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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41 저녁바람이 훅 하고 몰아치자 장추삼의 머리칼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본래 이것저것 귀찮아서 반쯤 풀어헤쳐진 머리지만 상태는 양호한지라 바람의 부 름에 따라 기분 좋게 나부꼈고 그도 이런 상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소림의 정문은 평소의 두 배가 넘는 다섯 명의 무승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 실 절의 대문을 호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보통 형식적인 장승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소림을 찾는 이들도 경비승(警備僧)들과 가볍게 합장하며 웃음으로 지나는 게 상례였다. 이곳은 단순히 절 같은 것 이 아니라 무림을 지키는 성소이자 강호의 대들보였고 보통 이런 장소에는 쓸데없는 날파리들이 꼬이는 법이다. 이를테면 전시용(展示容) 정도라고나 할까? 소림 무승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인물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른지 눈빛부터가 평소의 그들과 차이 가 있었다. 그와 사내가 산문(山門)앞에 이르자 다섯 명의 승려들 가운데서 가장 나이 가 많아 보이는 사십대의 승려가 한발 앞으로 나서서 합장을 했다. “무슨 일 인지 모르나 당분간은 향화객을 받지 않으니 오늘은 돌아가 주시 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공손하나 비굴하지 않고, 나직하나 힘이 담겨있으며, 무엇보다 상대방을 은 연중에 찍어 누르는 기세. 이것이야말로 천년소림의 관록을 단 한마디의 말 로 표현하는 것이니 과연 사람 하나를 봐도 그 집안을 안다는 말이 맞으리라. ‘대단하군.’ 침 한 방울을 꿀꺽 목젖으로 넘기고 무언가 위축되는 자신을 다잡으려 장추 삼이 뒷목을 두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새까만 먹구름이 지상으로 강림하 여 전신을 옥죄어오는 느낌. 장추삼의 인생에서 가장 강한 대전 상대를 꼽으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기학 이었다. 힘, 기술, 기도, 그리고 마음가짐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고수였다. 싸움에선 완패였고 승부에서 이겼기에 더욱 개운치 못했던 상대. 몇 십 년을 종횡한다고 할지라도 이만한 고수와 손을 섞어볼 기회를 가지기란 좀체로 난망한 일이다. 그런 장추삼이지만 상대방에게 기가 죽어본 적은 단 한번 있다. 그건 놀랍 게도 기학이 아니었다. 자신을 괴멸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천고의 무인이 아 니었다는 거다. 더없이 강한 기학이었지만 결코 겁을 먹지는 않았다. 우습 지만 그의 정신을 굴복시켰던 상대는 열아홉 장의 그림, 더 정확히 말해 그 림 속에서 월광살무라 명명된 괴검초를 휘두르던 이름도 얼굴도 모를 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실존조차도 의문시되는 허상의 존재에게 말이다. 그리고 지금 장추삼은 다시 한번 주눅이 드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 느낌 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한 가지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 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목을 누른 것이다. ‘무언가 비슷해... 뭘까? 이런 게 세월이라는 건가?’ 그를 내려다보았던, 또는 보고 있는 상대들은 무언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 잠정적으로 ‘세월’이라 이름 붙였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무튼 겁이 난다. 이거... 쉽게 봤는데 그게 아니다. “향불 올리려고 온 거 아니오. 들어가게 해 주시오.” “음?” 중년승은 눈이 찢어진 사내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향화객이 아니라면 소림 에 특별한 용무가 있다는 얘기고 복색을 보니 관에서 파견된 사람도 아니다 . 그렇다고 출중한 기도를 풍기는 무인도 아니니 도대체가 목적을 모르겠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날이 좋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이렇게 축령객을 입에 담는 소승을 용서하시길. 아미타불...” “날이 좋지 않은 건 귀사의 사정이고 난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소. 그러니 어서 문을 열어 주시오.” “뭐라고!” “저런 발칙한!” 문가에 서있던 청년승들이 왈칵 뛰쳐나왔으나 중년승의 제지로 걸음을 멈췄 다. 그러나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여전히 씨근덕거리며 장추삼들을 쏘아보았 는데 그 기세가 자못 매서웠다. 뭐, 그 정도에 얼어붙을 장추삼이 아니었지 만. “소승은 현오(賢旿)라고 합니다. 미천하나마 지객당을 맡고 있지요. 시주 께서 용무를 말씀하신다면 아뢸 건 아뢰고, 처리할 수 있다면 힘닿는 데까 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시주께서는 부담가지지 마시고 소승에게 말 을 해 주십시오. 아미타불...” 자신보다 최하 열 살은 어려보이는 청년에게 꼬박꼬박 소승이라 몸을 낮추 는 이 중년승이 소림의 지객당주 현오라는 사실에 뒤에 있던 사내가 깜짝 놀랐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겸양을 미덕처럼 실천하는 중이 사실 소림 내에서 무술만으로 놓고 볼 때 능히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 는데 있었고, 둘째는 그가 맹우들의 압송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거다. 장추삼도 영 바보는 아니라 지객당주라는 말에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뒷 목을 누르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오 지객당주라고 하셨소? 그것 참 잘 되었구려. 아주 잘 되었어...” “무엇이 말이오?” 빈정거리는 말에도 현오는 낯빛하나 바꾸지 않고 물었다. 그는 마치 돌부처 라도 된 양 한점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건 아무나 보일 정신수양 이 아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은연중에 사람을 찍어 누르는 힘이 있는 것이 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얘기일 뿐이다. 누르면 누를수록 튀어 오르는 괴짜 같은 놈도 있다. ‘여기서 숙이고 들어가면 끝이다!’ 기에서 눌리면 아무것도 못하고 무너진다. 장추삼의 대답은 다소 컸다. 얼마나 컸냐고 묻는다면 거의 소리를 지른 거 라고 봐도 될 정도였기에 다섯 명의 승려들만을 염두 한 행동이 아닐 거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천년소림의 정문에 토해낸 기합성일까? 아니면... “듣자하니 얼마 전에 무기를 소지했고 소속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천 . 년. 소. 림. 에서 다수의 무인들을 구금했다고 들었소! 누가 봐도 이건 온당치 못하니 어서 그들을 내 주시오!” “이보시오, 시주!” 깜짝 놀란 현오가 급히 한발을 나섰으나 한번 열린 장추삼의 입은 쉼 없이 말을 토해내었다. 몇 백 년을 침묵하던 휴화산이 느닷없이 용암을 뱉아내는 기세처럼 그의 모습은 사뭇 폭발적인 무엇이 있었기에 현오로도 얼른 대처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당황했다는 편이 옳으리라. 중원 천지에 그 누가 있어 소림사의 면전에서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아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정파의 기둥이란 말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허언이었던 건가! 힘으로 상대 를 억누르고 원하는 바를 얻는다면 소위 말하는 사파 나부랭이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거야! 찬란한 이름에 흠집 남기기 싫으면 어서 그들을 풀어주시오!” “그만두지 못하겠나! 시주는 정녕 눈이 없고 귀가 막혔는가! 여기가 어디 라고 그런 망발을 하는가! 예의를 갖추어서 대해줄때 알아서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겠나!” 마침내 현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불문의 사자후가 자연스레 운기가 되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음성은 능히 장내를 장악하고 남음이 있었 으나 도발을 해온 찢어진 눈의 청년에게 별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쾌재마저 부르고 싶었다. 천년이든 만년이든 피륙으로 이루어진 사람 들의 모임이란 게 입증되는 순간 아닌가? “훗! 내가 왜 고개를 숙여야 하오? 미안하지만 본인의 기억에서 소림에서 은자 한 푼 빌린 일도 없고 그렇다고 식량 한 끼 축낸 적이 없다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어렵군. 왜 내가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거지? 지객당 주님, 대답을 좀 해 주시겠소?” 부르르. 현오의 어깨가 잘게 떨려왔다. 이치적으로는 하나도 틀리지 않지만 반격으 로 보기에 정말 유치하고 치사하지 않은가? 아니, 대소림의 지객당주를 물 로 봐도 유분수지.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다니. 그러나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럼 비켜주시오. 날도 어두워지는데 귀사에서 폐 끼치고 싶은 생각 없으 니 용무만 마치고 가겠소이다.” 장추삼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반쯤 고개를 숙인 자세를 견지하던 현오가 어깨를 폈다. 휘르릉! 여지껏 겸손함을 잃지 않던 그였건만 일단 숙였던 상체를 꼿꼿이 하자 그리 크지 않은 현오의 전신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억지로 지어낸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연스레 우러나 는 기품이라고 할까? “시주께서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본 소림을 너무 만만하게 보신 것 같소이다. 아미타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떠나주 시오. 본사는 요즘 귀찮은 문제가 많아서 이것저것 신경 쓸 여력이 없소. 친구분들에게 아무런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풀어드릴 터이니 걱 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이다. 우리 소림을 믿고...” “믿을 수가 없는 걸?” 말을 잘린 현오의 눈썹이 불끈 곤두섰다. 알아듣기 좋은 말로 좋게 타일러 보내려고 했거늘 이자는 무얼 믿고 이리도 광망한 태도를 보인다는 건가. 믿을 수가 없다니! 어디 감히 소림의 이름에 대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가!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툴툴거렸다. “뭘 보고 믿으라는 거요?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귀사에서 의심이 가면 그대로 행할 거 아니겠... 아아, 귀찮어. 역시 이런 말장난은 내게 맞지 않아. 긴말하기 싫고...” 고개를 모로 꼬고 투덜거리던 장추삼이 똑바로 현오를 바라보았다. 더 정확 히 말해 소림의 정문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평범 한 사람이라면 은연중에 그가 일으킨 기세를 받아내기 어려울 터, 현오는 장추삼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다. ‘뭔가? 도대체 고수 비슷한 풍모도 보이지 않는 자가 이리도 당당하게 대 소림의 정문에서 시위를 한다는 건? 설마 이자가 내공을 안으로 갈무리할 경지의 절정고수라도 된다는 건가?’ 그러나 그의 입에서 토해진 말은 그런 상념을 깡그리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들여 보내줄 거요, 아니면 내가 들어가리까?” 얌전히 비키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밀어 부치겠다는 의미. 천년소림의 역사 상 정문에서 이런 수모를 겪은 경우도 드물 것이다. “갈!” “발칙한!” 겨우겨우 분노를 참고 있던 청년승인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현오도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이 과연 이 친구가 정신이 좀 나간 광인인지 아 니면 정말로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네 명의 승려들은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알고 보면 지객당에서 촉망받는 무승들로 일신의 절기가 동년의 소년무사들과 비교도 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었다 . 그들은 산문의 계단을 넘듯이 내려와서 장추삼의 앞으로 도열했는데 분노 의 기운과 출중한 기도가 어우러지자 과연 대소림의 이름에 걸맞는 위상을 보여주었다. "귀하는 지금 두 가지의 잘못을 범하셨소. 이제라도 발길을 돌린다면 불문 에 부치겠으나 자꾸 행패를 부린다면 매운 맛을 보게 될 거요!" "거참 말 많네. 뭘 두 가지씩이나 잘못했다는 거야?" "첫째로는 천년소림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이고, 둘째로는 감히 소림의 정 문에서 물정 모르고 난동을 부린 것이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론은 소림사 앞에서 큰소리 낸 것을 탓하는 말 아닌 가? 당연히 장추삼의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아니, 특유의 빈정거림을 가득 담은 말이 토해졌다. 본래 이쁜 말을 쓰지도 않는 자가 심기까지 상해 서 뱉어낸 말이니 거북함을 떠나서 상대방을 철저히 조롱하는 것이 되었다. "귀사에서는 세 가지의 잘못을 범했는걸? 나보다 한가지나 더 실수를 했으 니 마땅히 사과해야 하오. 잘못한 걸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내 귀찮지만 특 별히 말해 주도록 하지. 첫째로 정도의 기둥이라는 곳에서 힘으로 상대를 핍박하였고, 둘째는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항의하러온 사람에게 겁을 줬으 며, 나머지 하나는..." 장추삼이 말꼬리를 흐리며 씨익 웃었다. 가뜩이나 빈정거림의 말투에서 웃 기까지 하니 청년승들의 타는 가슴에 기름이라도 부운 격이지만 그는 얄미 우리 만치 또렷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나이도 어린 중들이 욕 비슷한 걸 형뻘인 사람에게 마구 지껄인 죄지." 네 명의 청년승들은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현오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그들의 얼굴과 홍시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기에 장추삼이 고 소 지었고 지객당을 맡고있는 수양 깊은 승려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참을 만큼 참지 않았는가? "귀하가 자처한 일이니 빈승들을 탓하지 마시오!" "말 많네, 진짜..." 그 말을 신호로 청년승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들고있던 장봉(長棒)을 맹렬 히 휘둘렀다. 기수식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때려잡자는 식이라 충분히 위력 적인 모양새였다. 봉의 특성은 길이와 유연성이 강점이다. 일견 딱딱해 보이지만 부러지기보 다 휘어짐을 염두하고 만들어진 탓에 공기의 영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지닌바 충분한 위력을 발휘한다. 소림의 봉법(棒法)은 권법과 함께 무림의 일절이라 하겠다. 그에 비견된다면 개방의 타구봉법(打狗棒法)을 들 수 있 겠으나 힘과 세기 면에서 아무래도 소림의 그것에 비한다면 많은 손색이 있다. 우웅!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내려쳐진 봉은 그러나 단 한걸음을 비켜선 장추삼의 몸놀림으로 허공을 가르는 듯 했다. 어차피 타격점은 하나이고 제아무리 빠 른 봉이라도 대상을 잃으면 그저 허공을 맴도는 나무막대기에 불과하니까. 웅! 이때 또 하나의 봉이 그의 옆구리를 쓸어왔다. 언뜻 보면 선인지로(仙人之 路)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세로치기인데 직단의 공격과 어우러지자 장추삼 으로는 마땅히 피할만한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훗!’ 그때 장추삼은 왼발을 축으로 쓸어오는 봉의 머리에 맞추어 반 바퀴 회전을 했다. 이렇게 되자 봉을 친 승인은 목표를 잃음은 물론 내쳐진 봉법의 성 격에 맞게 가슴 부위가 훤히 비었다. 츅! 그에게 돌진하려는 장추삼을 견제라도 하듯 불쑥 찔러온 봉 하나는 매우 시 의 적절하여 가슴팍을 얻어맞지 않으려면 하는 수 없이 뒤나, 옆으로 물러 서야만 했다. 스르륵. 비단결 펼쳐지듯 장추삼이 옆으로 물러서자 허공을 맴돌던 두 개의 봉이 한 바퀴 회전을 하며 일제히 쳐낸 방향과 반대쪽으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아 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마지막 승려가 큰소리 기합성과 함께 일학충천( 一鶴衝天)의 수법으로 몸을 띄웠다. 애당초에 이렇게 움직이려고 예비 된 동작처럼 그 움직임은 자연스러웠지만 일봉(一棒), 일봉마다 충분한 세기가 있었기에 위력 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었고 무엇보다 위로 쳐올려지고, 반대편 세로로 쓸며, 마지막으로 날아오 른 승려가 허공에서 맹렬히 내리친 봉은 마치 천지를 가를 것처럼 직단의 기운으로 장추삼을 압박했기에 일시지간에 그의 방위는 철저히 봉쇄되었다. 슥. 빠르게 반보 나서 장추삼이 몸을 교묘하게 틀었다. 그 각도는 쳐 올려지는 봉의 완벽한 사각지대였고 헛되어 승천하는 용처럼 쳐 올려지는 봉을 그가 발로 한번 툭 밀자 오르던 기세 그대로 방향만 조금 바뀌었다. 워낙 순식간 에 벌어진 일이라 올려치던 승려로는 전혀 대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 었기에 당황한 얼굴 그대로 봉을 거두려고 했다. 뚜둥! “컥!” “크윽!” 수발하려던 봉은 내리치던 승려의 것과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부딪쳤고 위와 아래라는 정반대의 힘이 가해졌기에 그 여파는 실로 무서워서 두 승려는 봉의 진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봉을 놓친 정도로 끝 난 것이 아니라 울혈(鬱血)마저 치밀어 올라 한 승려는 왈칵 피를 토했다. “크어억!” 단 두 가지 동작만으로 두 승려를 무력화시킨 장추삼은 결과를 보지도 않고 쓸어오는 봉의 정면에서 빠르게 두 번 몸을 틀었다. 그 결과는 봉의 목표 물 자체가 반대편으로 향하게 된 것이고 이를 악물고 봉두(棒頭)를 회전하 려는 승려는 그가 여지껏 보아온 가장 빠른 주먹을 견식 하는 것을 위안 삼 으며 지면으로 몸을 눕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휘이잉~ 간단한 몇 개의 몸 움직임만으로 소림의 청년고수 셋이 패퇴 당했다. 장내 는 얼음 같은 정적 속에 묻혀 버렸고 찌르기를 시전 했던 청년승은 입을 딱 벌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럴 수가... 저자는 내가 아는 어떠한 고수보다 독특하면서도 강하지 않 은가!’ 현오 역시도 내심의 격동을 애써 누르며 장추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 호상에서 저런 박투술을 보이는 자가 어디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감탄만 을 하고 있다가는 그야말로 정문을 내어 줘야 할 판이다. 그건 천년소림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허용하지 않은 수치로 기억될 것이다. “아미타불... 시주의 절공(絶功)은 소승의 눈을 개안시켜 주시기에 충분하 구려. 그 나이에 이정도의 성취라면 현 무림에 혜성처럼 등장한 삼성과 능 히 비견될 것이오. 그러나...” 우드득. 선장을 멀뚱히 서있던 청년승에게 넘겨준 현오가 두 손을 말아 쥐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장추삼의 전투태세와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았지만 방금 전에 언 급한 삼성 가운데 일인과 싸우고 있는 것을 모르는 그이기에 눈앞에 청년이 왜 웃는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소림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소이다. 이제 나를 뚫어보시오. 아미타불...” 화아악! 마치 불붙은 장작처럼 일어선 현오의 기세는 실로 놀라왔지만 이미 한차례 격렬한 운동을 한 후이기에 장추삼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어렸다. 역시 말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그와 어울리는 대화법이 아니다. 절로 느껴지는 긴장감,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객당주라는 승려가 분명히 무겁고도 웅휘로운 기도를 흘리고는 있지만 그가 아는 사람 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기학이나 남궁선유 그리고 박옹... 모두 현오 보다는 한수 위의 경지에 오른 인물임에 틀림없었고 그들과 부딪쳐본 장추 삼에게 현오가 두려울 리는 없었다. [17984] [연재] 삼류무사-142 말이 필요 없는 상황, 어차피 힘으로 승부를 봐야하는 지경이고 서로는 한 치도 물러설 용의가 없었다. 밀고 들어가려는 자와 절대로 자리를 내 줄 수 없는 극한의 대립이기에 두 사람의 전신에서 전의가 마치 번갯불처럼 타닥 타닥 방전되었다. 일촉즉발! 누구라도 작은 움직임만 보인다면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것이고 가만히 앉아 기다릴 장추삼이 아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사내가 목젖이 울 릴 만큼 크게 침을 삼켰고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 혔다. 그 소리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소림의 정문은 대난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터였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것이냐, 것이냐... 소리는 있는데 근원지는 보이지 않으니 이 공력을 일컬어 육합전성(六合傳 聲)이라고 했다.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끝마디의 아련한 메아리가 신비롭게 장내를 감싸 안으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절로 경외심이 들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 장문사백!” 털썩 무릎을 꿇는 현오의 눈에서 용솟음치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문을 욕 되게 한 자책이 그의 마음을 갈가리 난도질 하여 저도 모르게 비감한 마음 이 된 것이다.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구나.”] “자, 장문!” [“소림의 문턱이 이리 높고 야박했다면 어찌 천년을 우뚝 서 있었겠느냐. 문을 열거라.”] 고개를 숙이고 오열을 하던 그가 힘겹게 일어났다. 그 모습은 방금 전의 태 산 같던 모습과 너무도 달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감흥을 불러왔다 . 멍하니 보이지 않는 무엇을 바라보던 현오가 장추삼을 일별하고 문가에서 한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길은 비켜주겠으나 직접 문은 열어주지 않겠다는 의미. 자존심일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꺾이지 않는 기개의 소산일까? “드시오... 아미타불....” 입술을 꼭 깨물며 비감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합장하는 현오에게서 장추삼도 소림의 거대한 기운을 보았기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 이곳은 풍성할 것이다. 바단 많은 정도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쏟아져 나올 거다. 그러나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했다. 물러나려면 애당초 오지도 않았다. 왜 이 싸움에 집착하는 것일까? 별로 나올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손실뿐인 전투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마음이 부르는 대로 왔다고 한다면 아마도 미친 놈 소리를 들을 만큼 돌아올 여파가 크다. 하지만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피가 끓어오른다던가 하는 일차원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일이든 겪은 후에 미진하나마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미완의 모습으로 어정쩡한 모양새라 하더라도 마무리를 하고 가는 것과 하지 않은 건 커다란 차이가 있다. 솔직히 말해 소림이란 거대문파의 행보에 밸이 꼴린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행사는 분명 사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오만하지 않은가?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는 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파니 사파니... 그에게 딱히 와 닿지도 않았 다. 다 그놈이 그놈인거 같았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생각에 잠겨있던 장추삼이 머리를 한번 푸르르 흔들었다. 일 단 부딪쳐 보는 거다. 그래, 가는 거다! 이제... 시작이다! 끼이이익... 닫혀있던 나무문에 힘을 주고 밀자 천년의 언어를 외마디 비명으로 토하려 는 듯 지저의 밑바닥에서 끌어 올려진 일성(一聲)의 긴 늘임과 함께 소림의 문이 열렸다. 휘이잉- 막혔던 공기가 일시지간에 몰아 닥쳤을까? 느닷없이 불어온 돌개바람이 장 추삼과 사내를 휩쓸고 갔다. 머물 듯 스치고 간 바람의 한숨 뒤에 버려진 아이처럼 서있던 장추삼이 실눈으로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아내 었다. 별로 크지 않은 공터와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잘 손질된 전각들... 울창한 나뭇가지는 소림과 함께한 세월처럼 허리를 깊게 숙여 방문자를 환영하고 멀리 뒤편에서 들려오는 무승들의 기합성은 천년을 이어온 정파의 기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웅변하며 그들이 사랑하는 사찰을 맴돌고 있었다. 겉보기에 일반 사찰과 다른 것은 오직 그들의 진각소리와 함성이 전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방문자와 향화객들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 게 하리라. 그리고 정문의 대략 칠, 팔 장 뒤에 서 있는 일군(一群)의 승려들. 평소에 외부인을 맞이하는 문승(文僧)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자리를 피했고 대략 스무 명 남짓 하는 승려들의 기세와 태도는 잘 닦인 무인으로의 느낌으로 장추삼에게 다가왔다. “이곳이... 소림인가?” 독백처럼 뱉은 장추삼의 말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전 방을 주시하고 있는 그들을 보노라면 마치 철로 만든 나한상(羅漢像)을 늘 어놓은 것 같아서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들은 산문을 지키던 청년승 들 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렇소, 시주. 이곳이 소림이요.” 물이 갈라지는 것처럼 도열해있던 승려들이 길을 트자 그들의 뒤편으로 수 염이 하얗게 샌 노승(老僧) 하나와 중년 승인 세 명이 드러났다. 인자한 미 소로 염주를 굴리며 반개한 눈으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노승이 조용히 머리 숙여 합장을 하자 엉겁결에 그도 따라 고개를 숙이는 도리밖에 없었다. 노 승은 남을 누르기보다 자연스레 이끄는 힘이 있었으니까. “소승은 혜광(慧廣)이라 하오이다.” 혜광선사! 현 소림의 장문. 대대로 강호에서 소림의 장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말로 설 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요 근래에 산문 밖 출입을 극도로 자재하는 소림사라지만 혜광선사의 위명은 강호를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이 십 오세에 소림동인관(少林銅人關)을 돌파했다는 것에서부터 스무 살에 백 보신권을 극성으로 깨우쳤다고도 했고 세수(歲首) 팔십이 넘긴 지금 칠십이 종절예 가운데 반 이상을 체득했다고 했다. 이 모두가 출처 불분명한 소문 이고, 그가 무공을 사용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기에 호사가들의 입을 안 탔을 뿐이지, 본 실력이 드러난다면 무림의 서열이 통째로 바뀔 거라는 신 비의 인물이 그였다. 아무리 천방지축인 장추삼도 소림의 장문 앞에서는 그저 뻣뻣할 수는 없었 다.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존중을 받을 자리가 바로 소림사의 장문방장인 것 이다. “양양의 장추삼이 소림의 방장을 뵈오.” “장추삼!” “괴성!” “삼성의 장추삼 말인가!” 돌과도 같았던 무승들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당황한 건 장추삼이었지 만. “뭐, 뭐야? 이 분위기?” 아니, 언제 봤다고 돌조각 같던 승려들이 이리 호들갑을 떤다는 건가. 그의 기억에서 소림에 발을 딛은 적은 한번도 없을뿐더러 불심이 돈독하여 찾아 오는 스님들에게 몇 바가지씩 쌀을 퍼주거나 한 적은 없었다. 사돈의 팔촌 이라도 불문하고 관계있는 사람은 없거늘 왜 이 난리들이라는 말인가? 사람 좋은 인상 그대로 언제나 까지 웃고만 있을 것 같았던 혜광선사의 얼 굴에까지 미묘한 물결이 번지자 무작정 놀라고만 있을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장추삼이 한발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무언가 이유가 있다. 도저 히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러나 말을 먼저 꺼낸 건 소림의 장문인이었다. 그는 법명(法名)그대로 지혜로운 눈을 빛내며 장추삼을 바라보았는데 한 치의 악의를 찾기 어려웠다. “시주의 성함이 장추삼이라면 이번 하남에서 무룡숙을 괴멸시킨 본인이오?” “예? 아... 괴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룡숙을 뒤집은 사람은 맞소이다. 별로 재미없었던 기억이지...” 재미만 없었던가? 잊고 싶은 순간이리라. 그에게 무룡숙이라는 이름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으로 남아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 을 터였다. 저간 사정이야 모르지만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혜광선사가 갸우뚱 목을 틀 었다. 괴상하다, 괴상하다...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특이한 청년인지 몰랐 으니까. 아무튼 요즘 청년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존재였다. “이름이란 떨쳐보려는 자의 몫이 아니었구나. 아미타불...” 뜻 모를 독백이 궁금증을 더욱 키웠지만 장추삼으로는 묻기도 뭐하고 해서 멍청하게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낳기는 양양성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인생 을 지배하는 곳은 여기 하남땅인가 보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부를 만 나 죽을 똥을 싸며 오년동안 뒹군 장소도 이곳이다. 친 혈육을 잃은 곳도, 첫 살인을 친구라고 부를 사람에게 행한 곳도 바로 이곳, 하남땅이다. 준만큼 거두어간다고 할까? “그런데 장시주께서는 무슨 용무로 이곳을 방문하신 것이오? 멀리서 듣자 하니 본사에서 무슨 결례를 범한 듯한데 그 연유를 소상히 말해주겠소?” 모른다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그가 떠오르는 삼성의 일원이건 뭐건 지 금은 그런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성 싶었다. 천이통까지는 아니더라도 문 앞에서 벌어진 소요가 대충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었고 괴성이라 불 리는 이 청년이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소림을 찾아오지 않았음을 느꼈으 니까. “몰라서 묻는 겁니까?”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뒤편 승려들의 안색에 은은한 노기가 깔렸다. 감히 누구 앞에서 고함이라는 건가. 아무리 강호견식이 없는 천둥벌거숭이 라고 할지라도 소림의 장문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들은 풍월로라도 알아야 하거늘. “무엄하군!” “아무리 삼성의 일원이라고 하더라도 망발이 지나치다!” 들고 있는 봉을 바닥에 꽝 때리며 두 승려가 나섰다. 딱히 공력을 불러일으 킨 것도 아닌데 그들의 주위에서는 삼엄한 기세가 어려 장추삼의 뒤편에 있 던 사내가 주춤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이것으로 보아 산문을 지키던 청년 승과 이들은 격이 다른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대가리들 얘기하는데 꼬리들은 빠져’ 따위의 빈정거림을 토해냈을 터인데도 그들을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무서워서 가 아니었다. 겁을 먹었다면 애당초 들어오지도 않았다. 딱히 말로 표현하 라고 한다면 꼭 집어 표현할 단어가 마땅치는 않지만 그냥 나서지 않았다. 정리하고 있지 않았지만 장추삼은 지금 무림의 깊이를 맛보기로 나마 엿보 고 있는 중이었다. 한마디 말이나 행동이 아닌 정신의 폭으로 말이다. 으름장으로 사람의 기를 죽였다면 바로 치고나갈 그였지만 소림이라는 사찰 은 그런 유치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 신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더욱 효과적으로 그를 압박했다. “후움~” 크게 한번 숨을 들이키고 다시 한번 혜광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뒷머리를 벅 벅 긁었다. 아무리해도 이 노스님에게는 화 같은 걸 낸다는 게 무리다. 자 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웃고만 있을 것 같은데 무슨 화라는 건가. 숭산이 무너진다면 몰라도 말이다. “에휴~” 말머리를 찾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그가 안스러웠는지 혜광이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건냈다. “뭡니까?” “소실봉 뒤편에서 기른 약수라오. 목을 축이고 천천히 말을 하시오.” 무심코 손을 뻗던 장추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낮게 툴툴 웃었다.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자가 진정한 고수라더니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고수라 자처하며 중원천지가 좁다고 설쳐대는 인물들도 이곳에 온다면 칼 한번, 주먹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합장만 하다가 돌아 갈 거 같았다. ‘소림... 역시 위대한 대지다. 말뿐이 아니었어.’ 그러나 입을 통해 자리한 언어는 그렇게 곱지 못했다. 그는 합장만 하다 돌 아갈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고 제아무리 위대한 소림이라지만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니까. “나와 만나기로 한 인물들이 황당하게도 소림에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소 이다. 그들이 천인공노할 잘못을 저질렀다면 할말이 없겠지만 단지 소속이 없고, 병장기를 휴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몇 명이오, 전부가?” 말을 하던 장추삼이 고개를 돌려 사내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들의 총인 원도 여직 모르고 있었다는 게 우스웠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스물아홉 명 이오.” “스물아홉? 많기도 하군!” 과장되게 팔을 벌리고 장추삼이 혀를 찼다. 매우 건방진 행동이었지만 현 상태에서 매우 효과적인 표현방법이라 몇 마디 말보다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그런 이유로 무려 스물아홉명의 성인을 구금해도 됩니까? 이건 누가 봐도 너무한 처사 아니오? 비록 못 배우고 들은 것 없는 나도 이런 게 잘 못되었다는 정도는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아미타불...” 뜻 모를 표정으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현오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세상 천지에 이런 이유만으로 소림의 정문을 박차고 들어왔다는 건 분명 기사이 리라. 말이 쉬워 소림이지 이름 하나로 전 무림을 굽어보는 신화의 대지에 잘 알지도 못하는 - 기다리는 사람들의 인원수 하나 모르는 걸로 보아 절대 로 친한 사이는 아닐 거다 - 사람들의 신변을 이유로 난입 비슷한 행동을 할 이가 몇이나 될까? ‘곤혹스러운 일이로고.’ 말인즉슨 틀린 게 별로 없다. 그들이 일단의 무인들을 구금한 것은 분명 사 리에 맞지 않는 행위였다. 그러나 세상사라는 형체 없는 무기물이 어디 순 리대로만 흐르던가. 누가 보아도 비합리적이고 모순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그 존재의 이유조차도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며, 때로 부딪치고 때로 화해하며 만들어가는 인생의 집합이다. 엽전의 이면(裏面)처 럼 행(行)이 있으면 역행(逆行)이 반드시 따라붙고, 이(理) 속에 불이(不理 )가 어느 결에 숨쉬는 법. 몇 십 년을 참오해도 풀어내지 못한 세속에의 일 들, 그 알기 어려운 삶의 모순을 자신 나이의 삼분지 일정도 되는 청년이 요구하니 대답하기가 난감한 일이었다. “장시주에게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늘 이치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게 무 림사(武林史)라오. 자갈밭을 걷고 싶은 사람이 그 누가 있겠소? 무림동도들 은 아마도 본 행사를 이해해주리라 믿으니 시주도 그리 알았으면 하오.” 사(事)가 아니라 사(史)라고 했다. 혜광선사는 지금 장추삼에게 무림의 전 반을, 그 감추어진 다른 곳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드러난 면만으로 전체를 파악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일까? 아니면 정파든 사 파든 결론적으로 인간이 만든 조직이기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실토하는 것일 까? 문제는 어떤 식의 얘기건 간에 청자(聽者)의 마음을 별로 움직이지 못했다 는 거다. 장추삼의 입장에서 혜광선사의 말은 어디까지나 공염불정도의 말 이고 억지로 받아들인다고 치면 빈손으로 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건데 그럴려면 뭐 하러 이곳까지 와서 그 난리를 부렸다는 건가. “일단 사람부터 내 놓고 말합시다. 본인은 머리가 나빠서 선사의 높은 가 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오. 잘못했으면 벌을 주던지, 아니면 풀어줘야 하는 게 도리 아니요? 앞서의 이유가 원인이 된다면 낭인무사들은 모조리 압송될 거 아니요? 그게 말이나 되오?” 무림맹소속 아니면 칼도 들고 다니지 말라는 거야, 쳇 하며 궁시렁 거리는 장추삼을 납득시킬 방법을 찾던 혜광선사가 한숨을 지었다. 감만으로 사람 을 구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그들에게는 분명 냄새 가 났다. 처음에 양 당주들의 처사를 누구보다 걱정했던 자신이었지만 막상 대하고보 니 숨겨진 무엇의 음습함이 왈칵 배어 나왔다. 그들은 분명 낭인무사들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조직에서 철저히 훈련을 받은 무인군단이란 말이다. 만 약 그 자리에서 싸움이 붙었다면 아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을 정도의 전력 이었고, 무엇보다 그 느낌! 설명하지 못할 무엇을 풍기는 인물들이기에 이 대로 보낼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란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보아하니 소림에의 인상도 그리 좋지도 않은 듯한데...’ 혜광선사의 옆쪽에 시립해있던 세 명의 중년승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 다. 이들이 선사를 곁에서 모신지 무려 이십 여 년. 장문 방장의 마음을 헤 아리지 못 할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어떤 모양새이든 장문이 나선다면 무림의 손가락질을 면치 못한다. 또한 순순히 압송한 무리를 내주기도 뭣한 것이 그들에의 의심을 차지하고라도 소림의 이름에 커다란 오점이 남게 된 다는 게 문제다. 생각해보라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대소림사에 이제 막 이름을 떨치는 청년고 수 하나가 난입하여 필요에 의해 구금한 이들을 데려 간다면 강호동도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구금과정이 합리적이었든 비합리적이었든 무림인들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굉장히 단선적인 사고만을 하 기에 결론은 하나로 귀결될게 뻔하다. 뭐야, 천년소림도 다 됐잖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이제 종이호 랑이보다 힘이 빠졌구만... 이말 만은 도저히 들을 수 없다. 힘을 최우선시하는 무인들에게 약하게 보 이느니 차라리 산문을 걸어 잠구는 편이 낫다. 위엄이란 세우기 어렵지만 한번 무너지면 그야말로 사상누각처럼 무너져 그 형체조차 남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고 세 명의 중년승인에게 이러한 일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부 분이다. “알아듣게 설명했거늘 그리도 고집을 부리는가! 장문께서 친히 나서서 말 씀하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할 일이거늘! 시주는 그만 고집을 부리고 썩 물러나시오!” 우렁우렁한 외침에 범상치 않은 공력이 깃들어있어 장추삼의 미간이 찌푸려 졌다. 눈에서 뻗어 나오는 신광(神光)을 굳이 안보더라도 이 중년승의 심후 한 공력은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니까. “우와! 너무 무서운 걸? 요즘은 승려들이 산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 는 것으로 염불을 대신하는가 보군. 이거야 어디 무서워서 간뎅이 작은 처 자들이 불공이나 드리러 오겠나?” 도발이다. 사정을 보아하니 인자하건 뭐건 장문 방장이 그들을 내줄 것 같 지도 않았고 무턱대고 시비를 걸기도 뭣하다. 그 자신, 무림인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았지만 존중할 건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림이라는 이름이 라면 무공에 무(武)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고개를 숙일만한 가치가 있다. 먼저 나서는 건 모양새가 별로 안 좋다. 그러나 중년인은 싸늘하게 얼굴을 굳힐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양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순간일 것이다. 먼저 나선 중년승 이 옆에 서있던 두 사람에게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비슷한 나이또래의 세 승려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처럼 서로의 심정을 눈망울에 맺힌 의미만으 로 교환하고 있었다. 사실 이 세 승려는 하남뿐 아니라 무림 전체에서도 커 다란 신망을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장추삼으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보아하니 저들은 소림삼주(少林三柱)라 불리는 승려들일 것이오. 장문에 소림삼주까지 라니... 도대체 소림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사내의 전음에 장추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림삼주가 누구 길래 은은한 경외심을 담고 말하는 건가. 소림삼주. 다른 말로 하남삼승(河南三僧). 소림의 현장문인인 혜광선사의 직전제자들로서 그 공력을 헤아리기 어렵다 는 절정의 불문고수 세 명이 이들이다. 혜광과 마찬가지로 지닌바 무위를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기에 강호서열에는 등재된 적이 없으나 항간의 소문 으로 그 가운데 일인이 나서서 못할 것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부풀리는 게 입 소문이라고는 해도 소림장문의 직전제자라는 이름은 분명 무서운 의미 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노승들을 제외한다면 소림무공에 가장 근접해 있다 는 것이니 그 무학의 깊이를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으랴. 차기 장문감이 세 명이나 되어 좋겠다는 찬사가 나오는 걸 보면 그들의 공력과 수양을 미루 어 짐작하게 된다. 오죽하면 하남의 세 승려라고 높여 부를까. ‘누군데? 아무튼 세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존경까지 할 건 없잖아?’ 장추삼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소림삼주들은 나름대로 의견일치를 보았는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가만히 염주를 굴리고 있는 혜광선사를 물끄러미 쳐 다보았다. 장문이기에 앞서 하늘같은 사부이자 영원한 우상이기에 어떤 식 으로든 혜광의 몸짓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름만이 떠도는 절대오 존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소림삼주가 존경하고 따르는 인물은 오직 단 둘. 그 가운데 혜광선사가 으뜸이었다. “아미타불...” 제자들의 반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도 뭐 해서 나직이 불호만을 읊조리던 혜광선사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장추삼을 직 시하였다. 언제나 자애롭기만 할 것 같았던 얼굴이건만 어떤 의미를 담고 사람을 바라보자 매우 설득력 있는 표정이 되었다.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깊이로 접근하는 모습. 역시 소림의 장문은 허명만은 아니었다. ‘천년의 소림’ 말이다. “이런 말을 소승의 입으로 올린다는 게 무척이나 걸리는구려. 허나 장시주 , 미천한 이 늙은 중을 보아 이번에는 양보를 해 주지 않겠소이까? 소림의 이름을 걸고 명약관화하게 사안을 처리할 것을 약속드리겠소. 결코 많은 시 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길... 아미타불.” 하마터면 얼른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만큼 노승의 목소리는 진정이 담겨 있었고 작은 몸놀림 하나에도 사람을 납득시키는 무엇으로 장추삼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런 경우가 정말 난감한 순간이다. 저간의 속사정까지야 모두 알 도리는 없지만 아무튼 이들도 큰 소요를 원하지는 않고 있는 거 같고 그 래서 소림의 장문이라는 사람이 어찌 보면 답답하리만큼 물러나 주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동물, 관계와 관계 속에 원하든 원 치 않든 서서히 마모되어 본래의 성질 같은 건 어느 순간 찾아보기조차 어 려워지나 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든 동물의 생존법칙일지도 모른다. 독불장군은 어디에서건 배척받는 게 현실이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쉽사리 자신을 던져버린다면 훗날 웃을 수 있을까? 괜 찮은 인생이었다고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인사를 보낼 자신이 있느냔 말이 다. 그럭저럭 충돌 없이 융화되어 한평생 무난했는지 몰라도 돌아보면 안개 처럼 깔려오는 진한 아쉬움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거다. 이렇게 얼렁뚱땅 지나치는 인생 이제는 지겹다. 스무 살을 그렇게 살았고 사랑하는 이 마저도 희미한 성격 때문에 변변한 손짓한번 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다. 그때의 자신이 그렇게 저주스러웠거늘 같은 길의 반복이라면 이제는 사양 이다. 오르다 오르다 힘이 부쳐 그 자리에서 죽더라도 한번 딛은 산에서 결 코 발을 떼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지난 전철을 밟지 않겠어! 번쩍. 공력 같은 부차적인 개념과는 상관없이 장추삼의 두 눈에서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여태까지 자랑스러운 삶이 아니었기에, 지극히 따분한 인생이었기 에 이제라도 바꿔보자는 거다. 하루를 늦추면 몇 년 후가 될지 모른다. 선 택은 애당초에 없었는지도. "선사." 의외로 그이 말은 차분했다. 모든 독기를 안으로 갈무리해서인지 겉으로의 장추삼은 누가 보아도 침착한 여유를 되찾았다. "말씀하시구려..." 노승의 인자한 얼굴과 다시 한번 마주치면 애써 끌어올린 힘까지 전부 유실 되어 버릴 것 같아 고개를 모로 틀고 탄식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아무렇지 도 않은 듯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만만한 성질의 것이 아 니어서 잦아드는 저녁놀의 행보를 일순간이나마 붙잡아두는 기분마저 들었다. "선사께서는 쏘아낸 화살이 지쳤다고 투정을 부리며 쉬어 가는 경우를 본적 이 있습니까?" "허어..." 그제야 혜광은 비단 이 청년이 괴이할뿐더러 무척 고집이 세다는 것도 알았 다. 무룡숙을 와해시켰으면서 그 잔당을 색출하는 일에 동참은커녕 훼방에 가까운 일을 벌이는 이유를 알 도리는 없었지만 말로 해결을 보기는 난망함 을 단 한마디로 웅변해 준 것이다. 또한 천년 소림의 역사에서 물러난 경우도 없다. "이 또한 업보이리니... 나중에 제석의 응징이 내린다고 하더라도 피해갈 길이 없구나, 아미타불..." 스슥. 말은 충분했다. 이제 힘과 힘으로 부딪치는 일만 남았다. 헤광선사가 한발 뒤로 물러서자 무리 지어 있던 스무 명 가량의 청년승들이 두발 앞으로 나 섰다. 자세히 보니 이들의 인원은 꼭 열 여덟 명이었다. "열 여덟이라... 나한진(羅漢陣)이란 건가? 영광이군. 이런 무명소졸에게 소림의 자랑을 견식 할 기회를 부고 말이야." 비틀린 웃음을 짓고있는 장추삼이었지만 그가 언급한 이름은 천년소림을 위 대하게 하는 몇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였다. 소림십팔나한진(少林十八羅漢陣)! 다른 말로 소나한진(小羅漢陣)이라 불리는 소림의, 아니 전 무림 사상 최고 의 대일인연수합격진(對一人連手合擊陣)! 다수를 옥죄는데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과 더불 어 소림의 이대진식으로 강호에 우뚝 선 이름이다. 제아무리 무당과 화산의 검진이 있고 개방의 타구봉진(打狗棒陣)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림의 두 이 름 앞에서는 왠지 초라해진다. 일단 펼쳐지면 나찰(羅刹)들도 두려워한다는 절대의 합격진이 무림 초출(初出)의 청년에게 펼쳐진 것이다. 소림은 용서한다, 불타(佛陀)의 마음에 금이 갈지라도. 허나 일단 손을 들 면 상대방의 뼛골까지 그 이름을 각인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천년소림의 오늘을 있게 한 좌우명이다. 어설프게 건드리면 차라리 역풍이 오는 게 강호의 생리라는 걸 천년을 이어오며 자연스레 체득 했기에 성난 소림과 맞상대하려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소림은 몰라도 나한진은 안다는 열 여덟 개의 봉무(棒舞)란 건가? 좋다! 얼마나 대 하기에 그리 호들갑을 부리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 봐주마.' 그리고 바보가 하나 성큼 발을 떼었다. 츄츄츅! 장추삼의 이름을 들었을 때의 놀람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돌처럼 굳은 얼굴 의 열 여덟 명의 승려들은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이동했다, 몇 보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이들은 원형의 대오를 갖추고 제각기 빼어든 봉두 (棒頭)도 서늘하게 장추삼을 노리고 있었다. 우우웅- 갑자기 발산되는 기의 벽. 소림의 무공은 비록 봉으로 구현된다고 할지라도 웅혼한 내공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한다는 기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 다. 그것이 손을 이용한 백보신권이나 발로 펼쳐지는 십일면관음족(十一面 觀音足)이라도 공통적으로 깔리는 내공의 힘을 우선시 하기에 마주하는 적 들은 초장부터 죽어 들어가는 것이다. 스슥. 발뒤꿈치를 축으로 장추삼이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일대일의 승부에서 몸 을 사선으로 비껴내면 인체의 급소라 할 수 있는 중앙의 관통선 - 백회. 인 중, 명치를 비롯한 사람 몸의 가운데 부위를 말한다 - 을 상대의 시야와 일 차적인 공격권역에서 숨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수에게 원으로 둘러싸인 경우라면 이런 동작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전방위(全方 位)를 잠식당한 상태에서 무슨 시야고, 무슨 공격권역인가? 그래도 장추삼은 몸을 틀었다. 물론 습관적인 측면도 있고, 별로 유용한 행 동이 아닐지라도 심신의 안정을 가져오기에 취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쳐서 이루어내는 행위에서 절대(絶代)란 단어가 사용된 다면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특히 싸움의 경우에 무력으로 승부를 가른다 고 할지라도 본원적인 힘이 승패에 주는 비중은 고작해야 칠 할을 채 넘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사는 변수와 변수가 맞물려서 기묘한 조합을 이루어내 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의 세계라도 정신력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 이다. 문득 장추삼은 양손의 상실감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언제나 그를 감싸주 던 묵예갑이었거늘 이제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보지 못한다. 묵예갑, 추억의 소중한 편린(片鱗)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잘 가라, 내 유년기... 소중한 추억이여!' 꾸욱. 주먹을 말아 쥐고 전방을 주시하던 장추삼이 기습적으로 짧은 추뢰보를 밟 았다. 그와 동시에 전방에서 네 개의 봉이 날아들었는데 애초에 겁을 주는 움직임처럼 큰 발을 한번 딛은 정도여서 망정이지 무턱대고 달려들었더라면 큰일날 뻔했을 것이다. 꽝! 봉은 네 개였는데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오직 하나, 그것도 청력이 좋은 장 추삼이 겨우 식별할 정도로 소리간의 시간차가 없었다. 문제는 바닥을 두드 린 봉이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제 이차 공격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나머지 열 네 명의 승려들은 단 한 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 다. 단 네 명만으로도, 단 네 개의 봉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방을 감당할 수 있다는 무언의 항변일 것이다. 또르르... 더워서일까? 장추삼의 이마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하나 흘러내렸다. 확실히 여름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아무튼 실험의 결과는 대단히 위험함으로 나 왔다. 이들은 산문을 지키던 네 청년승들과는 아예 깊이가 다른 고수들이다. [18135] [연재] 삼류무사-143 묵묵히 전방을 응시하던 장추삼이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잊어버리려 해도 역시 묵예갑의 공백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치 가슴을 답답하게 내리누르 는 무엇이 있었다. ‘돌멩이라도 하나 걷어차면 좋을 텐데...’ 소림사의 경내는 얼마나 잘 쓸고 골랐는지 아쉽게도 돌멩이는커녕 자갈 비 슷한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찾아보지 못한다더니 그 흔한 짱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열여덟 명의 승려들은 한번의 움직임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했 는지, 아니면 그의 공세를 기다리는지 장추삼을 주시하는 상태 그대로 여하 한의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지만 서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대충 손을 섞고 웃으며 헤어지는 비무(比武)같은 게 아니다. 열여덟 명의 승려들은 결코 장추삼이 예뻐서, 잠시 숨을 고르라고 기다려주는 측면에서 손을 늦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힘의 비교우위를 확실히 각인시켜 상대방의 전의를 무력화시키고 반항의 여지가 거의 말소된 상태에서 치명적인 공격 을 가함으로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로 줄임은 물론 비록 죽이지는 않더라도 소림이란 이름 앞에서 영원한 부복을 하게끔 만드는 정신적 타격을 가하는 예비동작일 뿐이다. 문득 장추삼은 어린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화가 난 부친은 저녁에 보자는 한마디를 남기고 일을 나갔었다. 혼자 남은 장추삼은 퇴근 후의 부친이 너무 두려워서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전 전긍긍 집 앞을 서성였다. 얼마나 겁을 먹었으면 누가 지나가기만해도 화들 짝 놀라서 울었겠는가. 한시진이 하루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윽고 밤에 부친이 돌아왔지만 마당에서 놀란 토끼마냥 빨간 눈을 꿈뻑이는 그를 보고 는 그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의 안도감이 라니... ‘푸훗!’ 그가 헛웃음을 겨우 틀어막았다. 이순간도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 은가. 얼마나 대단한 모습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열여덟 명의 승려가 보이는 자존자대의 모습은 유년기의 어느날을 떠올리게 해주어 고맙지만 거기까지 다. 그 이상은 싫다. ‘나더러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새끼고양이라도 되라는 건가? 차라리 때려죽 이시게 들, 치도곤을 당하면 당했지 얼고 싶지는 않으니...’ 기세의 일변을 느꼈을까? 열여덟 명의 승려들은 장추삼의 평온하면서도 칼 끝 같은 예기를 알아채고 적이 당황했다. 아직 충분히 몰아붙이지 못했음인 가? 아니면 삼성이란 이름에 걸맞는 풍모라는 건가? 가만히 대결구도를 주시하던 소림삼주들도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 저만한 배짱도 없이 천년소림의 대문을 열어젖혔다면 매우 실망스러웠을 거다. 역시 무림에서 힘의 논리처럼 정직하고 깨끗한 건 없을 것이다. (“진을 발동하라! 손속에 사정을 두되 소림의 이름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 야 하느니!”) 천둥 같은 전음이 승려들에게 떨어졌다. 츄츄츅! 지상명령이다. 부처의 자비심을 잊고 야차의 광기로 불법을 수호하는 모순, 아니 이게 과연 불법의 수호인가? 무림의 정의를 위해? 일단 그런 감정은 모조리 접어두기로 했다. 상대를 제압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것이 뭐라고 정의되든 간에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측면 에서 떳떳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쿵! 한 승려가 들고 있던 봉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것으로 전 무림사상 대일 인합격진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소림십팔나한진의 발동이 시작되었다. 츅츅! 장추삼의 전방에 잇던 승려 둘이서 봉이라 믿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찌 르기를 가해왔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열여덟 개의 봉은 더 이상 불법을 수 호하는 선장(仙仗)의 대용물이 아니다. 한겨울 먹이에 굶주려 퀭한 눈을 빛 내는 늑대의 독아(毒牙)보다도 무서울 것이다. 스륵. 옆으로 밀리듯 그의 신형이 찔러 오는 두 봉두의 지점에서 벗어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갈라지며 두개의 봉이 직단의 수법으로 내리쳐졌다. 얼마나 위력적이었으면 공기를 분쇄하는 소리가 마치 구기곡성처럼 메아리 치며 장내를 가득 메웠을까? ‘젠장!’ 바삐 발을 놀려 내려오는 봉을 피하기는 했으나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 봉의 여파로 귓불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우웅~ 순간적으로 찾아온 이명(耳鳴)현상! 단순한 파공성의 여파만으로 이렇게 간접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할 터!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한가하게 그 이유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뒤편 에 있던 승려 두 명이 거의 같은 순간에 봉을 내리쳐왔고 이번의 직단 공격 은 뻔히 보일만큼 느린 속도였지만 왠지 소름이 돋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음 이다. 그렇다고 놀란 토끼마냥 펄쩍펄쩍 뛰며 피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상대방을 누르겠는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은 적진임에 틀림없었다. 무림초출에게 소림사 전체가 떼거지로 달려들 리 없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속에서의 돌격 이었지만 아무튼 싸움은 빨리 끝내는 편이 유리하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힘 을 더 남겨둘 테니까. 문제는... ‘남겨두기는 고사하고 이놈의 땡중들 치우기도 벅차잖아!’ 마음속으로 발악처럼 외치며 태산압정의 수법으로 내려오는 봉머리의 옆으 로 선 장추삼의 두 발이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핏, 핏! 쮸우욱! 발을 들어 쳐올리는 각법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기술 중 하나라는 일대이기 가 펼쳐졌고 발바닥과 봉면(棒面)이 충돌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부딪침의 여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며 그의 발이 미끄러졌다. ‘으윽!’ 왼발을 타고 흐르는 진동에 놀라 껑충 한걸음 뒤로 물러난 그가 힘차게 발 을 한번 굴렀다. 역시 아무생각 없이 받았다간 큰일 날 뻔 했었다. 일대이기의 특성은 쳐올린 첫 번째 발의 위력보다 뒤따르는 두 번째에 강한 타격이 실린다. 그래서 오른발로 받아낸 봉은 흘리는 수법으로 비틀었고 그 다음 봉에 가진 힘을 쏟은 터였는데 제대로 따려보지도 못하고 튕겨버린 것이다. 그제야 장추삼은 아직도 그를 괴롭히는 이명현상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나 한진을 이루는 승려들이 내치는 봉에 담긴 괴이한 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회전’이었다. 아낙네들이 빨래터에서 내려치는 몽둥이질과 다른 이유가 단순히 힘과 방위, 아니면 조화 같은 것과는 다르리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겪고 보니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통상적으로 가지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대한 힘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내치는 것이다. 힘의 속성상 전방위(前方位)로의 뻗음처럼 쉽고 직접적인 위력을 보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단순히 치고 지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병 장기로 피륙의 약함을 대체하게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사람이 부리는 것이지 무기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병장기의 재질과 특성으로 싸움이 결정지어지던 시대가 지나고 모두가 같은 무기를 손에 쥐게 되자 병장기의 이로움은 승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병기를 좀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법을 연구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기초가 인 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로 귀결되었다. 인체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수많은 초식이 개발되고 또한 내공이라는, 인 간 본연의 성질을 벗어난 신차원의 힘이 탄생하였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론 적으로 상대에게 가해지는 힘을 극대화 하기위한 수단일 터였다. 그것이 무림 일세대(一世代)들이 겪은 힘의 발전사였고 그들의 농축된 가르 침을 받고 자란 세대들이 지금의 무림 이세대(二世代)들이다. 그들은 일대 가 남긴 내공과 초식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열린 사고로 기존의 개념을 받아들이거나 일부 회의와 보완을 거듭하기에 이르렀고 마 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만상귀일(萬象歸一)! 병기니 초식이니... 모두 상대방에게 가장 완벽한 물리적 타격을 가하기 위 함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한 방편이라면 타격 을 가하는 인체의 전달방법, 즉 타격의 직접적인 매개체인 사람의 타격방법 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지금처럼 틀어치기인데 일반적으로 주먹을 내지를 때 허 리를 틀며 팔목을 돌리면 매우 강하면서 빠른 권력을 얻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허나 소림에서는 봉술에도 회전력을 넣어 타격순간에 외상과 더 불어 내상마저 입힐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병기의 특성상 날이 없기에 한 방으로 급소를 제압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타격을 상대에게 입히지 못한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개발한 방편일 텐데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오늘날 에 이르자 본래의 의도를 넘어서는 여러 가지 부수적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 다. ‘제대로 부딪쳤다간 손이든 발이든 모조리 갈리겠다, 젠장!’ 날이 시퍼렇게 선 도검류의 병기고수와 나무로 만든 봉이 만난다면 손해를 볼 쪽은 당연히 재질이 약하고 예기도 없는 나무 몽둥이일 것이다. 그렇다 고 병기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철봉을 사용한다면 봉술의 가장 큰 장점인 유연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니 이 조차도 여의치 않은 노릇. 여기서 봉 에 가해진 회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병기끼리의 접점(接點)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봉력으로 재질의 불리를 극복 함은 물론 오히려 상대방에게 은은한 내적 충격을 주는 효과마저 있으니 회 전력은 가히 일거양득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장추삼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벼락처럼 떨어지는 두개의 봉은 여하한 의 사고를 불허하게 하는 섬뜩함이 있어서 그는 허겁지겁 발을 놀려 봉력의 권역에서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승려들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단 한번의 마주침 으로 장추삼은 전의를 상실한 사람마냥 겅중거리며 피하기에 급급했고 열여 덟 개의 봉두가 가진 압박감은 소림의 경내를 완전히 잠식하기에 충분해 보 였으니까. 한번 잃은 선기를 되찾기란 고수들 간에도 어려운 법이다. 하물 며 무림경력 일천한 청년이 지금 같은 난관을 뚫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 리라. 파방! 그가 피한 자리에 떨어지는 봉들은 예외 없이 깊은 흔적을 남기고 회수되었 다. 한번 봉력이 스치고 간 지면은 움푹움푹 파여 볼썽사나운 몰골을 드러 내었다. 어찌나 섬찟한 느낌인지 그의 마음이 다 도려내어지는 기분이라 장 추삼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좋다!’ 그야말로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닌 상황. 피하기만 한다고 ‘우와 한대도 안 맞는데?’하고 넘어가주길 바란다면 바보다. 파바박! 천고의 산무영이 그가 가지는 최고의 힘으로 펼쳐졌다. 여덟로 불어난 장추 삼은 그리 크지 않은 원형을 가득 메울 것처럼 제각기의 방향으로 뛰쳐나갔 다. “어?” “뭐야?” 순간적으로 승려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불문에 몸을 담고 무공만을 일로 매진한 세월이 어언 이십년이 넘었지만 이런 식의 몸 가눔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농조로 언급되는 분신술이 아닌 담에야 인간이 어찌 여덟 명으로 불어난다는 말인가! 이때 나한진의 좌장격인 승려가 큰소리 사자후를 토했다. “산(散)!” 쫘악! 비단폭 갈라지는 소리처럼 승복의 마찰음이 들리며 승려들이 대오에서 저마 다 자신만의 영역을 고수하는 자세로 돌아서서 마주 오는 각각의 장추삼들 에게 힘차게 봉을 내질렀다. 주춤! 마냥 달려들 것만 같았던 그였는데 봉역(棒域)에 이르러 급작스레 신형에 제동을 걸었다. 마치 관성을 무시한 움직임이라 승려들의 봉은 목표물을 잃 고 세차게 땅을 후려쳤다. 그러나 전부의 힘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기에 장 추삼이 한 번 더 달려든다면 언제라도 제 이차 공세를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팍! 그리고 그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말이 안 된다? 그렇다. 은둔술을 쓰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눈에서 없어진다는 건 어불성설 이다. 하지만 분명 장추삼은 전방에 있던 다섯 가량의 승려 앞에서 분명 없어졌다 . 그리고 후면을 지키던 승려들은 어떤 것이 불쑥 솟아났기에 부랴부랴 봉 을 내쳐야 했다. 파바방! 그런데 그들은 전방의 승려들 마냥 또 바닥을 두드렸고 솟아났던 무엇은 다 시금 사라졌다. 팍! 어리둥절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승려들은 또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 에 분분히 봉을 들었지만 이번의 장추삼은 무척이나 빨라서 미쳐 봉을 들기 도 전에 최초의 목표가 된 승려는 날아오는 발을 그대로 맞아야할 형편이었 다. 꽝! “쿨럭!” 어디선가 들려온 굉음에 장추삼이 피를 토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세 개의 선장이 바닥을 두드리자 그 여파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고 음파의 방향 을 한곳에 집중하였기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타격을 받은 그였다. 욱씬- 허벅지를 타고 흐느끼듯 다가오는 통증과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울혈! 장추삼은 이번 겨룸에서 대단한 모험을 감행했었다. 산무영으로 돌격을 가 장한 일보를 딛으면서 상대방의 봉이 움직이는 순간 최대한의 속도로 추뢰 보를 밟으며 몸을 뒤로 틀고 후방으로 날아갔기에 전면에 서있던 승려들은 일시지간 시신경의 착각 - 돌진만을 염두하고 있다가 목표물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멀어졌기에 빚어진 착시현상 - 을 보였고 후면으로 나는 듯 두어 보를 떼다가 제 이차 급제동을 걸어 다시 한번 전방으로의 추뢰보를 밟음으 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승려들의 시야를 완전히 지배했던 것이다. 그 두 번의 추뢰보... 그것도 관성과 근육의 향상성을 무시한 급제동의 연속은 아무리 전능지체라고 불리는 그의 신체로도 감내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때 내리쳐진 소림삼주의 음공에 가까운 선장소리! 한없이 가늘어진 눈으로 세 명의 중년 승려를 바라보던 장추삼이 피식 웃자 하남의 세 승려라 높여지던 그들이었는데 왠지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저마다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망신스러울 수가... 아미타불...” 기묘한 정적속에 탄식처럼 울려 퍼진 혜광선사의 한마디. 그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은 지금 규칙을 어겼다. 아주 더럽고 치사한 방법으로 말이다. 어떤 식으로 이름 붙인다 하여도 지금의 소림삼주는 더없이 치졸한 소인배와 다 를 바가 없다. 이렇게라도 그들이 세워놓은 가치를 지켜야만 할까? 아니, 그들이 지키려는 것이 진정한 가치였을까? 이와는 다르게 한 구석에서 터져 나온 또 하나의 탄식. 그것은 한 젊은이에 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 교두님의 마지 막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 실실거리던 장추삼이 빙글 돌아서서 십팔나한 전체 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서 뻗어 나오는 기백은 엄청난 것이라 방금 전까지 혼백이 나가있던 승려들의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고 입가를 타 고 흐르는 한줄기 핏물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난 정파가 뭔지도 모르는 시골 표사 출신의 건달이거든? 그래도 소림이라 는 이름은 태어나서 백번은 넘게 들었었지. 무려 백번을 넘게 말이야...” 말을 끊고 그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위로 총총 히 박힌 별들이 하늘거리며 장추삼을 비춰주었기에 떨리던 어깨가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외로울 이유는 없다. 같은 하늘아래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후우, 하고 길게 쉼호흡을 한 장추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처럼 빈정 거리진 않았으나 낮고 조용한 그의 음성은 소림의 천년을 내리누를 것처럼 육중했다. “그래... 좋아... 하려면 해. 뒤치기든 뭐든 하고 싶으면 하라구. 어차피 판을 벌렸으니 이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테니.” 내리깔았던 그의 눈은 소림삼주를, 아니 소림이란 이름 전체를 집어 삼킬 듯 직시하였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의 장추삼을 마주 볼 사람은 없을 것이 다. 그는 어느새 소림이라는 이름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대신에, 대신에 말이야... 얄량한 이름으로 사람을 기만하지는 마.” [18159] [연재] 삼류무사-144 부르르. 도움을 받은 십팔 나한들도, 방수(傍手)를 내민 세 명의 중년승도 그의 나 지막한 일갈에 감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다. 어색한 헛기 침으로 때우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받아들이자니 전체를 부정해야 한다. 무 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말일까? 강호에서 애당초에 뭘 바랐다는 게 잘못 된 일인가? 휘이잉- 난데없이 돌개바람 하나가 홀연히 다가와서 소림의 경내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떨어져있던 낙엽 따위가 허공으로 낮게 비상하고 그에 맞추어 힘 없이 나부끼는 옷차림만이 소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 같았다. 허나 언제나 까지 머물 돌개바람도 아니고, 언제나 까지 멈출 정적도 아니다. “꿀꺽!” 사내의 작은 목울대 소리와 함께 장추삼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고 십팔나 한진은 예의 기운을 풍기며 발동되기 시작했다. 무학을 발동하면서 파생되 는 기운만으로 정(正)과 사(邪)를 구별한다면 십팔나한진은 누가 뭐래도 정 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만큼 패도적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위험함을 풍기면서, 묘한 경외감을 심어주니 역시 소림의 자랑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그런데 종종 일반적인 사고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나보다. 여기 장추삼같은 인물이 그런 경우이리라. ‘액면일 뿐이야!’ 씹어뱉듯 혼잣말을 속으로 내뱉으며 가중되는 압력에 몸을 맡기고 서있던 그가 반 보 옆으로 비스듬히 섰다. 말로는 길었지만 시간상으로 무척 짧았 던 휴식은 이제 잊어야 한다. 한번씩 주고받았다. 싸움은 이제부터 일지도 모른다. 스르륵! 발을 한번 교차한 것 뿐인데 장추삼은 어느새 네 명의 그로 불어나 있었다. 물론 네 개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있을 리는 만무했 다. 그런데 왜 넷인가? 아까 여덟로 불어난 그는 잔상수(殘像數)적인 면에서 분명 넷의 두 배 지만 그만큼 많은 방위를 점해야 하기에 자연 속도 면에서 떨어지게 된다. 어줍 잖은 무인이라면 눈을 현혹할 정도의 빠름만으로도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으 나 나한진을 구축하는 소림십팔나한들에게 그런 건 별무 소용이다. 재치로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도 한번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워낙에 빠른 신형의 이동속도 탓인지, 아니면 한결 유연해진 보법 탓인지 천고에 장추삼만이 알고 장추삼만이 펼쳐낼 수 있는 추뢰무영은 이제 옷자 락 부딪치는 소리마저 집어삼키고 얌전히 펼쳐졌다. 무음(無音)가운데의 소음(騷音)! 분명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십팔나한들은 어떤 소리보다 시끄러운 무엇이 일시에 발성(發聲)하는 착가에 빠져들었다. 음향을 제압하는 속도에서 나오는 전율. ‘느끼지 말라! 그 순간 이미 당한다!’ 파팍! “분(分)!” 소리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좌장승이 외치기전에 나머지 승려들은 원형을 허물어트리며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힘차게 봉을 내질렀다. 십팔나한진은 여타의 진식과 다르게 몇 가지의 간단한 조합형태만을 하달 받는 유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구심점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통제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것이겠으나 소나한진은 아직까지도 위대한 이름이다. 그 건 진을 이루는 개개인의 역량이 충분히 탁월하다는 말이겠고 바꿔 얘기하 자면 진을 이루는 열여덟 개의 축이 저마다 반응하는 결과가 된다. 머리 없이도 때에 따라 자유자제로 반응하는 손발! 빠르게 앞으로 나가던 장추삼이 일시간에 여덟 명으로 신형을 불리는 행동 을 취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옷깃소리! 아무리 동체시력을 무시한다고는 해도 보이는 것을 무시할 정도로 공력이 뛰어나진 못하기에 십팔나한들은 순간의 머뭇거림을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팍! 느닷없이 굉장한 빠르기로 어떤 물체가 튀어 나갔다. 아니, 두 명의 승려가 채 봉을 들지도 못하고 허물어지는 순간에야 무엇이 돌격한 것을 알았다. 욱씬- 또다시 통증을 호소하는 허벅지를 무시하고 ‘그것’이 빙글 몸을 틀자 쓰 러진 동료를 살필 겨를도 없이 황망하게 봉을 치켜든 십팔나한은 비로소 괴 성이 왜 삼성 가운데에서 괴(怪)자를 받았는지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넷에서 여덟으로 늘던 장추삼은 누구의 예상도 깨트리고 하나가되어 훗날 가속추뢰라 명명되어질 추뢰보의 완결형을 밟아 그야말로 우뢰의 속도가 되 어 두 명의 승려를 발로 차 쓰러트렸다. 그리고 몸을 돌린 그의 눈에 맺힌 귀기(鬼氣)! (“당황하지마라! 상대는 하나다!”) 상황이 안 좋음을 짐작하고 재빨리 나한들을 추스린 건 다름 아닌 소림삼주 가운데 대형인 만상(卍想)이었다. 그 역시 장추삼의 일변한 기세에 적이 놀랐지만 이제 그를 무림초출의 적당히 혼내서 쫓을 대상으로 판단하지 않 았기에 이렇게 개입한 것이다. 어느 정도 윽박지르면 생똥을 싸며 무릎 꿇 으리라 믿었거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으드득!’ 이를 갈아 부치는 장추삼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악귀가 소림의 경내 에 난입한 듯 했다. 본시 곱지 않은 인상에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과 귀화 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로 으르릉 거리고 있으니 아무리 철담(鐵膽)의 사나이 라도 어찌 두렵지 않을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같이 날이 새파랗게 선 모 습 또한 공포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모습에 불과했고 속사 정은 드러난 것과 전혀 달랐다. ‘빠,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나한진만은 발아래 꿇리고 만다!’ 그의 전신은 지금 엄청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추삼의 싸움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것이 기학과의 마주침이었다면 가장 처절한 순간은 지금이다. 그는 지금 전개 가능한 모든 것을 토해내고 있었다. 기학과의 대결은 일방 적으로 몰렸기에 사고의 범위가 한정되었었고 공격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 되었지만 지금의 그는 몸으로 구현가능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토해내고 있 었다. 머리는 따르는데 몸은 정직하게 반응하여 육체의 피로도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형국. 속전속결 밖에 없다! 파팍! 발작적으로 뛰쳐나가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필사적이었고 상대에게는 위압 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만해의 전음은 동요되었던 나한진의 숨통을 열어주 는 효과가 있었다. 부우웅! 나한진의 가장 위력적인 공격방식이라 할 수 있는 합(合)의 움직임이 보이 며 열여섯 개의 봉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꼿꼿이 머리를 들고 돌진하는 그에게 내리 꽂혔다. “타아!” 밀려들어오는 네 개의 봉면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가자 내리치던 나한들 은 그들의 의도와는 너무 빠르게 회전하는 봉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들의 신물을 그만 놓쳐버렸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봉들은 얼마나 회전력을 받았는지 저잣거리 미친 여자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듯 맹렬히 돌며 소림 의 경내를 뛰어다녔다. 파팍! 맹렬히 솟구쳐 오르는 핏물의 주인을 찾을 사이도 없이 그들의 앞에 채찍 같은 무엇이 덮쳐왔고 지면으로 몸을 누이는 네 승려를 타고 넘으며 두 팔 을 벌리고 도약하는 장추삼의 모습은 매우 장엄했다. 양손 가득 창공을 품고 흐르는 피의 장막 나래삼아 허공을 가로질러 닿을 곳은 어디 한숨처럼 토해내는 기합성으로 천상을 태워버릴 가루라 되어 천둥처럼 내리니 혈익전시(血翼前翅)라...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거대한 날개처럼 흩뿌려지고, 뛰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흘러 내렸다.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한 켠에서 주먹을 꼭 쥐고 관 전하던 사내가 무의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일까? 타도의 대상인, 같은 하늘을 이고 가기 어려운 사내의 싸움일 뿐인데 두 눈 에서 흐르는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은 지금 무엇하고 싸우는 거지? 정말 나한진인 건가? 아니면 소림? 모르겠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 다만 한 가지. 지금의 당신은 달보다도 광휘롭다.’ 혈익전시! 피의 날개짓으로 감행한 최고의 공중도약술! 무림 사상 최고의 도약술이라는 대붕전시(大鵬前翅)와 매우 흡사했지만 추 뢰보로 가속을 붙였기에 속도 면에서 훨씬 위였고 점점이 허공을 수놓는 핏 물의 내(川)를 이루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위압적이더라. 스르륵! 남은 승려들이 분분히 몸을 틀어 방향을 잡았으나 허공에서 내리 떨어지는 그에게 더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그는 이제 장추삼마저 넘어서려 하고 있 었으니까. 부우웅! 다시 한번 봉들이 움직이며 천왕탁탑(天王卓塔)의 수법으로 하강하는 장추 삼을 무찔러갔으나 그의 눈에는 봉의 머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파박! ‘큭!’ 두 대의 봉두가 장추삼의 가슴을 강하게 때렸고 소용돌이 모양으로 상의가 파였지만 치밀어 오르는 울혈을 참으며 밀리는 몸을 무겁게 한 그가 힘차게 다리를 놀렸다. 허공에서 전개되었기에 디딤발의 부재로 인한 위력저하를 차지하고라도 넓은 공간이라는 부수적인 강점은 장추삼이 내지른 여섯 번의 발길질을 빛내주기에 충분했다. ‘피하...’ 생각뿐이었다. 두 명의 승려를 향해 날아간 세 방향의 발차기는 어느 것이 허초이고 어느 것이 진초인지 알기 어려웠기에 피해보려고 몸을 움직였으나 결집되어있는 동료들의 벽에 갇혀 약간 몸을 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파바방! 두 승려가 봉을 쥔 채로 지면에 몸을 눕히자 벌어진 틈으로 떨어져 내린 장 추삼이 마치 팽이가 회전하듯 맹렬하게 몸을 회전시켰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엉거주춤 봉을 들고 있던 두 명의 승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봉두 끝이 아군 쪽으로 쏠리게 되었고 제어 할 사이도 없이 연속적으로 가 해지는 힘의 파고에 따라 근처의 승려를 가격하는 형국이 되었다. “헛!” “이런!” 예상치 못한 동료의 기습(?)이었기에 불시지간에 봉을 들어 막아냈지만 그 힘이 미미함은 당연한 일일 터. 이때 교차된 봉의 열십자 부근을 강하게 찍 고 다시 한번 도약한 장추삼의 시야에 망년한 얼굴 네 개가 들어왔다. “안돼!” 뒤편에서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나머지 승려들이 몸을 이동했지만 사람과 사 람이 마주할 공간은 기껏해야 다섯이 한계였기에 헛된 메아리에 불과했고 부러질 만큼 강하게 찍어 누른 두 십자모양의 주인들의 눈엔 공포가 어렸다. 대붕이 나래를 펴듯 분수처럼 흘러내리는 핏물을 깃털삼아 내지른 피의 유 성비... 그래서 소리까지도 애달팠나보다. 쿵! 쿵! 쫘아악! 격타음은 없었다. 그저 땅바닥으로 몸을 눕히는 승려들과 지면의 마찰음 뒤 에 어디선가 아련한 파공성만이 울려 퍼졌다. 네 명의 승려가 쓰러지자 남은 인원은 불과 여섯! 길게 숨을 몰아쉬는 장추삼의 모습은 나찰의 현신과도 같았기에 발산되는 기운만으로도 남은 승려들을 옥죄고 있었다. 숨 한번 몰아쉴 사이에 십팔나한의 삼분지 이를 괴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무림 역사상 얼마나 있을까? ‘소, 소림은 지금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만상의 눈썹이 짙은 역팔자를 그렸다. 그는, 아니 소림삼주는 오늘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몸놀림과 아울러 최강의 전투력을 견식한 것이다. 처 음 두 승려를 쓰러트린 발재간도 놀라웠지만 태산압정식으로 내리쳐진 봉면 에 빛살같이 손을 뻗어 바닥으로 회전을 가속시킨 동작 - 이것이 손바닥을 편 유성우란 것 까진 몰랐지만 - 은 그야말로 전투의 백미와도 같았다. 뒤 이은 공중도약과 알 수 없는 삼단계 - 물론 삼음추의 공중 시전형이다 - 의 양발차기. 그리고 지면으로 내리 꽂혀 왼발만을 축으로 돌아 네 명의 봉을 무력화시킨 선풍각... 그리고 비단을 가로 찢는 음향을 은은히 동반한 초 쾌권. 유성우란 이름의 슬픈 권력은 그들에게도 알 수 없는 감흥을 불러일 으키기에 충분했다. ‘으윽!’ 장추삼의 얼굴이 야차의 그것처럼 일그러졌다. 피에 굶주린 아수라인가? 발 에 이어 손까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아수라가 있다면 크게 틀린 표현이 아 니다. 두 번의 유성우는 회전력까지 억지로 소화하면서 펼쳤기에 인간을 넘 는 신체라도 극도의 피로감에 몸을 떨고 있었지만 팽팽히 당겨놓은 전의는 휴식이란 이름을 무시하고 있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의 발로가 고스란히 담긴 표정이건만 방금 전까지의 격투 가 인상에 남아있기에 그의 모습은 우습게도 그 어떤 사신보다 무서운 모습 으로 다가왔다. 휙! 몸을 틀어 봉을 겨누고 있는 여섯의 승려를 응시하던 장추삼이 문득 발을 떼었지만 나지막한 불호가 그의 두 번째 행보를 가로막았다. 인정하기 싫었 지만 소림의 자랑이라는 십팔나한진은 무림초출의 청년에게 완벽히 격패 당 한 것이다. 단 한점의 이론도 없이 말이다. “아미타불... 걸음을 멈추시오.” 어느새 한 걸음 앞으로 옮긴 소림삼주 가운데 만상이 고개 숙여 합장을 했 다. 아까의 멸시에 가까운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그의 합장은 정중하면 서도 무거웠다. 그의 눈은 축축하게 젖어있었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장추삼은 야릇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이대로 물러날 리는 없겠지. 괜히 점잔빼지 말고 어서 덤비라구. 어차피 갈 때 까지 간 거 아냐?’ 비릿한 조소가 그대로 가슴을 파고들었기에 몹시 창피했으나 헛기침 한번 없이 말을 잇는 만상의 정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뭐라 하든 이대로 끝날 판 은 아니고 충분하리라 믿었던 십팔나한진은 붕괴되었다. 이제 선택의 여지 는 없다. 훗날 어떤 욕을 듣더라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장시주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빈승들을 개안케 해주었소. 인간의 신체가 그렇게 유용한 무기로 화할 줄은 미처 몰랐소. 비록 미숙한 제자들이 펼쳐 냈기에 본래의 소나한진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맨손만으로... ” “피차간에 금칠할 사이도 아닌 것 같으니 우리 요점만 말하는 게 어떻소?” 간단히 말을 자른 장추삼이 바닥에 침을 퉤하고 뱉았다. 소림 경내에서 거 리낌 없이 침을 뱉은 이는 그가 최초이리라. 두 사제들의 울컥한 기색을 눈짓으로 제지하기는 했지만 누구보다도 기분이 상한 사람은 만상이다. 그에게 소림은 절대가치였으니까. 막판까지 왔다. 한 방울의 침은 몇 천만배의 고통으로 그에게 되돌려주면 된다. 지금의 행동을 평생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본사는 나한진만으로 천년을 내려오지는 않았다오. 장시주께서...” “긴말 필요 없는 것 같고...” 다시 한번 말이 잘리자 석상 같던 만상의 얼굴에서도 은은한 노기가 일었다 . 그의 나이 마흔 여섯, 사내의 인물을 제외하고 이만큼 양보한 경우는 극 히 드물다. 아무리 천방지축 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허나 곧 그는 노기를 거두어야만 했다. 소리 나게 목을 좌우로 한 번 꺽은 장추삼이 피의 장갑(血匣)이라도 낀 것 같은 주먹을 들어 코를 한번 문질렀 기 때문이다. 볼을 스치고 간 한줄기의 혈선(血腺). “시작해 보자구.” 그 광오한 말을 감히 부정하지 못했다. 눈을 반짝 빛낸 하남삼승이 제각기 품(品)자형으로 자리를 이동시키고 중앙의 만상이 합장한 그대로 입을 열었 다. “빈승들은 오직 일초만을 사용할 것이오. 이번 공세를 막아낸다면 장시주 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거요. 아미타불...” “일초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군.” 남궁선유의 초상이 갑자기 떠올라 히죽 웃는 장추삼은 지금 싸우고 싶어 미 칠 지경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전신의 근육들은 한계점에 봉착하고 불로 지 진 듯한 양손바닥의 통증은 더없이 거추장스러웠지만 마음속의 또 다른 자 아가 부차적인 고통을 무시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깨트려! 깨트리란 말이다! 소림?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개론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무언가 원론에 가까운 느낌이다. 한데 뭔지는 모르겠다. 역시 복잡한 생각은 답답하기만 하고 언제나 해답을 주지 않았다. 일단 부딪치면 무언가 나올 것이다. [18181] [연재] 삼류무사-145 스슥! 반쯤 몸을 튼 장추삼이 반짝 눈을 빛냈다. 이들이 고수라는 것쯤은 구차하 게 말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피부가 먼저 느끼고 있었다. 닭살처럼 돋아난 소름이 삼승에 대한 반응인건지, 그 자신의 내면적 자아가 외치는 소리에 마주한건지 알 길은 없지만 아무튼 소름이 돋은 건 사실이었다. 찌릿! 온몸을 사선으로 관통하는 긴장감. 단 일초라고 했다. 그렇다면 합공인데 도대체가 어떤 형태인지 모르겠다. 만약 한명씩 할 거였다면 삼초가 되니 그건 아니고, 그렇다고 품자로 벌린 대형을 보면 분명 연수임에 틀림없다. 꾸욱! 주먹을 말아 쥐자 화끈거리는 통증에 입이 다 벌어졌지만 어떻게든 티를 내 지 않으려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부터 나올 초식은 매우 무시무시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위험할뿐더러 강할 터였다. 장추삼의 동작을 찬찬히 지켜보던 만상이 그가 어느 정도 전투태세를 갖추 었다고 판단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일초라는 규율 없이 단신 으로 이 광폭한 신진에게 훈계를 내리고 싶었다. 소림의 이름을 지키는 것 은 물론 만상이라는 불문인(佛門人)이 아니라 무인대 무인으로서 아무런 조 건 없이 소림의 자랑을 깨트린 상대를 소림의 무공으로 확실히 굴복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혜광의 전음은 분명 일초의 겨룸이었다. 물론 일러준 그 초식이라면 괴성 장추삼이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라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 야 절대오존 정도? 그 아래의 이름들이라면 절대로 이 초식 앞에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불문무공의 위대한 세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니까. 꽝! 꽝! 꽝! 만상이 들고 있던 선장을 바닥에 꽂자 나머지 두 승려들도 나란히 같은 행 동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서의 봉술과는 다른 무엇을 시전 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바닥을 파고드는 세 개의 선장이 육중한 소리로 지면에 박 히자 하남삼승들은 일제히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승복이 펄럭이고 대기가 요동을 친다. 떨어진 나뭇잎 따위가 허공으로 비산 되며 발산되는 내공의 힘이 실체처럼 장추삼의 온몸을 내리눌렀다. 이것이 야말로 ‘내공무적 천년소림’의 자랑이라는 세 명의 승려가 보이는 실체였 다. 세 승려가 일으킨 내공의 기운은 작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고 어울리 기도 하며 휘감고 돌아 대기 속에서 묘한 울림을 보였다. 이 기세가 언제까 지 유지될지, 아니면 실체의 모습으로 덮쳐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가만히 있으면 기세라는 마물에 잡혀 먹힐 판이라 장추삼은 절로 숙여지는 어깨를 애써 폈다. 아까의 나한진이 보였던 기세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단 세 사람이 구현해내 는 기의 파고는 열여덟 명의 나한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엇이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뭘 보여주는지 말이야...’ 질끈 어금니를 물고 그가 천천히 오른발을 떼었다. 쿠오오오오- 긴박해지는 기의 소용돌이! 지옥으로 통하는 암굴에서 울려 퍼지는 귀곡성이라 해도 이보다 섬짓할까? 표면적으로 아무리 웅휘롭고 고고하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 에서 끔찍하다면 그것의 이름은 악몽이다. 깨어나려 해도 발목을 꼭 틀어쥐 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가위눌림처럼 소림삼주들이 불러일으킨 기운은 장 추삼에게 뼛골 속까지 전달되었다. ‘시주가 아무리 대단한 재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가 한계로다. 무 림초출에게 밟히기 위해 있었던 이름이라면 그건 소림이 아닐 것이다. 아미 타불...’ 짧은 생각과 함께 합장했던 만상의 손이 자유를 찾자 파생된 최고조의 공력 이 일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애당초에 그런 기운은 존재하지 않았었 다는 듯 주위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 명의 사내가 만들어낸 침묵이 얼마 나 깨끗했는지 쓰러진 동료들을 돌보는 승려들의 발걸음이 천둥처럼 들렸을 까? 그러나 이건 소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폭풍전야의 고요, 깨지기 위해 생 성된 살얼음이다. 장추삼도 질식할 것 같은 결빙상태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감히 뛰쳐나가거나 하는 경거망동을 감행하지 않았다. 말없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뿐. 일견 꼬리말은 개같이 보일지는 몰라도 그의 전투감각은 현재 위태로울 정 도로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단지 표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 를 덮쳐온다고 하더라도 일마든지 싸울 용의가 있다. 문제는 그의 몸, 언제 까지 버텨줄지 모르겠지만. 완벽한 정적은 반상의 내리감았던 눈이 반개(半開)되며 깨졌다. “불법은 무한하니 아홉 송이 연꽃으로 그 뜻을 기리리라...” “아미타불...” 내용조차 불분명한 만상의 선창이 있자 두 승려가 화답했다. 스스슥!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세 송이의 연꽃이 되었다. 장추삼의 주위로 절대 꺾이지 않을 아홉 송이의 완벽한 불화(佛花)가 피어오르자 천지는 세 승려 의 완벽한 통제하(統制下)에 놓였다. 연대구품(蓮臺九品)! 불문의 위대한 세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 삼백년 전부터 구현자체가 불가능해진 불법무한과 이름만이 허공을 노니는 달마삼검과는 달리 아직까지 소림의 경내를 맴돌고 있던 이름! 찰라라는 시간동안 아홉 개의 완벽한 방위를 점하고 서로 다른 아홉 개의 초식을 구사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무학. 지난 백년간 한번도 펼쳐지지 않았던 신비의 무공이 소림을 받치는 세 가닥 기둥들에 의해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이미타불...’ 그 모습을 목도하는 혜광의 노안도 축축이 젖어들었다. 비록 편법으로나마 전설이 되어버린 초식을 보게 되니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으랴! 본시 연대구품은 한 사람이 펼쳐내는 무공이다. 허나 실질적으로 현 소림에 서 위와 같은 능력을 가진 승려는 없는 게 작금의 실정이다. 동시에 아홉 방위와 아홉 개의 초식... 말이 쉬워서 아홉이지 이것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다. 불가의 힘과 도가의 이념까지 아우르는 절대의 초식인 것이다. 처음 세 명의 제자들과 연대구품의 부재를 아쉬워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변 형적인 연대구품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아홉은 셋으로 세 번 갈라지지 않는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삼분지일의 역할 은 해 낼 것이다! 문제는 단 한 치의 오차 없는 연수(連手), 그 정도는 승 산이 있다! 그때부터 소림의 세 기둥들은 침식도 잊고 한마음이 되어 잊혀진 이름을 목 청껏 불러보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흉내에 불과했던 몸동작이었거늘 어느 순간부터 간간히 메아리 되어 화답을 해주었고 얼마 전의 새벽, 그들 은 마침내 위대한 울림을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 삼재(三才)는 육합(六合)을 낳고 그곳에서 구궁(九宮)을 이룬다. 구 궁은 삼라만상을 환히 비추노니 이것이야말로 연대구품이라 칭하리라...... 그때의 눈물은 이제 없다. 완전한 모양인지는 몰라도 연대구품은 충분히 위 력적이었고 무림초출의 신진에게 거역할 수 없는 부름으로 명령할 것이다. 소림의 이름아래 무릎을 꿇으라! 꺼지듯 나타난 아홉 사람!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골이 쭈뼛 설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아홉 칸 지하세계의 겁화에 시달리는 우매한 중생들이 눈에 밟혀 극락정토(極樂淨土) 안온함을 모두 뒤로하고 스 스로 여덟 분신과 함께 지옥으로 현신한 부처의 그것처럼 나부끼는 승복조 차 아름다운 아홉의 분신들. ‘억!’ 장추삼의 눈은 인간이 벌어질 수 있는 한계까지 치떠졌다. 삼승이 펼쳐낸 연대구품의 멋진 자태 때문에? 물론 멋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결투 중에 상대방의 모습을 보며 감탄사나 삭일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태산처럼 그를 찍어 누르는 내공의 압력에 억눌려서 내지른 비명성도 아니다. 그런 거로 놀랄 겨를이 어디 있는가? 지금의 그는 무척이나 다급하단 말이다. 허나 역 시 놀라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저, 저 모습은 언젠가의 나다!’ 그렇다! 소림삼주가 보여주는 분할(分割)적 연대구품은 언젠가 장추삼이 구 현해 내었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다! 연대구품이라는 말 정도는 들어본 기억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어 떠한 위력으로 대지에 강림하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허나 지금의 그들을 보노라면 무의식중에 펼쳐내었던 어떤 동작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 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마음이 부르는 데로 뽑아내었던 - 하운의 제 2차 월 광살무와 어우러졌을 때의 순간이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 순간의 장 추삼은 자아와 무관하게 움직였었으니까 - 창졸간의 몸놀림이지만 기억용량 과 기간의 한계를 가지는 머리가 아니라 직접 펼친 몸통이기에 바로 반응했 던 것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결과는 필패다! 그 역시 같은 동작으로 버틸 수는 있겠지만 말 그대로 버텨는 정도에 불과 할 뿐, 절대로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장추삼의 싸움은 상대방의 거리와 허점을 제압하여 가장 효과적 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특출한 초식이라고는 유성우 하나 였고 부허내기라고 명명된 내공의 운용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 한 상태. 확실히 점을 찍고 가장 자신 있는 초식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들을 단지 손을 내밀어서 제압한다는 건 무리다. 쿠오오오! 한쪽을 보면 강대한 위력의 권법인가 하였으며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각의 환영이 무서웠고 허공에서 비산되듯 내리 떨어지는 기운은 한번 봐서 어쩐지 정겨운 백보신권이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천지를 가르기에 충분했 고 셋만으로도 중원의 절반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런데 아홉 개가 한번 에 펼쳐지니 숨을 내쉬는 게 벅찰 지경이었다. 작은 공간에서 큰 이름의 초식이 아홉 개나 한순간에 구현된다면 자칫 서로 유지하는 공간이 침해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소림의 위대한 이름은 마치 자로 잰듯한 공간 점유의 미학을 보이며 잘 맞물린 나무조각처럼 한 치의 빈틈도, 한 순간의 오차도 없이 장추삼을 옥죄었다. 절망적인 건 방위(方位)! 어느 곳으로든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찌해야 하나...’ 그때 한순간처럼 솟아오른 눈동자 한 쌍. 언제나 맑고 온유했지만 절명(絶 命)의 순간에서 오히려 그를 믿어주었던 눈빛. 믿는다! 그때 한순간처럼 스치운 한마디. 투명하면서도 신비롭게 젖어 별리(別離)의 순간에도 오히려 그를 걱정해주었던 음성. 부디 몸 건강히 돌아오세요... 그리고 외진 곳에 움츠러들었던 자아의 정겨운 외침! 수많은 사건의 중첩으 로 어느 순간 잃어버렸던 청빈로의 장추삼이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 뭐야, 벌써 꼬리를 마는 거야? 하품이 다 나온다, 장추삼... 수많은 단상들이 겹치며 스러지고 합쳐졌다 분산되어 최종적으로 떠오른 어 떤 얼굴에 장추삼의 전신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늘 근엄했지만 아련한 아픔 을 간직했던 신선풍의 노인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 나 역시 이것이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아니 만들어 질 가능 성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눈으로 보고 믿는 성격의 노부였기에 그의 말은 뜬구름 그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허나 인체의 궁극을 바라보는 지금 사람은 머리로 몸을 제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무(無)에 출발하 여 전체를 이루고 전체가 또다시 무를 이룬다는 개념은 어쩌면 영원히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본다면 너의 전능체에 날개가 달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관(天觀)이리니...... 파직! 전신을 관통하는 어떤 부름, 천관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보인다. 그리고 무언가가... 깨져나갔다. 그의 발이 가만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무영일까? 잔상이 남는 것으로 보 아 맞지만 그렇게 간단한 동작이 아니다. 추뢰보일까? 아니다. 추뢰보라면 그것의 완결형이라는 가속추뢰라도 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까. 빠른 잔상이기에 추뢰무영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지금의 장추삼은 정중동(正中 動)이자 산중분(散中分)이다. 아니,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가 보이는 몸 놀림을 정의할 단어는 현 무림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스스스... ‘이럴수가...’ 후발선착(後發先着)이란 말이 있다. 뜻으로 보면 지극히 간단하다. 뒤에 떠 나서 먼저 도달한다는 것이니 그저 빠르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건 어디까지나 흔히 존재하는 이론에 불과하고 고수간의 다툼에서 적용되는 경 우는 없다. 모든 싸움은 거리를 제압하면 끝이었지, 맞기 전에 때리면 그만이거든? 이 유 같은 게 어딨어? 선방처럼 좋은 건 없지. 근데 말이야... 그걸 좀 유식 하게 풀어보니 다른 이름이 나오네? 뭐냐고? 그건 바로... 홀로 만들어낸 아홉이 셋이 만들어낸 아홉의 선공보다 빠를 수 있을까? 만상 뿐 아니라 두 승려의 얼굴은 참혹한 절망감에 굳어버렸다. 그들이 아 무리 위력적인 초식을 구사한다고 해도 거리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해 그들 이 손발보다 나중에 발동된 장추삼의 육신이 사정거리를 잡아내었다. 그는 드디어 싸움이라는 굴레를 벗고 무도라는 큰 틀로 한걸음 내딛은 것이다. ‘오오... 저 시주는 해와 달이 지배하는, 그림자의 길이로 정의되는 시간 을 넘어섰다! 시간이란 정형화된 개념을 넘어선 그 무엇! 그래, 그런 것이 었나!’ 깊이의 차이일까? 놀란 삼승과 달리 혜광은 장추삼이 본 그 너머를 얼핏 넘 겨보았다. 그리고... 백년간 잠들어있던 신화가 재현되었다. 부우웅- 천천히 그의 몸이 떠오르며 불호 속에 한 노승의 가녀린 몸이 분열하며 제 각기의 동작을 보였다. 하나, 둘... 일곱에서 멈칫하나 싶었지만 염화시중 의 미소가 혜광의 얼굴에 잔잔히 번지며 나머지의 변화를 이루어내니 그 수 는 정확히 아홉이었다. 홀로 만들어낸 아홉의 부처였건만 그가 보여주는 형 상은 또렷한 실체와 기품이 있었고 무엇보다 은은한 향기마저 배어 나왔다. 연대구품! 백년을 묻혀있던 천고의 절기가 무림초출의 괴청년이 보여준 무엇을 빌어 육십 여년을 하루같이 고뇌하던 노승의 몸으로 재현되었다. “오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상당한 승려들을 돌보던 승려들도 느닷없는 전설의 재림에 하염없는 불호 로서 경배하였고 노승의 미소는 언제나 까지 계속 될 것만 같았다. 지금의 혜광에게 경내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돈오(頓悟)의 환희에 몸을 떠는 구도자의 기쁨만이 충만할 뿐. 그러나 한 켠의 싸움은 급박하게 치닫고 있었다. 단 한 치면 소림삼주들은 지면에 내팽개쳐질 판이었으니까. 팍! 갑자기 터진 코피! 뒤이어 격렬히 전달되는 전신의 통증! “쿠억!” 마치 정지된 순간처럼 굳어있던 광경은 장추삼의 코와 입에서 터져 나온 핏 물로 급하게 돌아갔다. ‘한 치만 더 뻗으면 되는데...’ 혹사에 혹사를 거듭한 전신근육은 마지막의 깨달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무너 지고 있었다. 일컬어 주화입마라고 했던가? 아무런 준비 없이 받아들인 신 세계였기에 역설적으로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건가? 아득한 정신으로 아홉 개의 초식이 내리 떨어지는 것을 보며 희미하게 장추 삼이 웃었다. 할 만큼은 했다. 정말 후회 없이 싸웠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다. 이정도 면 스스로의 이름에 떳떳할 수 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로지 하나 ... ‘미안해, 기형... 꼭 물어보려 했는데 이놈의 운도 여기까지 인가봐. 후후 ..,’ 어디선가 아득한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안돼! ‘내 참, 정신이 없기는 한가보군. 이럴 때 빈대영감이 생각날 건 또 뭐야? 아무튼 나란 놈은 참...’ 그리고 그의 몸은 아홉의 소림절기가 짓밟고 지나갔다. 털썩! 비명조차 없었다. 웅혼한 내공의 소림초식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의 육신을 일순간에 집어삼켰고 만개한 꽃과 같은 노승의 자태와 피곤죽이 되 어 허공을 훌훌 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지면에 착지하며 급히 몸을 날리는 만상은 저간의 사정은 모르지만 상대의 신변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감지했다. 승패는 거짓말처럼 뒤바 뀌었고 그들은 무방비의 상대에게 거의 죽을 만큼의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물러나라!”] 나라, 나라. 나라... 수 백 개의 천둥이 일시 간에 몰아치듯 울려 퍼지고 떨어지는 그의 몸은 어 떤 이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경내를 들어온 신법의 기경함을 차지하더라도 자신들의 사부보다 강력한 육합전성을 구사하는 인물!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정대한 체구의 노인이 참담한 얼굴이 되어 장추삼의 뺨을 쓸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정말로 미안해. 노부가 그만 늦어버리고 말았어...” 그의 음성은 지극한 슬픔을 담고 있는 것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머리 를 숙이게 하였다. 처연한 눈빛으로 장추삼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문득 고개 를 들었다. 그의 눈은 아까의 슬픔에 처절한 분노를 담아 만상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연대구품의 돈오에서 깨어나지 않은 혜광을 응시하였다. 그 눈에 담긴 빛은 너무나 많은 감정이 담겨있는지라 딱히 한단어로 정의내리지 못 했기에 만상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각질화 하였다. ‘뭐, 뭔가! 이 노시주의 기도는 사부님마저 상회하고 있지 않은가? 공력을 일으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남을 누르는 천고의 기개, 도대체 이 사람은 누 구인가!’ “어찌된 일이냐!” 장내를 한번 훑어본 노인이 한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 고 물었다. 장추삼을 제외하고 승복을 입고 있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바로 눈에 띠었을뿐더러 무엇보다 그의 눈물은 충분히 서글펐었다. 울던 사내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렸으나 곧 무엇에 홀린 사람처 럼 저간의 사정을 술술 풀어냈다. 노인은 말 한마디만으로도 전체를 장악하 는 힘이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이 - 놀랍게도 그는 말을 하는 일방 오른손으로 장추 삼의 전신을 추궁과혈하고 있었다. 무림에서 말을 하며 내상 입은 사람을 돌볼 이는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만상의 경악은 더해만 갔다 -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혜광에게 한마디 했다. “내가 왔소.” 말은 부름이나 기세는 강압이다. 문득 들려온 창노한 음성에 고개를 돌린 혜광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킨 사람마냥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있어 현신한 것만으로 대소림의 장문방장을 뒤흔드는가! 혜광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피어났다. 그리움, 반가움, 경 외... “이제야 오셨구려, 이제야 말입니다...” 격동을 금치 못하던 노승의 입이 벌어졌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의미가 가진 무거움에 대소림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으로... “비. 빈승 혜광이 맹주를 뵈오이다...” 쿠쿵! 현 강호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십팔 년 전 신기루처럼 실종된 무림맹의 옥 탑(玉塔). 그 자리는 아직까지 비어있다. 열명의 눈앞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빛바래지 않은 위대한 그 이름! 한 자루 칼로 대륙을 종횡하니 일수(一手)로 풍운이요, 일검(一劍)으로 평 정이라! 만승검존(萬勝劍尊)! 그 이름 앞에 누가 있어 두발을 펴고 서 있으랴! 털썩털썩. 사내를 제외한 모든 이가 무릎을 꿇으니 무림사에 이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어디 또 있으랴. 소림의 경내건만 그의 눈보다 높은 이는 오직 부처밖에 없 었다.
첫댓글 천년소림.
아미타불.
만승검존.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