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함께 한 냉장고 님이 마지막 숨을 가늘게 뱉어내고 장렬히 스러지셨습니다. 이사할 때 들여온 것이니 만 21년이 되었네요.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엔 한 번 들이면 오래 가는 게 참 많습니다. 외삼촌이 입으시던 걸 받아 제가 입은 세월만 20년이 넘는 코트도 있었습니다. 에어컨도, 브라운관 TV도, 세탁기도 20년을 쓰고 바꾸었습니다. 제 애마도 15살, 39만㎞나 저와 함께 살아왔습니다. 저는 손때 묻은 것, 낡은 것이 좋습니다. 애정이 더 갑니다. 그러나 세탁기도, 냉장고도, TV도, 에어컨도 20년씩이나 쓸 수 있게 만들었으니, 환경부하를 적게 주고 기술력이 최고지만 수익성을 낮추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오랜만에 제 친정, LG전자 걱정도 해봅니다.
새 냉장고를 들이기 위해 사망 선고 받은 냉장고의 냉장실, 냉동실을 정리했습니다. 크지 않은 냉장고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오는지, 버릴 게 태산이었습니다. 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었습니다. ‘소욕지족’을, ‘버리기’, ‘빼기’를 수도 없이 얘기하고 체화시키고자 했건만,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냉동고에서 빼낸 음식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이것도 있었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언젠가 먹을 거라고, 아껴 먹을 거라고 넣어두곤 까맣게 잊어버린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버려야 할 아까운, 혹은 전혀 아깝지 않은 먹거리의 뒷정리를 하면서 아내와 의논하여 정했습니다. 이제부턴 냉장고 구획 별로 1단으로만 투명 용기에 보관하고, 냉장고 용량의 반 이상을 채우지 않기로. 꼭 필요한 것 위주로 사고, 있어도 좋은 건 꼭 사야 하는 건지 한 번 더 고민하기로. 그리고 지인이 정성으로 준다고 다 받을 게 아니라, 며칠 내로 먹을 수 있는 것만, 그만치 분량만 받기로...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도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는 적정 인구는 얼마일까,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계산을 해서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자원의 양을 그 자원 생산에 필요한 땅 면적으로 환산한 생태 발자국 개념에서 프랑스 수준이면 30억 명, 한국 수준이면 22억 명 수준으로 줄여야 한답니다(국제생태발자국네트워크의 계산치 기준). 1994년 진화생물학자 폴 얼리크가 모든 사람이 알맞은 부와 기본권을 누리고, 문화 및 생물 다양성이 보장되며 사람들의 창의성이 잘 발현되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한 적정 인구는 20억 명 이하였습니다. 이미 우리 지구는 2.5배를 초과해 버린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익성은 떨어지더라도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적정한-최적이 아닙니다- 환경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20년 쓰는 냉장고, TV가 필요한 겁니다. 개개인들에겐, 오래 입고 쓰고, 필요한 만큼만 먹고 소비하는 습관들이 필요한 겁니다. 이미 용량을 한참 넘어버렸기에 삶의 질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소욕지족’은 필수입니다. 줄이고, 아끼고, ‘늘이기’ 대신 ‘유지하기’, ‘빼기’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추석 연휴, 넘치는 먹거리를 보며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욕심 내려놓기, 줄이기, 빼기를 더욱 신경 써서 해야겠습니다. ‘빈 잔의 자유’를 새기며 비움의 미학에 조금 다가섭니다.
가을의 자연은 갈무리, 비움의 미학을 깨닫게 해줍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2102059724
빈 잔의 자유를 보라(모셔온 글)==============
잔을 비울수록 여유가 있다.
그것이 술이라도 좋고 세월이라도 좋고
정이라도 좋다.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조급함을 버리고,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우리의 잔은 채울 때보다 비울 때가 더 아름답다.
빈 잔의 자유를 보라.
그 좁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를
그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일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무언가에 자꾸만 집착이 갈 때,
삶이 허무하여, 믿음이 가지 않을 때,
빈 잔을 보라! 가슴이 뛸 때까지 보라!
비우는 잔마다 채워질 것이다.
투명한 것을 담으면 투명하게 보일 것이요,
따뜻한 것을 담으면 따뜻한 잔이 될 것이다.
---- M. W. 히크먼, ‘상실 그리고 치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