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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가난과 애도
1321년 단테의 작품 ‘신곡’이 나왔습니다. 단테는 연인인 베아트리체가 24세에 죽자, ‘신곡’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베아트리체를 이상적인 여인으로 그리고 연옥에서 단테를 맞이하고 여행을 안내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방랑과 고통과 괴로움과 삶의 고난 속에서 탄생한 ‘신곡’은 영원한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단테의 열정을 담고 있습니다. ‘신곡’ 중 마지막이 33곡인데 142-145절이 마지막 절입니다. “나는 성스러운 물결에서 돌아왔고, 새로운 잎사귀로 새로 태어난 나무처럼 순수하게 다시 태어났으니 별들에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간(연옥, 죽음의 세계)을 여행하는 사람을 그린 것이 “신곡”입니다.
보고 못 보고는 수없이 눈을 깜박거릴 때의 몸의 경험입니다. 긴 인생도 눈 뜨고 감고의 순간으로 아주 짧은 순간입니다.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인연을 만납니다. 우리가 서로 보는 시간이 성탄과 부활 사이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요한16:16).”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몰랐다가 예수의 부재가 주는 고통으로 인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놀라운 기쁨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빕니다.
제게 에덴은 큰 내가 흐르는 천안의 남관리입니다. 여름이면 큰 내에서 멱을 감고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아 햇볕에 말려 오후 늦게 그 말린 고기를 집으로 가져옵니다. 저녁준비를 하시는 어머니가 그 물고기를 요리하셔서 저녁의 아버지 밥상에 올려 식구들이 밥상주위에 앉아 함께 밥을 먹습니다. 아버지께서 잘 잡수시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뻤습니다. 부엌에서 쓸 나무들은 퇴봉산에서 지게와 낫을 가지고 가서 해 오곤 했습니다. 밥 지을 나무를 하고 방을 따스하게 할 나무를 하는 것이 참으로 기뻤습니다. 물론 산 주인이 나타나면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산지기가 사라지면 다시 나무를 해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땔나무를 한짐 지게로 해 가지고 오는 날과 물고기를 잡은 날이면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지셨고 아버지가 좋아하셨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동생과 제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뻤습니다. 저녁때 식구들이 모두 모여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식구들은 가난하기에 서로에게 부족한 것이 보이면 서로를 메꾸어 주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자녀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게 아버지는 하느님이셨기에 교회에 나가 하느님을 믿는 데에는 어떤 장애물이 없었고 아주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사랑을 하면서 살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안방에서 오남매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기억이 제게는 가장 복된 천국으로 기억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식구들과 한방에서 자고 살고 밥을 잡수시는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느님 아버지는 저희들과 한 식구가 되셔서 살아 움직이신다는 것이 제게는 아주 자연스운 것입니다.
저는 방에 앉으신 아버지의 양반 다리 위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품 안에 앉으면 제 머리에 아버지의 턱수염이 닿아 따가워서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습니다. 머리가 따가워도 그 아버지 품이 따스해서 동생들과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버지에게로 빨리 달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이 아버지의 품을 차지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품 안은 우리 모두의 자리였습니다. 아버지는 누나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지금 그 누나는 제천 곰바위로 귀향하여 동네 어른들과 함께 사랑으로만 사십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들 모두가 하느님의 품안이 아버지의 품과 같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기도 소리가 제게는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셔서 교회에 가는 주일 아침에는 식구들이 신발을 신고 나가기 편하게 가지런히 놓아 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제가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분으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살면 하느님은 우리 가족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이사9:1).”라고 믿었습니다. 무진장한 힘을 가지신 하느님이 우리 가족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생각만 해도 저는 기뻤습니다. 그래서 교회 가는 길은 늘 기쁜 길이었습니다. 교회 가는 길이 의무적이나 숙제를 하는 그런 책임을 완수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품 안에 안으시는 하느님은 따뜻한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러니 교회 가는 길이 기뻤던 것입니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이 교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시간일수록 하느님을 찾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새벽에 어머니가 쌀독 밑바닥의 쌀을 바가지에 담고자 쌀독 바닥을 바가지로 긁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이 소리를 들으셨을까? 이 소리를 들으셨다면 아버지의 속은 얼마나 쓰리셨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쌀독에 쌀을 채우지 못하는 아들인 제가 어리고 못났다는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빨리 커서 쌀독에 쌀을 채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도 빨리 교회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를 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들어주신다고 할머니께서 자주 제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예배당에 가는 것이 참으로 기뻤습니다. 쌀독에 바가지로 긁는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이 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빨리 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못할 일이 없으신 힘이 크신 하느님, 저를 빨리 크게 해 주셔요. 장남인 제가 쌀독에 쌀을 채워야 해요. 예수님 이름으로 빌어요. 아멘.” 나이가 든 지금도 쌀독에 쌀이 항상 채워져 있으면 제 마음이 놓입니다. 이는 지난 시절의 결핍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쌀이 쌀독 속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살로 가득 채운 쌀독 같은 사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사제로부터 성령을 받아 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시멘트 벽돌을 어른들이 찍어 만들고 나르고 나면 그 벽돌에 물을 주는 일을 초등학교 방과 후에 동무들과 하곤 했습니다. 물을 주는 일 덕분에 돈이 생기면 그 돈으로 공책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게 돈을 주는 사장이 제 아버지께 ‘일한 값으로 공책을 산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께 참으로 창피했었습니다. 공책을 산 것을 아버지가 모르시길 바랬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제 공책을 사 주시지 못해 슬퍼하실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아버지 모르게 일하면서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스케끼를 사먹지 않고 공책을 산 제가 대견하다고 사장은 아버지께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가 파한 후에 집으로 돌아올 때 큰길로 가지 않고 조금 먼 뚝방길로 가게 되면 주머니칼로 쑥을 뜯을 수가 있었습니다. 동무들이 보이지 않는 뚝방길로 가면서 쑥을 뜯어 집에 가지고 가면 어머니께서 쑥버무리를 해 주셔서 아버지께 드리고 저와 동생들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똑방길에 많은 쑥과 나물들을 주셨고 제 주머니칼로 그 나물들을 캐서 어머니께 드리면 간식으로 먹기도 하고 반찬으로 먹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제 동생이 저보다 그런 일을 더 잘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를 잘 모시는데 저보다도 제 아우가 더 잘 모십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창세3:20).” 교복이 없거든 지금 입는 옷을 입고 다녀도 충분할 터인데 꼭 교복을 입어야만 된다는 학교가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대다수 학생들이 엘리트 고급옷감으로 교복을 했는데 저는 싼값의 데드롱이라는 옷감으로 교복을 만들었습니다. 엘리트교복은 확실한 검정색이라면 데드롱 교복은 흰색처럼 보이는 검정교복이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공부만 하면 학생이지 좋은 교복과 좋지 않은 교복으로 차별하는 것이 뭔가 잘못된 배움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중학교 입학 때 그 옷을 크게 해서 고등학교 일학년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옷 걱정은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교회 예복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전례생활에 맞는 예복은 정성껏 대하려고는 합니다. 때가 되면 그 직위에 맞게 하느님이 적절한 옷을 입혀 주신다는 것으로 겉옷에 그렇게 집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입어할 옷과 직위는 하느님이 이미 정해 놓아 주셨으니 우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맡겨주신 일에 매진하면 될 일입니다. 전적으로 하느님께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늘 생각한 것입니다.
할머니의 땅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세운 교회가 새벽별교회입니다. 학교에 가면 새벽별 보기운동이라 하여 북한을 비난하는 교육을 받고 주일이나 밤에는 새벽별교회에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부조화로 산 초등학교의 시절이었습니다. 큰할머니가 서울의 중심에 있는 궁전교회를 다니셨고 할머니가 그분의 영향을 받아 감리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교회 종은 큰할머니 권사가 봉헌하셨고 그 교회 종을 치는 이가 바로 할머니 권사였고 큰어머니권사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와 큰어머니의 종소리로 학교 갈 자녀를 위해 밥을 짖는다고들 하셨습니다. 방학이 되면 서울 만리현교회를 다녔습니다. 천안고등학교 학생인 장전도사가 긴 뱀고개를 넘어와서 새벽별교회의 주일학교를 지도하셨는데 그분이 그립습니다.
이른 아침 고등학교 등굣길에 교회가 있어 그 교회에 잠깐 들러 새벽기도를 바치곤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에도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예수의 부재가 큰 고통인 것을 알기 때문에 늘 예수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짧은 고통과 긴 기쁨으로 사는 이가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새벽 바람은 우리의 삶을 냉철하게 보게 하여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신학교에서의 조도를 좋아한 이유가 새벽기도를 익숙하게 했던 경험 때문입니다. 특히 조도에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가 입이 풀려서 하느님께 찬미를 바치는 “즈가리아 송가(루가1:68-79)”를 성령에 젖어 노래로 부릅니다.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루가1:78-79).”
저는 해금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해금소리가 너무 구슬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만, 제 고달픈 인생을 표현할 수 있다면 해금소리가 딱 맞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해금연주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해금을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연습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연습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에 해금연주와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때가 옵니다. 해금을 연주하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와 해금 줄인 유현과 중현이 같이 놀게 되는 때를 만나면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고등학교 일학년 가을에 국립극장에서 해금을 연주한 기억이 납니다. 자신과 악기가 하나가 된다는 느낌은 자신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 아마도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고 성령을 만나는 그 순간이 이때와 같다고 여깁니다. 신앙의 참맛을 느낄 때가 해금과 내 몸이 하나가 될 때와 같으리라 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신앙경험이 우리를 평생 하느님께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내맡기게 됩니다.
대학시절은 어렵게 지냈습니다. “괴로운 그 시간이 우리의 영혼에게는 좋은 양식을 취한다.”는 영국 시인인 웰리엄 워드워즈의 “서곡”이라는 시집이 생각났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우리를 경건한 자리에 서게 하는 시입니다. 시위하다가 지친 몸으로 같이 자취하는 친구 김광섭을 따라 성서침례교회를 다녔는데 말씀 중심이어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네덜란드에 계신 임제임스로 인해 성경공부를 깊게 하게 된 것(UBF)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성령의 활수를 최고로 마신 때가 이 때입니다. 아무리 마셔도 배부르지 않을 달콤한 물이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를 매일 마신다면 건강해져서 육체의 한계선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롭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 산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마시는 물이 에덴동산에서 오는 물인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동산에서 나와 하느님이 계시는 제단을 거쳐서 온 물인지를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물이 성령이고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이시기에 마시면 좋은 사람이 되고 마시면 우리는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망자는 명계로 가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강물을 마신 망자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전생의 번뇌를 잊게 된다고 합니다. 레테의 강은 죄의 기억을 씻어내는 망각의 강입니다. 마텔다는 베아트리체의 부탁을 받고 단테에게 에우노에의 강물을 마시게 합니다. 에우노에 Eunoe는 ‘좋은 기억’을 뜻하는데 에우노에 강물을 마시면서 모든 선행의 기억을 더 강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두 강물은 순서에 따라 마셔야만 효력이 나타납니다. 우선 레테 강물을 마셔서 모든 죄를 잊게 한 다음 에우노에 강물을 마셔서 영혼의 모든 선을 깨웁니다. 에우노에 강물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의 비유입니다. 그렇게 하늘로 오르는 길은 내 속의 뭔가는 내려놓아야만 허락을 받는 길입니다. 악마를 내려놓아야 하늘로 오르게 됩니다. 악마는 하늘로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막아서 하늘에 오르지 못하는게 아니라 악 그 자체가 의지를 사로잡아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7곡 57). 늘 나와 함께 한 악마가 내게서 떠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 귀하게 모셔져 있으면 악마는 힘을 잃게 되어 사라지고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하늘로 오르는 길에 설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난 할머니는 기쁜 찬송이 나오면 일어나셔서 자주 춤을 추셨습니다. 아리랑 같은 춤을 추면서 하느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춤이 춰지더라는 할머니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춤추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질곡을 뒤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주신 힘으로 가능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찬송으로 레테의 강물을 마신 할머니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참된 위로를 받았고 에우노에 강물을 마셨기에 춤을 추지 않을 수 없었던 권사 할머니십니다. 지금은 할머니께서 별들에 오르셨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시고 저를 보시고 웃으실 것으로 믿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사는 형이 산소에 묻힌 조카를 편하게 찾아가라고 산길을 다듬는 동생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큰조카가 묻혀있는 산소의 앞자리에 두 평 밭을 일구어 토마토와 배추와 오이를 키우는 동생이 만가인 레퀴엠의 흐름으로 형을 위로하는 듯합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형에게 두 평 밭에서 나는 채소로 조카의 죽음에 대해 연도煉禱를 바치는 속에서 만가挽歌 Requiem를 들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이 보지 못하는 정도의 거리에서 형을 위로하는 동생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다니 저 스스로 많이 놀란 시간이었습니다. 형을 생각하는 동생의 마음에 고마움이 뒤늦게 밀려왔습니다. 형이 런던으로 가면 딸 보리테레사가 많이 외로울 것이라는 동생의 마음 씀씀이가 저보다 더 깊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펜바흐 자클린의 눈물”을 첼로연주로 듣고, “모자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2번 아다지오”를 듣곤 합니다. 상실은 늘 인간에게 있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바닷가의 맨체스터 Manchester by the Sea.”의 영화음악을 자주 듣는데 아이들을 다 잃고 난 아버지의 삶을 듣게 합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워포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아들 제레미의 이름을 단 나무가 학생회관 앞에 있습니다. 그 나무를 수없이 떠올립니다. 영국 스코틀란드의 샌 앤드류대학에서 철학공부를 하며 지낸 학생 기숙사를 수없이 쳐다보았습니다. 아들과 함께 지낸 노스카롤라이나 주의 클린톤의 새뮤얼이 하늘로 갔고, 아들을 돌본 미국 엄마인 킴이 하늘로 가셨습니다. 욜딩초등학교 앞에 사는 마이클이 아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집 뒤의 공원에서 별이 된 마이클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내 허성우막달라마리아 종신부제가 쓴 “얼마든지 오래 울 수 있다(심지출판사).”는 시집을 냈습니다. 제레미 동욱에 대한 어머니의 심정이 담긴 이 시집으로 애도가 필요한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애도는 상실을 슬퍼하는 자리이고 산 사람이 먼저 간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먼저 가신 영혼을 생각하고 기억하기에 먼저 하늘로 가신 분들로 인해 우리가 의존하여 산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먼저 가신 분이 계셨기에 지금 내가 사는 것이라는 확인증을 받는 자리가 애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먼저 가신 분 앞에서는 겸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상실의 삶에 기대어 얻게 됩니다. 그렇게 지난 일을 잊지 않는 애도의 자리를 가질 때 자신 앞에 펼쳐지는 내일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일은 그렇게 먼저 가신 분과 참된 연결을 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제가 애써서 얻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성찬례라는 미사에서 늘 예수의 돌아가심과 그 돌아가심에 우리가 의탁하는 겸허한 삶으로 삶을 재배치하게 합니다. 감사성찬례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의 돌아가심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는 깊은 신심을 가지신 교우가 큰 위로를 줍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다짐으로 동생이 일궈놓은 두 평 밭 그리고 동생의 손길이 스민 삽을 오래도록 쳐다보았습니다. 먼저 하늘로 가신 분들이 산 자들을 다독이고 산 자들이 먼저 가신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앞으로 삶을 이어갈 힘을 받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안식이 주어지고 이 세상에서는 살 힘을 받게 됩니다. 죽음의 고통을 알게 하여 산 사람으로 하여금 겸허한 삶으로 안내해 주는 성당의 제단 아래에서 하느님께 구원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를 바칩니다. “믿음을 모르는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 먼저 가신 영혼들을 하느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감사성찬례를 마친 다음 예복실에서 사제는 복사들과 함께 늘 이 기도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기념함으로 이해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하느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늘로 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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