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루는 중종 때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그 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1570∼1652) 선생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1643년(인조 21) 퇴락한 건물을 다시 수리하고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의미로 청원루라 했다고 전한다. 이는 척화론을 주장한 김상헌의 절의를 맑을 청(淸) 자와 멀 원(遠) 자의 의미가 같아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그러나 청원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명문 「애련설(愛蓮說)」의 한 구절인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온 것으로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래 영남 지역을 비롯한 조선 사대부들의 누정 명칭은 이처럼 고전 문학이나 유학적 덕목에서 따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자의 고고한 풍모와 은거하는 선비의 맑은 기상을 연꽃의 향기에 빗대어 ‘맑음(淸)이 멀리(遠) 퍼지는 누각’이라는 본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듯하다.
당호 청원루는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의 한 구절인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온 것으로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좌·우익사는 중층으로 꾸미고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조성한 후 단층으로 앉힌 다락집 형상으로 독특한 ‘ㄷ’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다. 몸채에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 툇간에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은 2단으로 구획하였는데 앞쪽을 2자 정도 폭으로 한 단 낮게 하고, 뒤쪽을 덧붙여 전체적으로는 마루를 2단으로 구성시킨 점이 독특하다. 따라서 몸채와 좌우익사를 중층과 단층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건물을 구성한 점이 돋보이는 누각이다.
청원루는 본래 두 채의 건물로 전체가 41칸이었으나, 1934년 갑술년 홍수로 허물어져 지금은 7칸의 ㄷ자형 누각 한 채만 남아 전한다. 이후 보수한 기록은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지은 청원루 상량문이 남아 있어 18세기 후반에 중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의 청원루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누각의 반듯한 형세와 지붕의 날선 모양이 청음의 충의와 절개를 상징하듯 대단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중층 다락집의 형태로 지은 청원루의 위용은 청음 선생의 충의와 절개를 상징하듯 우뚝하다.
청원루가 자리 잡고 있는 풍산읍 소산리의 옛 이름은 금산촌(金山村)이다. 안동 향토지인 「영가지」에는 “금산촌은 현의 서편 5리에 위치한다. 앞에 큰 들을 놓고 땅이 기름져 온갖 곡식이 잘 된다.[金山村 在縣西五里許 南臨大野 土地沃饒 百穀皆宜]”고 기록하고 있다. 금산촌의 순우리말은 쇠미마이다. 금산(金山)이 쇠금자의 쇠자와 뫼산의 뫼를 뜻하여 쇠미마로 부른 듯하다. 이 금산촌이 소산으로 이름이 바뀐 데에는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풀려 나온 후 소산에 은거하면서 청을 멀리한다는 뜻을 담은 청원루를 중건한 청음 김상헌에 의해서이다. 김상헌은 김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이름을 금산촌이라 하는 것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드는 이름이라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검소하고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씨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하여 소산으로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유래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素耀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고, 소요산의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해서 소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학가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일으킨 정산(井山)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는 기름진 풍산들과 굽이치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밝고 시원스런 풍광을 자랑한다.
청원루를 중건한 김상헌의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교리(校理)·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나,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임을 당할 때 혼인 관계로 인해 한때 파직되었다. 서인(西人)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우두머리로 다시 등용되었다. 대사간·도승지(都承旨)·대사헌·대사성·대제학 등을 거쳐 예조·공조·형조·이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판서로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는데 화의를 극력 반대하고 끝내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고향 소산으로 낙향했다. 그 후 중국 심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 심문에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청나라에 잡혀갈 때 지었다고 하는 시조를 떠올려 본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故國) 산천(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분분(紛紛)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음 김상헌 선생이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갈 때 지은 시를 누각 앞에 세웠다.
청음은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았고, 그 결과로 찾아온 개인의 비극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면서까지 대의명분과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당당히 가시밭길을 걸어간 김상헌의 절개가 한 소절 한 소절 절절하게 다가온다. 적국으로 끌려가는 마당에도 나라를 향한 사랑을 숨기지 않고, 흔들리는 감정을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게 표현해 낸 이 시조를 읊으면, 삼각산과 한강을 바라보며 눈물 흘렸을 노신하의 붉은 마음이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지조(志操)란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것이다."는 선생의 마음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 준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으로 『청음집(淸陰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청음이 소산에 낙향하여 김번의 집터에서 1637년부터 1640년까지 지내면서 이 집을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의 청원루라 이름하고 현판을 써서 달았다. 이때 세 손자가 따라와서 이곳에서 글을 배웠는데 첫째는 공조참판(工曹參判) 김수증(金壽增), 둘째는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 셋째는 역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다.
청원루 좌익사
지금의 청원루는 마을 한가운데 있고 주변에 큰 양옥들도 들어 서 있어 경관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지은 청원루 상량문에 의거하여 옛 흔적을 찾아보면, 상량문 중에는 몇 수의 시가 있는데, 그 시들은 청원루 동서남북 상하의 경관에 붙여 청음의 충절과 학문을 권장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쪽은 붉은 해가 뜨는 광경으로 청음의 충절을 비유하였고, 남쪽은 화천의 푸르름으로 꺾이지 않는 절개를 비유하였고, 서쪽은 정산(井山)의 소나무와 청음의 절개를 비유하였으며, 북쪽은 북극성을 들어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청나라를 배척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위쪽은 화봉(花峰)을 붓과 연적으로 비유하여 학문에 힘쓸 것을 말하고, 아래쪽은 소산촌 학동들의 모습을 들어 옛 가르침의 의미를 그려내고 있다.
소산마을은 안동김씨(安東金氏)가 400여 년을 세거(世居)해 온 씨족마을이다. 안동김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안동김씨(後安東金氏·新安東金氏)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銀說)을 시조로 하는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上洛金氏)로 구분한다. 소산마을에는 청원루(淸遠樓), 삼구정(三龜亭), 안동김씨종택(安東金氏宗宅·養素堂), 선안동김씨종택(先安東金氏宗宅·三素齋), 묵재고택(黙齋古宅), 동야고택(東埜古宅), 비안공구택(比安公舊宅·敦素堂) 등의 문화유산이 전하고 있다.
누각의 마루는 2단으로 구획하였는데 앞쪽을 2자 정도 폭으로 한 단 낮게 하고, 뒤쪽을 덧붙여 전체적으로는 마루를 2단으로 구성시킨 점이 독특하다.
김상헌이 안동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7년이다. 체류한 시기는 두 차례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1618년(광해 10)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해야 한다는 북인 정권의 혼정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어머니 이 부인을 모시고 풍산으로 낙향하여 1621년(광해 13)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가기까지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청원루에에 기거하면서 삼구정이나 주변의 경치나 인물들을 탐방한 것으로 확인된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고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는 병든 몸으로 하직 인사를 고하고 마침내 정축년인 1637년(인조 15) 2월 7일 풍산으로 낙향했다. 김상헌의 손자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화산기(花山記)」에 의하면 김상헌은 1638년(인조 16) 2칸의 작은 집을 짓고 방 안에는 ‘만석산방(萬石山房)’이라는 당호를 걸고, 방 밖에는 ‘목석거(木石居)’라는 당호를 걸었다. 김상헌은 이곳에서 느낀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다.
石室先生一角巾 석실 선생 머리 위에 각건을 쓰고서
暮年猿鶴與爲群 노년에 원숭이와 학과 함께 살아가네
秋風落葉無行跡 가을 바람에 낙엽 지고 인적 하나 없는데
獨上中臺臥白雲 홀로 중대사에 올라 백운루에 눕네
김상헌은 1640년(인조 18) 12월 심양으로 압송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2년 9개월간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에 김상헌은 북벌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은거 생활을 지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청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시간이었다. 김상헌은 1640년(인조 18) 12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6년간 억류되어 있으면서 북벌에 대한 집념을 더욱더 확고히 한다. 그리고 심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실천 방안을 모색한다. 이런 그의 북벌사상은 효종의 국가통치이념과 맞물려 한층 더 급물살을 타게 되지만, 북벌의 꿈을 이루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청원루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서 걸었다.
청원루를 답사하고 돌아서니 빛바랜 단청 사이로 여전한 바람의 길이 흐르고, 기둥마다 새겨진 깊은 나이테는 그날의 고요를 기억하고 있다.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이름처럼 청원(淸遠)의 처마 끝은 하늘의 가장자리를 가만히 건드리며 지나간 세월을 묵묵히 품어 안는다.
이끼 낀 기와 위로 떨어지는 햇살마다 시간은 멈춘 듯, 혹은 흐르는 듯, 옛 선비의 곧은 숨결을 청해 듣누나. 세상의 소음은 이 누각 문턱을 넘지 못하고, 오직 먼 산의 능선과 맑은 바람의 노래만이 가득하니, 내 마음에 묻은 먼지도 어느새 저 멀리 씻겨 가네. / 2026. 6. 27 청원루에서 필자
다른 방향에서 본 청원루 위로 하늘빛이 곱다.
동야고택, 청원루 상량문을 지은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의 집이다.
안동김씨종택, 양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