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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재웅, 박찬호 선수의 공주고 시절은 지나고... 제 개인적인 여담과 함께, 공주고의 마지막 전국대회 우승시즌인 1992년 시즌을 돌아보겠습니다.
공주고에 새로 부임한 서종호 감독은 강력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수단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전 감독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쳐 선수단에 끌려갔지만 새로 부임한 서종호 감독은 공주고 선배이기도 하거니와, 선수단에 끌려갔다가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강한 신념이 있어서인지 학부형이 선수 기용이나 이런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아예 그 선수를 빼는 한이 있어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으며, 경기 중에라도 선수들의 잘못된 플레이가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선수들을 혼냈습니다.
또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절대로 선수들을 수도권 대학으로 보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것은 원광대 코치 시절부터 당해 왔던 설움 때문에 그랬을 거라 추측합니다. 부산권의 우수 선수들이 동아대나 경성대로 가고, 경북권의 우수선수들이 계명대나 영남대에 진학하고 충청권의 우수선수들이 단국대에 진학하고 호남권의 우수선수들이 원광대에 진학하고 했다면 분명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대학 야구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라는 대학야구 빅3에 의해 전부 수도권으로 우수선수들이 이탈하면서 지방의 대학야구는 심각한 타격을 맞게 됩니다. 이런 문제점을 현장에서 지켜본 때문인지 공주고 서종호 감독은 우수선수들을 대거 경성대나 원광대학교로 보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2학년 말에 빙그레와 가계약이 되어 있던 노장진을 규정미비를 이유로 원광대학교 보내게 됩니다. 1992년 당시 원광대학교는 전국대회에서 17연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고 있어서 야수였던 길배진을 투수로 돌리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에 서종호 감독의 결단은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비록 노장진이 빙그레에 입단하긴 했지만 그 해에 군산상고 출신의 오상민이 원광대로 진학하고 그 다음 해에 전주고 에이스 조진호가 원광대에 진학하면서 원광대는 그 후로 나름대로 투수진을 알차게 구성하긴 합니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서종호 감독이 강한 카리스마로 팀을 장악해 가면서 공주고 선수들은 점점 기량이 향상되기 시작하고 전국무대에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됩니다.
운명의 대통령배 예선... 공주고로서는 본선보다 힘든 지역예선이었기에 서종호 감독은 판정에 강하게 어필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선수들을 다독여 나갑니다. 그러나 노장진과 이성갑의 맞대결에서 심판 판정을 등에 업은 천안북일고가 앞서갔으나 경기 후반 생각지도 않게 1학년이던 왼손잡이 우익수 이종원이 만루홈런을 작렬시키며 공주고를 대통령배 본선에 올려 놓게 됩니다.
1회전을 무난히 통과한 공주고는 8강전에서 동향의 라이벌 대전고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공주고는 이전경기에서 완투한 노장진을 내보내지 않고 중견수 김기중을 선발로 투입합니다. 대전고등학교도 이종민, 장재호, 김병준, 오창선 등 투수들을 아끼면서 1루수인 노정근을 마운드에 올리게 됩니다. 당시 공주고와 대전고는 모두 청소년대표 중견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바로 공주고의 김기중과 대전고의 최만호입니다. 두 선수는 공통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에, 통통하면서 발이 매우 빠르고 어깨가 강하며 덩치에 맞지 않게 장타력이 있었다는 점이죠. 두 선수 모두 3번타자로 출장하는데 승부는 1회에 갈리게 됩니다.
공주고는 대전고 선발 노정근을 상대로 1회에 3번 김기중 4번 남기훈 5번 정회선이 3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대전고의 사기를 꺾어 놓습니다. 이어 김기중이 선발투수로 호투하고 김기중 대신 중견수에 들어간 만년 후보에 가까웠던 박종익도 좋은 플레이를 선보이며 1회 홈런 세방으로 공주고는 대전고를 쉽게 제압하며 4강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어 4강전에서 공주고는 전년도 공주고에 화랑기에서 일격을 가했던 부산고를 맞게 됩니다. 부산고는 당시 손민한 주형광의 원투펀치에 진갑용이라는 특급포수와 문재성, 임근민 등 장타력이 있는 타자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매우 좋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이스 손민한이 개막전에서 상대팀 1번타자가 받아친 공을 정강이에 맞고 골절을 당하는 바람에 바로 주형광이 전경기를 던져 4강까지 진출했습니다. 공주고는 이상하게 이 경기에서 주형광에게 전혀 힘을 쓰지 못한데다, 노장진이 상대 5번타자였던 주형광에게 홈런까지 얻어맞으며 5:0으로 패해 4강 진출에 만족하게 됩니다.
부산고는 결승전에서도 신일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형광의 그해 전국대회 18승 1패의 신화가 시작됩니다. 첫 대회에서 우승가능성을 보인 공주고는 청룡기에서 전략을 수정하게 됩니다.. 뭐 전략이랄 건 없지만 모든 경기를 노장진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대통령배에서 오히려 한 경기를 쉬고 던진게 화근이었는지 경기감각을 찾지 못하던 노장진은 청룡기 1회전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지역예선에서는 노장진을 앞세워 먼저 1승을 기록한 공주고는 상대팀이 2회전을 연기하기 위해 운동장에 물을 많이 뿌려 논처럼 만들어 버려 하루 순연된 경기에서 생각지도 않게 2년생 투수 김재성이 호투를 펼치며 다시 한번 청룡기에 진출하게 됩니다.
청룡기 1회전에서 덕수상고를 연장 끝에 5:3으로 힘겹게 제압한 공주고는 2회전에서 유신고를 상대로 피말리는 투수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상대 투수가 바로 현재 한화에도 있는 최영필이었습니다. 당시 고교야구 빅3라고 하면 공주고의 노장진과 광주진홍고의 이대진, 그리고 유신고의 최영필이 꼽혔습니다. 당시만 해도 손민한은 이 선수들에 비해 한수 아래로 평가받았었죠.
공주고의 노장진과 유신고의 최영필은 삼진을 각각 20개, 13개씩 잡으며 13회 연장까지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이틑날 서스펜디드 게임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튿날 최영필은 생각지도 않게 공주고의 2년생 왼손 1루수 소종석에게 홈런을 맞으며 6:3으로 주저않게 됩니다. 비록 이튿날은 부진했으나 당시 최영필의 투구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사기가 오른 공주고는 다음경기인 마산고전에서도 노장진의 10회 연장 완투를 앞세워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노장진은 이 대회에서 전경기를 혼자 완투하며 무려 45이닝을 던졌기에 결승전에 진출했어도 상당히 우려가 많았습니다. 특히나 결승전 상대는 왼손강타자가 많았던 선린상고인데 선린상고에는 좌완에이스 심영호와 우완 언더핸드 이경일이 버티고 있어서 투수진의 분담도 비교적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공주고는 선린상고 좌완 심영호를 나름대로 잘 공략해서 4점을 뽑아냈으나, 선린상고는 공주고 에이스 노장진에게 볼넷 두개를 얻어냈을 뿐 삼진을 무려 15개를 당하며 전국대회 56년만에 노히트노런의 수모를 당하며 패배하게 됩니다. 당시 노장진은 직구 최고 구속이 141킬로미터에 불과했으나 힘을 앞세운 묵직한 직구와 춤추는 듯한 변화구를 던지며 프로야구단에게까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공주고는 홍원기에 이어 3루수를 맡게 된 박면수가 수비가 약한 편이었는데 이 경기에서는 박면수 쪽으로는 아예 공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유격수와 3루수 쪽 깊은 안타성 타구를 날리기도 했으나 공주고 유격수 정회선은 너무나도 쉽게 공을 처리하면서 위기를 넘겼고, 8회에는 좌익선상 안타성 타구를 날렸으나 남기훈 좌익수의 눈부신 호수비로 플라이 처리되며 공주고는 92학번 황금멤버들도 이뤄내지 못한 우승을 일궈냅니다.
경기 후 서종호 감독은 모든 선수들에게 공을 돌리고 특히 노장진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며 이후 경기에서는 노장진을 거의 내보내지 않는 등 앞으로 원광대 에이스가 될 노장진에게 예우를 갖추게 됩니다. 또한 이후부터는 여러 선수들에게 돌려가며 경기에 출전시키는 등 다시 우승을 노려볼만한 전력임에도 이후 경기에서는 선수단을 많이 배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제 추측이지만 서종호 감독은 원광대에서 선수 수급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팀들이 4강 안에 들어서 대학 체육특기자 입학권한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후 서종호 감독은 꽤 오랫동안 공주고의 감독으로 재직하는데, 천안북일고와의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음주한 상태에서 충남야구협회에서 난동을 부리며 지역예선을 천안과 공주가 아닌 제3지역에서 갖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다가 출전정지를 당하기도 하는 등 어려운 감독생활을 하게 됩니다. 후에는 팀을 서울의 경동고로 옮기면서 공주고의 에이스였던 정찬민을 데리고 가서 많은 물의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서종호 감독의 강한 카리스마가 아니었다면 공주고의 그 해 우승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해 공주고의 주력 멤버는 투수 노장진, 이대성과 2학년이던 김재성, 1루수에 훗날 LG에 입단하는 이동우와 2학년 좌타자 소종석, 2루수에는 청소년대표인 송재익, 유격수에는 청소년대표인 정회선, 3루에는 박면수, 포수 양진모, 좌익수 남기훈 중견수 김기중이 고정이었고 우익수 자리에는 장타력을 자랑하는 1학년 좌타자 이종원, 빠른 발을 자랑하던 2학년 좌타자 김기성, 그리고 투타에서 재능을 보인 2학년 김재성이 투입되었으며, 박종익이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조커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해의 공주고 멤버는 훗날 경성대(이대성, 정회선, 남기훈, 김기성, 소종석, 박종익)와 원광대(노장진, 양진모, 김기중, 박면수, 김기성)에 모두 입학하고 이종원 선수만 3년 뒤 홍익대로 입학합니다. 물론 노장진 선수는 알다시피 원광대로 갔다가 팀을 이탈하여 빙그레와 계약을 맺어 연말을 시끄럽게 장식합니다.
1992년은 공주고에 두가지 의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첫째가 공주고 재학생들의 청룡기 우승이고 둘째가 공주고 출신 선수들의 눈부신 약진입니다. 공주고의 에이스였던 신재웅은 1학년때 문동환의 연세대와 맞붙어 9회까지 완투하며 12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1실점의 호투로 무승부를 이끌어내느데, 이 때 유일한 실점이 바로 훗날 한화에 입단하는 권오영(포수)에게 허용한 홈런일 정도로 호투하며 일약 91학번 투수의 계보에서 안희봉을 밀어내고 빅3에 진입하게 됩니다.(문동환, 위재영, 신재웅) 훗날 이 선수들은 모두 거금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게 되죠. 물론 문동환은 현대피닉스에 입단했다가 프로에 진출하긴 하지만요.
또한 한양대에 입학한 박찬호는 4학년 구대성과 장철에 이어 동기생 차명주와 함께 1학년때부터 약진하기 시작하는데, 1학년 가을리그에서 156킬로미터의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거로서의 기본을 다지게 됩니다. 홍원기 선수도 고려대에 입학하자 마자 중심타선에 3루수 자리를 꿰차고 국가대표를 맡게 되고, 한양대에 입학한 오중석 선수는 수비에서 유격수를 놓쳤지만 지명타자로 한양대 4번을 맡으며 공주고등학교 선배인 손차훈 선수가 맡았던 한양대학교 4번 자리를 공주고 출신으로 이어가게 됩니다.
돌이켜 보건대 그 해는 공주 야구에 가장 의미있는 한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참... 또 다른 두 선수를 빠뜨렸군요. 당시 공주고 야부구가 한참 약진을 하던 시점에... 공주고 옆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인 금학초등학교에 다니던 두 형제는 수업이 끝나면 공부는 안하고 매일 공주고에 와서 농구게임을 하다 야구를 보고 또 자기들끼리 투닥거리고 싸우다가 집에 가곤 했는데, 공주고 앞에서 계란을 파시던 이들의 부모님은 둘이 공부보다는 운동을 하는게 낫겠다고 판단하여 공주중동초 야구부로 모두 전학을 보냅니다.
그들이 바로... 훗날 공주고 야구부의 명맥을 프로에서 잇고 있는 SK의 조동화와 삼성의 조동찬이니... 역시 아이들은 꿈을 먹고 자라는 것 같습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자면 현재 공주중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의 연예인이 또다른 비상을 준비중입니다. 그게 누구인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댓글 부탁드립니다. 정답은 조만간 공개하겠습니다.
다음에는 공주고 출신들의 대학과 프로에서의 활약을 중심으로 마지막 1회만 더 이어가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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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 1회가 남았다니 아쉽네요~ 마지막까지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연예인?? 글쎄...누굴까요 ㅋㅋ 조동찬, 조동화 선수 중 한명이라도 한화가 지명했었다면 좋았을텐데..한화에 발빠르면서 수비안정된 외야수가 없는 현재의 현실에서..
조동찬 조동화 선수에 대한 이야기...진짜 한 편의 영화처럼 영상이 떠올려지는건 저 뿐인가요??? 진짜 이야기 재밌게 봤습니다..^^ 근데.. 봉팔이님께서는 어찌 그렇게 고등학교 야구에 관심이 많으셨는지..혹 프로야구 출범 이전이라면 조금은 이해가겠지만... 90년대초반이면.. 프로야구가 한창 인기있을 시기고..고등학교 야구는 프로에 가려져 조금씩 흥미를 잃어가던 시대로 기억되는데... 고등학교 야구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혹 부천고에 대한 이야기는 없나요?? ^^ 제가 부천고 출신이어서 90년대 부천고 이야기가 있음 듣고 싶습니다.. 제 기억의 부천고 야구는 97년인가 전국대회 3윈가했던게 최고로
기억하는데..^^;; 저 고등학교 때 98~00년도 사이에는 4강인가 한 번 올라갔던 기억이...;; 처음으로 프로에서 주목받는 히어로즈의 장영석 선수에 대해서 기대가 아주 많습니다..^^
완전 잼있게 잘 읽었어요~ ^^ 감사해요~
사실 많이 조심스럽게 쓴다는 글인데도, 어쩔 수 없이 감정상하는 분이 계시는군요. 지금은... 솔직히 공주고에 유리하게 판정을 해도 아마 천안북일을 이기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천안북일고는 80년대까지 전국을 호령하다 90년대 들어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런 좋지 못한 방법까지 동원했던 거라 지금은 이해를 합니다. 물론 공주고가 91년 본선에 처음부터 진출했다고 해도 우승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외부의 문제보다는 당시 내부의 단합이 전혀 안되던 시기니까요...
와 역시 프로에 있는 선수들은 학생시절에 다들 한가닥 하던 선수들이군요. ㅋㅋㅋ
봉팔이님은 아마도 지역에서 공주고 야구 후원하시는 분...ㅡ-ㅡ;;
사실 후원하고 싶은 생각은 강하지만... 제 형편에 야구부를 후원할만하지가 못합니다. 부끄럽게도...
박시후 동생인것같다.. 현대에 입단했었다는데.. 그사람밖에없을듯..
박시후요? 아닙니다. 장시우(본명 장성찬)는 고교시절에 야구를 그만두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기 때문에 프로에 지명될 수가 없었습니다.
노노.. 네이버에서 박시후 치면.. 가족관계나오던데.. 현대선수였던 것같음..
참... 장시우 씨는 우리 동네 삽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때부터 유니폼 입고 다니다가 저 군대갔다 전역한 후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는데 현대에 지명될 수도 없거니와, 그는 이미 결혼한 누나가 하나 있을 뿐입니다. 박시후와는 아무 상관없는 장시우입니다.
조동찬, 조동화.. 현재 한화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선수들이군요. 김민재의 백업 유격수, 수비 되고 컨택있고 발빠른 중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