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8월 8일 목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31,31-34
복 음 : 마태 16,13-23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마태 16,16)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신 베드로가 부러웠습니다.
그분께서 누구인지 알려고 애써 노력하여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인데,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셨으니 복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여 볼 때, 그것은 베드로의 나약함입니다.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신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울 때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았다 하더라도,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내 생각이 곧 하느님의 생각이라고 자만할 수는 없습니다.
늘 내 안에 들어와 계시는 하느님의 생각과 나의 인간적인 생각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 현세에서 겪는 삶이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베드로의 강인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16,23)라는 말씀을 듣고도 물러나지 ᅟᅡᆭ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만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고 꾸짖으실 때도 그분께 매달리고 끈질기게 달라 붙습니다.
예수님께 좋은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않고, 지금 “사람의 일”(16,23)에 집착하여
하느님의 계획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 주실 때도
그분을 피하여 도망가지 않는 것,
어쩌면 그래서 베드로가 반석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진 흠을 짚어 주실 때, 그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믿음,
그것으로써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유명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식당 성공의 비결을 묻자, 사장님께서는
“손님에게 무조건 더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성공 비결일까 싶었지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퍼주고 망한 장사 없다’라는 옛말을 인용하면서,
최고의 영업 전략은 손님들이 ‘본전 뽑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감동한 손님은 다시 찾거나 새로운 손님에게 소개해서 보답한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더 많이 제공하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자기 성공 비결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큰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역시 넉넉한 인심을 보이는 식당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고깃집 사장님은 손님으로부터 불만을 표현하는 말,
예를 들면 ‘자리가 지저분하다.’, ‘음식이 늦게 나온다.’, ‘주문했는데 다른 것이 나왔다.’ 등의
항의가 나오면 곧바로 음료수 한 병을 들고 직접 찾아갑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사과의 말씀을 하시고 음료수 한 병을 건네는 것입니다.
이 고깃집은 잘 될까요? 안 될까요?
현재 3호점까지 냈으며, 모두 호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떠올리면서 장사한다면 오히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와 비즈니스 성공 비결 제1조는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질적 이익뿐 아니라 즐거움과 감동 같은 정신적 이익을 준다면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에게는 무엇이건 주고 싶어 합니다.
이런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는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지요.
이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닌,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우리에게 큰 손해를 가져다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이익으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망하는 길을 걷는 것이고,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면 성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기를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나는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그에 대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바람을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런저런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바람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주님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교
회의 신비는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먼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곧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바로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바위 위에,
곧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는 까닭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오늘 우리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자신만을 챙기는 일로 주님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우리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다 겪어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는 매 미사 중에 ‘거룩하시도다.’를 고백합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다른 것들은 다 이해할 수 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호산나’입니다. 호산나의 히브리어 어근을
시편 118:25, “아,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아, 주님, 번영을 베푸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야샤’(구원)와 ‘안나’(간청)가 합쳐져서 “호산나”라 번역되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 호산나는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또는 “제발 구원해 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호산나라는 말은 신약성서의 복음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에 옷을 깔고,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 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렇게 ‘호산나’라고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은 5일 후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대상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현실에서의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구원자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와 명예 그리고 재물을 주시는 구원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눈먼 이를 뜨게 하고, 중풍병자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구원자를 원했습니다.
그런 기대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요한은 왼쪽에 야고보는 오른쪽에 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에게 끌려가서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했던 ‘호산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습은 제자들이 원했던 ‘호산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호산나’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을 말씀하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상실된 하느님의 모상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시기, 질투, 분노, 원망, 욕심, 게으름, 욕정이라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나자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죽었던 소녀에게 ‘탈리타쿰’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재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호산나가 아니셨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죄와 악 그리고 죽음에서 결코 구원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들 또한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미사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호산나’가 되실 수 없습니다.
나를 죄와 악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진정한 ‘호산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예수님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도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엘리야는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 엘리야이거나,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예언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떤 예언자보다도 위대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이는 줄곧 주님과 함께 지냈고, 기적을 보고, 당신과 함께 많은 표징을 일으킨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이렇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이라고 하신 뒤,
그 반석 위에,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베드로라 부르시며,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9절)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꾸짖으신다.
아버지께 계시를 받고,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히브리 말로 반대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분을 따르는 일과
하느님 아들의 가시는 길을 바꾸어 놓으려 한 것이 사탄의 일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총애받던 수제자의 모습에서 초라한 사탄 한 마리로 급전락한 이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님께서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드러내는 표시를 보여 주십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 시기에 딱 맞는 성인들의 출현입니다.
교회가 갈팡질팡하며 총체적 난국 속에 허덕이던 중세 시기,
주님께서는 방황하던 당신의 양들을 위해
착한 목자이자 명설교가 도미니코 사제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때로 논리정연하면서도 감동적인 설교, 때로 벼락이요 철퇴 같은 강렬한 말씀 선포로
이단들을 물리쳤고, 교우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는 또 다른 도미니코 사제와 같은 명설교가를 요청합니다.
사실 우리 사제들은 다들 모두 명강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게 만드는 그런 강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 같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넘치는 자료들의 홍수 시대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유명 강사들의 명강의가 내 손안에서 펼쳐집니다.
고리타분한 강론 외에도 얼마나 많은 즐길 꺼리들로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뭔가 말 좀 해보려 시도를 하면, 즉시 눈을 감아버리고 딴전을 피우는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계속한다는 것, 참 난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강론은 우리 사제가 교우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
공의회는 강조합니다.
좋은 강론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출발해서 성경을 주제로, 성경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청중들 지루해 죽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파악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눈물과 동떨어진 강론은 백퍼센트 실패입니다.
너무나 강론하기 힘든 시대,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사제들의 강론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론을 준비하기 힘든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강론에 진심인지 모릅니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우들에게 우리 사제들께서 시원한 청량음료 같은 강론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그런 여름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으로부터 반석 소리를 들으며
사도단의 에이스로서 천국의 열쇠까지 건네받았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주님으로부터 총애받던 수제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흉측하고 초라한 사탄 한 마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주님 나라의 충신에서 역적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영예, 박수갈채에만 몰두했지,
주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 고통과 십자가 죽음을 철저히 외면했던 것입니다.
필기시험에 100점, 실기에는 빵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
공관복음 모두가 전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
갈릴래아 주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이르러 베드로의 고백을 받게 됨을 전한다.
루카복음은 빵의 기적 후 즉시 장소를 명기하지 않은 채 베드로의 고백을 보도하고 있다.
루카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저자 고유의 특성인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까지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는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예수 추종의 길’ → ‘종말의 시기에 관한 토막어’
→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순서이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카 9,18-9,36)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일행과 함께 띠로와 시돈 지방에서 다시 갈릴래아 지방으로 돌아와
호수의 이쪽저쪽에서 활동하시고 난 뒤(마태 15,29-16,12)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당도한다.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맥의 지하수가 샘 솟는 곳을 골라
기원전 2년경 건설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마치 하나의 필기시험과도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 3년가량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답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2단계로 구성된다.
예수께서는 우선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하여 물으신다.(13절)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蘇生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예언자 등으로 여겼다.(14절)
다음으로 질문은 제자들을 향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하고 대답한다.
마르코는 단순히 ”그리스도“(마르 8,29)로,
루카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루카 9,20)로 소개하면서
즉각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는
예수님의 함구령을 덧붙이고는 이 단락을 끝맺는다.
물론, 마태오도 함구령을 덧붙이지만,(20절)
그 사이에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찬사,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첨가하였다.
이는 마태오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이 확실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필기시험은 만점, 즉 100점으로 평가하시고는 그를 복된 자로 여기신다.
그런데 이 결과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밝혀 두신다.(17절)
이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째는 시몬 베드로(돌, 바위)를 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교회 창립 약속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죽음의 힘도 능가하는 그런 조직이 될 것이다.(18절)
둘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셋째는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똑같을 것이라는,
매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19절)
이는 실로 엄청난 약속이며, 이 약속이 실현된다면 베드로가 가지는 권능은 절대적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 때문에 학자들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그 밖의 다른 교회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께서 베드로, 즉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전체에 주시는 권능인지,
아니면, 베드로라는 수제자 개인과 그를 계승하는 교황의 인격에 주시는 권능인지를 따지는 것이다.
대답은 쉽지 않다. 예수께서 거짓으로 약속하실 리는 없을 것이므로
어느 쪽에든 그 권능이 주어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마 교회 전체에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전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주교단에 의해 일치됨으로
이들의 권한과 책임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엄청난 권능을 교회나 교황이 임의 행사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교회와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권능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계획에 달려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매여 있다.
이런 사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말씀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에서 즉각 드러난다.
예수님의 머지않은 수난과 죽음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쉽게 수용될 사안이 아니었다.
방금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듣고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그는 예수를 붙들고 ‘결코 그런 이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린다.(22절)
이것으로 비드로 고백의 진가가 드러난 셈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정확한 고백이지만, 속으로는 형편없는 고백이 되고 말았다.
필기시험에서 100점을 얻은 베드로가 실기시험에서 빵점을 맞은 격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태도는
예수께 장애물로 간주된다.(23절)
실기시험에도 100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베드로에게 남은 숙제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이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
이 숙제는 우리들에도 같은 비중으로 주어져 있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