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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10일 토요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제1독서 : 2코린 9,6ㄴ-10
복 음 : 요한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밀알은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밀알이 없어져야 싹이 트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려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있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참 어리석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은 죽을지 말지 생각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씨앗은 죽고 다음 세대의 열매가 자랍니다.
또 그렇게 자라난 열매들은 누군가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다시 씨앗이 되어 그다음 세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본성에 따라 자연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뜻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어서,
때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길을 스스로 갑니다.
“자기 목숨”(요한 12,25) 때문입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언덕이 멀리 있는 큰 산보다 크게 보이는 법이지요.
그래서 잠시 누릴 수 있는 눈앞의 이익, 편안함,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하고 밀알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합니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택하는 것은 사실은 어리석음입니다.
밀알에게 배우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시대를 평가한다면, ‘러닝머신 같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움직이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서 그냥 서버리면 뒤처지면서 러닝머신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뛰면 어떨까요? 그냥 그 제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이처럼 쉬면 뒤처질까 봐 멈추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봤자
겨우 제자리 정도인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요?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의 법칙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건국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이 번아웃을 겪고 있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사제조차 뒤처짐을 느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시대입니다.
다들 바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나 바쁜지 초등학생도 “너무 바빠요.”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제 습관적으로 바쁘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제 생각은 자기만의 속도로 느리더라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기란 너무나 힘듭니다.
바쁘게,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서
단단하지 못한 채 앞으로만 힘들게 가고 있습니다.
책을 남들보다 조금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글자 많은 책을 보면
“와! 글씨가 너무 많아.”라면서 책 읽는 것을 포기했던 저였습니다.
이런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뒤, 책을 통해 저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지식이 팍팍 들어오면서 단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30년 넘게 꾸준히 책을 읽다 보니, 이제야 조금씩 단단해지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단한 믿음이 묵주기도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미사 한 번, 피정 한 번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을 따르는 길을 향할 때,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성 라우린세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성인께서는 부제로 세상에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 하면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런데 단번에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꾸준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단단해질 수 있었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교회가 찬란히 발전할 수 있었던 역할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단번에 믿음이 생기길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때만 가능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태12,24).
이는 ‘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입니다.’
물론,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 능력, 재능, 물질,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한 알의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으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 입니다(홍승모).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몰래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고
믿음을 증언하며 죽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 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않고 끝까지 항구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하시면서,
당신의 때가 왔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죽음으로 밀어붙이는 그 힘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죽을 수 있는 힘’,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에서 셈족의 언어 관습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서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바로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곧 따라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성소의 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지 않고 여전히 ‘따라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집과 가족을 떠나는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아직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고 알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형제를 존중하게 하소서!
형제를 섬김으로 당신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3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끌려가 조롱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죽겠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는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였지,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확신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박해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제자들이 원한 것은 수난과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원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걸으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중풍 병자를 걷게 하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으로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난과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제 아들들을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둥지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밀알은 어쩌면 우리가 머물고 싶어 하는 둥지일 수 있습니다.
그 둥지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먹이가 있습니다.
그 먹이에 취해서 우리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자들을 다그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재물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둥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둥지를 벗어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의 바람이 불고, 고통의 암초가 다가올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며 힘차게 날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없는 성공을 경계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희 피정 센터는 바야흐로 대목입니다.
이박삼일 일정으로 아이들이 나가고 들어오고, 적막하던 어촌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목청껏 소리 지르면서 신나게 뛰놀고,
야무지게도 잘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다들 흐뭇해합니다.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동료 사제와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면서,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냐?”
“젊을 때 공부 열심히 안 한 결과!”라는 둥 농담을 주고받으며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뭐든 거저 되는 것은 없다는 것,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행사가 성공리에 치러졌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조용히 땅에 떨어져 썩고 죽는 밀알 영성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퍼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 역시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 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과 생명의 逆說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258년 8월 10일에 순교한
로마교회의 부제 라우렌시오 성인의 천국 입성을 경축하는 날이다.
라우렌시오 성인만큼 복잡한 명함을 가진 성인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스페인을 비롯하여 로마, 뉘른베르크, 부퍼탈 등 수많은 도시들과
가난한 사람, 과부, 청소부, 세탁인, 요리사, 유리세공업자, 양조주, 소방수,
도서사서, 문헌 수집가, 학생, 대학생, 화상환자, 눈병환자, 좌골신경통 환자, 피부병 환자,
페스트, 열병환자, 연옥 불로 고통받는 영혼 등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330년경 로마에 라우렌시오 성당이 세워진 이래로
수많은 성당이 성인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시오는 성 식스토 2세 교황(257-258) 시절에
로마교회의 재정과 사회복지를 담당하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일차적으로 교황이 감옥에 갇혔다.
그때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교황과 함께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3일 후에 그도 자기를 따라오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모든 재산을 제국에 헌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황제는 교회가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저녁 예식에 금 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다.
또 너희의 스승인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야 한다.’고 했고,
너희의 神은 돈을 만들어 내지 않았으며,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나의 제국에 바쳐라.”
황제의 말을 듣고 라우렌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당신에게 정말 가치있는 것을 다 갖다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3일간의 말미를 주시오.”
이에 3일간의 말미를 받은 부제는 곧 3일 후
수많은 장님,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황제 앞에서 한 줄로 세워놓고
황제 앞에 한 줄로 세워놓고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하고 간단히 말했다.
화가 치만 황제는 당장 라우렌시오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석쇠 위에 쇠줄로 묶어놓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은 성인은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알고 황제와 형리들에게 놀랍게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로마제국의 회개를 빌며 숨을 거두었다.
형리들 중 하나가 성인의 믿음과 인내심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성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2,12-20)과
최후의 만찬(13-17장) 사이에 위치한 내용으로서
생명의 逆說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생명의 역설이란,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 인간에겐 아주 생소한 이론이다.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집착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목숨과 건강을 부지하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은 다 취해야 하는데 말이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가장 좋은 예는 바로 밀알의 모범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24절)
밀알 하나가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밀알이 죽는 이유가 많은 열매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의 시간이 곧 예수께는 영광과 새 생명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의 역설은 곧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의 추종법칙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와 준비를 하였을 때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을 것이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있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