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결전의 날 결승전, 충암고는 심재학을, 공주고는 준결승 선발 신재웅을 다시 마운드에 올립니다.
당시 충암고는 심재학이 투수겸 4번타자, 이원식도 뛰어난 타격을 가진 투수였으며, 송재용도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빠른 공과 정확성이 돋보였습니다. 심리적으로는 충암고의 우위라고 봐야죠. 이미 한번 붙어서 공주고를 누른 적이 있고 시즌 전국대회 2관왕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으리라 보입니다. 반면 공주고는 이번 경기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다시 한번 공주고는 오중석 - 송재익 - 홍원기 - 강준기 - 신재웅 - 박찬호 - 고경찬 - 이보형 - 김기중 라인을 투입합니다.
공주고의 당시 가장 큰 문제점은 주전 라인업에 좌타자가 없었으며 팀을 통틀어서도 디스크로 고생하던 1학년생 우투좌타 남기훈과 투수 수업을 시작한 장신 이대성 뿐이었습니다. 투타에 왼손잡이가 전혀 없는 핸디캡에 비해 충암고는 특급좌타자 심재학 하나만으로도 위압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하자 마자, 심재학은 볼넷을 남발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서 선발 투수였던 신재웅은 청룡기에서 박찬호가 그랬듯 회심의 병살타를 날리며 1회 심재학을 단 1실점으로 막게 해 줍니다.
당시 충암고의 핵타선을 감안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점수차였지만 신재웅은 전날보다 더 차분하게 경기를 이끌어 나가며 다시 한번 안타를 추가하며 2점째를 올립니다. 결국 충암고는 심재학을 내리고 이원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원식은 공주고 타선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신재웅의 호투로 0의 행진을 계속하게 됩니다.
5회가 지난 후 마운드는 다시 박찬호에게 인계됩니다. 그러나 전날 눈부신 호투를 펼쳤던 박찬호는 다소 흔들리는 제구력으로 1점을 내주며 살얼음같은 리드를 지키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주고에 영웅이 등장합니다. 바로 8번 타자 이보형... 3학년이면서도 1,2학년이 6명이나 포진한 타선에서 8번을 맡았고... 청룡기에서도 번번이 삼진을 당하며 고개를 숙였던 이보형은 운명의 8회 상대 투수 송재용의 직구를 통타 청주구장 우측 관중석 높은 곳에 라인드라이브로 꽃히는 1점 홈런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날 경기에서도 이보형은 매 타석 삼진으로 물러났으나 이 홈런 한방으로 그동안의 응어리를 풀어내게 됩니다. 어찌나 그라운드를 빨리 돌던지 3루타 기록하려는 선수처럼 보였습니다.
이보형은 당시 거의 순혈주의(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를 지향했던 공주고에서 충남중을 졸업하고 공주고로 온 선수였습니다. 좋은 타격에 빠른 발과 괜찮은 어깨를 갖춘 선수였지만 2학년 겨울방학 때 부상을 당해 거의 훈련을 하지 못한 상태로 시즌을 맞아 마음고생이 심했으나 이 한방으로 그는 충암고의 사기를 꺾어 놓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홈런 한방으로 훗날 허무하게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비운도 겪었으니 사람 일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9회 박찬호는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강준기와 함께 우승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 가운데 선수단 뒤에서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감독님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단적으로 봤을 때 공주고는 준결승과 결승전을 통해 신재웅, 박찬호의 계투로 단 1점을 내주며 방어율 0.50을 기록했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삼진은 20개 정도 잡았습니다. 피홈런은 0.... 공주고는 사력을 다해 공주고가 보여줄 수 있는 야구를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당시에 이전 경기에서 무시무시한 장타력을 보였던 팀들을 상대로 4경기를 펼쳐 3실점만 했던 공주고의 투수진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공주시는 말 그대로 축제에 휩싸였습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그해 전국대회 우승팀을 연전연파하고 파죽지세의 우승을 거머쥔 공주고 선수단은 1박 2일에 나왔던 공산성 매표소 앞을 출발하여 공주고까지 인근 군부대에서 제공한 지프차를 이용한 카퍼레이드를 펼쳤으며 저도 그 선수단 가운데서 강준기, 신재웅 선수가 탄 차를 향해 연방 셔터를 눌렀습니다. 지금이야 카메라 좋지만 당시만 해도 줌카메라는 꿈의 카메라였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찍기 위해 눈치 먹어가며 셔터를 눌렀죠....
그렇게 신재웅은 시즌 마지막 2경기에서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준결승전 결승타를 때려내며 공주고에 13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안기고 경성대로 훈련을 하러 떠나게 됩니다.
공주고는 김00 감독을 새로 사령탑에 앉혀 다음 시즌 전관왕 프로젝트를 가동했지만 동계훈련을 시작하기도 전에 노장진이 팀을 이탈해 잠적하면서 불행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투수조 조장이었던 신재웅 선수는 후배들이 잘 따르기도 했지만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투수 리더 신재웅이 경성대로 가자 마자 투수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주전포수로 뛰어야 할 강타자 고경찬이 선수단에서 약간의 다툼 끝에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게 됩니다. 주전포수의 팔 골절은 공주고로서는 치명타였습니다. 결국 그 해 동계훈련은 주전포수 없이 다음 해에 노장진과 결승전 노히트노런을 이끌어내는 양진모를 안방마님으로 동계훈련을 시작하게 됩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팀의 기둥이던 강준기와 신재웅이 떠난 그 시점부터 공주고의 황금 92학번의 팀웍은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선수가 홈런을 치면 모든 선수가 홈런스윙으로 일관하는 등의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했죠.
또한 당시 새로 부임한 감독은 선수단에 의해 전 감독이 경질된 상황에서 부임한 데다 워낙 대단하다는 선수들을 모아 놓아서 그런지 팀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선수간의 몸싸움으로 팔이 부러지고 적어도 3번째 투수 역할을 해야 할 노장진이 이탈하는 등의 문제에 이어... 제가 보기에는 선수단 장악에 큰 문제점을 드러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운동장 관리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야구장을 겸하는 운동장은 보통 소금을 수십자루 뿌려서 배수능력을 높이고, 눈이 오면 군인 못지 않은 빡센 자세로 눈을 치워서 운동장을 보송보송하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해 겨울 폭설이 내렸을 때 눈을 치우지 않아 선수단은 거의 1주일을 야구하는 건지 쭈꾸미 잡는 건지 모를 운동장에서 연습경기를 치렀으며 그 후 땅이 급격히 얼어붙어서 굴곡이 엄청나게 심해진 야구장에서 연습하던 와중 박찬호 선수가 팔꿈치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운동장 상태가 얼마나 심했느냐 하면... 플라이볼이 내야와 외야 한 가운데 떨어지면 땅에 박혀 굴러가지 않았고, 번트를 댄 타구는 홈플레이트 처음 떨어진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 번트 타구를 처리하러 달려나가던 포수는 발이 박혀 있어서 그만 제대로 된 몸개그를 보여 줬고, 중계플레이든 뭐든 하는 플레이마다 몸개그가 되었습니다. 이런 운동장에서 선수들은 당연히 제대로 된 연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휘문고, 배명고, 신일고, 대전고 등 많은 팀들이 그 해 공주고와 연습경기를 하러 와서 이런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고 갔으니... 제가 보기에 그 당시 감독이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익히 짐작이 갑니다. 질은 좋으나 접착력이 없던 시멘트... 당시 공주고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더구나 전 해에 자신들을 주축으로 이미 전국대회 우승을 경험해 본 선수들의 어깨에도 상당히 힘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구요.
이런 불안 징조를 보이던 공주고 야구부는 시즌 시작을 비교적 상쾌하게 그러나 개운치 않게 맞이하게 됩니다.
다음에 계속....
첫댓글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넘좋은글 감사합니다.
심재학 선수의 잠깐만 사건은 공주고와의 결승전에서 있던 일이 아닙니다. 공주고 - 대전고의 준결승전 경기 바로 직전 충암고 - 광주진흥고의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중에 공주고의 강준기 선수가 충암고의 덕아웃을 찾았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당시 광주진흥고 투수가 이대진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 가네요. 맞다면 당시 1학년이었구요.
신재웅 선수 아마 99년도에 최익성 선수와 트레이드 되지 않았나요?
신재웅선수는 한화에서 은퇴한걸로 알고있느데요..
노장진은 이때부터 끼가있었구나 ;; 왜케 팀을 이탈해
강준기선수는공주중감독때 교통사고로 사망했죠 팬으로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이후신재웅선수가 감독이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