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남 연합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 20일~27)
2차 진주성전투에 참가해서 장렬히 전사했던 장수들은 호남사람들이 많았다.
창의사 나주사람 김천일장군, 충청병마사 남원사람 황진장군, 경상우도병마사 화순사람 최경회 장군,
고경명의 아들 장흥사람 고종후장군,
김해부사 남평사람 이종인 장군 등 호남 출신 장군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원수 권율장군, 선거이 장군, 의병장 곽재우장군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십만 왜놈들에 맞설 용기가 없던 것이고 목숨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막 도원수가 된 권율은 중과부적이라 진주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병력차를 보고 "이 전투는 미친 짓이야, 여기서 나가야겠어."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저런데서 개죽음은 못당하겠다." 면서 진주성 구원을 포기했다.
전라병사 선거이와 영천군수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곽재우는 좌순찰사 김늑이 그를 꾸짖기를
"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에 어쪄려는가? 하자 곽재우 말하기를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 변명했다.
그런데 육만 진주성 백성을 버린 무장을 어찌 영웅시 할 수 있을까?
정략적으로 진주성에 입성하지 않은 도원수 권율과 영남 의병장 곽재우??
군인의 역할이 목숨이 경각이 달린 국가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군인을 믿고 살기 위해 입성한 육만 경상도 백성들은 어찌할꼬?
호남 의병장 김천일 장군은 " 나 죽을 곳이 이곳이다.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다.
최경회 장군도 비통을 안고 역시 남강에 투신한다.
서예원 진주성주를 대신하여 싸운 장윤장군은 전사한다.
서예원은 목이 베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주을 목을 베어오라고 지시했기에
서예원을 김시민 장군이라 오인하고 목을 베고 그 목이 히데요시에게까지 간다.
김해부사 남평사람 이종인장군은 왜놈을 양팔로 목을 잡고 남강에 투신한다.
그는 마지막에 죽을 때도 양 겨드랑이에 왜적 두놈을 끼고서
"나 김해부사 이종인, 여기에서 죽는다."라고 외치며 남강에 뛰어들었다.
살아남은 백성 하는말, 황진 장군이 살아계셨으면 진주성은 보전되었을 것이다.
29일. 적병이 진주를 함락시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이상 3인은 삼충(三忠)이라 하는데 그 뒤 8년 만에 진주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워 제사지내다. 전라 복수대장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 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 부장 장윤, 적개 의병 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영광 의장(靈光義將) 심우신(沈友信), 태인 의장(泰仁義將) 민여운(閔汝雲), 해남 의장(海南義將) 임희진(任希進), 도탄 복병장(陶灘伏兵將) 강희보(姜希甫), 의장 이계련(李繼璉), 김해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泗川縣監) 김준민(金俊民), 남포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
진주목사 서예원 등이 다 죽다.
충남 수령을 따라온 병사 중에 죽은 이가 심히 많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적이 매일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하자, 속이기를, “사창대고(司倉大庫)에 피난하여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운운”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협박을 당하여 앞다투어 창고에 들어갔더니 적이 한번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다. 남원 사람으로 여러 의병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던 자가 3백여 명인데 남강(南江)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뿐이었다. 적이 성과 참호를 다 헐어버리다. 군사의 죽은 수효는 아래에 상세히 보인다. 적이 바야흐로 성에 들어올 때에 최경회ㆍ김천일이 달아나 촉석루(矗石樓)에 오르니 장수와 군사들이 다 모였다. 적병이 죽이며 나아오는데 이잠ㆍ김준민 등은 화살이 이미 다되어 바로 죽창을 가지고 육박전으로 싸우니, 적병이 잠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되어 죽었다.
천일 등은 서로 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작된 2차 진주성 전투에
고니시유키나가, 가토기요마사, 시마즈, 우키다 히데이에, 미시다 미츠나리, 모리 히데모토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왜놈 명장과
왜놈 십만명이 공격했고 4만명이 죽었다.
25전 24승 2차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의 종언을 알린 전투였다.
진주성전투 이후 일본군은 호남공격을 포기하고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4년간 육지에서는 평화가 찾아온다.
▶ 제1기- 임진왜란 1592.4 ~ 1593. 6
▶ 제2기- 휴 전 1593.6 ~ 1597. 7
▶ 제3기- 정유재란 1597.7 ~ 1598. 11
제2차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사를 바꿔버린 전투였으며 사실상 왜란이 끝난 전투였다.
아이러니하게 제2차 진주성전투의 지휘부는 거의 호남사람이었다.
주논개는 몰락 양반집안의 여식으로 장수현령 최경회의 후처다.
주논개는 황진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한다.
안성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잡힌다.
황진이 논개를 구출하고 황진과 주논개가 함께 들어온다.
슬프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남을 구하고자 몸부림친 호남인들과
영남인은 서로를 탓하고 미워하는가?
민족사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