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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프트-가츠라 밀약(?)
이제 글쓰기를 쉬면서 그동안 쓴 것들을 정리하려 하는데 껀 수가 몇 개 생기네요. 아무래도 시사적이고 나의 전공과 관련된 문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며칠 전(11/12) 이번 대통령선거의 여권 후보로 나선 분이 미국 연방 존 오소프(Jon Ossoff) 상원의원을 만나 ‘태프트-가츠라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국 합방을 승인해’ 한일합방이 이루어졌다고 했더군요. 이 뉴스를 들으면서 우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싸늘해지고,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미치고 폴짝 뛰것네’ 이군요. 이 문제를 두고 미국이나 한국 학계에서 지난 수십 년간 충분히 논의되었고 결론이 난 사항입니다. 여권 후보의 말이 엉터리입니다.
이 문제를 논문 쓰듯이 다시 거론하며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아는 당시의 상황과 주변적 이야기로 안주거리나 삼으면 좋겠네요. 우선 떠오르는 것이 교육의 힘이란 참 무섭구나.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어린 시절에 잘못 입력된 지식은 평생을 가도 고칠 수 없구나, 堂狗三年(당구삼년)이라, 서당(書堂)개 삼년이면 풍월(風月)을 읊는다더니 무식(無識)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면서 엉뚱한 소리 계속해대면 진실이 되는구나, 그래서 교육은 백년대계라 하는구나, 그러면 이게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접장들이 수십 년을 두고 아니라고 해도 대통령 후보까지 된 인물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어떻게 고치라는 말인가 등등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나옵니다. 그래서 한심하다는 겁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승만 전대통령입니다. 외교적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정치와 외교문제에 정통하다고 자타가 인정했던 분이죠. 그의 주장은 해방 후 대통령이 되면서 권위를 갖게 되고 그래서 합방이나 해방과 관련된 그의 주장은 진실이 변했습니다. 1970년대 런던 주재 한국대사가 한 영국대학에 와서 한 강연은 이승만의 주장을 판박이 한 것이더군요. 이승만이라면 치를 떠는 여권 후보도 필요하면 이승만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도 신기합니다. 그렇다면 이념적 지향점이라는 건 아예 없고 필요하면 여기저기서 따와 써먹는 게 아닌가요?
사설이 장황했군요. 주제와는 약간 벗어났지만, 카이로 선언에 나온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in due course)’부터 이야기 해 봅시다. 영국에서는 너무 흔하게 쓰는 말입니다. 나의 지도교수가 나에게 6년 만에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편지로 알려주면서 학교에서 ‘in due course’를 거쳐 ‘공식 서신’으로 나에게 알려줄 것이라고 하더군요. 거창한 절차가 아니라 장학금 위원회에게 의결되었으니 학과에 통보될 것이고 그러면 학과장이 나에게 알려 줄 것이란 말을 in due course라고 쓴 겁니다. 1992년 12월 TV를 보니 John Major 수상이 의회에서 Charles 왕태자와 Diana 왕자비의 별거를 발표하면서 Diana는 별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왕비가 될 것이라는 말을 She will be the queen in due course라고 하더군요.
처칠이 카이로 선언에 이 말을 넣었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문장가인 처칠이 ‘아주 쬐금’ 영국식 멋을 부려본 것입니다. 물론 영국이 한국의 해방은 지지했으나 ‘독립’에는 영국 식민지 문제를 고려하여 소극적이었지요. 문제는 in due course가 포함된 한국조항이 당시 국민당 정부 수도인 중경에 전해지자 중국정부는 중경의 임시정부에게 영국의 한국의 독립을 지연시키려 하며 중국만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유일한 열강이라고 선전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이 말을 믿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정이 준비하던 카이로 선언 축하 연회도 취소되고 이후 중국과 영국이 한국의 독립 지연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뒤집어씌운 겁니다. 국제적으로 한심한 작태를 벌인겁니다.
장개석과 처칠이 사이가 나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카이로 회담 때 처칠은 장개석 때문에 히틀러에 대항할 유럽전선을 두고 미국과의 작전논의가 지연된다고 불평하면서 장개석에게 부인 송미령을 데리고 피라미드 구경이나 다녀오라고 하죠. 장개석은 처칠을 ‘개조되지 못한 제국주의자’라고 전기에 쓰고 있지요. 영국문서에는 카이로 선언 한국조항의 주도자는(prime mover)는 ‘분명히 미국’이라고 못 박습니다.
태프트-카츠라 각서는 더 재미있습니다. 나는 이 시기 미국문서들도 소상히 읽어 당시의 국제정치적 분위기와 태프트를 둘러싼 분위기에 익숙합니다. 할 말이 너무 많군요. 우선 이건 밀약이나 조약, 협정이 아닙니다. 의회의 인준이나 대통령의 서명도 없고, 국무장관의 서명도 없는데 무슨 국제조약입니까? 억지로 이걸 조약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1905년 7, 8, 9월은 연달아 동아시아와 한국과 관련하여 체결된 3개의 국제조약 중 하나입니다. 7월이 태프트-카츠라, 8월이 2차 영일동맹, 9월이 러일전쟁을 종결한 포츠머스 평화조약입니다. 그만큼 당시 동아시아 정세가 급격히 돌아가고 열강들은 상호 이해를 조정했다는 말입니다. 태프트-카츠라를 통해 (여기서도 의미를 쬐끔이나마 부여한다면) 미국과 일본이 지역정세를 두고 의견을 교환했다는 겁니다.
이 중 어느 것이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2차 영일동맹 조약입니다. 태프트-카츠라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영일동맹이 지역의 두 군사강대국이 전쟁 후 나타날 동아시아 정세를 규정한 것인데 포츠머스 조약은 그 내용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2차 영일동맹에서 영국과 일본은 동맹의 범위를 영국의 방어선이 취약한 인도 국경까지 넓히고 그 대가로 러시아의 복수전을 우려하는 일본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동맹의 성격을 방어동맹에서 공수동맹으로 바꿉니다. 방어동맹은 제3의 국가가 러시아를 지원하면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다는 것이지만 공수동맹은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일본을 돕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 설정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러일전쟁 초기부터 일본의 한반도 점령으로 존재해 있던 사실을 승인하는 것뿐이라고 하지요.
아마도 가장 큰 오해는 당시의 미국을 오늘날 전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과 같은 수준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강대국이었지만 군사 강국이 아니었습니다. 필리핀을 장악했지만 변변한 해군도 없었지요. 육군은 주 방위군 수준이었구요. 그래서 경제적 문호개방과 같은 허황된 구호로 열강들을 설득하려하지만 누가 따르려 하던가요? 13년이 지난 1918년 6월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프랑스에 도착한 미군조차 보이 스카우트 같았다고 유럽 국가들은 비웃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식민지와 해군을 함께 보유한 실질적 강대국은 영국이었지요. 그러나 유럽의 정세가 독일의 해군력 증강으로 악화되자 영국은 1906년 (1905년이 아니라) 태평양에서 해군력을 철수시켜 유럽 해역에 재배치합니다. 미국은 1907년에야 흩어져 있던 전선들을 규합하여 진주만에 태평양 함대를 창설하죠. 그리고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1907년 12월 세계 일주에 나섭니다. 이것이 Ted Roosevelt의 ‘Great White Fleet’ 혹은 ‘Naval Demonstration’이라고 합니다. 1905년이라면 일본을 위협/협박할만한 변변한 해군력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일본이 한국의 합방을 위해 동의를 적극적으로 구한 열강을 꼽으라면 오히려 러시아일 것입니다. 1910년 초 일본은 합방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열강들의 입장을 타진합니다. 먼저 동맹국으로 가장 호의적일 것 같은 영국입니다. 그러나 영국은 2차 영일동맹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만 인정했을 뿐 합방에 관한 공약은 없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미국은 일본과 직접 부딪치기 보다는 영국을 통해 일본의 의도를 확인하려 합니다. 일본은 영국을 집요하게 설득하면서 협상을 통해 관세 등 영국이 중요시하는 무역 분야에서 양보하고 합방에 대한 동의를 받아 냅니다. 영국은 이 결과를 미국에 통고하고 ‘자, 이만하면 되었지?’식으로 합방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 합니다. 미국은 일본과 협상다운 협상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동경주재 미국대사는 영국대사를 만나 뭐 새로운 진전이 없는지 타진하죠. 미국은 서양인 중 자국인이 한국에 제일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이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치외법권을 강조하는 선에서 합방에 동의합니다. 이게 1910년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이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접근합니다. 일본은 만주의 경제적 문호개방을 요구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 아래 러시아와 싸웠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이들과의 협력보다는 과거의 적대국이었지만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인 러시아와 손을 잡고 만주를 양분합니다. 미국과 영국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후 이들 양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됩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손잡고 이들의 이권을 만주에서 배제해 나가지요. 이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입니다. 일-러 양국은 만주와 한국을 두고 1907년과 1910년 두 차례 협정을 맺습니다. 이 협정으로 한국의 합방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1910년 7월 2차 협정이 체결된 지 1개월이 지나지 않아 합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요. 그러나 러시아의 언론들은 일본이 한국을 삼켰지만 소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요. 결론적으로 일본은 한국합방은 열강들에게 강압적으로 요구(impose)한 것이며 이를 저지할 힘이 없는 열강들은 자발적으로 동의하기보다 이익이나 챙기는 선에서 수용(accept)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태프트-카츠라 밀약으로 잘 알려진 태프트(William H. Taft) 이야기를 할까요? 그는 1905년 육군장관이었습니다. 1908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1912년엔 테드 루즈벨트가 다시 출마하여 둘 다 윌슨에게 패배합니다. 그러나 태프트나 루주벨트 모두 일본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선진국이고 중국과 한국은 보수적인 야만이라고 보았지요. 또 영국과 같이 일본의 시선을 이권이 산재한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돌리려했습니다.
1907년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의 연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문명 강대국이 후진 약소국에 간섭(intervention)하여 이를 개혁하는 행위를 당연한 권한이며 이것은 강대국들에게 전략적 필요성에 의한 간섭과 동일한 수준의 정당한 이해라고 강조합니다. 태프트는 1907년 일본을 방문 중 연설을 통해 한일관계를 이같은 관점에서 평가하지요. ‘일본은 15세기적 방법으로 [잘못] 통치되고 있는(governed or misgoverned) 가까운 이웃인 고대 왕국을 개혁하고 소생시키기 위하여 정당한 이해(legitimate interest)를 갖고 이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 ‘밀약’ 2년 후 양국관계가 캘리포니아 이민 등의 문제로 전쟁 가능성까지 언급될 정도로 악화됩니다. 그런데 미국정부는 이 ‘밀약’을 거론조차하지 않았습니다. 두 국가 간에 위기상황이 조성되면 정책 입안자들은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기존의 조약들을 점검하며 이것을 기준으로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1907년의 위기에서 미국무성은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양국관계에 의무를 규정하는 협정이나 조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Taft의 전기에 의하면 Taft는 심각한 협상을 위해(to conduct serious negotiations) 일본을 방문한 것이 아니며 일본정부 지도자들의 면담 내용도 육군장관인 자신이 국무성의 업무에 간섭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국무성에 보고하지 않고 대통령에게 사신으로 보낸다고 쓰고 있습니다. 전권을 받은 대표가 서명한 조약이나 협정이 아니고, 일본-미국 간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대화록 혹은 각서(memorandum)인 셈이죠.
이상의 과정을 두고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국을 ‘교환’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소유권은 확고하며 열강들이 모두 인정했지요. 미국은 어떠한 간섭도 독자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왜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의 안보에 대한 보장을 받습니까? 이 ‘밀약’은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요. 미국의 역사학자 Tyler Dennett이 미 의회도서관에서 이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Dennett는 학자라기보다는 글쟁이, 정치 평론가, 기자, 선전 담당원 등을 의미하는 publicist에 가깝습니다. 그로서는 한 껀 한 셈이지요.
학계에서는 이미 잊힌 이야기가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이승만 등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 덕분입니다. 재미독립운동가들은 ‘옳타구나, 이제 미국에게 빚을 갚으라고 해도 되겠구나’라고 하면서 합방 때 미국이 한국을 배신했으니 이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책임지라면서 질타하고 나선 겁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다음해인 1942년 3.1절 기념식은 장관이었죠. 이를 참관한 미국무성 관리는 올린 보고서를 보면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한 어떠한 프로그람이나 전략도 제시하지 않고 이 ‘속죄(atonement)’만 외치고 있다는 는 겁니다. 이게 이후 미국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비판하는 요지입니다. ‘늙은이들로 구성된 임정이나 이승만은 독립을 위해 죽을 수는 있다면서 어떤 방안도 내놓지 못한다’는 겁니다. 또 자기 나라를 자기들이 지키지 못하면서 왜 미국이 속죄하라는 말이냐고 합니다. 이승만이 필요하면 이 ‘밀약’을 꺼내 미국을 비난하니 이것이 이후 한국에서는 진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을 그토록 싫어하는 여권후보도 미 상원의원을 상대로 미국이 ‘속죄’하라고 당당히 주문한 것 아닌가요?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지는군요.(202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