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 4년(1549) 홍유(洪脩, 이름 글는 본가에서 술잔 유자로 읽고 있다)
의 아들로 태어난 모당은 고양팔현(高陽八賢)-추강 남효온(1454-1492), 사재
김정국(1485-1541), 복재 기준(1492-1521), 추만 정지운(1501-1561), 행촌
민순(1519-1591), 모당 홍이상, 석탄
이신의(1551-1627), 만회 이유겸(1586-1663)- 의 한 사람인 행촌(杏村) 민순(悶純)의 제자다.
민순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이며 대곡(大谷) 성운(成運),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함께 당시의 명유(名儒)로 추앙되었던 이다. 모당은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1579년)했다. 그의 아우도 문과에 급제했으며 네 아들과 두 사위도 그랬다.
그는 정언, 수찬 직 등을 거쳐 문신으로서 더욱 자긍심을 갖게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의 영예도 누렸다. 이 때 일송 심희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함께 참여했다.
또한 이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경서를 교정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때는 모당이 36세가 되었을 무렵으로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아본 율곡 이이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1591년에는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고 이조참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옮겨 선조를 호가(扈駕·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따라감)하여 서행하였고 평양에 이르러 부제학이 되었다.
1593년 정주에서 대사간이, 이듬해에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좌승지에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淸正)의 이간을 계획해 추진하기도 했다.
1596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 유생에 대응해 성리학의 대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두둔하다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목사가 되고 1609년 대사헌과 부제학, 1612년에는 이이첨과 정인홍 일파에게 밀려 개성유수로 좌천되었다. 병으로 사임한 뒤 선영이 있는 경기도 고양 고봉산 기슭으로 돌아와 작은 집을 짓고 은거하다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당이 벼슬했던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 광해군 1년 때의 조정의 주요 관료를 볼 필요가 있다.
영중추부사로 한음 이덕형, 영의정에 오리 이원익, 좌의정에 백사 이항복, 우의정에 일송 심희수, 병조판서에 월사 이정구, 공조판서에 추포 황신, 동부승지에 이이첨이 있을 때 모당은 대사헌 직에 있었다.
참으로 쟁쟁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로 추앙을 받았던 15년 후배인 월사 이정구와는 인척 간이기도 하다.
모당은 문과에 급제해 4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관료다. 그러나 그에게는 은둔군자의 피가 흘렀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20세 때부터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정신적 지주인 행촌 민순이다. 유생들의 공격을 받았던 우계 성혼을 변호하다 불이익을 당한 일도 이러한 학맥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홍이상 졸기(卒記)를 보면, 그가 최고의 ‘강관(講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관이란 경연(經筵)에 입시(入侍·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여 임금에게 경전을 지도하던 임무를 담당했던 관원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식과 교수 방법을 지녔던 신하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다.
그런데 모당은 강관 중에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니 그가 학문에도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예조판서를 아홉 번이나 지내고 40년간이나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으며 붓을 잡기만 하면 문장이 되었던 월사 이정구조차 이러한 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조정에서 부조묘를 내렸다.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하강서원(荷江書院)에 배향했고 서원 서쪽 강가에 후학들이 그의 덕을 추모해 모현정(慕賢亭)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담서원 주변은 예로부터 풍광이 빼어나 하담추월(荷潭秋月)은 충주팔경(忠州八景) 중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모당가의 출판 사업 뿌리 |
모당, 통감 再발간 주도… 후손은 탐구당 차려
조선시대에에 많이 읽힌 책 가운데 통감절요(通鑑節要)라는 것이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역사책으로, 주(周)나라 때인 BC 403년부터 959년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 통사로 엮었다.
이 책은 본래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294권 100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래했다. 이를 송나라 때의 학자인 강지(江贄)가 50권 15책 분량으로 대거 줄인 것이 통감절요다.
통감절요는 오히려 자치통감보다 사람들로부터 더 사랑을 받았다. 중국 역사의 대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이 재미있고 문장도 평이해 문장 해석 능력을 기르는 데도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1237년 중국에서 출간된 후 1381년(고려 우왕7)에 우리나라에서도 간행된 통감절요는 이후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시대 때까지 전국 여러 곳에서 출간되었다. 그래서 한 질을 소장하고 있는 반가들을 조사해보면 다양한 판본을 만날 수 있다.
반면 가장 흔한 책이면서도 15책 완질로 깨끗하게 남아있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 또한 통감절요이다.
이는 이 책이 초학용으로 아동들에 의해 주로 읽혔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한 질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어 한두 권씩 유실 된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던 책이었지만 임진왜란 직후에는 오히려 쉽게 만날 수 없는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 나라가 피폐해진 탓이었다.
그래서 문교(文敎)를 진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감절요와 같은 책을 우선적으로 간행하는 것이 절실했다. 이 당시 모당 홍이상은 안동부사로 부임해 책자 발간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난후의 어려운 사회적 여건 하에서 안동에서 통감절요 15책 간행 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사실은 순암 안정복의 수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어쩌면 통감절요 읽기 열풍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 작은 불씨를 모당이 살려낸 것이다.
그 후 400여 년 뒤 모당의 후손들이 탐구당을 차려 출판사업을 하는 것을 보면 모당가의 출판 뿌리는 깊고도 깊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