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복면가왕 봤어요?”
“....? 아니”
“잼나요. 그것도 안보고 뭐 하세요?”
“잔차 타잖니?”
“에이, 한번 보세여”
“어디서 하는데?”
지난 주말 임도를 타며 동호회 참새들과 나눈 대화다.
난 그게 영화인 줄 알았다.
요새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TV프로란다.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는 얘기도 온통 그 얘기다.
고추아가씨? 퉁키? 클레오파트라?
왕따에 노땅되는 건 순간이다.
허긴 엠티비동호회 라이딩 멤버들이 요새는 2-30대가 주류다.
어느새 여성인구도 많이 늘었다.
이런 저런 가요경연프로들을 본지라 그런 것 중의 하나려니 했다.
그런데 뭔가 색달랐다.
누가 부르는지 모른다.
일 대 일로 상대를 떨구며 올라간다.
스키나 양궁의 크로스대회처럼 진행한다.
승부는 청중의 투표로 결정된다.
선택한 곡을 들고 나와 부르는 것은 어디서나 하는 형식으로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말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한 노래를 경쟁자 둘이 나와 한 소절씩 번갈아 나누어 부르는 것이었다.
이건 처음 보는 경연 방식이다.
둘이 불렀으니 이런 것도 듀엣이라고 하나?
같은 가사의 곡을 둘이 나누어 부른다.
누구와 대결하는 지도 모른다.
승부는 바로 결정된다.
감정표현과 가창력의 진검승부다.
승부가 가려진 다음이 정말 아름답다.
패자는 가면을 벗어 얼굴을 드러낸다.
승자는 가면을 벗지 않는다.
패자는 투표의 결과를 환한 얼굴로 받아드린다.
패자는 승자를 칭송한다.
대결이 즐거웠다고 한다.
승자와 승부의 자리에 선 것만도 영광이라고 한다.
승자는 패자를 위로한다.
이런 장면이 감동을 준다.
당연한 것이 남다르게 비치는 것은 왜일까?
일상의 주변 환경 때문일 것이다.
잘난 의인들 사이에 끼어 살기 때문일 게다.
사랑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를 입에 달고
매일 크로스경기에 몰두하는 선수들
같은 성경구절을 읆조리며
같은 찬송을 목소리 높여 부르며
돌아 나오면
너는 죽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프로들
그들 사이에 있어 고달픈 것 일게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고
익명의 복면 뒤에서 물고 늘어지고
이원 대칭구조로 계속 분화하며 으르렁거린다
정녕 우리 주변에는
교회 주변에는 복면의인이 없는 것일까?
오늘도 정말 덮다.
폭염에 나다니지 말라고 긴급재난문자까지 날아든다.
첫댓글 노래자랑 끝나고도
복면도 안벗고 이름표도 떼어 버리고
심사위원이 썪었다고
노래도 아닌 악을 쓰는 상황입니다.
시청자들이 짜증나서 채널 돌리고
복면가왕 노래자랑 프로가 없어지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익명의 가면 뒤에서 진리와 정의를 논하는 것은 스스로의 글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자백이며,
우리가 진리 가운데 있으면 진리를 말하기 위해 자신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수에게 비난을 받을까 염려되어 익명으로 글을 쓴다면, 차라리 그 다수를 배려하여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위하여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싶은 심정을 주시면 이름을 드러내고 순교를 각오하고 할 일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익명은 마귀의 방법입니다.
인터넷시대를 살면서 대부분 ID를 사용합니다.
이는 주민등록 제도와는 다른 digital ID라고 생각합니다.
예명, 필명 또는 digital ID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남산솔개 아이디나 필명 등을 통하여 글쓴이의 DIGITAL ID가 명시되는 경우는 익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쓴 글이 물의를 일으키거나 허위 사실을 적시하였을 경우 절차를 통하면 해당 아이디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이 가능하고, 또 그에 따른 합당한 제재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으로 제가 아이디에 실명을 포함한 이유는 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필명에는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간혹 언어표현이나 단어 선택에 감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표출하는 저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본세우기(김원곤) 결국은 알맹이가 온전하냐 아니냐의 문제로군요.
다른 말로 겸손의 문제라 할까
이긴자는 복면뒤에서 드러내지 않는 겸손
진자는 얼굴을 드러내어 패자임을 인정하는 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