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봉, 위재영, 문동환 세 선수는 고교시절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맹위를 떨쳤죠.
안희봉 선수는 세 선수중 가장 좋은 체격조건(188, 90)에 강속구를 던지던 선수였습니다. 바로 밑에 정민철, 김기한이라는 당시로서는 준척급 투수가 뒤를 받쳐 주기도 했고, 타선에서도 안희봉이 4번을 쳤지만 3번의 3루수 최명진도 대단했습니다. 결국 이 선수들이 그 해 봉황기를 품에 안았죠.
위재영 선수는 고1때부터 맹위를 떨치던 투수입니다. 이건 제가 본 게 아니라 선수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얼마나 공의 위력이 좋았는지 알루미늄 배트를 쪼갠 적도 있다고 합니다. 부러진게 아니라 세로로 쪼개졌다고 하더군요. 또한 동산고가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우승도 많이 경험해 보았죠.
문동환은 세 선수 중 개인적으로는 가장 뛰어난 투수라고 생각합니다만, 동래고등학교가 부산고, 경남고 등 지역의 다른 팀에 비해 전력이 많이 약해서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연세대 1학년때부터 바로 팀과 국가대표의 에이스로 활약을 했죠. 많은 분들이 임선동을 높이 평가하시는데... 솔직히 제가 보는 관점으로 임선동은 힘을 앞세운 투구 외에는 크게 매력있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 시절에도 에이스는 임선동이 아닌 문동환이라고 봐야 하구요.
그 외에 대단했던 투수들이 있는데 프로와서 빛을 본 케이스로는 단연 진필중이 돋보입니다. 휘문고 시절에는 후배 임선동에 가려 별로 빛을 못봤는데 대학 졸업 후 프로에 와서 만개했죠. 물론 끝이 좋지 못해서 아쉽기는 하지만, 91학번 투수 가운데 가장 빛나는 성적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은 도박문제로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성남고의 강병규는 봉황기에서 결승까지 혼자 완투하며 팀을 준우승시키며 프로에 진출했습니다.
그 바로 다음 레벨이 아마 신재웅 선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신재웅 선수는 투구 메커니즘이 당시만 해도 내리꽃는 스타일도 아니고 마치 1박 2일에서 김씨가 던지듯 팔을 뻗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서 공은 빠르지만 가벼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연습경기에서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는데, 신재웅 선수가 모 고교와의 연습경기에서 단 6안타만 내주며 7이닝 정도를 던진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아주 준수한 성적이죠. 그런데 실점이 6점이었습니다. ㅡㅡ..... 안타 6개가 모두 솔로 홈런이었습니다.
잘 던지다가 뜬금없이 홈런 한방 맞고... 삼진 잡고 잘 던지다가 또 뜬금없이 홈런 한방 맞고... 여러분이 감독이라면 이런 투수 계속 마운드에 올리겠습니까? 내리겠습니까? 정말 판단하기 어렵겠죠... ㅋㅋㅋ
당시 신재웅은 그런 미완의 대기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신재웅 선수를 존경하고 박찬호 선수가 신재웅 선수를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보여줬던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었습니다. 신재웅 선수의 부친은 지금도 공주 모처에서 아주 오래된 자전거점을 운영하십니다. 새 자전거를 판다기보다는 중고 자전거 수리해 주는 쪽이 훨씬 많은 공주의 변두리 지역입니다.
그 자전거점 한 구석에 자전거 타이어를 걸어 놓고 피칭연습을 하곤 했었죠.
그러나 91학번에서 최대어라고 하면 절대로 이 선수를 빼고는 논할 수 없었으니... 바로 충암고의 심재학 선수였습니다. 충암고는 당시 심재학, 이원식, 송재용이라는 걸출한 투타인재와 특급포수 최기문을 보유한 초강팀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팀이 가장 틀이 잡혔던 팀은 충암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심재학 선수가 프로에 와서 양준혁 선수의 모든 기록을 깰 줄 알았습니다. 물론 못한 건 아니지만 고교와 대학 시절 그의 이름값에 비하면 한참 처지는 성적을 냈습니다. 당시 제가 예상한 심재학 선수의 평균 기록은 잠실임을 감안해도 3할에 20홈런 80타점 정도는 꾸준히 기록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투수로서도 135킬로 이상의 직구를 던졌구요.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 우승컵을 가져갔습니다.
심재학 선수와 강준기 선수와의 일화에 대해 한마디 소개를 안 드릴 수가 없겠군요. 당시 고교 최고의 강타자가 누구냐는 백이면 백 모두 심재학이라는데 동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천안 북일고의 심성보도 훗날 단국대 1학년때부터 심재학과 함께 공포의 SS타선을 구축했지만 고교시절에 심성보는 타자보다는 투수였고, 또 당시 천안북일고가 공주고에 지역예선에서 연전연패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는 높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전국레벨의 강타자라고 하면 투타를 겸한 대전고의 안희봉, 충암고의 심재학, 공주고의 포수 강준기, 경남고의 2루수 박현승, 대전고의 3루수 최명진 등이 지명도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세는 좌재학 우준기였죠. 강준기 선수는 심재학 선수처럼 거포는 아니었지만 포수로서 강견에 비교적 빠른 발과 정확한 타격으로 그의 공은 거의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 아니면 2루수와 좌익수, 우익수 사이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가 많았습니다. 가장 안타를 치는 방법을 잘 아는 선수였고 심재학은 전형적인 거포였습니다.
공주고는 청룡기 준우승, 충암고는 대통령배,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두 팀은 이미 모든 선수가 대학행을 확정했기에 다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국체전 출전했습니다. 사실 전국체전은 학교 입장에서는 중요한 경기지만, 야구만 하는 경기가 아니라 지금도 많은 분들이 전국체전 우승을 크게 쳐 주지 않는 점도 있었죠. 공주고와 충암고는 당시 전국체전 결승에서 붙었는데 청주구장에서 결승이 열리기 하루 전날 충암-광주진흥, 공주-대전의 준결승이 있었습니다. 당시 광주진흥은 전국레벨이라기에는 많이 부족한 부분이 있는 팀이었는데, 이미 동국대로 진로를 결정한 강준기 선수는 경기 전에 충암고 덕아웃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청소년대표에서 친분이 있던 심재학 선수에게 내년에 우리 학교 손혁이 고려대로 갈 거니까 잘 봐달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러 갔다고 합니다.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충암고 선수들이 심재학 선수를 불렀습니다. 그의 타석이었기 때문이죠. 심재학 선수는 강준기 선수에게
"야 잠깐 기다려 치고 들어올께" 하고 나가더니 바로 홈런을 날려 버리고 들어와서 강준기 선수에게
"아까 우리 무슨 얘기했었지?"
강준기 선수는 할말을 잃고 그냥 덕아웃을 나왔다는 ...
다음에 이어집니다.
첫댓글 와 님 기자에요?ㅋㅋ
봉팔형님....저 기억하시려나 ㅎㅎㅎ 02년도인가...대전구장에서 한번 뵜었져...건강하세여
진짜 잼있어요..최고인듯...ㅎㅎㅎ
정말 재밌네요...^^ 다음편이 기대되요~~
완전 잼있어요ㅋㅋ 나도 공주 출신인데.. 과거엔 공고가 화려했네요.. 지금 넘 침체되서 안타깝다는ㅠ 작년에,, 학교랑 야구부 사이에 문제가 있단 얘길 들은것 같은데.. 잘 해결되었나 몰겠네...
이 글이 어디에 쓰셨던 건가요?? 당시 선수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마치 영화처럼 그려지면서.. 기대되네요 ^^
그냥 옛날 생각나서 끄적이는 거에요... ^^ 그리고 천장지구님 감사해요. 올해는 야구장 자주 갈 수 있도록 노력할께요.
완전 대하드라마 같아요...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