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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이방인 깜짝 놀라게 했던 한국인들 시위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2003년 3월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같이 온 친구의 지인이 인천공항으로 마중 나왔고 우리가 앞으로 1년 동안 공부해야 할 연세대 어학당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그날 연세대 캠퍼스 인상은 매우 좋았다. 개나리가 활짝 펴서 온 캠퍼스가 노랗게 물들었고 여기저기 핑크색 진달래꽃도 보였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또 있었다. 학생들이 시위하는 광경이었다. 그 전 해인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고와 관련된 시위였다.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고? 그게 돼?” 그때 20살이었던 나는 그닥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시위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지만 시위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시위는 러시아에서 보기 드문 시민 활동인데다가 더더구나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다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사회 진출을 앞둔 학생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게 보통이고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한국 대학생들이 자기 나라 정치에 대해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민주주의와 나의 첫 만남이라고 할까.
이방인 깜짝 놀라게 했던 한국 대학생들의 정치 시위
어학당을 마치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로로 이사 갔다. 그 당시는 한국말이 아직 많이 서툴러서 뉴스를 제대로 보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주말마다 대학로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이유를 몰랐지만 그 시위 행렬을 뚫고 어렵게 버스 정류장으로 가곤 했던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물론 동네 주민으로서는 교통이나 이동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시위를 하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한국 문화의 일부라고 그냥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다가 2008년 2월이 되었고 대학로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매주 시끄럽게 음악을 크게 틀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싹 다 사라졌다. 대통령이 바뀐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제 대학로는 조용한 곳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항상 많고 경찰도 많았던 광화문도 역시 한산해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시위가 없는 서울은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이 아닌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을 가졌다.
한국말도 연습할 겸 내가 사는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더 많이 알기 위해서 뉴스를 신중히 보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만나 ‘다스’가 누구 것이냐고 논의를 해 보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미르와 K스포츠는 어떤 재단인지 알게 되었다. 2014년 4월에는 동료들과 함께 TV 화면을 보면서 공포를 느꼈고 2015년 12월에는 위안부 합의 때문에 화 난 적도 있었다. 이 정도의 사건을 그냥 넘기고 잊어버리는 게 한국 사람들의 본성이 아닐 것 같았고 꼭 폭발할 것이라는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2016년 10월부터 터진 역대 최대 규모의 엄청난 시위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졌고 정권 교체가 되었다. 시민사회가 자기 의견과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보여 준 사례다. 물론 뭉치려는 이런 심리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2020년에 코로나19가 한참이었을 때 당국의 지시를 어기고 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집단 감염이 되었고 광복절에 모이지 말라고 함에도 모인 시위를 통해 바이러스가 더 널리 퍼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태들은 헌법이 보장한 집회의 자유가 종교적 이유로나 재난 상황에서 어느 정도나 제한당할 수 있는 것인지 논쟁점을 제시해 주었다.
지난 2017년 3월 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2017.3.4. 연합뉴스
시위에 부정적인 건 러시아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시위를 자주 하는 이런 한국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러시아에 있는 한국학계 동료들과 가끔 말다툼을 한다. 시위가 전면 금지된 러시아에서는 한국의 이런 모습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러시아 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시위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사회 무질서 야기, 세력 간 불필요한 싸움, 사회 속 폭력 증가 등과 같은 부정적 현상을 부각시킨다. 시위를 할 여유가 있으면 그 시간에 가서 돈이나 벌라는 논리다.
보수 성향이 강한 나의 동료 연구자는 특히 한국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시위 말고 이룬 게 하나도 없다고 비판한다. 한국 진보 세력은 별의별 주제를 내세우고 곧바로 시위부터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만약 민주당이 패배하면 선거 부정을 외치면서 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이라는 주장까지 했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역대 최소 차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시위를 부추기기는커녕 깨끗이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 그는 한국 사회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내 한국인 친구 중에는 한국 민주주의가 미완성형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래,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국가가 없고 지상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롭고 합법적인 시위를 통해 정부에게 요구할 것을 요구하고, 정부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늦어지거나 광화문을 돌아서 가야 할 때 기억해야 할 점이다.
출처 : 시위로 정치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한국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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