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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인 목사 /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 (민 12:1-16)
이 시간에는 민수기 12장 1절에서 16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3절을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말씀그대로 지면의 모든 사람, 즉 세상에 사는 천하만민 그 누구보다 온유한 모세가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승리도 패배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습니다. 승리를 말할 때에 오늘날의 사회는 '경쟁하며 사는 사회'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회는 "너 혼자 잘 되라. 너 혼자 다 먹어라"하며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입니다. 무엇인가 잘 된다고 하면 경쟁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선의의 경쟁은 좋은 것입니다. 선의의 경쟁은 "네가 잘 하냐? 그럼 나는 너보다 더 잘하겠다" 또 다른 사람이 "나는 잘하는 너 보다 더 잘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계속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결이라고 하는 것은 저마다 망하기 쉬운 것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 혹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살겠다"라는 식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까? 이럴 때에는 다 같이 망하고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결은 좋지 않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좋긴 좋지만 그래도 우리가 선의의 경쟁에서 패배하면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선의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하고, 승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게되면 하나님이 경쟁의 마당에서 모세의 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즉 경쟁하는 이 사회 속에서 승리하는 사람, 즉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상고해 봅니다.
I. 온유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1-3)
온유가 무슨 뜻이냐고 질문할 때 속으로는 '이것이다' 혹은 '저런 뜻이다' 라고 감을 잡으면서도 확실하게 대답하라고 하면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온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온유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외유내강'이라고 하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밖으로는 상당히 순하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직합니다. 마음속까지 물러 터지면 그 사람은 그 어디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속으로는 강직하면서 겉으로는 아주 부드럽고, 유순한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야생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입니다. 야생마는 매우 사납습니다. 저는 '동물의 세계'를 즐겨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는 중에 사자가 야생마를 잡아먹으려고 덤볐다가 야생마가 뒷발질을 하는 바람에 사자의 턱이 부셔졌습니다. 이런 턱으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므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야생마는 사납습니다. 힘이 매우 강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야생마를 끌어다가 얼마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즉 길을 들입니다. 길들이면 야생마가 힘이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강한 힘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나운 성질은 그대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순해졌습니다. 그러니까 힘은 여전히 남아있으나 매우 순해졌습니다. 길들여진 야생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온유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야생 코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사납습니까? 사람에게 달려들어 해치려고 야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코끼리도 사람이 붙잡아 쇠고랑을 채우고 얼마동안 훈련을 시키고 길들이면 더 이상 순해 질 수가 없습니다. 힘은 그대로 있기에 일도 잘합니다. 이러한 경우를 '온유'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경에서 이삭을 온유한 사람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 가서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가 되고, 목축업을 하였더니 떼가 떼를 이룹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이 달려들어 빼앗아 버립니다. 이때 이삭은 빼앗는 대로 빼앗깁니다. 그리고 쫓아내는 대로 쫓겨갑니다. 몇 번을 반복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쯤 되면 망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는 블레셋의 왕이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하며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넓은 곳에서 마음놓고 번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시낭독으로 읽어주신 말씀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여기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라는 말씀은 승리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빼앗겼다' 혹은 '잃었다'고 하게 되면 패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승리할 것이요' 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3절을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보게 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서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결혼을 합니다. 본처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가 구스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모세의 형이 되는 아론과 그 위에 누님이 되는 미리암이 모세에게 야단을 치고 비방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하는 얘기들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십니다. 아내에게 야단치는 일도, 아내가 잘못한 일도 없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야단치는 소리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철야 기도회, 새벽 기도회 나간다고 야단치고 괴롭히는 남편들의 모습을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고, 들으시고 계십니다.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뭐라고 해도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선언 하셨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야단쳐도 말 한마디 대꾸하지 않는 온유한 모세가 승리했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가 말대꾸를 하지 않기 때문에 지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주시면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즉 온유한 자가 잘됩니다.
모세는 주먹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도 주먹으로 다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에서 배운 학술로 역시 하나님의 일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배운 학술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먹이 강한 모세는 히브리인을 야단치는 애굽사람을 쳐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나운 모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고, 또 승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탄로 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모세가 얼마나 죽어지고 썩어집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능력을 받고, 보냄 받아 승리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설명을 드리자면 이 광야 40년 동안에 모세가 하나님께 단단히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도하던 모세가 하나님께 길들여진 이후로는 정말 온유하고 겸손해 졌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온유라는 말은 이런 뜻인 줄 아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단단히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으로서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는 패할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손들어 주시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노나라에 '안자'라고 하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왕궁에 출, 퇴근할 때 마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문간방에 마부를 위해서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습니다. 얼마동안 이 마부가 마부 노릇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해 와 보니 아내가 짐을 다 싸 놓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주인님이 나가라고 하시더냐?"마부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당신의 모습을 보니 희망이 없는지라 당신과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서 내가 나가려고 합니다"고 합니다. "다른 남자가 생겼느냐?"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과 살기 싫어서 그럽니다"고 합니다. "왜 나와 살기 싫으냐?" "당신은 당신 모습을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까? 안자 재상님은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한데 그 마부 노릇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거만하고 도도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그렇게 없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나는 당신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마부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자기 자신은 하늘천자도 모르면서 재상의 배경만 믿고 자만하고 도도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깨닫고 그 날 밤부터 아내 앞에서 천자문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퇴근 후에 필요 없는 일을 하고 큰소리치며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집에서 공부만 합니다. 몇 해 동안 좋은 책들을 다 읽고 배웠습니다. 실력이 부쩍 늘고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마침 임금이 안자 재상에게 좋은 사람 있으면 천거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자기의 마부를 천거하였습니다. 마부에게 좋은 자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보람 있게 혹은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갔다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거만하고 도도하지 맙시다. 누구를 믿고 그렇게 살아갑니까? 글자 한 자 더 아는 것, 아파트 몇 평 더 넓은 것으로 거만하게 노십니까? 남보다 한 자리 높다고 도도합니까? 그것이 항상 그렇게 유지되는 것입니까? 거만하고 도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온유한 자를 도와 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충성된 사람이 승리합니다 (4-8)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겨주셨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딤전 1:12). 여기서 충성이 먼저 입니까? 직분이 먼저 입니까? 충성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 고린도전서 4장 2절을 보면 '직분 맡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다.'라고 합니다. 직분이 먼저 입니까? 충성이 먼저입니까? 직분이 먼저입니다. 충성은 나중입니다. 두 곳에 있는 말씀을 종합하면 충성이 먼저인 동시에 나중입니다. 즉 처음에도 충성, 나중에도 충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 혹은 하나님은 이일, 저일 하는 일꾼들에게 처음도 충성을 보시고, 나중에도 충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일꾼에게서 충성을 제하면 이미 일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충성한다' 는 말을 '아만' 이라고 합니다. '아만' 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찾아보면 어떤 곳에서는 '충성한다.'라고 번역을 했고, 어떤 곳에서는 '믿는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충성한다.'는 말의 뿌리를 찾아가면 '아만'이고, '믿는다.'라는 말의 뿌리를 찾아가면 역시 '아만'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 즉 유대 사람들은 충성과 믿음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믿음을 하나로 본 것입니다. 이 말을 설명 드리면 "네가 믿음이 있느냐? 그러면 충성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충성이 없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아무 것에도 쓸 수 없는 믿음입니다. "네가 충성하느냐? 그러면 믿음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 이해 타산에 따른 충성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진실한 충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믿음으로 충성하고, 또 충성하는 믿음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충성은 항상 정비례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 올라가면 충성도 올라가는 것이요, 믿음이 떨어지면 충성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귀하게 보시는 만큼 충성도 귀하게 보십니다. 충성하는 자의 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하실 때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은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4절에서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 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 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서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리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 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결혼 문제로 모세의 누님 되는 미리암이 야단을 칩니다.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모세에게 시집 온 구스 여자는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가시 방석 위에 앉은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암이 시누이 노릇을 단단히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형 아론이 왜 야단입니까? 모세가 구스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으면 구스 여자가 모세와 함께 사는 것이지 아론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여자도 말 한마디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너희 삼형제는 나오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회막 앞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또 실제적으로 임재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 구름기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또는 밤에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라고 믿었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론과 미리암이 앞으로 나갑니다. "내가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는데 너희들이 왜 야단이냐? 내가 세운 모세가 마땅치 않으면 내가 처리할 일이지, 너희들이 왜 야단이냐?"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 대하여 "세상에서 지금까지 나의 일꾼들이 많이 있었지만 모세처럼 충성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성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충성하는 모세의 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하시는 순간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하였습니다. 남들이 '미련하다'고 할만큼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손을 들어 가정생활의 승리, 교회 생활의 승리, 직장 생활의 승리를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학에서 문제를 풀려면 반드시 공식이 있어야 합니다. 수학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기본원리가 공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식을 문제에 대입하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다 풀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쉬운 문제일지라도 공식을 빼고 풀려고 하면 풀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수학 문제를 푸는 원리가 공식입니다. 공식이 없이는 수학이 수학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동서남북 어디에 가도 모두 물뿐입니다. 열두 바퀴를 돌아도 얼마나 돌았는지를 모릅니다. 거기에 해도, 즉 바다의 지도를 갖다놓고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만 가지고서는 절대 찾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 나침반을 가지고 가면 곧바로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배가 조금만 기울어져도 어디로 얼마만큼 방향이 돌아갔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침반을 따라 가게되면 틀림없이 그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해하는 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을 빼 버리게 되면 방황하고, 파손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일꾼들에게 충성이라는 것을 빼고 나면 수학에서 공식을 빼는 것, 그리고 항해하는 사람에게서 나침반을 빼는 것과 같습니다. 충성이 없는 일꾼은 일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성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리석다'할 정도로 충성하는 자의 편을 들어주시고, 충성하는 자에게 축복하시고, 힘을 주시고, 오른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기도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9-16)
본문 9절에서 1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로 살이 반이나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같이 되게 마옵소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칠 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 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이에 미리암이 진 밖에 칠 일 동안 갇혔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진행치 아니하다가 그후에 백성이 하세롯에서 진행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님 미리암을 불러서 호통을 치고 야단을 치신 다음에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는지 아십니까? 야단을 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고 떠나신다면 참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떠나자마자 미리암이 온 몸에 문둥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아주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얼굴에 침을 뱉다가 당한 고난입니다. 그때 모세의 형 아론이 우리가 잘못했으니 용서하고 이 누님을 위해서 좀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모세는 다른 말 한마디도 없이 누님을 위해 간절히 한마디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자기 아비에게 침을 뱉은 자식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칠 경우에도 칠일간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내 얼굴에 침 뱉은 미리암,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칠일동안은 진 밖에 가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칠일동안 진 밖에 가두는 동안에 회개하고 거기서 문둥병을 고침 받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길을 가지 못하고 칠일을 기다렸다가 떠납니다. 한사람의 잘못이 많은 백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준 것입니까? 나 한사람의 잘못으로 내 가정 식구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다고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할 때 아무 말 없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모세의 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기도하는 모세가 누구보다도 낫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장사꾼 한 명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갔습니다. 시골 어느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선반에 아주 이상한 돌이 있습니다. 이 장사꾼은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돌이 무슨 돌인지를 모릅니다. "저 돌이 어떻게 된 겁니까?"하고 주인에게 묻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하는 말이 "내 아들이 어디 어디에 가서 주워 온 돌입니다" 그때 장사꾼이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주겠습니다, 이 돌과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내 아들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옵니다. 장난감을 주고 눈깔사탕 몇 개를 얹어주었습니다. 돌을 가지고 케이프 타운으로 갔습니다. 그 돌을 보석상에서 12만 5천 달러에 팔았습니다. 그때 돈 12만 5천 달러면 요즘은 백만불이 될지도 모릅니다.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그 돌이 보석인줄 알면서도 눈깔사탕 몇 개 얹어 주고 바꾼 영국인은 날도둑놈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 탓할 일이 아닙니다. 보석을 보석으로 여기지 못하고 귀한 것을 천히 여긴 집주인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귀한 것을 천히 여길 때 이런 꼴이 되어집니다.
전에 부산에 다녀올 때의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 한 분과 비행기를 같이 타고 왔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영호남 화해한다고 해서 영남지방에 있는 여러명의 목사님들이 청와대의 초청 받아 갑니다"라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가서 밥한 끼 먹고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면서도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을 다 제쳐놓고 "너는 나와 단 둘이서 독대하자"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독대하자고 하십니다. 그게 바로 기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도하는 특권, 언제고 찾아 와서 독대하자고 하는 이 특전의 은혜가 이렇게 큰데 기도를 아주 무식한 사람이나 하는 줄로 여기고, 가난한 사람이나 하는 독백으로 여기고, 할머니들의 넋두리쯤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있다고 하면 비참한 결과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기도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귀한 기도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승리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손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승리해야 합니다. 물론 마귀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해야 하지만 경쟁하는 사회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주실 때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첫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길들여 쓰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서 승리하였습니다. 둘째는 충성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만큼 충성을 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충성된 자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셋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일할 때 일하는 것은 나이지만 기도할 때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처럼 살고 모세처럼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