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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49
그녀의 바람을 매정하게 자른 한마디. 얼핏 이해하지 못한 바보처럼 여인은
멍하니 사내의 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화입마의 상태였기에 언제나 불안했었다. 녀석은 무공뿐 아니라 장기까
지 다쳤었으니까. 헌데 병이나 그런 게 아니라 생사결 끝에 죽었다는 거야.
암기에 맞아서 말이야.”
“내공도 없는데 무슨 결투를...”
“비각주가 보았다는군. 내공을 사용했다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마도 소학은 잠력을 격발시켰을 거다. 그 방법 외에는 어떠한 무공이라도
주화입마로 단전을 훼손당한 사람의 몸에서 공력을 끌어내지는 못하니까.”
“대체 어디에서 누구와...”
홀린 듯 묻는 여인의 질문에 지그시 눈을 감고 낮은 탄식을 토하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속에 담긴 자책은 고스란히 그녀에게도 전달되었기
에 여인의 가슴은 또 한번 찢겨져 나갔다.
“내 집무전 앞이었다. 녀석은 비염극이를 탈출시키고 대신 죽어간 거야.
내가 죽인 거라고... 그렇게 아끼는 척을 했는데 결국 내가 죽인거지 뭐야?
큭큭큭...”
“사형...”
“변명의 여지가 없다. 녀석은 모자라디 모자란 사형을 대신해서 죽어간 거
라구. 이 빌어먹을 청빈로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사형을 대신해서...
녀석은 목숨 같은 진원진기를 태우면서까지 숙의 비밀을 지켜내고 죽었다.
그런데...”
말을 끊고 사내가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
“왜 장추삼이라는 거지?”
“예?”
그녀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오는가?
물론 숙을 괴멸시킨 사람 가운데 장추삼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소문을 들어
서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빌어먹을 복룡표국의 표사들이 주축이 되어 사
형의 청춘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무룡숙을 박살내었다. 그런데 기학의 죽음
에 왜 장추삼이 나오는가?
“그게 무슨 말인지?”
“내가 묻고 싶은 거야. 아무리 주화입마의 상태였다고는 해도 잠력을 끌어
올린 기학과 맞서 승부를 결할 무인이 현 강호에 몇이나 되겠나? 검정오존?
우습지... 그야말로 절대오존급의 고수가 아니라면 녀석의 손에서 채 십
초를 버티지 못할 거다. 그런데 녀석은 장추삼이란 놈과 싸웠다고 했어.”
“암기가 사인(死因)이라는...”
“암기란 게 맞아야 효과가 있잖나? 기학은 형(形)의 목전에서 좌절했다는
걸 잊었어? 그리고 형을 차지하더라도 어느 정도 어우러졌기에 암기를 날렸
다는 얘기가 된다. 문제는 장추삼이라는 거지. 잘 봐줘서 일류를 상회하는
무위를 지녔다고 생각했던 시골촌놈 장추삼이라는 거야.”
휘이잉-
짧은 침묵과 긴 여운. 바람이 스쳐 가는 자리에 그들의 슬픔과 의구심이 놓
였고 가을 낙엽이 돌개바람에 말려 올라가듯 그 모든 감정들은 부산하게 산
중턱에서 뛰놀았다.
뭘 생각하는지, 속에서 피어나는 분노를 억제하는지 몰라도 여하한의 움직
임을 보이지 않던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여인이 벌떡 일어섰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대꾸 없이 또 한 걸음을 떼는 사내를 그대로 가게 방치할 수는 없었는지 그
의 소매를 잡으며 여인이 소리질렀다. 지금의 이 사내는 뇌관만 받쳐주면
여지없이 터질 폭약 같은 상태일 테니까.
"이성을 찾으세요! 뭘 어쩌려고 하는 거에요? 하늘의 기학이 사형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워하겠어요! 화나고, 슬프더라도, 어떤 시련이
닥쳐도 우리에겐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고 그것을 위해 달려나가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어요?"
"내가 뭘 어쩐다는 거지?"
빙글 몸을 돌린 사내가 피식 웃었다.
"언제나 계산을 하고 상황이다 싶으면 움직였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특
별히 그런 방식을 선호하는 건 아니었어. 다만 확률적으로 그게 적중될 확
률이 높았기 때문에 행(行)한 거야. 여태까지 거둔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았
고. 허나 지금은 회의감이 조금 드는군. 너무 재기만 하다가 정작 중요한
걸 놓쳐버리고 그런 바보짓을 하는 동안에 우리 것을 잃게 되었다. 절대적
으로 옳은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사형..."
"한번쯤은 직감이 부르는 대로 움직여 보는 거다. 조직에 누를 끼치지는 않
아. 아직도 나를 모르나?"
말은 쉽고, 별일 아니라 한다. 그러나 어둠 속으로 침전되는 사내의 모습에
서 흡사 활화산을 끌어안은 화마(火魔)의 음습한 열기가 전해졌기에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구름처럼 유유자적하고 언제나 냉정한 이성
으로 사물을 분석하기에 자칫 차가운 인상만이 남지만 알고 보면 뜨거운 무
엇을 내심 억누르고 있는 사내. 가슴의 구름은 옷에서 빠져나와 천둥과 폭
우를 동반하여 대지에 강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이든 쓸어버릴 기세로.
"운(雲)사형..."
슬픈 사슴의 큰 눈망울처럼 낮고 공허한 울림이 야산에 메아리 쳤지만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청빈로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운조가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은 록미랑은 먹다 둔 술상의 잔해들을 치우며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다. 절대적인 무위를 바탕에 깔고 영리한 행
보 속에서 날카로운 판단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사형이기에 별 일 없을 거라
고.
하지만 스믈스믈 피어나는 이 불안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역사를 만들어보고자 했지만 어느새 그들도 거대한 흐름 속에 편입되어 가
는 자신들의 자화상을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이라 명명되어진 세상의 조류 앞에.
***
더운 여름밤에 아궁이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하릴없이 불씨나 쑤시며 청
승떠는 정혜란은 언제 자신이 이런 일에 놀랍도록 익숙해졌는지 기억도 나
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기에 불을 돌보고 마침 하루 종일 놀러 나갔던 묘령
이 어슬렁거리며 돌아와서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골골거리자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행동을 자연스레 하고 있었던 것
이다.
틱틱-
느슨한 그녀의 마음과 달리 불은 기세 좋게 타들어갔고 멍청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혜란의 입에서 신세타령 같은 노래가 흥얼흥얼 나왔다. 누가
보면 딱 식순이의 그것이라 적응이란 단어를 몸소 실천하는 그녀의 모습에
만약 화산 사람들이 보았다면 세 번은 까무라쳤겠지만 아쉽게도 정혜란의
옆에는 그녀와 필적하게 나른한 모습을 과시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무림 삼화가 부럽더어냐아~ 이 몸은 비록 부엌데기라 하지마안~ 강호 여
걸 부럽지 않다네에~”
이리 돌려도 신세타령, 저리 돌려도 자기위안이다. 뭐, 사실 강호 여걸이
부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금 그녀의 당면과제는 아버지와도 같은 장유
열의 안위를 지키는 것과 자신의 눈을 감쪽같이 속인 장추삼이 돌아오면 한
판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니까.
“구렁이가 따로 있더냐아~ 장가가를 능가할 구렁이라면 보는 대로 고아 먹
어서어~ 일 갑자의 공력을~ 엥! 가만~ 일 갑자가 오르기는 커녀엉~ 주화입
마에 걸리겠구나아~”
주화입마 부분에서 뽀드득 이까지 갈아 부치는 정혜란이 문득 부지깽이를
힘주어 잡았다.
삼류 건달? 뒷골목 싸움의 천재? 허! 개가 웃을 일이다. 요즘 동네 건달패
는 강호로 가나가는 즉시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삼성의 반열에 등극하게 되
나? 화산의 대사형인 하운과 같은 항렬로? 전설의 고수라는 육천염의 두 명
을 상대하여 압승을 거두는 동네 싸움꾼?
“분며엉~ 그 인간은 구렁일거야아~ 아니면 이 아가씨의 눈을 피할 수 없지
이~ 웃겼어~ 흥! 흥! 흥!”
기가 막힌 마무리로 노래를 끝내고 문득 손에 들린 부지깽이를 보니 반쯤
휘어져있다. 얼마나 힘을 줬으면...
“아무튼 오기만 해봐라. 이 아가씨를 속인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톡톡히
알게 될 테니까.”
근데 사실 장추삼은 정혜란을 속인 적이 없다. 무공을 숨긴 거야 그녀 역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고 그렇다고 익힌 적이 없다든가 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잖은가.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무슨 대답이라는 건가!
그러나 그녀에게 이런 이성적인 판단은 절대로 적용되지 않았고 단지 그의
무공을 몰라봤다는 것, 대화산 내에서도 다섯 명밖에 없는 교두 역할을 하
면서 트인 눈을 감쪽같이 피했다는 것... 이게 열 받는 거다.
“젠장이다, 진짜!”
장보러 나갔다가 삼성의 소문을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뭐 앞서의 두 명
- 한성 북궁단야와 유성 하운 - 은 그렇다고 쳐도 괴성? 이름은 장추삼?
거기다가 공포의 이름이라는 육천염의 둘을 맨손으로 격파했다?
머리가 다 아파왔다.
그리고 확인된 사실, 소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 나만 바보다! 밥이나 짓고 설거지나 하는 나만 바보라고!”
“누가 감히 언니에게 바보라고 했나요?”
영롱한 목소리가 그녀의 투덜거림을 다독였다.
“왔니?”
볼멘소리로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녀였건만 우건은 빙긋 웃었다. 얼마나 목
청이 좋았는지 정혜란의 울부짖음 같은 노래를 오면서 다 들었다. 솔직 담
백한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에 웃음부터 나왔으나 가까스로 참아
야 했다.
오늘은 장유열이 이웃마을 표사집의 잔치에 갔기에 둘이 한 잔 하기로 약속
을 했었다. 그래서 우건의 품에 술병 두어 개가 달랑거리고 있는데 정혜란
의 투덜거림성 노래를 듣노라니 새삼 떠나간 이들이 생각났다.
“뭘 그렇게 툴툴거려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지.”
그녀의 옆자리에 살며시 앉으며 반쯤 졸고 있는 묘령을 안아든 우건이 술병
을 내밀었다. 기분 나쁠 때는 자고로 한잔하면 좀 나아진다.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밀어진 술병을 멀뚱히 바라보던 그녀가 휘어진 부지깽이를 내
던지고 말없이 한잔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두 잔, 세 잔...
술을 마시면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진다. 첫째로, 말이
많아지거나 둘째로, 과묵해지거나 마지막은 이유도 없이 그냥 우는 경우.
“근데 말이야... 장가가 코곤다? 너 몰랐지? 내가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
데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더라구. 소리가 얼마나 크냐하면...”
장추삼에 대한 불만이 용솟음치기는 한데 어떻게 풀 방법은 없고 하니 이런
‘어린아이가 옆집 애 흉보기’식의 수준 낮은 말이 튀어나온다. 그 속내
가 보여서 우건도 괜히 놀라는 척하며 열심히 맞장구 쳤는데 시간이 지날수
록 기분 맞춰주기에서 그냥 ‘나랏님 욕하기’가 되었고 여인네들의 수다는
한없이 깊어만 갔다.
농담도 자꾸 들으니까 진짜로 들리는 법, 별 생각 없이 되는대로 맞장구에
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건과 기왕 나온 김에 식으로 마구 퍼부어
대는 - 술의 효과가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현재의 모든 불만을 장추
삼이라는 대상을 빌어 퍼붓고 있었으니까 - 정혜란의 모습은 매우 희극적이
었다.
“잘은 모르지만 장가가 속곳이나 재 때에 갈아입나 몰라? 아무튼 아침에
출근하면서 눈꼽이나 떼는 식의 고양이세수도 겨우 한다구. 남자들은 전부
왜 이러니?”
“우리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인데 겉으로 보기에 번지르르 하지만 알고 보면
흥! 그 지저분하기가...”
차곡차곡 술병은 비워졌고 그녀들의 수다도 흐르는 달과 함께 끝을 모르는
항해로 시간을 벗삼아 마냥 이어졌다. 원래 뒤에서 남 욕하는 것만큼 훌륭
한 안주가 세상에 없는 법이고 대상이 자신보다 손위, 또는 어려운 상대일
경우라면 그 맛은 가일층 높아진다.
씹다, 씹다 더 이상 나올 꺼리가 없었는지 머리를 벅벅 긁은 정혜란이 말없
이 불을 쑤석거였다. 사실 이들이 장추삼을 만난 시간은 고작해야 두 달 남
짓이다. 난도질을 하고 싶어도 뭐 재대로 아는 것이 있어야 도마 위에 올려
놓을 텐데.
"그나저나 지금의 무림은 분명 격변기인가 봐요."
"음?"
갑자기 차분해진 우건의 말에 틱틱거리는 불씨를 피해 눈을 찡그리던 정혜
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말이 있지요. 군웅이 할거하여 무용담이 넘쳐나고 그것을 밑천삼아
기루를 떠도는 변설자들의 술잔이 빌 날이 없을 때면 어느새 강호에 난세가
찾아왔노라고...”
“흐음.”
고개를 끄덕이며 우건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정혜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
었다. 한동안 지극히 평온했기에 이렇다할 이야기거리 조차 없었던 무림이
었는데 난데없이 들려온 하남의 싸움,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대두된 세 청
년의 이름.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나저나 장가가 말이야. 별로 두꺼운 안면가죽도 아니고 속일만한 일도
아니었잖아? 그렇다면 가출했던 오년동안 뭔가 있긴 있었다는 건데 도대체
가 짐작이 안가. 눈썰미 좀 빠르고 운동신경 좋은 동네 건달이 어떻게 해서
단 오년 만에 고수가 됐을까? 아니, 그게 가능은 한거야?”
우건도 머리를 짤짤 흔들었다. 그의 싸움 장면을 보지 못한 정혜란이기에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장추삼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특이한 무공을 사
용하는지, 그것을 무공이라 칭해도 되는지, 목격한 당사자로도 아직까지 해
깔리니까.
“아무튼.”
생각해봐야 공염불 같아서 양팔을 깍지 껴서 쭉 편 우건이 어깨를 좌우로
꺾었다.
“이제 무언가 시작되고 있음은 부정하지 못할 진실이에요. 어쩌면 아주 거
대한 일이 태동되고 있는지도. 이미 시작되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
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원군을 청한 거지만.”
“원군?”
“그래요. 우리만으로 감당하지 못할 암운이라면 도움을 부탁하는 건 당연
하잖아요? 뭐, 처음부터 시킨 사람이기도 하지만.”
정혜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가 판단한 우건의 무위를 놓고 보았을 때
원군이라 한다면 이 남장여인의 실력보다 위라는 얘기일 테고 그 정도라면.
‘맙소사! 이 아가씨,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을 불렀다는 거야?’
뒤이은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심드렁했지만 정혜란은 온다는 ‘원군’에 몰
입하느라 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도 게으르신 분이라 청한 방법이 다소 과격했지만 말이에요. 아마 지금
쯤 난리가 났을 거야.”
솔직히 없는 말도 아닌데 뭐, 하며 중얼거리던 우건이 귀를 쫑긋 세우는 묘
령의 코를 쿡 눌렀다. 이럴 때는 영판 집고양이 같은 묘령이기에 귀를 납작
하게 숙이며 눈을 감고 귀찮아하는 고양이가 귀여워서 그녀는 계속 코를 눌
렀다.
“오호호... 이 녀석 좀 봐. 강호의 일류고수를 가지고 놀던 고양이가 맞기
는 한 거니? 아유, 이거 재미있네?”
톡.
그녀의 품에서 유연하게 빠져나온 묘령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낮
게 울었다. 무언가를 부르는 듯한 냐옹거림에 장난을 치던 우건도 무의식적
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리도록 파란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과 넉넉한 만월(滿月), 그리고...
“어머? 유성이네? 언니! 저것 좀 봐요! 유성이에요, 유성!”
“음?”
생각에 골몰해 있던 정혜란이 고개를 들자 파란 하늘을 산산이 가르며 한줄
기 유성이 흘러가고 있었다. 보통 크기보다 크고 긴 꼬리를 자랑하며 천천
히 흐르는 별똥별은 뭔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묘한 상념에 빠지게 하여 두
여인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위풍당당하게 궤적을 마친 유성이 그 존재를 감추자 엄지와 중지의 손가락
을 딱 부딪치며 우건이 발을 굴렀다.
“아차!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바보처럼 멀거니
바라보느라 놓치고 말았네!”
“소원?”
평소와는 다르게 나지막한 어조로 정혜란이 말을 받았다. 같은 것을 보았는
데 느낀 감상이 어떻게 이리도 다를까?
금새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과 말없이 흘러간 유성 하나. 그리고 한 여
인의 낮은 독백.
“유성이 흐르면 소중한 무엇이 떠나간다고 하지...”
“예?”
의아해하는 우건의 눈길을 피하고 술병을 잡은 그녀가 꼴깍 한 모금 들이켰
다. 태울 듯 기도를 넘어가는 술의 향취와 아련히 제자리를 맴도는 여러 가
지 상념들.
어떤 여름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첫댓글 절 앍고 겁나더,
즐겁게 읽구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