요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3절까지를 읽어줬다
노래해 달라는 아야코의 부탁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을 불러줬다
3번째 방문한 날에 미쓰요는
"하나님, 제 생명을 아야코에게 주어도 좋습니다.
아야코를 낫게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가 아야코의 마음을 움직였다
만난 지 5년 후 이들은 결혼한다
그때까지도 아야코는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건강은 꽤 회복됐다
미쓰요는 " 3일만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결혼하겠다" 고 말했다
둘은 1959년 5월 24일 아사히카와의 리쿠조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쓰요가 35세 아야코가 37세였다
이후 아야코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일상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쓰요는 아예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야코가 구술한 내용을 필기했다
67년 <시오리 고개>를 쓸때부터 30여년 동안 미쓰요는 아야코의 충실한
비서로 지냈다
사랑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빙점의 무대인 아사치카와 미혼린에는 미우라 아야코 기념문학관이 있다
아야코가 죽기 1년 전인 1998년에 세워졌다
문학관 건립을 위해서 그녀를 사랑한 독자 15000여명이 십시일반으로
기부한 금액이 무려 2억엔에 달했다
아사히카와 도요오카(豊岡)에는 미우라 부부가 30년 넘게 살았던 집이 있다
지금도 미쓰요(光世)씨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담백한 2층 집으로 문패에는 미우라 미쓰요, 미우라 아야코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2층 큰 다다미 방은 아야코가 소천받기 전까지 집필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이곳에서 부부는 밤 늦게까지 앉아 서로를 도우며 소설을 완성해 나갔다
아내의 말을 남편이 옮겨 썼다
미쓰요는 사랑을 어떤 조건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의지라고 말했다
아야코가 어떤 아내였는지가 궁금했다
"순종의 여인이었어요 고통 속에서도 남을 돕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나에게 요카타(좋아요) 요카다 라고 말해줬어요
학교를 8년밖에 다니지 않은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위해 줬어요"
미쓰요는 아내를 만나게 해준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3일만 살아도 된다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4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아야코 덕분에 15권의 책도 쓸 수 있었습니다"
미쓰요는 지금도 아내의 체취가 묻어 있는 2층 다다미 방에서 잔다
아야코는 고통을 어떻게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아내는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구원의 빛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참으로 그녀는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한
것 같습니다"
아야코는 죽기 직전에
"죽는 것은 내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미쓰요는 아내가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사명까지 완수한 사명의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응접실에는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편지와 엽서가 그득했다
편지마다 미우라 아야코의 작품을 통해서 새 소망을 찾은 사람들이
보내는 감사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시오카리 고개 기념관의 게시판에는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 적혀있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니라"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장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뵈지 못할 얼굴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조차 없다
♥미우라 아야코♥
1922年4月25日(大正11年)に堀田鉄治とキサの第五子として北海道旭川市に生まれる。両親と九人兄弟姉妹と共に生活した。1935年に妹の陽子が夭逝する。[1]1939年、旭川市立高等女学校卒業。その後歌志内町・旭川市で7年間小学校教員を務めたが、終戦によりそれまでの国家のあり方や、自らも関わった軍国主義教育に疑問を抱き、1946年に退職。この頃、肺結核を発病する。1948年、北大医学部を結核で休学中の幼なじみ、前川正に再会し、文通を開始。前川は敬虔なクリスチャンであり、三浦に多大な影響を与えた。1952年に結核の闘病中に小野村林蔵牧師より洗礼を受ける。1954年、前川死去。1959年に旭川営林局勤務の三浦光世と結婚。光世は後に、綾子の創作の口述筆記に専念する。
1961年、『主婦の友』募集の第1回「婦人の書いた実話」に「林田 律子」名義で『太陽は再び没せず』を投稿し入選。翌年、『主婦の友』新年号に「愛の記録」入選作として掲載される。
1963年、朝日新聞社による大阪本社創刊85年・東京本社75周年記念の1000万円(当時の1000万円は莫大な金額であった)懸賞小説公募に、小説『氷点』を投稿。これに入選し、1964年12月9日より朝日新聞朝刊に『氷点』の連載を開始する。
この『氷点』は、1966年に朝日新聞社より出版され、71万部の売り上げを記録。大ベストセラーとなり、1966年には映画化された(監督:山本薩夫、出演:若尾文子)。また数度にわたりラジオドラマ・テレビドラマ化されている。ちなみに、日本テレビ系番組『笑点』は、このころベストセラーであった『氷点』から題名を取ったと言われる。
1996年、北海道文化賞受賞。
結核、脊椎カリエス、心臓発作、帯状疱疹、直腸癌、パーキンソン病など度重なる病魔に苦しみながら、1999年10月12日に多臓器不全により77歳で亡くなるまでクリスチャン(プロテスタント)としての信仰に根ざした著作を次々と発表。クリスチャン作家、音楽家の多くが彼女の影響を受けている(例えば、横山未来子、椎名林檎[2]など)。
1999年、彼女の名にちなんだ三浦綾子文学賞が設立された。現在でも続いている。
2014年10月に三浦光世が死去し、その遺言により夫妻が生活していた自宅は三浦綾子記念文化財団に寄贈された。2016年2月、三浦綾子記念文化財団は三浦家家屋検討委員会を設置して自宅の保存と活用を協議したが、現地保存は維持管理や費用面から難しく、全面移築にも多額の費用がかかるため、書斎などを三浦綾子記念文学館に移築して保存することとなった。これとは別に、1961年から1971年まで暮らした旧宅の一部が和寒町に1999年に移築され、塩狩峠記念館として公開されている[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