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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려 생각했던 글이었는데... 쓰다 보니 점점 길어지네요. 글을 쓰면서 혹시 다른 분들께 누가 되지 않을까 최대한 자제하면서 쓰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기분상하는 글이 있을 수 있으니 그 부분은 감안하시고 읽어 주세요. 또한 저는 전후관계를 모두 밝히고 글을 쓸 예정이오니 지금 기준으로 그렇다 아니다를 논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 주세요.
방학 동안 밀려 들어오는 연습경기 주문에 공주고는 많은 팀과 경기를 치릅니다. 그 가운데는 조성민의 신일고와 임선동의 휘문고도 있었고 방학 후에는 대전고도 공주고와 연습경기를 했습니다. 당시 공주고에는 고교 기준에서 거포급에 속할만한 선수들이 3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찬호, 홍원기, 오중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발도 무척 빨랐습니다. 거의 선착순 달리기를 하면 앞에 1,2,3등을 했었죠. 2학년때는 주로 오중석이 톱타자를 했고, 홍원기가 중심타선에 포진했으며 박찬호는 클린업과 하위타선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는데 참 재미있는 것은 91년 시즌 경기 기록을 보면 공주고가 홈런을 3개 이상 친 경기는 무조건 저 세 선수가 함께 친 경기였습니다. 그 정도로 세 선수의 경쟁심은 강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당시 감독은 대부분의 경기에서 세 선수를 3,4,5번에 포진시키고 6번에 손혁을 1루수겸 투수로 투입합니다.
당시 휘문고의 임선동 선수는 연습경기에서 정말 엄청나게 난타를 당했습니다. 임선동 선수가 빠른 공을 가졌고 좋은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당시의 임선동은 고교무대를 좀 깔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확실히 박찬호 같은 노력형 선수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임선동도 공주고의 불방망이 앞에서는 크게 혼나고 갈 정도로 공주고의 화력은 막강했습니다. 투수진도 박찬호, 손혁, 김종국으로 이어지는 안정된 선발라인에 전형적인 언더핸드로 완벽하게 1이닝을 막아줄 수 있는 김대영이 성장하고 있었고, 노장진과 동기인 왼손잡이 투수 이대성도 밸런스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지만 공에 힘이 붙기 시작하던 시점입니다.
드디어 3월이 되고 공주고는 CBS에서 주관하는 대청기 야구대회에 참가하는데 이게 이해가 1회 대회였습니다. 대청기는 충청권 학교만 참가했는데 이 대회에서 공주고는 주전포수 고경찬이 빠지고도 결승전에서 박찬호와 이대성의 계투를 묶어 무난히 우승을 차지하며 워밍업을 마칩니다.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타격상,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박찬호 선수에게 모든 상을 몰아주기가 뭐햇던지, 뜬금없이 결승전에는 출전하지도 않은 김종국 선수가 우수투수상을 받게 됩니다. 당시 해설을 하셨던 분은 박찬호의 투구를 지켜 보며 처음에는 빠른 공을 가진 선수다라는 말을 하더니 조금 지나서는 전국에 이름을 알린 임선동 선수의 호적수가 될만하다라는 말을 더했다가 나중에는 지금 당장 프로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을 거란 말로 해설을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공주고를 정작 괴롭힌 것은... 당시 충남야구에 뿌리깊은 편파판정이었습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되면 천안북일고 출신 카페 회원님이나 다른 분들도 이의를 제기할 분들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의 편파판정은 누가 보더라도 정말 심한 면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교야구팀의 전국대회 출전횟수가 3회로 제한되어 충남처럼 두 학교만 있는 경우는 한경기씩 번갈아 가며 나갈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기는 팀이 모든 경기에 출전하고 지는 팀은 같은 시기에 나누어서 출전하는 화랑기와 대붕기 경기 중 하나와 지역예선 없이 출전하는 봉황기만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천안 북일고등학교는 한화그룹 계열의 학교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국내 고교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전용 야구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항상 예선은 천안북일고 운동장에서 진행되었습니다.
90년에도 편파판정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강준기와 신재웅 선수가 워낙 팀을 잘 이끌어 가고 있던 시점이라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92학번이 주축이 되고 나서부터는 편파판정이 공주고 스스로 흔들리는 경우가 무척 많았습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박찬호 선수 같은 경우 공이 빠르면 무조건 볼로 판정되었을 정도였으며, 천안북일 투수의 공은 원바운드에 가깝게 들어와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박찬호의 천안북일과의 지역예선 평균 방어율이 17.58인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두가지 중의 하나겠죠. 편파판정이던 당시 천안북일고가 메이저리그 찜쪄먹는 팀이었던...
대통령배 예선에서 이런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천안북일이 본선에 진출하는데 여기서 좀 애매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천안 북일은 결론적으로 대통령배 대회에서 1회전에서 탈락하긴 했는데 스코어가 1:0으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이긴 했습니다. 당시 천안 북일 92학번 중에 어떤 선수가 기억나시는지요? 정말 그 해에 천안 북일은 유망한 선수가 거의 전무했습니다. 오히려 1년 아래 선수였던 이성갑 선수가 있긴 했으나 그 선수도 동갑내기 노장진 때문에 고교시절에는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청룡기 예선에서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는데, 편파판정을 보다 못한 김종국 투수가 심판에게 대놓고 욕을 하고 유니폼을 벗어 버리고 퇴장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김종국은 그 경기로 인한 징계로 91 시즌 전국무대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또한 첫 경기를 보러 왔던 공주지역 헬스클럽 회원들이 화를 이기지 못해 경기가 끝난뒤 심판을 폭행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다음날은 천안 지역의 어깨들이 천안북일고 경기장에 모였음은 당연했구요. 그러나 공주고는 다시 한번 예선탈락을 했고, 청룡기에서도 천안북일은 1회전에서 탈락합니다.
대통령배와 청룡기는 연거푸 경남상고의 차지가 되는데 경남상고는 부산에서도 경남고와 부산고는 물론 부산상고에도 밀리며 부산야구의 변방취급을 당했었는데 안병환 감독의 엄격한 지도와 우수선수 스카우트로 인해 경남상고는 일약 전국 최고팀으로 부상합니다. 경남상고는 당시 우완정통파 투수 곽재성과 좌완 기교파 차명주가 있었고 1학년에는 훗날 거물이 되는 김건덕이 있었습니다. 타선에서는 곽재성과 포수 김형남이 중심타선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른 선수들도 대단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봉황기를 주관하는 한국일보사에서는 봉황기 광고를 겸하여 왜 공주고가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쓰기에 이릅니다. 한국일보사에서는 직접적으로 편파판정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작년의 우수멤버가 그대로 있는데 왜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는가와 그런 공주고를 이기고 올라온 천안북일고가 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가에 모아졌죠. 결국 당시 공주고 감독은 "모두 공주고를 전국 최강팀으로 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지역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팀이 무슨 강팀인가? 그러나 지역예선 없이 출전하는 봉황기에서는 뭔가 보여 주겠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칩니다.
결론적으로 천안북일고의 당시 전적은 전국대회 출전 2전 2패였지만 그 중에 한 경기는 경남상고와의 1:0 경기도 있었고 결코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2달 후 공주고와 천안북일고의 당시 전력을 간접비교할만한 일이 화랑기에서 벌어집니다. 천안북일고는 3번째 전국대회 중 대구에서 열리는 대붕기에 출전하였고, 공주고는 화랑기에 출전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구 야구는 침체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물론 몇년 후에 강동우, 김수관, 이승엽을 앞세운 경북고와 김민우 김승관을 앞세운 대구상고가 고교야구를 지배하긴 하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경북에는 우수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산에는 전통강호 부산고 경남고에 이어 생각지도 않던 경남상고까지 나서게 되었고 동래고등학교도 훗날 2억원에 쌍방울에 입단하는 신재웅의 경성대 후배 최정환을 앞세워 마냥 얻어터지는 역할은 하지 않을 만한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똥개도 제 집에서는 반 먹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야구도 홈에서 하는 경기가 유리한 건 사실인지라 대붕기는 대구경북팀에게 유리하고, 화랑기는 부산경남팀에게 유리한게 현실이었습니다. 공주고는 지난 두번의 경기에서 전국대회 출전이 없어서인지 상대를 압도하는 전력을 보이지는 못했으나 무난한 성적으로 4강에 진출합니다. 또한 이 경기에서는 투수 손혁이 상당한 타격을 선보이며 4강까지 타격 1위를 달리는 이변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8강에서는 대구고를 맞아 팽팽한 경기를 이어가다가 3학년 좌익수 한지훈이 첫 홈런을 결승홈런으로 장식하며 팀을 4강에 올려 놓습니다. 같은 때에 천안북일고도 대붕기에서 8강에 진출하며 전국대회에서 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때에 공주고에 최대의 난관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준결승전 공주고의 상대가 대통령배와 청룡기 2관왕 경남상고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했고, 홈에서 경기하는 경남상고와 공주고의 대결은 누가 보아도 경남상고의 우세를 점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이 준결승전에서 공주고는 박찬호의 쾌투를 앞세워 경남상고에 전국대회 최초의 패배를 홈에서 안기며 결승에 진출하게 됩니다. 박찬호는 이 경기를 통해 결국 장래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한 1보를 내딛게 되는데... 경남상고 감독이던 안병환 감독은 박찬호의 호투에 강한 인상을 받고 미국에서 열리는 굿윌 청소년대회에 박찬호를 청소년대표로 선발합니다. 결국 박찬호는 그 대회 3경기에서 2승 1세이브를 올리며 처음으로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달고 나간 경기에서 짭짤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는 계기가 됩니다.
여튼 최강 경남상고를 물리친 공주고는 사기충천하여 결승전에 진출하였는데 상대팀은 손민한과 염종석의 부산고였습니다. 부산고는 2년생 손민한을 선발로 내세웠고, 공주고 역시 2년생으로 동계훈련 끝즈음에 복귀한 노장진을 선발로 투입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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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궁금한게 있는데요~~ 글 처음부터 계속 읽으면서 다른 분들은 조금 알겠는데 김종국선수에 대한게 궁금해요~ 물론 기아 김종국선수는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 공주고 투수 김종국 선수는 어찌 된거죠?? 프로에 입단 했었나요?? 이야기로는 그선수도 굉장한것 같은데 궁금해요 ^^ 글넘 잼나가게 보고 있습니다 ^^
공주고의 김종국 선수는 92년에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습니다. 영남대로 간다는 말이 있었다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는데 입단 초기에는 신인 중에 꽤 괜찮은 컨트롤과 배짱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삼성 라이온즈 1군에 진입할만하지는 않았는지 92시즌 말에 대만 프로야구에 임대되었다가 그 뒤로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됩니다. 김종국 선수는 키가 175쯤(프로필로는 177) 되는 크지 않은 선수였구요. 공빠르기는 최고 135킬로미터 정도로 공이 빠르진 않았지만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던 선수입니다. 한밭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고에서 활동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정민철 선수처럼 1년 유급을 했다는 말도 있더군요.
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