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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캐나다]/정연희 譯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 Alice Ann Laidlaw) 소설가 출생; 1931년 7월 10일 (캐나다)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
어린 시절 나는 길게 뻗은 길 끝에서 살았다. 아니 어쩌면 내게는 길게 느껴졌던 길 끝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집으로 걸어 돌아올 때, 내 등뒤 진짜 타운에는 활기찬 분위기와 보도와 어두워지면 켜지는 가로등이 있었다. 메이트랭드 강에 놓인 두 개의 다리가 타운의 끝을 표시했다. 하나 는 좁은 철교로, 그 다리를 지나는 차들은 이따금 차를 옆으로 빼고 다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골치 아픈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목조 보행교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의 판자 하나가 사라져서 그틈새로 빠르게 흘러가는 투명한 물살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지만 항상 누군가 기어코 판자를 다시 끼워놓고 갔다. 그리고 약간 움푹 팬 곳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집 두 채가 있었다. 그 집은 봄만 되면 물에 잠겼지만 어쨌거나 늘 사람들-사람들이 바뀌었다-이 와서 살았다. 그리고 물레방아를 돌리는 수로 위에 다리가 하나 더있었는 데, 수로는 좁긴 했지만 사람이 빠져 죽을 만큼 깊었다. 그곳을 지나면 길리 갈라져, 한쪽은 남쪽으로 뻗어 오르막이 되었다가 다시 강을 건넌 뒤 진짜 고속도로와 이어졌고, 다른 쪽은 홱 꺾어져 예전에 축제가 열리던 광장을 돌아 서쪽으로 향했다. 그 서쪽으로 난 길이 내 길이었다. 북쪽으로도 길이 나 있었는데, 그 길에는 짧지만 진짜 보도가 있었고 타운에서처럼 집들이 몇 채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중 한 집의 창문에는 “살라다 티”1)라고 쓰인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한때 그곳에서 식료품을 팔 던 흔적이었다.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 내 인생에서 이 년 동안 다녔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 시기 이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추겨 타운에 있는 낡은 가축우리를 구입했다. 타운에 세금을 내야 나를 타운에 있는 학교에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이, 내가 타운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해 바로 그달에 독일과의 전쟁이 선포되어 원래 내가 다녔던 학교-못된 아이 들이 내 점심을 빼앗아가고 나를 두들겨 패겠다고 협박했던, 소란스럽기만 했지 어느 누구도 무엇 하나 배우지 않은 것 같던 그 학교-가 마법에 걸린 듯 잠잠해졌기 때문이었다. 곧 그 학교에는 교실 하나와 교사 한 명만 남게 되었는데, 그 교사는 아마 휴교중에 문도 잠그지 않았을 것이다. 걸핏하면 허세를 부리듯 섹스하고 싶지 않은지 물어서 나를 놀라게 했던 남자아이 들은 그들의 형들이 입대를 하자 일자리를 얻으려고 안달이었다. 그때쯤에는 그 학교의 화장실이 개선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최악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집에서 옥외 화징실을 쓰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집 화장실은 깨끗했고 바닥에 리놀륨도 깔려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아예 무신경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누구 하나 구멍을 겨냥하는 것 같지 않았다. 타운 생활 역시 여러 면에서 내게 쉽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1학년 때부터 같이 생활한데다, 나는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 학교의 더럽지 않은 변기시트와 수세식 변기의 고상하고 도시적인 소리는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첫 번째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친구를 한 명 사귀었다. 여기서 다이앤으로 부를 그 아이는 내가 2학년 때 전학을 왔다. 내 또래였고, 집앞에 보도가 있는 집들 중 한 채에서 살았다. 어느 날 다이앤이 내게 하일랜드 플링2)을 출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내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애가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생각을 하며 수업이 끝난 뒤 그 아이의 집으로 갔다. 다이앤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서 조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 아이는 하일랜드 플링을 추려면 딸깍 구두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그 아이에게는 있었지만 내게는 없었다. 우리는 발 크기가 거의 비슷해서 그 아이가 나를 가르치는 동안 신발을 바꿔 신을 수 있었다. 목이 마르면 다이앤의 할머니가 마실 물을 주었는데, 학교에서 마시는 물처럼 삽으로 판 우물에서 끌러올린 물이라 맛이 지독했다. 내가 우리집에서는 우물을 드릴로 뚫어서 물맛이 훨씬 좋다고 하자,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자신들도 그런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때 하필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갔고, 내가 어디로 갔는지 너무 빨리 알아내버렸다. 어머니는 차를 빵빵거려 나를 불러냈고 할머니가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데도 본체만체했다. 어머니는 운전을 자주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운전대를 잡으면 불안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집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결국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는데 며칠 뒤부터 다이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이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고 어머니는 안다고 했다. 내가 하일랜드 플링에 대해 말하자, 어머니는 언젠가 그 춤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겠지만 그 집에서는 아니라고 했다. 다이앤의 어머니가 매춘부였고 매춘부들이 잘 걸리는 병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소원이 고향에 묻히는 것이어서 우리 교회 목사님이 장례식을 집전했다. 그런데 그가 인용한 성경 구절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그가 옳았다고 믿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로마서 6장 23절) 어머니는 오랜 시간 뒤에, 아니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었을 때 내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싫어했던 시기였고, 특히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격앙되기까지 한 그 목소리로 확신에 차서 말할 때는 더욱 그랬다. 나는 계속 다이앤의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늘 살며시 웃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오래 다니는 것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다이앤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디에 있건 다이앤도 그곳에서 제법 오래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나만큼 오래는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다이앤이 토론토에 있는 레스토랑에 일자리를 구했고 그곳에서는 스팽글이 달린 의상 을 입는다고 했다. 그때쯤에는 나도 그곳에서는 스팽글 의상을 벗기도 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만큼 나이를 먹었고, 충분히 영악했다. 내가 학교를 오래 다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이앤의 할머니만은 아니었다. 내가 사는 길에는 타운의 집들보다 더 널찍한 간격으로 지어진 집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 사유지라고 할 만한 땅은 별로 없었다. 그중 한 채는 작은 언덕위에 있었는데, 1차대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외팔이 퇴역 군인 웨이티 스트리츠의 소유였다. 그는 양을 키웠고 아내가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그의 아내를 딱 한 번 보았는데, 펌프로 물통에 마실 물을 받고 있었다. 웨이티는 학교를 그렇게 오래 다니고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공부를 끝내지 못한 것이 딱하다며 나를 놀려대곤 했다. 나도 그 말이 사실인척 하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어떻게 믿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당신이 그 길 사람들을 아는 방식이자 사람들이 당신을 아는 방식이었다. 당신이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들도 인사를 하며 날씨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차를 몰고 가는데 당신이 걷고 있으면 당신을 태워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생계를 꾸리는 방법도 어느 정도는 모두 같은 진짜 시골 같지는 않았다. 내가 오 년 과정을 완전히 끝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여느 아이들 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학생도 얼마 없었다. 그 시절에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9학년 학생들 전부가 지식과 올바른 문법 실력 을 갖추고 13학년을 마칠 거라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파트타 임 직장을 구했고 그 일이 점차 플타임으로 바뀌었다. 여자들은 결혼해 서 아기를 낳거나 혹은 아기를 낳고 결혼을 했다. 13학년이 되자 학생 수는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훗날 그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건, 학구적인 분위기, 어떤 진지한 성취감, 혹은 조용하고 비현 실적인 분위기 같은 것이 감돌았다. 나는 첫 번째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9학년 때 알았던 사람들 대부분과도 한평생만큼이나 떨어진 느낌이었다. 내가 청소를 하려고 식사실 구석에서 일렉트로룩스 청소기를 꺼낼 때면 거기 놓인 어떤 물건이 번번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것이 무엇이지는 알았 다. 골프 클럽과 공이 들어있는 완전히 새것 같은 골프 가방이었다. 다만 그런 것이 우리집에 있다는 게 늘 의아했다. 나는 골프는 전혀 몰랐지만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에 대해서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처럼 오버올을 입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도 시내에 나갈 때는 더 좋은 작업복 바지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운동복 같은 옷을 입고 바람에 나부끼는 가느다란 머리칼에 스카프를 둘러 묶은 어머니의 모습은 어느 정도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공을 쳐서 홀에 넣으려고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 경박한 행동은 어머니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때 어머니는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다른 부류가 되려고, 어느 정도 여가를 즐기는 부류로 살아보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골프. 디너파티. 아마도 거기에 경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헐벗은 캐나다 순상지3)의 농장-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농장보다 훨씬 암울한- 을 떠나는 데 성공해 교사가 되었고, 어머니가 교사처럼 말하고 다니자 친척들은 그녀를 불편하게 여겼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으니 어머니는 어디에서든 자신을 반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타운 사람이든 누구든 그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그것을 과시할 기회를 절대 주지 않으려 했다. 골프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이긴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에게 꽤 괜찮은 농장을 물려받은 아버지가 부모의 기대대로 사는 것에 줄곧 만족했을 거라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던 곳을 떠나 이전에는 몰랐던 어느 타운 근처의 길 끝에 있는 땅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여우 여섯 마리를 키우고 나중에 밍크까지 키우면 성공할 거라고 분명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농장 일을 거들거나 고등학교에 가는 것보다 덫을 줄줄이 놓아 짐승을 잡는 일에서 더 행복감을 느꼈고 - 그전 어느때보다 돈을 많이 벌기도 했다. - 그 생각이 떠오르자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모은 돈을 그 사업에 쏟아부었고 어머니는 저축한 교사 월급을 투자했다. 아버지가 동물둘이 지낼 우리를 전부 다 만들었고, 포획한 생명들을 가둘 벽을 철사로 세웠다. 땅의 규모는 12에이커로 적당했다. 건초지와 우리집에서 키우는 소가 풀을 뜯기에 충분한 목초지가 있었고, 여우에게 먹힐 날을 기다리는 늙은 말들이 있었다. 목초지는 곧바로 강으로 이어졌고 느릅나무 열두 그루가 그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많은 것들이 죽어나갔다. 늙은 말은 고기가 되어야 했고 모피를 두른 동물은 가을마다 추려져 길러준 주인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에 익숙해지자 나는 그 전부를 쉽게 무시할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한 <빨간머리 앤>이나 <은색 덤불숲의 팻>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한 정갈한 장면을 상상 속으로 만들어냈다. 목초지 위에 그늘을 드리운 느릅나무와 반짝거리는 강물, 목초지에 있는 언덕에서 솟아오르는 신기한 샘이 그런 장면에 도움이 되었다. 그 샘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말들과 한 마리뿐인 소에게 물을 공급했고, 나 역시 그곳에 양철머그컵을 책겨 가 물을 떠 마셨다. 여기저기에 늘 신선한 거름용 배설물이 깔려 있었지만, 초록색 지붕 집에 사는 앤이라면 그런 것은 무시해버렸을 테니 나도 무시했다. 당시에는 남동생이 아직 어려서 이따금 내가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나는 펌프로 깨끗한 물을 받아 쭉 늘어선 가축우리들을 왔다갔다하며 물통을 씻어내고 새 물을 채웠다. 나는 그 일이 좋았다. 중요한 일을 한다는 점,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점이 좋았다. 시간이 더 흘러 집안에서 어머니를 도와야 했을 때 나는 걸핏하면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걸었다. ‘말대꾸’. 그것을 일컫는 말아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감정이 상했다면서 어김없이 마구간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그러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당시에는 흔한 벌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나는 침대에 누워 흘쩍거리면서 달아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시기 또한 지나갔다. 십대가 된 나는 고분고분해지고 심지어 명랑해졌고 타운에서 주워듣거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집은 제법 컸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최초의 정착민이 보드민이라는 곳-지금은 사라졌다-에서 걸음을 멈추고 뗏목을 만들어 강을 따라 내려온 것이 1858년이었으나 한 세기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정착민이 그 땅의 나무를 쳐냈고, 나중에 그곳은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초창기 마을에 제재소와 호텔, 교회 세 개, 학교가 들어섰는데 그 학교가 내가 처음 다녔던, 내가 끔찍이 무서워 했던 그 학교였다. 강 위에 다리가 놓이자 사람들은 강 건너편 고지대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정착지였던 곳은 조금씩 쇠락하고 평판이 나빠지더니 결국 여태 말해온 독특한 마을,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그런 마을이 되어버렸다. 우리집은 정착 초기에 지은 집은 아닐 것이다. 초창기 집들은 죄다 목조건물인 데 반해 우리집은 외벽이 벽돌이었다. 그렇다고 그리 나중에 지어진 집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집은 마을을 등지고 있었는데, 서향이었고, 집 앞으로 약간 내리막인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은 빅벤드라고 불리는, 보이지 않는 강굽이까지 이어졌다. 강 건너 저만치 짙푸른 상록수들이 무리 지어 자란 곳이 있었는데, 삼나무였겠지만 너무 멀어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멀리 다른 언덕에 우리집을 마주 보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은 그만큼 먼 거리에서는 너무 작아보였고 우리가 가보거나 알고 지낸 적도 없어서 내게는 그저 이야기 속 난쟁이의 집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아니 지금 쯤은 죽었을 테니 한때 그 집에 살았던 남자의 이름은 알았다. 그의 이름은 롤리 그레인이었다. 트롤4)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지만, 이 글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쓰는 글에 그에 대해서 더 써넣을 자리는 없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에 두 번 유산을 했다. 그러니 1931년 내가 태어난 그해에는 틀림없이 흐믓한 분위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암울해져 갔다. 사실 아버지는 모피사업에 너무 늦게 뛰어들었다. 모피가 새롭게 유행하고 사람들에게 돈이 있었던 1920년대 중반이었다면 아버지가 바라던 성공도 가능성이 좀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고 전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에도 고무적인 부산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해 여름 아버지가 전통적인 빨간색 벽돌에 갈색 페인트를 덧발라 집을 단장했기 때문이었다. 벽돌과 합판을 붙인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 추위를 막아낼 벽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페인트를 덧바르면 나아질 거라고 색각했지만 효과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욕실을 설치하고, 쓰지 않는 덤웨이터5)는 찬장으로 만들고, 계단이 있던 넓은 식사실은 계단을 막아 평범한 방으로 바꾸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린 것, 그리고 내가 그 모든 일 때문에 비참하고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한 것이 예전 그 공간에서였기 때문에 그 변화는 왠지 모르게 내게 위로가 되었다. 환경이 달라지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해마다 공부를 더 잘 했는데, 감침질이나 펜글씨 같은 것은 더 이상 배우지 않았고 일반사회 대신 역사를 배웠고 라틴어도 배웠다. 하지만 낙관적인 새단장의 시기가 지나간 뒤로 우리 사업은 점점 기울었고, 이번에는 재기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여우가죽을 모조리 벗겼고 이어서 밍크가죽을 벗겼지만 받은 돈은 충격적일 만큼 적었다. 그러자 낮에는 그 사업이 탄생하고 소멸한 가축우리를 허물었고 다섯시부터는 주물공장으로 가서 경비로 일했다. 아버지는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아버지의 도시락을 만들었다. 코티지롤 햄을 두 장 구워 케첩을 잔뜩 뿌렸다. 그리고 보온병에 진한 홀차를 담았다. 잼을 바른 브랜 머핀이아 집에서 만든 묵직한 파이도 한 조각 넣었다. 토요일에는 내가 파이를 만들기도 했고 가끔은 어머니가 만들었는데, 어머니의 솜씨는 점점 미덥지 않아졌다. 줄어든 수입보다 더 예상할 수 없고 더 재앙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아직은 어떤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 일찍 발병한 파킨슨병이었고, 그때 어머니는 40대였다. 처음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눈이 어딘가를 헤매는 것처럼 치떠올라가다가 뒤집히는 건 어쩌다 한 번이었고, 잔뜩 고인 침이 슬며시 흘러내린 것도 입가에서나 조금 보일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침에는 도움을 받아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이따금 집을 돌아다니며 간단한 일도 했다. 어머니는 내면에 간직했던 힘을 놀라울 만큼 오랫동안 끌어 쓸 수 있었다. 너무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사업은 망했고 어머니는 건강을 잃어갔다. 소설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때를 불행한 시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집에 딱히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는 어머니가 호전되지 않고 더 나빠지기만 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아버지는 아직 기력이 있었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그럴 것 같았다. 아버지는 주물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남자들을 좋아했는데, 그들도 대부분 아버지처럼 침체기를 경험하거나 더 많은 삶의 짐을 떠안게 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이른 저녁에 경비로 일하는 것 말고도 다른 힘든 일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그 일은 틀 속에 쇳물을 붓는 것이었다. 주물공장에서는 전세계로 팔려나가는 구식 난로를 만들었다. 위헌한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조심하는 건 자기 몫이었다. 보수도 괜찮았고 아버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고되고 위험한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집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아버지는 기뻤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집에서 나와, 각자 나름의 문제가 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남자들의 무리로 가는 것이. 아버지가 나가면 나는 저녁을 해서 먹었다. 돈만 적게 들면 스파게티나 오몰렛처럼 내가 이국적이라고 생각했던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설거지가 끝나면 -- 여동생이 물기를 닦았고 남동생은 설거지물을 어두워진 들판에 내다버리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내가 직접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명령하는 것을 좋아했다.)--나는 문짝이 떨어진 따뜻한 오븐에 발을 넣고 앉아 타운 도서관에서 빌려온 어려운 소설들을 읽었다. 『독립한 민중』에서 다룬 아이슬랜드의 삶은 우리의 삶보다 훨씬 고달프고 장엄한 절망감이 느껴졌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내용뿐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폐결핵을 다룬 『마의 산』은 삶을 바라보는 친근하고 진보적인 시각과 어둡고 얼마간 흥분을 일으키는 절망적인 시각 사이의 거대 논쟁을 담아냈다.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워 숙제는 절대 해가지 않았지만, 시험이 닥치면 벼락치기로 거의 밤샘을 하면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을 머릿속에 쑤셔넣었다. 나는 단기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아서, 덕분에 내게 요구되는 일을 제법 잘해낼 수 있었다.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나는 나자신을 행운아라고 믿었다. 이따금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체로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는 나도 사물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각에 그다지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당시 참전 퇴역 군인인 웨이티 스트리츠--내가 학교를 마치는 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린다며 놀라워 했던--의 소유였던 그 집에 얽힌 이야기를 몇 번 해주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전 그보다 먼저 그 집에서 살았던 네터필드라는 미친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네터필드 부인은 우리가 모두 그랬듯 전화로 식료품을 주문해 배달시켰다. 어느 날 식료품점에서 버터를 넣어 보내는 것을 잊었고--혹은 그 노부인이 주문하는 것을 깜빡했고--배달 청년이 트럭 뒤쪽을 열자 그녀가 그 실수를 알아차리고 성질을 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손도끼를 들고 있다가 배달 청년에게 벌을 주려는 듯--물론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높이 쳐든 것이다. 그는 뒷문도 닫지 않고 운전석으로 달려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그 이야기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나도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노부인이 한 짐 가득 실어온 식료품 꾸러미에서 뻐터가 빠진 것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았겠는가? 게다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도 전에 도끼를 들고 있을 생각을 어떻게 했겠는가? 혹시 모를 도발적인 일에 대비해 항상 손도끼를 가지고 다녔을까? 네터필드 부인은 젊었을 땐 참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네터필드 부인에 대한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는데, 내가 등장하는 그 사건은 우리집 근처에서 일어났다. 오느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나는 잔디가 새로 자란 조그만 땅에 내놓은 아기 유모차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날 오후 아버지는 집에 없었고--이따금 그랬듯 일손을 도우러 할아버지의 옛 농장에 갔을 것이다.--어머니는 개수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첫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뜨개옷, 리본, 연수軟水에 담가 조심스럽게 손빨래를 해야 하는 이런저런 옷가지였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고 물기를 비틀어 짜내던 그 개수대 앞에는 창문이 없었다. 바깥을 내다보려면 집안을 가로 질러 북향으로 난 창문까지 가야 했다. 창문 앞에 서면 우편함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진입로가 보였다. 어머니가 빨래를 한 뒤 물기를 짜다 말고 진입로를 살피러 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찾아오기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늦은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식료품점에서 저녁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사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가 요리 시간에 맞춰 집에 오는지 궁금했을지도. 어머니는 그 당시 꽤 고급스러운 요리를 했다. 시어머니와 아버지 집안의 다른 여자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수준 이상이었다. 비용을 보면 안다고 그들은 말했다. 어쩌면 저녁 요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옷본이나 어머니가 만들어 입고 싶어했던 드레스의 옷감을 아버지가 사다주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왜 창가에 갔는지 어머니는 나중에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요리에 대한 의혹이 아버지 가족과 어머니 사이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엇다.어머니의 옷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개스대에서 빨래를 할 때도 애프터눈 드레스로 갈아입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삼십 분 동안 낮잠을 잤고 일어나면 늘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가닝 흐른 뒤 그때 사진을 보았는데, 당시 유행은 어머니에게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드레스 모양은 예쁘지 않았고 단발머리는 어머니의 윤곽이 부드러운 둥근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사는 아버지의 여자 친척들이 어머니를 못마땅해 하며 예의주시했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잘못은 그녀 자신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농장에서 자란 사람으로는, 그런 여자로 살아가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본 것은 골목길로 접어드는 아버지의 차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나이든 여자를, 네터필드 노부인을 보았다. 네터필드 부인은 그녀의 집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훨씬 나중에 내가 나를 놀리는 와팔이 남자를 보았던, 펌프 앞에 서 있는 단발머리의 아내를 꼭 한 번 보았던 그 집에서, 내가 그 미친 여자에 대해 알게 되기도 훨씬 전에 그 여자가 뻐터 때문에 손도끼를 들고 배달 청년을 쫓아갔던 그 집에서. 어머니는 네터필드 부인이 우리 골목길로 걸어오는 것을 보기 전에도 그녀를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겠지만 어머니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이ㅕ어, 아버지는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네터필드 부인 같은 사람이라도 품위만 있으면 연민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의 머릿속에 친절이나 픔위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부엌에서 뛰쳐나가 아기 유모차에서 나를 낚아챘다. 유모차와 덮개는 그 자리에 남겨둔 채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허둥대며 부엌문을 잠그려 했다. 앞문은 늘 잠가두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부엌문에 문제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부엌문에는 제대로 된 자물쇠를 달았던 적이 없었다. 밤에는 부엌에 있는 의자 하나를 옮겨와 문손잡이 밑에 등받이가 오도록 그 문에 받쳐놓았다. 그렇게 하면 누가 들어오려고 문을 밀 때 와당탕 소리가 날 테니까. 내가 보기에 그런 방식으로 안전을 유지하는 것은 좀 무모한 것 같았고 아버지가 집안 책상 서랍에 리볼버를 것과도 일관성이 없었다. 또한 정기적으로 말을 쏘아 죽이는 남자의 집이라 당연히 그랬겠지만 집에는 라이플총 한 자루와 산탄총 두 자루도 있었다. 물론 장전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문손잡이 밑에 의자를 받치고 나서 그 무기들을 떠올렸을까? 어머니가 평생 총을 들거나 장전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 늙은 여자가 이웃집에 놀러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어머니의 마음속에 스치기는 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걸음걸이가 달랐을 것이다. 놀러오는 것이 아닌 여자가 골목길을 걸을 때의 결연함이, 적의를 품은 채 우리집 길로 접근할 때의 결연함이 감돌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기도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은 해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 여자가 유모차 안에 놓아둔 담요를 들춰본 것을 알았다. 부엌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기 직전에 담요 하나가 바닥에 훌렁 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창문들의 블라인드는 내리지 않았고, 그저 나를 품에 안은 채 들키지 않을 만한 구석에 가만히 있었다. 점잖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의자가 밀리지도 않았다. 우당탕 무너지는 소리도 없었다. 어머니는 계속 덤웨이터 옆에 숨어서 그 정적이 그 여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일 거라고, 가망 없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여자는 천천히 집 주변을 걸어다녔고, 모든 아래층 창문 앞에서 어김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물론 그때는 여름이라 덧창을 닫아두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창마다 얼굴을 바짝 붙였다. 날씨가 좋아서 블라인드는 최대한 높이 올려놓았다. 여자는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안을 들여다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겁에 질려 저인이 아뜩해진 채 이 가구 저 가구 뒤로 옮겨 숨으며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나 커다란 웃음과 맞닥뜨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덤웨이터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식료품 저장실이 있었다. 우리집 창문들은 사람이 통과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식료품 저장실에 숨을 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안에 잠금고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마침내 집안까지 쳐들어와 식료품 저장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온다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더 끔찍했을 것이다. 2층에도 방들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커다란 방을 지나야 했다. --훗날 그 방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계단을 막은 뒤에는 악의적인 느낌이 사라졌다. 어머니가 내게 그 이야기를 처음 해준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어머니가 숨어있는 동안 네터필드 부인이 유리창에 얼굴과 손을 갖다 댔다는 것에서. 하지만 나중에는 그냥 쳐다보았다는 내용 뒤에 새로운 결말이 덧붙여졌다. 조바심을 내고 성질을 부리며 문을 흔들고 쾅쾅 쳤다고 했다. 소리를 질렀다는 말은 없었다. 그 늙은 여자는 아마도 그러기에는 숨이 찼을 것이다. 어쩌면 기력이 다해 그곳에 온 이유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여자는 단념했다. 그것이 그 여자가 한 행동의 전부였다. 그 여자는 창문들과 문들을 일일이 살펴본 뒤 돌아갔다. 어머니는 마침내 정적 속에서 용기를 내어 주위를 살펴본 뒤 네터필드 부인이 다른 곳으로 갔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문손잡이에 받쳤던 의자를 치우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알아야 했고 대체로 재미있게 들은 어머니의 레퍼토리는 그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고등학교에 가려고 애쓴 이야기, 아이들이 말을 타고 등교하던, 어머니가 교사로 일했던 앨버타의 그 학교, 어머니가 사범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들과 했던 순수한 장난들. 나는 어머니가 하는 말은 언제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혀가 굳은 뒤로 다른 사람들은 종종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통역사였다. 이따금 복잡한 구절이나 어머니가 농담으로 한 말을 사람들에게 반복해야 할 때는 온통 비참한 생각만 들었다. 나는 착한 사람들이 대화를 하려고 걸음을 멈추었다가도 얼른 떠나고 싶어 조바심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네터필드 노부인의 방문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에 대해 나더러 말해보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주 오랫동안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그 노부인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던 게 떠오른다. “사람들이 데려갔지.” 어머니가 말했다. “그랬을 거야, 혼자 외롭게 죽지는 않았어.” 결혼해서 밴쿠버로 옮겨간 뒤에도 나는 내가 성장한 타운에서 발행되는 주간지를 구독했다. 내 생각에 누군가가, 아마도 아버지와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내게 구독을 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던 것 같다. 보통은 신문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언젠가 한번 그 신문을 펼쳤을 때 네터필드라는 이름을 보았다. 지금 그 타운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름은 아니었고,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사는 한 여자의 처녀 때 성인 것 같았다. 그녀가 신문사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 여자도 나처럼 아직 고향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고, 그 신문에 유년 시절에 대한 시를 써서 보냈다. 나는 깨끗한 강 위쪽에 있는 풀이 무성한 언덕을 알지 평화롭고 즐거웠던 장소 더없이 소중한 추억....... 시는 몇 개의 연으로 되어 ㅜ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읽자마자 대번에 그녀가 말한 강기슭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강기슭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봉한 시는 옛 시절의 언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쓴 것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귀사의 유서 깊은 신문에 이 시가 좁은 지면이라도 차지할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강 위에 걸린 태양 끊임없이 아롱거리는 햇빛의 놀이 그리고 또다른 언덕에 즐겁게 활짝 핀 꽃봉오리들...... 그곳은 우리의 언덕이었다. 나의 언덕이었다. 또다른 연은 단풍나무에 대한 것이었는데, 분명 그녀가 잘못 기억했을 것이다. 그 나무는 느릅나무였고, 지금은 네덜란드 느릅나무병으로 모두 죽었다. 편지를 마저 읽자 상황은 더욱 명확해졌다. 그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성이 네터필드였다.--가 1883년에 정부로부터 토지를 매입했고, 그 땅에 나중에 로워타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그 땅은 메이트랜드 강까지 이어졌다.
아이리스가 경계를 이룬 물결 너머 단풍나무 그늘이 펼쳐졌네 그리고 강물에 젖은 들판에는 흰 거위 떼지어 먹이를 먹네 그녀는 말발굽에 짓밟혀 샘이 흙탕물이 되고 주변이 온통 더러워진다는 내용은 쏙 뺐는데,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거름용 배설물도 뺐다. 사실 나도 그 시와 유사한 시를 몇 편 썼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어쩌면 글로 쓴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을 예찬하는 시들이었는데, 끝맺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 시들은 내가 어머니를 정말 견딜 수 없어하고 아버지가 나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던 그 시기에 썼을 것이다. 혹은 당시 사람들이 유쾌하게 말하던 대로, 나를 흠씬 때려주던 그 시기에. 그 여자는 1876년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녀는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타운이 끝나고 탁 트인 땅이 시작되는 곳이자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집. 내 어머니는 그 사실을, 우리집에 네터필드 가족이 살았던 것을 몰랐을까? 그 노부인이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곳의 창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노년에 나는 흥미가 생겨 기록을 뒤져보고 이런저런 것들을 살펴봤다. 이 단조로운 작업 끝에 나는 네터필드 부부가 그 집을 팔고 우리 부모님이 그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몇 가족이 그 집에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직 살날이 남아 있던 노부인이 그 집을 처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부가 된 뒤 돈이 궁해졌을까? 누가 알겠는가. 어머니가 말했던,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 그녀의 딸, 오리건에 산다는 그 시를 쓴 여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기 유모차에서 노부인이 찾고있었던 것은, 다 커서 멀리 떠나간 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죽기 살기로 나를 낚아 챈 직후에. 그 딸은 한동안 내가 어른이 되어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찾아가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어린 식구들과 한결같이 불만족스러웠던 내 글쓰기 때문에 바쁘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그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1) 캐나다에서 제조하는 유명한 차의 상표임 2) 스코틀랜드 춤으로 계속 도약을 하며 춘다. 3) 선캄브리아대의 지층이나 암석이 방패 모양으로 노출된 지역. 4) 스칸다나비아 전설에서 동굴이나 야산에 사는 거인이나 난쟁이. 5) 요리 운반용 소형 승강기.
젊은 시절의 앨리스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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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앨리스 먼로의 "최신작이자 마지막 걸작"인
소설집 <디어 라이프> 中, 한 편만을 "상징적"으로 올린다. 타자하는 일도
그렇지만, '저작권'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이기에.......한 편에서라도 충분히
앨리스 먼로 단편소설의 세계를 엿볼 수가 있으리라 믿는다.
一讀을 바라오며.........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은 안읽는다는 시대인데, 일독을 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읽는다는 그 행위 자체가 공부이며,
즐거움이 되어야 할 듯.......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