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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마감할 시간이 되었네요.
경성대에 진학한 신재웅 선수는 1학년 때의 호투를 발판으로 김경환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떠오릅니다. 먼 부산에까지 가서 그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남들 쉴 때 운동하는 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하루는 저녁에 선수들이 휴식을 취할 때 운동장을 달리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장순조 경성대 감독이 약을 사들고 와서 그 옆에서 울기까지 했답니다.
2학년이 되던 해, 그는 생애 처음으로 위재영과 함께 국가대표에 선발되며 좋은 활약을 펼칩니다. 아울러 그 해에 천마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그의 가치는 거칠 줄 모르고 상승합니다. 같은 학년에 단국대에서 국가대표 5번타자로 활동하던 심성보에 이어한화의 레이더에 본격적으로 그가 잡힌 것도 이 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심성보 선수는 국가대표 초년생 시절이던 단국대 1학년때, 국가대표 팀 훈련에 늦어서 선배에게 꾸중을 듣던 중 항명을 하는 일이 생겨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일 이후로 심성보 선수보다 신재웅 선수에게 균형추가 옮겨 갔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 진학 후 엄청난 강속구로 일대 회오리를 몰고 옵니다. 당시 박찬호 선수가 제구력은 형편없으나 직구가 위력적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사실 그 때 박찬호 선수는 하이킥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릎이 성치 않은 관계로 제구력이 더 떨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가을리그에서 156킬로미터의 강속구를 던졌는데, 당시 야구 관계자들 외에는 누구도 박찬호가 156킬로미터를 던진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야구를 좋아하던 제 친구에게 곧 한화에 156킬로미터를 던지는 대학생이 들어올 거라는 말을 했더니 코웃음을 치더군요... 하지만 그 다음날 봄철리그가 끝난 후 신문에 대학야구 투수들에 대한 평가가 게재되었는데 그 당시 박찬호에 대한 언급이 '무릎 부상 탓에 직구 스피드가 151킬로미터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대학야구 최고의 강속구 투수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라는 말이 나오니... 눈이 뒤집히려고 하더라구요. 임선동과 조성민, 손경수에 대한 기사는 전년도에 프로야구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해 많이 알려졌지만 박찬호 선수는 당시 동아대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하게 된 거물신인 지연규에 가려 있어서 2500만원의 입질만이 있었을 뿐이니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하기도 했습니다.
박찬호가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당시 인기있던 주간야구에서는 대어급 8인방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는데 바로 대학야구를 주무르고 있는 91학번과 92학번 대어급 투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대어급으로 지목된 선수는 91학번에 안희봉, 위재영, 문동환, 92학번에 임선동, 조성민, 박찬호, 손경수 등 우완투수와 좌완으로 유일하게 전병호 선수가 기록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희봉의 투수로서의 가능성도 이야기가 되었나 봅니다. 연세대에서 그가 주로 타자로만 뛰었음에도 말이죠. 만약에 그 해에 연세대가 문동환과 임선동이라는 거물투수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그 때 정말로 안희봉이 투수로 다시 뛸 수도 있었을 법합니다. 또한 박재홍 선수도 만약에 연세대로 진학하지 않았다면 삼성에서 활약했던 최재호 선수처럼 투타를 겸하다가 투수로 나왔을 수도 있겠죠.
여튼 93년도 대학야구는 말 그대로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는데,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투수들이 10명을 헤아리고 있었으며, 특급좌타 거포 심재학과 심성보, 호타준족의 상징 이병규 등 역시 당시로서는 당대 최고라 불릴만한 재능을 가진 타자들까지 진을 치고 있었죠.
신재웅 선수가 3학년이던 시절... 백호기 아마야구 결승전에서 역사적인(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으로) 사건으로 기록될만한 경기가 있습니다. 바로 백호기 아마야구 결승전에서 부산경성대와 한양대학교가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기 때문이죠. 누구라도 당시 에이스였던 신재웅과 박찬호의 공주고 출신 우완투수의 대결을 기대했으나, 공교롭게도 박찬호 선수가 식중독에 걸려 엄청나게 물을 뿌려대는 바람에 박찬호 선수는 선발등판하지 않고 훗날 한화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차명주 선수가 선발로 등판합니다. 경성대는 대안도 없이 신재웅이 선발로 나섰습니다. 아시다시피 신재웅 선수 187, 차명주 선수 172... 그러나 차명주 선수는 강속구는 없어도 능수능란하게 변화구를 구사하며 경성대 타자들을 무력화시킵니다.
그러나 신재웅 선수는 참 골때리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는데.... 당시 국가대표 1루수였던 허문회 선수가 번번이 번트 타구를 2루로 송구하면서 악송구를 범하여 순식간에 2실점을 하더니, 급기야는 다음 타자의 번트타구를 1루로 던진다는게 잘못해서 주자의 머리를 맞춰 버리고 맙니다. 순식간에 6점차로 점수차가 벌어지자 경기를 포기하고 최정환을 투입합니다... 그 때 방송카메라에서 신재웅 선수의 입모양이 선명했는데... 2006년 조재진 선수가 월드컵 경기 도중 유행시킨 언어로 움짤로 많이 돌아다녔던 그 단어더군요.... 하긴 자책점은 1점인데, 실점이 6점이면... 저는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허문회 선수의 수비력이 그리 떨어지는 줄을 말이죠... 당시 대학 최고의 1루수라고 한다면 건국대의 거포 추성건, 경성대의 허문회, 고려대의 강상수 선수가 앞서가고 있었고, 경희대의 이숭용 선수가 나름 괜찮은 기량을 보이고 있었는데... 학년 시절 혹사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신재웅이 이어 마운드에 오른 최정환은 나름대로 패전처리를 잘 하다가 투런홈런을 얻어맞으며 결국 8:1로 주저앉고 맙니다.
훗날 LG가 허문회를 2라운드 1번에서 지명하고 6순위에서였나 서용빈을 지명하는데 둘의 명암이 입단하자 마자 엇갈린 것은 바로 다름아닌 수비력 때문이더군요. 팔꿈치를 어깨 위쪽까지 올리지 못하는 말못할 약점을 가지고 있던 허문회는 출중한 타격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반쪽선수로 전락하며 불운하게 프로생활을 마치게 됩니다.
이 경기는 제게는 신재웅과 박찬호의 맞대결이 성사될 뻔했던 경기라 기억에 남지만.. 사실 경기보다 경기 후에 있던 해프닝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바로 MVP 바꿔치기 사건인데요. 당시 4할대의 고타율로 좋은 활약을 보인 한양대의 4년생 2루수 안경환이 기자단에 의해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야구협회 관계자는 돌연 MVP를 한양대 1년생 1루수 강혁에게 줄 것을 요구하여 결국 강혁이 수상을 하게 되는데, 프로와의 입단 줄다리기 중에 한양대로 입단하면서 프로에서 영구제명의 징계를 받은 강혁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답니다.
강혁이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죽어도 프로 안 가요!" 그러나....
역대 대표팀 에이스급 투수들이 한두해를 사이에 두고 배출된 이 해에 한국야구는 2팀으로 국가대표팀을 구성합니다. 바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대륙간배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였는데요. 사실 대회의 권위로만 따지자면 대륙간배 대회가 훨씬 유명한 대회였지만, 당시 워낙 대학생들의 전력이 좋아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우승까지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을 대학 최고팀으로 구성하고 대륙간배는 대학야구 선수들과 실업야구 우수선수들로 구성이 됩니다.
당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의 구성을 보면 지금 프로팀에서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30대 선수들이 거의 망라돼 있을 정도인데요.
투수로는 임선동, 조성민, 박찬호, 차명주, 전병호, 문동환 등이 있었고 포수는 최기문과 김형남, 야수들도 연세대의 박재홍, 강필선(당시 2루수, 3루수), 홍원기, 심재학, 최경환, 백재호, 강상수 등으로 구성이 되었고...
대륙간배 대표팀에는 신재웅, 위재영, 최영필, 김민국, 유현승 등의 선수들과 야수로는 경희대의 이숭용, 한양대의 장석희 등이 선발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오래 전이라 기억이 잘 안나네요. 그러다가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투수 중에 부상이 생기자 대륙간배 팀에서 위재영을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차출해 가고, 대신 대륙간배 대표팀에는 훗날 또 한화에서 활약하다 은퇴하는 계명대의 포크볼 투수 홍우태가 대신 선발됩니다.
대륙간배 대회 1회전에서 한국은 최영필을 선발로 내세우며 4:0으로 앞서나갑니다. 4회에 최영필이 무사에 주자를 내보내자 지체없이 신재웅 카드를 빼들며 경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신재웅은 6이닝 동안 9개의 삼진을 솎아내며 무실점 역투를 펼치게 됩니다.
바로 다음 경기는 유럽의 약팀이었는데 기억이 가물... 여튼 쉽게 이기고 올라갔는데... 4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미국 국가대표팀과 맞서게 됩니다. 당시 미국팀의 에이스는 폴윌슨이라는 선수로 후에 메이저리그에서도 활약을 하게 되는데 신재웅은 이 선수와 선발 맞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경기가 펼쳐지자 마자 미국 입장에서는 황당 그 자체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데, 바로 이 경기에서 신재웅은 미국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4회 3,4,5번 타자를 연속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시속 154킬로미터(당시 미국 스피드건으로는 97마일로 156-7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의 강속구를 앞세워 8이닝 동안 16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세계스카우트들의 이목을 끌게 됩니다. 그런데... 신재웅 선수가 약간 다혈질 끼가 있어서... 주자가 나가도 전혀 득점을 하지 못하자 힘이 빠진 나머지 8회에 대거 3점을 내주며 5실점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9회초에 들어선 한국대표팀은 장석희의 홈런 등을 앞세워 3점을 쫓아갔지만 아쉽게 5:3으로 무릎을 꿇고 마는데... 이 시점에 이미 조성민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10만달러의 계약금이 오가며 최초의 메이저리그 도전에 관한 입장이 가시화됩니다. 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한국대표팀의 에이스로 활동하던 조성민의 좋은 체격과 공에 매력을 느끼며 그에 대한 평가를 작성하는데 2년 정도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면 메이저리그에 올라올만한 기량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공의 위력만으로는 조성민을 찜쪄먹을 만한 투수가 한국에 또 있다는 것에 매우 놀라서 훗날 한국 대학야구 봄철리그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대거 관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신재웅이 먼저 국제대회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에 대해 알렸으나 당시 대륙간배 대회는 비교적 나이 많은 아마추어들이 많이 등장하였기에 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은 바로 뒤이어 벌어진 버팔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몰리게 됩니다. 한국은 특급투수들의 마운드 인해전술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결승에 오르게 됩니다. 이 와중에 박찬호는 팀의 4승 중 1승 3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게 됩니다.
결승전 선발은 비교적 빠른 공에 제구력과 변화구가 능란한 위재영이 등장했으나 이내 물러나고 한국은 다시 인해전술로 나가게 됩니다. 결국 박찬호가 마운드에 올랐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155킬로미터(96마일)의 불같은 강속구에 143킬로미터의 슬라이더, 133킬로미터의 포크볼 등... 당시 한국 야구 사정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공을 던지며 쿠바 타선을 틀어막습니다. 결국 팀은 패하고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대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미 박찬호는 엄청난 스카우트들을 몰고 다니는 스타가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박찬호가 어느날 깜짝 등장한 스타로 착각하시는 분이 많지만 대학시절 성적을 보아도 박찬호는 임선동보다 좋은 선수였으며, 고교시절의 전국대회 기록을 봐도 손경수 선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성형에 가까운 투수였습니다.
결국 이 대회를 끝으로 많은 스카우트들이 한국을 다시 방문합니다. 이전에는 조성민 스카우트를 위해서 왔는데, 이번에도 조성민 스카우트를 위해 왔습니다. 다만 달라진게 있다면 조성민은 스카우트는 부업이고 박찬호 스카우트를 1순위로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당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그렉 매덕스 - 톰글래빈 - 존스몰츠 - 스티브 에이버리 - 피트스미스라는 최강의 선발라인을 자랑하던 애틀랜타의 투수진이 이른바 '리치 건'으로 불리며 천하를 호령하던 시기였는데, 이 때 애틀랜타의 스카우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수선수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쿠바를 비롯해 유럽, 중남미까지 돌아봤지만 이제껏 보았던 선수들 중에 최고다. 지금 당장 계약을 하고 AA에서 몇개월 다듬은 뒤 바로 확장엔트리가 적용되는 시점에 메이저리그에 올려도 될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조성민 선수에 대해서는
"조성민의 경우는 다르다. 가능성이야 충분하지만 2년 정도 마이너리그에서 체계적인 진화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떻든 두 선수를 모두 데려가고 싶다."
또한 더불어 한 마디 더 비수를 남기게 되니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상위 순번 지명자가 100만달러 이상을 받는 추세인만큼 박도 상당한 계약금을 받을 것이다. 한국에는 군문제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 당장 학교를 휴학하고 2년간 상무에서 병역의무를 마친 뒤 계약해도 좋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4년 뒤를 바라보고 계약하기는 힘들다"
바로 몇달 전 조성민에게 10만달러를 제시하던 애틀랜타가 박찬호에게 100만달러를 제시하자, 조성민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100만달러 이상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부잣집 아들로 자랐고, 고교시절부터 우승을 밥먹듯이 했던 조성민이 촌놈 박찬호에 비해 가치가 10%밖에 되지 않으니 열을 많이 받기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1호 메이저리거에 대한 꿈을 키워가다가 느닷없이 박찬호가 치고나가자 오기가 발동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해 말 박찬호는 애틀랜타가 아닌 교민이 많은 LA다저스에 입단을 했고 무려 120만달러의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계약을 체결하고 바로 뒤이어 입단 동기인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17번째로 직행하는 선수가 됩니다. 물론 그 후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의 노력끝에 본격적인 메이저리거가 되지만... 그의 노력, 그의 의지 등은 정말 높이 살만하죠.
당시 조성민이 10만달러의 계약금에 꿈쩍하지 않자 애틀랜타는 30만달러로 계약금을 높였으나 박찬호 수준이 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조성민의 고집에 결국 손을 들고 맙니다. 대신 상품성을 인정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박찬호의 계약금에 상당하는 수준을 제시하며 그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미련없이 일본행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가 재학 중 바로 일본에 가지 않고 고려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간 이유는 바로... 고려대의 최남수 감독과 조성민 아버지의 친분이 어느 정도 작용을 했는데 친분을 떠나 조성민에게 평생 사무칠만한 일이 발생을 합니다.
가을경기에서 조성민은 영남대를 상대로 7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대학야구에서 실로 보기 힘든 대기록을 눈앞에 두게 되는데 8회에 그만 안타를 맞자 경기를 지켜 보던 최남수 감독이 그대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게 됩니다. 뇌출혈....
최남수 감독은 그뒤로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더니 이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 일로 조성민은.... 자신 때문에 감독님이 돌아가셨다는 자책감에 한참을 괴로워했고, 곧이어 벌어진 정기 연고전에서 최남수 감독의 영정을 덕아웃에 두고 경기에 임합니다.
임선동, 문동환의 막강 마운드에 박재홍, 강필선, 장재명 등 호남 타선을 앞세운 연세대와 강상수, 심재학, 홍원기로 이어지는 막강타선에 조성민이 버틴 고려대의 경기는 결국 조성민의 혼신의 역투로 고려대가 승리를 거두고 경기가 끝난뒤 경기장에서 한참을 엎드려 울며, 응원단 앞에서 눈물흘려가며 고려대의 응원가를 부르던 당시 선수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얼마 후 고려대는 최남수 감독의 후임으로 부산고에서 염종석, 손민한, 주형광을 길러냈던 조두복 감독을 앉히게 되면서 손민한이 이때부터는 조성민과 고려대 마운드를 양분하기 시작합니다. 조성민은 대학을 마치고 일본에 입단하여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98년 전반기 최고의 성적을 올리며 호투했으나 올스타전 기간 입은 치명적 부상으로...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92학번 야그를 하다 보니 제가 중요한 걸 빠뜨렸군요. 이후 신재웅 선수는 3학년때 8강과 준결승에서 패배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동국대와의 8강전에서는 팀 동기였던 강준기에게 역전 결승타를 맞고 웃으며 마운드를 내려왔고, 건국대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9회 2사까지 잘 던지다가 평범한 외야 플라이를 놓친 외야수의 실책으로 건국대에 패하고 마는데 당시 건국대에서 MVP를 받은 선수가 이종범입니다. 4학년이 되자 마자, 박찬호의 추천과 함께 각종 대회의 활약으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다시 동대문 구장을 방문한 가운데 신재웅 선수는 마운드에 오르게 되는데 이 때 이미 각종 대회의 연이은 혹사와 무릎 부상으로 136킬로미터밖에 나오지 않는 구속으로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한화에서도 2학년 때 허리에 이어 무릎부상까지 당한 신재웅 선수와 단국대의 좌타자 심성보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신재웅에게 2억의 계약금을 안기며 입단시키는데 사실 신재웅의 2억원은 실업팀 현대피닉스가 저지른 계약금 인플레의 영향도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럼 어떻게 현대피닉스가 그렇게 유망선수들을 싹쓸이 할 수 있었는가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당시 현대피닉스의 대어 싹쓸이 현상의 주 원인은 다름 아닌 김재현 선수입니다.
1993년 고교야구는 우동주 좌재현이라는 특급타자들과 함께 투수로는 주형광과 신윤호가 단연 돋보였고, 신경현이 고교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점입니다. 그 해에 김동주는 OB,입단으로 가닥을 잡고 계약금으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고 LG는 신윤호를 1억원에 입도선매한뒤 김재현에게 입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재현의 연세대학교 입학 열망이 워낙 강하여 어려워하던 시점입니다. 당시만 해도 아마야구 선수들만 국가대표에 뽑히던 시절이어서, 결국 그 해 청소년대표팀에서는 당시 최고타자였던 김동주가 프로행으로 마음을 완전히 굳힌것으로 판단하여 제외시키고, 김재현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LG스카우트들은 청소년대표팀의 숙소까지 잠입하여 계약금 9100만원에 김재현 입단 계약서를 받아 가지고 나오게 되는데, 사실 김재현의 입단에는 2억 가까운 돈이 들어갔다는 후문입니다. 라이벌로 생각하던 김동주에게 OB가 제시한 계약금이 2억원이었는데, 김재현이 9100만원에 계약을 했을 리 없다는 것이죠.
결국 연세대는 다 잡았던 고교 최고 좌타자를 LG에 뺏기자 당시 연세대 김충남 감독은 절대로 연세대 선수들을 프로에 입단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정말로 연세대 유망주들을 전부 현대로 보내 버립니다. 4학년이던 문동환, 안희봉에 3학년이던 박재홍, 장재명, 강필선 등 특급선수들을 모두 수억원에 입도선매한 현대의 뒤에는 연세대가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동주는 OB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며 뒤늦게 고려대에 입학을 하고 말았으니 당시 김충남 연세대 감독의 심기가 얼마나 뒤틀렸을지는 알 수 있는 일이죠. 고려대는 심재학을 프로에 보내면서도 내심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로 현대는 프로야구에 입성을 조건으로 자신들이 입도선매했던 유망주들을 대거 풀어주었는데 그 선수들이 바로 위의 선수들과 함께 두산의 불운한 거포 문희성 등이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키보드를 상대로 제 마음속에 감춰뒀던 지난 야구에 얽힌 추억들을 풀어 놓으니 기분이 훈훈해집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구요. 잠시나마 1박 2일의 추억 속에서 재회한 신재웅, 박찬호 두 공주고의 영웅 앞날에도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더불어 한화 이글스의 류현진 선수 등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듣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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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정말 정말 잘 읽었습니다.(__)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연예인이 누구에요?? 아까 중간에 조동화 동찬형제이야기 나왔던 부분에.. 박시후 동생이 야구선수인것같은데.. 그사람 말하는거에요?? 박시후가 공주사람이던데..
한주동안 너무 재미있었습니다..감사감사.. 이거 기사화 해도 되실듯..ㅎㅎㅎㅎ
좋은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실례되는 질문 혹시 대학도 야구부 있는 학교를 나오나요?
오주상선수고교시절활약좀알수있나요
좋은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하셨어요^^재미있고 유익한 글이었구요,, 앞으로도 이런 영양가있는 글.. 종종 부탁드려요ㅋ 감사합니다
오주상 선수가 고교시절에 얼마나 활약을 했는가는 제가 그 때 군대 있을 무렵이라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그가 공주고가 청룡기에서 준우승하던 시절에 중학야구에서 6할이 넘는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었고, 빠른 발과 강한 어깨, 장타력을 두루 갖춘 선수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훗날 한화에 고졸로는 드물게 1억원을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지만, 허리부상으로 은퇴하고 한동안 공주중학교에서 신재웅 감독과 함께 코치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공주중 코치를 하지 않는 상태인데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겟네요.
참고로 김승권, 이승엽과 동기동창이었던 김영진 선수도 있습니다. 이 선수는 고려대에 입학신청을 했다가 당시 수능에서 기준점수에 미달하여 한화에 입단했는데 청소년대표 출신 유격수였던 김승권이 6000만원을 받을 때 7000만원을 받고 입단했던 대형 3루수였습니다. 이 선수도 입단 초기 4월 한달간 홈런 1위에 랭크되며 맹활약을 했는데 그 후로 변화구에 약점을 노출하며 2군으로 내려갔다가 공익근무를 한 뒤 은퇴하게 됩니다. 김영진은 현재 공주중동초등학교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봤습니다... 손경수는 역시 거품이 상당히 있었고....박찬호는 고교때 부터 손혁보다 한두 레벨위의 선수 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게되었습니다. 박찬호의 성공 스토리를 언론에서 극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고교나 대학시절은 별 두각을 못 나타낸 선수로 언젠가 부터 그렇게 알려지더군요. 그래야 더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극적으로 보일테니까 말이죠... 이승엽도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과소(?) 포장된 면이 있었구요...
조성민 입장에서 나온 얘기 겠지만 스포츠2.0의 조성민 인터뷰를 보면... 박찬호가 서울에서 대회를 치루거나 하면 조성민 집에서도 자주 묵고 그런 사이였는데 막상 다저스와 계약하는 과정에서 조성민에게 아무 귀뜀이 없었답니다. 자존심 강한 조성민 으로서는 그런 것들이 더욱더 30만불에 아틀란타에 가지 않았던 이유인거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이글 다른 사이트에 좀 퍼가도 되겠습니까???
박찬호가 고교시절 서울에서 경기를 치를 때 조성민의 집에서 묵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고교야구 선수가 대회도중 숙소를 이탈해서 다른 선수의 집에 가서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봐야 하구요. 공주고가 서울에서 전국대회를 치른 적도 그가 3학년때는 봉황기 한번밖에 없습니다. 또한 봉황기는 예선대회가 좀 많아서 경기를 치르자마자 내려와야 하는 상황이구요. 대학 진학 이후에는 박찬호가 한양대에 있었기 때문에 가끔 놀러갔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그가 1,2학년만 다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현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입니다.
한가지 더 붙이자면, 조성민 선수가 공주에 있는 손혁 선수의 집에서 며칠 자고 가고 했던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학 동기동창인데다 집도 서로 불편하지 않을만큼 부자였으니까요. 박찬호 선수가 조성민 선수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다면 청소년대표 때의 인연으로 팀 훈련이 없을 때 몇번 잤을 수는 있을 것 같네요. 당시 박찬호 선수는 신일고의 최고 1번타자였던 설종진 선수와 더 친해서 그와 함께 미국 가기 전에 등산을 하며 서로의 선전을 다짐하곤 했던 적은 있습니다.
이승엽은 고등학교 2학년때 이미 선배들을 제치고 청룡기 우수투수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물론 고교시절 그는 지금 보여주는 것 같은 장타력을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고교에서 최고타자 중에 한명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타자보다는 투수로 더 유명했던 것 뿐이죠.
또 한가지 이승엽이 고교시절 돋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동학년에 대구상고의 김승관이라는 거물 오른손 1루수 겸 투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선수 모두 청소년대표로 활동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는데 당시 기준으로만 보자면 장타력은 오히려 김승관 선수가 우위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찾아 보니 나오네요...고교대회 때문이 아니라 청소년 대표 시절 조성민 집에서 묵은 적이 있답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issue&mod=read&issue_id=387&issue_item_id=6933&office_id=227&article_id=0000001772
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 찬호와 사이가 안 좋다. 찬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찬호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 청소년대표 시절 찬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 가자고 해 이틀을 재워준 적이 있다. 대학가서도 찬호에게서 자주 전화가 왔다. 통화내용은 “넌 뭐하냐”(박찬호) “어, 나는 집에서 쉬고 있어. 아픈 데 없냐”(조성민) 등의 대화였다.
나는 정말 친구로서 찬호의 어깨가 아픈 것을 걱정하고 챙기고 그랬는데 나중에 책이 나오고 아는 기자를 통해 알아본 결과 내가 운동 하나 안 하나를 확인하려고 찬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찬호가 미국에 가는 것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찬호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신일고 동기들과 송년회를 했는데 동기인 종진이가 늦게 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종진이가 “너 몰랐어? 찬호, 미국 들어가잖아” “뭐?”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찬호, LA 입성’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때 나는 찬호를 친한 친구로 생각했는데 공항간 친구는 종진이와 차명주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찬호한테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링크된 곳에서 발체한 내용입니다... 조성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당시 상황은 이랬던거 같네요....
글쎄요... 뭐 조성민이 박찬호를 집에 데려가서 재웠느냐 아니냐는 사실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구요. 그런데 찬호한테 이정도밖에 안되니까 박찬호가 싫어서 메이저리그에 안 갔다는 건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고 보입니다. 선수 하나 싫어서 메이저리그를 안 가기야 했을까요?
더구나 처음 박찬호와 조성민을 접촉했던 건 애틀란타가 맞지만 LA다저스에서 박찬호를 데려갔는데 애틀랜타의 제안을 거절한것이 박찬호에 대한 서운한 마음 때문이라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존심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제말은 그 이유가 주가 되서 미국에 안갔다는건 아니구요...물론 몸값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겠죠... 몸값 같은 중요한 문제외에도 그런 박찬호와의 경쟁심(?)도 조금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스포츠 2.0에서 나온 조성민 선수에 관한 글은 저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조성민 선수 역시 너무 주관적인 생각을 쉽게 말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박찬호 선수 입장에서 조성민 선수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서 "어 성민아 나 내일 미국 가. 미국 애들이 계약하자고 하네" 이렇게 쉽게 말할 상황은 안 되었을 거라고 보입니다. 자기 잘못은 아니지만 같은 꿈을 가진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테구요. 또한 손혁과 박찬호 사이가 그리 원만치 않은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박찬호가 미국으로 간 이후에 고려대 동기인 손혁선수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오해가 깊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손혁 선수도 공공연히 아들 낳으면 150킬로미터짜리 강속구를 던지는 아이로 기르겠다라며 다분히 박찬호를 의식한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고교시절 황금사자기에서 광주일고와 붙어서 박재홍과 박찬호가 경기를 하고 있을 때는 동생과 통화 도중에 "초고교급 투수들이 대결하고 있는데 내가 낄 자리가 있겠느냐"라는 말로 자신에게 실망한 건지, 질투인지 모를 말도 했었습니다. 이건 제가 손혁선수의 동생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렇다고 손혁 선수가 나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둘 다 좋은 사람이라도 서로간에 편치 못한 관계는 많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번 시리즈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앞으로도 프로선수들의 예전 고딩시절 얘기 자주 써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아... 정말 잼있었습니다. 담에 또 기회가 되면 연재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