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 시기에 제작된 수월관음도(일본 대덕사 소장)
고려 귀족문화와 불교문화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이 제작된 시기의 고려의 상황은 아름답지 못했다.
고려의 '흔한 범법자'
..기철·기원·기주·기윤은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며 그들과 가까운 일당들도 그 연줄을 타고 교만하게 횡포를 부렸다.. ..기철의 족제(族弟) 기삼만(奇三萬)도 권세를 믿고 불법을 자행하며 남의 토지를 빼앗았다. 정치도감에서 장형에 처한 후 순군에 수감했더니 20여 일만에 옥사했다.. ..왕은, “기삼만이 남의 밭 5결(結)을 빼앗았을 뿐인데 왜 죽이기까지 했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김영돈은, “기삼만이 권세를 믿고 악한 짓을 오랫동안 저질러 왔으니 어찌 밭 5결만 뺏고 말았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기삼만의 죽음을 안 원나라에서는 공부낭중(工部郞中) 아루[阿魯]와 형부낭중(刑部郞中) 왕호유(王胡劉) 등을 보내 관련자를 국문했다.
-고려사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던 이색이 급제했던 1353년 8월,공민왕은 고려에 방문한 원나라 만만태자를 위해 베 5140필을 들여 잔치를 벌입니다.그 댓가로 고려의 재정은 바닥나고, 백성들에게 이중과세가 적용됩니다.그리고 1356년까지 매년 원나라 사신들을 대접할때 이만큼의 비용을 지출합니다.공민왕이 이색의 상소를 받아들여 전국의 공전과 사전을 조사하던 때에 정작 가장 큰 문제자들이었던 기씨 일족은 원나라의 힘을 입고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씨 일파는 1356년 봄에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로움(?)을 깨닫고 반란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해 3월부터 기씨 일파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던 공민왕은 그해 5월 기씨일파를 숙청하고 재산을 몰수 합니다. 이후 이해 7월까지 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반원자주정책-정동행성 폐지,고려식 관제와 연호 사용,쌍성총관부 수복,압록강 이북 공략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원나라와 고려는 전시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80대군 침공 협박을 하고 이것으로 인해 백성들이 불안에 떨자공민왕은 그해 7월에 쌍성총관부 탈환과 압록강 이북 공략을 담당했던 장군 인당(印璫)을 참수하여 그의 목과 사과문을 원나라에 보냅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원나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려를 용서(?)해줬고 고려는 예전처럼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기씨 일족이 제거되었으니 고려의 토지제도를 개혁할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토지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14세기 고려의 헬게이트 오픈 상황
1.고려 재정의 파탄
공민왕이 즉위한 다음해인 1353년 3월, 왜적들이 인천과 강화도를 급습합니다. 강화도나 인천은 뱃길로 곧장 개경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개경사람들은 경악합니다. 하지만 진정 경악할 일은 이후로 왜구는 수십년간 한반도를 지속적으로 약탈하게 된 것이었죠. 전라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의 해안지역과 조운선이 지속적으로 약탈을 당해 고려 조정의 재정을 악화시킵니다. 그리고 왜구가 고려의 정규군을 격파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내륙지역의 피해도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1358년 3월, 정주부사 주영세와 전라도만호 강중상이 개경에 와서 공민왕을 알현하자, 공민왕은 내우외환의 상황을 열폭합니다.
“지금 나라에 어려운 일이 겹쳐 서쪽으로는 홍건적, 동쪽으로는 왜적들의 우환 때문에 변경의 백성들이 편히 살지 못하고 있는 판에 너희들이 어찌 감히 제멋대로 관할 지역을 이탈했느냐?”
이후 주영세와 강중상은 투옥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왜적과 홍건적 문제가 해결될 리 없었지요. 한편 12공도(성균관의 전신)에는 비축한 양곡이 없어서 관리들이 각 도에 내려가 베를 쌀로 바꿔오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공문을 위조하여 쌀을 얻으려는 관리가 적발되는 사태가 1368년 5월에 발생합니다. 즉 국가가 공무원에게 봉급을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바닥난 것입니다. 하급관료들이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행정집행이 제대로 될 수 있었을까요?
홍건적을 물리친 이듬해인 1360년 7월, 공민왕은 개경 근처의 백악에 궁궐을 새로 짓습니다. 원래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하고 싶었지만,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점괘가 불길하게 나와서 백악에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해 왜구가 경기도와 충남의 서해안 일대를 불태우고 강화도에서 미곡 4만석을 약탈했으며, 홍건적 수군이 황해도 해안가에서 약탈을 하고 돌아갑니다.
다음해인 1361년 2월, 공민왕은 신년 교서를 반포합니다. 홍건적과 왜구가 고려를 유린하고, 해안가의 비옥한 농경지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각종 공역과 군역에 죽어나가고, 재정이 부족하여 관료들이 알아서 녹봉을 마련하던 시기에 공민왕은 한양천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361년 교서에서 한양천도에 대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요약:니들 배고프고 천도하느라 힘든 거 잘 안다. 하지만 도읍을 옮기면 다 잘 될꺼야.
"..생각해 보면 신하와 백성들이 도읍을 만드느라 분주히 일하면서 그 노고와 비용이 실로 많이 들어간 사실을 내가 어찌 가슴아파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국가를 이어나갈 큰 계책이라 감히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제 모든 사업이 시작되는 마당에 어진 은혜를 널리 베풀어야 마땅할 것이다.. ..근자에 병란과 흉년이 드는 바람에 제대로 목숨을 이어가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으며 또 요양과 심양에서 온 유민 가운데 귀화해온 자가 많으니, 해당 관청을 시켜 이들도 넉넉히 구제하도록 할 것이다. 아아! 하늘에 순응하는 길은 오직 지성(至誠)으로 하는 것뿐이며 백성을 아끼는 길은 실질적인 혜택을 베푸는 것이 우선이다. 너희 신료들은 각자 마음을 다해 내가 덕으로 통치하는 일을 돕도록 하라.”
그러나 그해 5월, 도첨의사사에선 이런 주장이 올라옵니다. 고려는 더 이상 백성들을 구제할 힘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죠.
요약:더이상 국가가 백성들 구제 못하니 권문세족들에게 백성들을 노비로 줘서라도 먹여살리시죠?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으나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스스로 먹고 살 수 없는 양민의 경우 부유한 자로 하여금 그를 먹여 살리는 대신 그 양민 한 명에 한해 노역시킬 수 있게 할 것이며, 노비를 소유한 사람이 그 노비를 먹이지 못할 경우 그를 먹여 살리는 사람이 영구히 그 노비를 차지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백성이 노비가 되는 것을 국가가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공민왕은 그 건의서를 태워버리게 합니다. 하지만 관료들 녹봉도 제대로 못챙겨주는 고려는 이제 백성들을 보살피는 최소한의 의무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해 10월, 마침내 2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합니다. 11월, 고려는 절령에 인근 5개현의 백성과 양곡을 집결시키고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그러나 홍건적은 절령방어선을 돌파하고 백성들을 도륙낸 뒤, 개경으로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갑니다. 결국 개경은 함락당하지만, 정세운,김득배,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성공합니다.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과 지속적인 재정지출을 남긴 채로 말이지요.
결국 우왕 7년인 1381년에는 왕실창고인 요물고와 궁중창고인 풍저창의 물자가 일시적으로 고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1387년에는 관헌들의 녹봉을 저장하는 광흥창이 고갈되어 녹봉이 삭감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여말선초 시기의 공신녹권
14세기의 고려는 엄청난 수의 공신들을 양산했고
공신들이 지급받은 각종 물질적 보상과 토지는 고려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결국 공민왕-우왕 시기 재정난에 시달리던 고려는 공신들과 권문세족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2.증식되는 공신집단
공신의 혜택:1등공신에게 전지 100결과 각종 포상을 주고, 2등공신에게 전지 50결과 각종 포상을 준다.
..일등공신은 공신각에 그 초상을 걸고,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작위를 봉하며, 그 아들 한 명에게 7품의 벼슬을 주되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조카나 사위 가운데 한 명에게 8품의 벼슬을 주었다. 구사(驅使) 5명, 진배파령(眞拜把領)7명에게 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그 자손은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렸으며, 전(田) 1백 결과 노비(奴婢) 10명을 내려주었다. 이등공신은, 그 부모와 처를 세 등급을 뛰어 작위를 봉하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의 벼슬을 주되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조카나 사위 가운데 한 명에게 8품의 벼슬을 주었다. 구사(驅使) 3명과 진배파령(眞拜把領) 5명에게 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자손은 음서로 관직에 올렸으며 전(田) 50결(結)과 노비(奴婢) 5명을 내려주었다..
1352년 6월, 공민왕은 즉위 직후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좌했던 조일신,김용,유숙,정세운 등 수십명의 측근들을 호종공신으로 책봉합니다. 6명이 1등 상공신, 18명이 1등 공신, 8명이 2등 공신, 5명이 3등 공신에 임명되어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습니다.
이 중 조일신,김용,유숙,정세운은 공민왕의 최측근으로 성장하지만 정치적 음모에 모두 희생됩니다. 먼저 조일신이 1352년에 정변을 일으켜 기철 일파 일부를 제거하고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공민왕에게 주살당합니다. 유숙은 신돈이 집권하던 시기에 신돈에 의해 주살됩니다.
7년 뒤인 1359년 6월, 홍건적의 침입이 예보된 상황에서 공민왕은 기철 일파를 숙청하는데 공을 세운 홍언박,김득배 등 수십명의 관료와 장수들을 공신에 책봉합니다. 8명의 1등 공신과 12명의 2등 공신이 녹훈을 받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습니다.
이 중에서 홍언박,김득배 등이 공민왕의 측근으로 성장하지만, 결국 정치적 음모에 희생됩니다. 2차 홍건적의 침공이 끝난 후, 김용의 음모에 의해 정세운이 먼저 살해됩니다. 이후 정세운 살해에 관련된 김득배,안우,이방실이 주살당합니다. 그리고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난에서 홍언박이 살해당하고, 김용은 공민왕에게 주살당합니다.
1363년 윤 3월, 공민왕은 김용의 난을 평정한 이후, 대대적인 공신 녹봉을 단행합니다. 그 결과 흥왕사의 난에 관련된 1등공신 23명과 2등공신 16명이 선정되었고, 2차 홍건적의 난 평정에 관련된 1등공신 131명과 2등공신 109명이 선정되었으며.(이들 중에는 이강달,최영 같이 중복 임명된 공신들도 있습니다.) 그 외 수천명이 공신으로 녹훈됩니다.
이 공신녹훈에 개혁을 주도했던 이색이 호종공신 1등에 봉해져 100결의 토지를 하사받았고, 훗날 고려의 권문세족이 되는 이인임,임견미,염흠방 등도 홍건적 격퇴의 공신으로 녹훈되어 토지를 하사 받았습니다. 나중에 조선을 건국하게 될 이성계와 동북면 세력들도 공신으로 녹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덕흥군의 원나라군과 싸우러 출정한 고려군이 진군로에서 굶어죽어가고 있을 무렵, 공민왕은 1차 홍건적 난의 공신들을 새로 선정하여 녹훈합니다. 1등공신 24명과 2등공신 40명이 선정되고 지난 3월의 공신들과 똑같은 포상이 주어집니다.
1363년 3월의 공신녹훈때 1등 공신에게 지급된 토지는 15400결, 2등 공신에게 지급된 토지는 6250결이었습니다. 이 3월의 1등,2등 공신들에게 지급된 토지만 해도 고려 조정에 등록된 전체 토지 50만결의 4%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11월의 공신 녹훈때 1등공신과 2등공신에게 4400결의 토지가 추가로 지급되었습니다. 이외에도 공신들은 노비,관직 등 각종 혜택을 제공받았습니다. 여기에 수천에 달하는 전공자들이 각종 포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국가가 소유한 공전의 감소와 재정 손실로 이어지고, 한편으로 세족들의 재정적 기반을 강화시켰습니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권신 이인임 처벌을 요구하는 신진사대부 권근,이숭인,이첨,하륜,염흠방
권문세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이들은 정작 혈연적으로 권문세족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혈연으로 연결된 귀족정치체제는 전근대 정치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스크린샷 출처는 네이버 검프의 바운드갓 블로그)
3.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결합
공민왕 즉위 직후에 개혁을 주창했던 이색은 호종공신의 반열에 올라 100결이 넘는 농장을 보유한 지주가 되었습니다. 훗날 신진사대부에서 권문세족으로 변신하는 염흠방도 홍건적 진압의 공신이였지요. 이색의 제자였던 하륜이나 이숭인은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인척이었습니다. 일전일주론을 주장한 권근은 안동권씨로써 고려의 공신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또한 왕실과 권문세족과 인척 관계였습니다. 훗날 정도전,조준의 전제개혁을 지원한 이성계도 권문세족인 이인임,지윤과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가 혈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에, 공민왕은 권문세족 뿐만 아니라 신진사대부들에 대해 신뢰를 품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뒤를 우왕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요약:권문세족,신진사대부,유자 모두 밥버러지
당초 (공민)왕이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도 자기 뜻에 맞는 재상을 구하지 못하자 이렇게 생각했다.
“대대로 벼슬한 명문거족들은 가까운 무리들끼리 얽혀져 있어 서로를 감싸준다. 또 초야에 묻혀 있던 신진기예들은 마치 초연한 듯 성행을 가장해 명예를 구하다가 일단 귀한 신분이 되면 자기 가문이 한미한 것을 수치로 여겨 명문거족과 혼인하고는 애초의 생각과 행동을 죄다 던져 버린다. 또한 유생들은 강직하지 못하고 유약한데다가 문생(門生)이니 좌주(座主)니 동년(同年)이니 떠들면서 개인적인 친소만을 따져 당파를 이루니 이러한 세 부류는 등용하기에 부적합하다.”
-고려사 신돈 열전
2008년 대전에서 발견된 고려 중기 귀족의 저택 유적-저택의 규모가 축구장과 비슷한 정도였다.
고려 말 산과 강을 사유지의 경계로 삼았던 권문세족의 저택도 이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대전에서 발굴된 고려 귀족 저택의 도면
양산에 있는 통도사 국장생석표
통도사 주변 10리의 토지가 통도사의 영지임을 나타내는 표석이다.
고려 말의 불교사원도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면서 한편으로 각종 불교행사를 진행하여 고려 재정을 약화시켰다.
첫댓글 오오미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카르텔'이 문제군요.정치-사법-경제계-언론-교육 등 사회 지도층이라는 집단이 한데 물려 결탁해버린 이상 개혁을 추진할 '사람'자체가 없고, 설령 신진세력이 등장한다 한들 기존 시스템에 편입되는 순간 한배에서 나온 개들처럼 뒹굴어버리니...[정도전]에서 극적으로 묘사한 고려말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오오미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카르텔'이 문제군요.
정치-사법-경제계-언론-교육 등 사회 지도층이라는 집단이 한데 물려 결탁해버린 이상 개혁을 추진할 '사람'자체가 없고, 설령 신진세력이 등장한다 한들 기존 시스템에 편입되는 순간 한배에서 나온 개들처럼 뒹굴어버리니...[정도전]에서 극적으로 묘사한 고려말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