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국제펜클럽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서울 詩 문학기행 2017년 제 1회가 4월 13일
오늘이다. 나는 확인도 안하고 신청만 했다
마침 오늘이 새로 선출된 손해일 팬 이사장 행사 첫날이라서
화가인 친구 한명과 봄 나들이로 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꽃피고 새우는 봄날 일행 45명은 모두 행복해 하는 날이다. 해설하시는 분은 존경
받는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님이다. 얼마나 해설이 좋은지 이분의 열정
때문에 이 행사가 지속되는지 모를 일이다. 서울시가 하는 일 중에서는 최고 인 것 같다.
해설자의 민족문화의 중요성과 민족정신의 이념적 철학이나 작가들 고도의 작품성과
상황을 자세히 심도 게 우리들의 가슴 속에 풀어넣어주는 그분의 열정은 대단하시다.
여의도 에서 모여 오전 10시 출발 성북동 조지훈(1920년-1968) 고택 터를 제일 먼저 갔다
박두진 박목월 과 청록파 시인이다 그곳 방우산장 조형물에는 그의 대표시 <낙화>가 시비로
서있다. 집터는 헐리고 애잔한 흔적만 남아 있는 그 조형물 앞에서 시대의 후학들은
안타까운 마음이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 울움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조지훈 낙화 -
가문 대대로 애국의 지조를 지켰던 선비문인 조지훈 시인의
문학정신과 시대의 아픔과 그의 얼을 회상하며 사라진 집터의
안타까움을 우리는 함께 했다.
다음으로는 이태준(1904-?)의 수연산방 壽硯山房이다
수연산방은 소설가 이태준의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던 집이다
수연산방은 당대의 최고 멋진 집의 풍모를 갖추고 정지용 시인도 부러워하던
시대의 문학인 산실이다. 그의 대표작인 저서 『無序錄』은 "두서없이 쓴 글"의
재목이지만 지금 읽어도 짧은 글들의 큰 감동이다.
당호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이집의 현판인데 "오래된 벼루 서재"란 뜻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각한 현판은 엣 문사의 그림자로 곧 사라질
듯 희미하다. 기와지붕과 처마선의 곡선들은 아직도 그 멋을 그대로 풍긴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은 대나무가 계곡처럼 서 있는 서재란 이름으로 싱싱한
키 작은 대나무가 소슬하게 우리를 반긴다. 그곳 옆집에서 돈까스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사방 창문으로 봄꽃들은 피어서 꽃 의 여행열차로 느껴진다
점심을 먹으면서 꽃 열차는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그 당시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이라며 정지용 이효석등과 구인회를 결성하여 시대문학의 집필의 큰 산실이었다.
그 다음 한용운의 심우장㝷牛莊행이다. 여기서 한용운 시인은 1879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조선 총독부가 보이지 않는 성북동 산속에 북향으로 집을 지었으며 동쪽 대문 입구에
한용운 시인이 심은 향나무가 아직 청정 르다. 심우장이란 당호는 산속에서 동자가 소를
찾는다란 뜻이다.
초발심을 비유한 禪의 단계에서 따왔다 한다. 심우장은 위대한 문인 만해의 불교 사상의 문학과
조국 독립 의지가 집약된 공간이다. 진보적인 역사관과 불교적인 신앙이 문학을 만나서 영원히
변절하지 않는 아름답고 영원한 민족문학을 탄생시켰다.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은 만대로
존경받는 민족정신 문화의 보물이다.
심우장 좁은 골목을 뒤로 걸어 올라가면 어깨가 부디 친다 지붕과 담장이 맞붙은 집에 홍매화가
피어 지붕과 담 에 몸이 비좁다. 그래도 화사한 꽃은 온통 웃음뿐이다. 그 꼭대기의 비탈진
곳에 김광섭의 "성북동 비들기" 집이 있다. 저쪽 돌깨는 소리가 시끄럽던 달동네 산 삐 알 골목은
자목련도 벽에 기대어 위태롭게 피어 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들기 작은 광장에서
나는 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 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알지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 야 간다 .
김광섭 시인이 서대문 형무소로 가면서 쓴<이별의 노래> 시다.
호가 이산怡山이며 1917년 고향의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와 중동고보를 거쳐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최고의 지식인이다.
이헌구 (1905 -1982년)에게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5년
詩苑에 <고독>을 와세다대학의 동창회지 시 모기장을 발표하고 문학활동
시작이였다 한다. 그의 시중에 제일 유명한 시는 <저녁에>라는 시가 1969년 월간
조선에 발표힌 김광섭시인의 시다. 시인의 투병 중에 하늘과 별에 희망을 걸었던
詩가 유행가 가사가 되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내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 <저녁에>
1974년 시 선집을 간행하고 1977년 세상을 떠났다.
다시 골묵을 내려와서 만해공원에 쉬고 뒷길로 넘어 길상사로 이동했다
길상사는 문학과 애절한 사랑이 가득한 최 근대의 큰 사찰이다. 이곳은 서울의
3대 요정이었던 대원각이 있던 터다.고개를 넘어 길상사에서 우리의 문학수업은
진지하고 끝이 없었다
백석을 평생 그리고 산다. 백석시인에게서 자야란 이름을 받고 그 이름은 이백의
子夜吳歌시 중의 가을 편에서 따왔다 한다. 그리고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시를 받았다
살아서는 백석 시인을 가슴에 품고, 죽어서는 시대의 학승 법정스님을 웃 담에
모시고 영원을 살고자 한 것 같다. 길상화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법정스님의 선물을
받고 그 당시 7 백 억 정도의 전 재산을 불교재단에 희사한다 그 당시 언론아나 뉴스에는
기사가 넘친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에게 가자는 물었다
그 큰 재산을 어떻게 미련 없이 희사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김영한 그녀는 대답한다
내 재산 모두 합해봐야 백석의 시 한 줄 보다도 못하다는 대답이다. 여인의 배포도 이
정도면 장안의 어떤 남정네도 그녀 앞에선 오금을 못펴리라, 와! 통쾌하다 시인이여
우리 오늘 만세를 부르자 김영한 여인! 이쯤되면 장안의 어떤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
못하는 시대의 대인이다
법정의 유품이 전시된 진영각 뜰에는 법정의 유골이 묻혀있다. 그 옆에 모란순이 꽃멍울울
머금고 서있다. 그 아래는 길상사의 길상헌 뒤편에 김영한의 유골이 뿌려져 잠들어 있다
길상사 계곡에 잠든 사랑과 애증과 적막했던 만날 수도 없었던 사람을 그리워 하던 삶이여
영원히 깊이 잠드소서. 김경식선생님의 해설을 듣고 대충 건너 뛰고 나름대로 기록을 했습니다.
글 : 허윤정
Caravelli Orc - J'aime 그대를 사랑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