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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동은 서구관내 행정동이다. 10개의 법정동을 거느리고 있다. 면적은 서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49.16㎢. 대전시 관내 82개 행정동가운데 세번째다. 그런데 인구는 겨우 3천5백여명.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아 이 곳을 방문하는 외지인들은 한결같이 찬탄(讚歎)한다. 어느 아름다운 전원마을에 온 느낌이라고. 장난기가 발동해 '이 곳도 대전'이라고 옆에서 살짝 건드려본다. 금새 놀란 표정에 그래요가 바로 튀어나온다. 흑석네거리에서 장태산가는 방향을 바라본다. 어느 면소재지에 온 분위기다. 저절로 밀려오는 느낌이기에 부정할 순 없다. '대전이면서 결코 대전이 아닌 것같은 이 곳. 전원이 느껴지고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이 곳. 기성동이 살갑게 다가온다. 하여 이 곳에 오래 살아왔고, 그래서 기성동의 역사가 됐고, 문화가 된 분들을 찾아 그 분들의 농익은 삶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과업으로 생각하며...(편집자주)』
"그까짓 산 얘기 끄집어내서 뭐 해유~ 고생 고생만 했지유~ 한 시상 가족들 멕여 살리려고 안해 본 게 없지유~ 이 계곡에 도슬비가 많아유~ 도슬비 잡고... 또 산벚도 따고...그것들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해서 흑석리까지 걸어가서 흑석역에서 기차타고 대전 역전시장에 가서 상인들에게 넘겼죠. 흑석리에 대전버스가 안들어오는 시절이었슈~"
도슬비는 이 지방 방언(사투리)으로 '다슬기'를 지칭하고, 산벚은 벚나무 열매인 '버찌'를 일컫는다.
연정화(延貞花, 77세)님은 현(現)장안동의 모태가 되는 원(元)장안마을에서 50여년 넘게 자그마한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장안 원 슈퍼'. 21일 오후 연정화님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게 건너 남의 집 화단턱에 궁뎅이를 걸치고 가방에서 책 한 권 꺼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2시간여가 훌쩍 지나갔다. 시장끼가 느껴졌다. 그때 이웃집에 사시는 남성분이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만요!" "여기 아주머니 어디 가셨을까요?" "아마도 내 생각에 저 위 소막지나 있는 밭에서 김매고 있을거유~" 계곡길을 따라 한참 걸어올라갔다. 마침내 우사(牛舍)가 나오고 고추 등이 심겨져 있는 밭에 이르렀다. 열심히 염탐해 봐도 사람그림자는 전혀 안보였다. 혹시나 해서 좀더 올라가서 인기척을 찾아려 해도 소용이 없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척 허기졌다. 안되겠다 싶어 차를 몰고 흑석리로 나갔다. '금평추어탕'에 들러 한 그릇 뚝딱 하고 다시 슈퍼를 찾아갔다. 원래 계곡의 해는 짧다.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 그런데 저 멀리 슈퍼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며 짜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차를 길가에 바삐 주차시키고 한걸음에 가게앞으로 다가갔다. 연정화님은 가게 옆에 딸린 부엌에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 번에 생수 사간 사람인데, 기억 하세요?" 연정화님은 뚱한 표정으로 필자를 올려다봤다. 느닷없이 앞에 나타나 생수 사간 사람 기억하냐고 하니...? 그동안 생수 사간 사람 어디 한 두사람인가? 필자가 생각해도 마음속에서 웃음이 나왔다. 인삿말치고는 참 어설펐다. 만일 인터뷰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속에서 걱정이, 긴장이 옥죄어왔다. 침착하자. 침착하자며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다독거렸다. "어머니, 식사 천천히 하시고요. 이따가 말씀 좀 나눠요"
연정화님은 가게 앞으로 의자 두 개를 들고 오셨다. 가게 안에서 흘러나온 불빛덕분에 가게앞도 환했다. 필자를 소개하고, 찾아온 목적을 천천히 차근차근 설명해 드렸다. 기성동에 오래 사시고 있는 분들을 찾아뵙고, 기성동의 역사, 문화와 함께 살아오신 인생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해서 찾아왔다고... 선선히 응해 주셨다. 필자는 다행이라 싶어 속으로 숨을 여러 마디로 나눠 안정을 시켰다.
옥천 삼양리가 고향인 연정화님은 시집와서 무척 고생만 하며 살았다며 서두를 꺼냈다. 그 다음은 술술 베를 짜듯 옛 기억들의 파편들을 막힘없이 쏟아냈다. 그런데 묘한 화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무척 환한 미소를 띄면서 말씀을 이어가지만... 한 문장을 마무리할 때마다 말끝에선 긴 한 숨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남들은 모를 것같지만, 필자의 청각은 놓치지 않았다.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살아온 지친 세월은 어쩔 수 없나보다.
대전과의 인연은 1971년이다. 그 해 남편과 맞선을 보고 결혼했다. 결혼은 옛대전극장통에 있었던 제일예식장에서 치뤘다. 결혼한 뒤 시가(媤家)가 있는 두메산골 장안동에는 들어가 살고 싶지 않다고 버텨 충남고인근(현 버드내 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얼마 안있어 첫애가 들어섰고, 안도마다리 근처로 또한번 이사해 살았는데, 남편에게 큰 변이 생겼다. 남편이 덜컥 결핵에 걸렸다. 지금은 병대접도 못받는 병이지만, 당시엔 엄청나게 중한 병으로 알려졌다.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가. 주위에서 도망가라고 했지만, 어찌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고 아기는 어쩌란 말인가.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남편이 치료를 위해 공기좋은 장안동에 들어가 살자고 하도 통사정해서 결혼한 지 일년 남짓 지난 뒤, 이 곳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단다. 24살인 1971년 결혼해 장안동에 들어와 산 지 어느덧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현 슈퍼는 원래 동네 구판장이었다.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해왔는데, 나누는 몫이 별로고, 신경은 신경대로 쓰여 마을주민들이 아예 연정화님이 맡아서 하라고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정화님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 아무리 고된 일일지라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매일 남의 밭일 하는 것은 예사고, 틈만 나면 도슬비 잡고, 버찌 따서 저 멀리 대전으로 팔러 다녔다. 필자의 눈앞에 손을 펼쳐 손등을 보여주셨다. 손가락마디 관절마다 퉁퉁 부어오른 모습이다. 가슴이 찡해 왔다. 연정화님은 손에 돈이 쥐어지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남편 몸에 좋다는 약, 음식을 챙겨 먹였다. 그 덕에 병은 완쾌돼 정상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막힌 인생살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팔자인지 연정화님의 시름은 끊이지 않았다.
주위에서 남편을 편안히 지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남편의 성격이 밝고 부지런함때문에 주위에서 평이 좋았다. 마을주민들 추천과 면사무소 직원들 권유로 장안리 이장일을 보게 됐다. 무려 24년간 이장일을 봤다. 장기간의 이장일은 남편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랫동안 이장일을 하다보니,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술 마시는 일이 잦았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결국은 남편에게 사단이 일어났다. 대장(大腸)에 중한 병이 생겨 여덟번이나 수술을 했고, 결국 7년전 74세에 수술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 때는 남편이 무척 싫고 밉고 서운했다. 못사는 집에 시집와 평생 고생만 한 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남편을 보니, 하염없이 눈물만 나오고, 남편한테 팔십까지라도 제발 살아달라고 애원했다. 속만 썩혔던 남편이지만, 남편의 빈자리는 어느 누구도 메워줄 수없으리라. 남편은 이장일을 성실히 수행해 대통령 표창 두번을 비롯해, 수많은 도지사, 군수 표창을 받아 책 몇 권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남편이 불치의 병을 얻게 돼 하도 화가 나서 남편 살아생전에 불쏘시개로 썼다. 남편은 허허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괜히 태웠다고 후회하고 있단다.
너무 무거운 얘기가 장시간 흐른 것같아 화제를 바꿀겸 장안동 마을 얘기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연정화님은 금새 더욱 환한 웃음기를 띄며 '전설따라 삼천리'를 시작했다. 조금도 막힘이 없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원래부터 그런 얘기를 좋아해서 집안어른들로부터 마을이야기를 많이 들었었고, 주위에서 물어보면 남한테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단다. 한번은 충남대교수님이 찾아와 마을이야기를 묻길래 얘기해 드렸더니, 나중에 티비에서 '전설따라 삼천리'로 만들어져 방영됐단다.
저 앞에 보이는 바위산이 장군봉인데, 지리산 500리가 끝나는 봉우리란다. 지리산 산줄기가 여기까지 뻗어온다는 얘기. 그리고 장군봉 정상너머 아래에 굴이 하나 있는데, 장씨란 사람이 임진왜란 전 '임오난'에 난을 피해 3년동안 굴 속에서 베를 짰다고 한다. 임오년은 언제인가? 조선 선조임금이전에 외적(外敵)이 쳐들어온 적이 있었던가? 생각이 안난다. 그러면 고려때? 그래서 전설따라 삼천리인 것같다. 그 굴이 베틀굴이며, 장씨는 장안동 일대 땅을 자기 것이라고 선언했단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쌀을 가지고 오는 사람, 밀가루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이 산 저 산 하나씩 나눠주다보니 더이상 산이 없어 먹고 살기 위해 지금의 원(元)장안에 내려와 마을을 가꿔 살게 됐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마을에서 마주보이는 뒷동산(마을서편)이 잘 생긴 미인산이라서 마을의 터를 잡게 됐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마치 그 옛날 장씨옆에서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말씀해 주셨다.
또 남쪽의 산을 가리키며 '저 산은 불 화자 화태산인데, 정상에 물이 고여있는 둠벙이 있단다.' 그런데 만일 그 둠벙의 물이 마르면 마을에 불이 난다고 해서 화태산 정상 못미쳐 그 아래 낮은 봉우리 비탈면에 긴 단지를 묻었단다. 마을사람들은 그 단지의 물이 마를 것같으면 동네 남정네들이 그 곳까지 물을 퍼날라 단지의 물을 채워놓았단다. 또한 쉽게 마르지 말라고 식초담은 병을 넣어두었단다. 그 광경을 본인이 직접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화태산은 지도상에 나오는 '해태산'을 지칭하는 것같다. 해태는 상상의 동물로 불을 막는 동물이라고 한다. 경복궁앞에 놓여진 해태상이 그러한 경우다.
또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막골이 있는데, 신선과 학이 산다고 해서 선학동(仙鶴洞)이라고도 했단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상선학, 중선학, 하선학으로 나뉘는데, 지금은 수양원이 있는 곳이 웃산막골, 그 다음이 가운데산막골, 그 아래가 하산막골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산막골에 계곡물을 건너가는 다리가 있는데, 먼 옛날 그 다리 아래에 깊게 파인 바위웅덩이가 있었단다. 가마솥처럼 생겨 가마소둠벙이라고 하는데, 진산에서 한 처녀가 시집오다가 가마가 뒤집혀 물에 빠져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단다. 가마꾼이 물을 건너다가 중심을 제대로 못잡아 기우뚱하는 바람에 그 처녀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는 바위가 많단다. 슈퍼앞 저 멀리 송가네펜션이 있는 계곡으로 올라가면 고양바위가 있고, 장태산휴양림 입구 왼쪽에 행상바위가 있고, 좀더 들어가면 왼쪽에 씨아시바위가 있단다. 그리고 장안저수지 가에 높다랗게 바위가 솟아 있고 정상에 정자가 있는데, 바위는 여덟마리의 말이 머리숙여 물을 마시는 형상이란다. 그런데 말의 목부분에 도로가 나는 바람에 말이 피를 흘리게 됐고, 지금도 바위에 핏자국이 남아 붉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자는 '팔마정'을 말하는 것이고, 장안저수지 조성으로 물에 잠겼지만 이 일대를 '팔마동'이라 한다. 새로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길울(길곡 吉谷)이란 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긴 계곡에 위치해서 생긴 지명이다. 정확한 지명확인은 나중에 시간여유를 갖고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연정화님은 만일 필자가 제지하지 않으면 밤을 새울 것같은 기세다. 다음에 듣겠다며 궁뎅이를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떼어 일어났다. 비로소 연정화님의 입은 닫혔다.
장시간 시간을 내주신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 답례로 생수병 20개묶음짜리 한 벌 구매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나눠 먹으면서 서로의 헤어짐을 달랬다.
첫댓글 현재 (사)대전문화유산 울림 '마을이야기강사단'에서는 올해 '기성동프로젝트'를 기획해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강사단에서 마중물이 맡은 역할은 기성동에서 오래 사시고 있는 주민을 만나 인터뷰를 통해 기성동의 역사,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대둘 회원님들께서도 기성동의 역사와 문화를 접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의껏 시리즈물을 이어가고자 하니, 회원 여러분들의 격려와 조언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탁월한 문필력 입니다. ㆍ
술술 물흐르듯 한편의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ㆍ건강하십시요 ㆍ
예전에 슈퍼 앞을 지나며 저도 시간 내서 주인분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잊고 지냈네요.
마중물님 글을 읽으며 생각만 하는 건 행동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깨닫습니다.
덕분에 기성동 이야기, 슈퍼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긴글이지만 지루하지않게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