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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상(華嚴思想) 개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소의경전으로 해서
정립된 것이 화엄사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절대적인 대(大), 상대가 끊어진 극대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절대의 대(大)라고 할 수 있다.
방광(方廣)이란 넓다는 뜻인데, 특히 공간적으로 넓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이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부처님을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부처를 말한다.
그 부처를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라고 한다.
그리고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이다.
화엄을 범어로는 ganda-vyuha라고 하는데
ganda란 잡화(雜華)라는 뜻이고, vyuha란 엄식(嚴飾)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화엄이란 잡화엄식이라는 말 그대로
갖가지의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말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대방광불화엄경>은 광대무변하게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부처님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은 인도 용수(龍樹) 보살이 편집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오히려 <화엄경>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등의
연기사상(緣起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에 힘입어 교학의 체계가
정립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전의 한역본으로는
60권, 80권, 40권으로 된 <육십화엄>, <팔십화엄>, <사십화엄> 등
세 종류의 <화엄경>이 있다.
<60화엄>은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 의해
AD 418~420에 번역됐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됐다.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먼저 번역됐다고 해서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른다.
<80화엄>은 당나라 대주(大周)시대(측천무후시대)
실차난타(實叉難陀)에 의해 역출됐으며 이를 주본(周本)
또는 신경(新經)이라 한다.
<40화엄>은 당의 반야(般若)가 798년에 역출했으며,
<화엄경> 중에 ‘입법계품’만 따로 분리해서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화엄의 최고 가르침을 원교(圓敎)라 한다.
그런 화엄사상의 특징은 연기설에 있는데,
관계의 얽힘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가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이다.
따라서 화엄사상을 줄여서 이야기 한다면,
법계연기요, 무진연기라고 할 수 있다.
화엄사상은 인도에서 용수(龍樹)와 세친(世親) 등에 의해 연구되기도 했으나,
화엄교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중국에서 전개돼 화엄종이 성립됐다.
당나라시대의 두순(杜順, 557~640)은 화엄종의 초조(初祖)로 불리며,
지엄(智儼, 602~668)과 법장(賢首法藏, 643~712) 등은 화엄교학을 집대성했다.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은 삼국시대에 수용된 이래로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사상으로 발전해 왔다.
화엄 종단이 성립되고 화엄사상이 교학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기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의 활동에서부터 비롯된다.
의상은 당(唐)에서 유학해 지엄(智儼)에게서 화엄을 배운 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법성게>를 저술함으로써
자신의 화엄학을 체계화했다.
670년 귀국해 화엄종을 개창하고, 676년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실천행을 중시한 것이 특징으로
관음 신앙과 아미타 신앙으로 표출됐으며, 세속의 신분을 초월해
문도를 양성했는데, 의상의 화엄종 개창은 한국 불교사에서
화엄사상이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한편, 원효계 화엄이나 중국 법장(賢首法藏)계의 화엄학을
계승한 이들도 있어 신라 하대 화엄교학은 의상계가 주도하는 속에
다양한 흐름이 공존했다. 통일신라시대 성립된
의상과 원효의 화엄사상은 일본 화엄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 말 고려 초 선종의 공격으로 쇠퇴했던 화엄종은
고려 광종 때 화엄종 승려가 연달아 국사로 임명되며
주요 종단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했고, 왕실을 비롯한
고위 지배층 출신의 화엄종 승려들도 등장했다.
특히 균여(均如)는 고려 초기 화엄사상을 대표하는 승려였다.
균여의 화엄사상은 신라 말 고려 초 이래 이론적인 약점을 보이며
선종에 밀리던 신라 화엄학의 한계를 보완해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림으로써 화엄사상이 교종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재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균여 이후 화엄사상의 발전은 의천(義天)에 의해 주도됐다.
의천 이후 다시 선종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화엄사상은
선종에 흡수돼, 오늘날까지 한국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화엄사상은 천태사상과 더불어 중국불교철학의 쌍벽을 이루는 사상이다.
그런데 화엄사상은 인도에서 직접 전해 받은 불교철학이 아닌
중국인이 새로이 체계화한 독창적인 사상체계라 할 수 있다.
사상계에 있어서도 화엄종은 선종과 더불어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性理學)이 형성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쳐
쇠퇴한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또한 중국의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정토종과 선종(禪宗)은 화엄학에서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초기불교의 중심과제가 고(苦)의 원인을 규명해
그 고(苦)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로 했다면,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비되는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하는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으로서
영원불멸의 부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해답으로 ‘깨달음[覺]과 실천행[行]’을
보살의 가장 큰 원행(願行)으로 제시했다.
<화엄경>은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
단순히 화엄사상의 소의경전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불신사상(佛身思想)과 보살사상(菩薩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연기사상(緣起思想), 정토사상(淨土思想), 선사상(禪思想) 등이
고루 설해지고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하나의 경전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각 품(品)들이 별도의 경전으로 성립 유통되다가 대승불교 초기에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됐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화엄사상의 기본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돼
중중무진(重重無盡:끊임없이 이어짐) 관계로 엮임으로써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과 뿌리를 같이 한다.
그리고 사법계(四法界), 십현연기(十玄緣起), 육상원융(六相圓融),
상입상즉(相入相卽),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등은
이 무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사법계(四法界)란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이법계(理法界)⋅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사사무애법계란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에 있는 세계를 말하며, 화엄사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삼라만상 사사물물이 각기 독립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화엄종의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즉일체 일체즉일’이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네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여기는 일심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 주고받는
상응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인연이 겹치고 겹쳐 끝이 없다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세계를 뜻하며,
하나와 전체, 전체와 하나가 다함이 없이 서로 겹치고 서로 스며드는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존재의 실상을 말한다.
이러한 화엄사상(華嚴思想)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을 지양시킴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교설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왕권국가의 율령정치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큰 구실을 담당해
왕실불교 귀족불교의 역할도 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1) 법계연기(法界緣起)---법계, 곧 우주만유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화엄교학의 근본이념을 나타내는 학설이다.
그래서 화엄세계는 법계연기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
화엄십현연기(華嚴十玄緣起), 십현문(十玄門)과 같은 말이다.
법계무진연기 혹은 법계무애연기, 중중무진연기라고도 한다.
이게 다 같은 말이다.
중국의 화엄종에서는 유식(唯識)과 여래장(如來藏)사상을 결합해
법계연기설을 주장했다. 이것은 현상계를 떠나 따로
실체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계 그대로가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라고 말한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서로 끝없이 연관돼 있으며,
상즉상입 해 두루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인이 되고 연이 돼,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진연기의 법칙을 말한다.
<화엄경>에 일관돼 있는 유심설(唯心說)에 근거해 성립된
법계연기는 우주만유의 모든 사물과 사상(事象)이
모두 인연 따라 자재롭게 서로 얽혀 의지하면서 한없이 교류하고
융합해 생겨나고 있음을 말한다.
만유(萬有-삼라만상)를 모두 동일한 수평선 위에 두고 볼 때에는
중생과 불(佛),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등과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실제는 모두 동등한 것이며,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어서
만유는 원융무애(圓融無礙)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다.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礙)라 하는데, 법계란 이 사사무애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런 세계의 존재방식이 법계연기이다.
그리고 이것을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도 하며,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상세계에 개개의 사물들이 겉으로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같이 서로 원인이 되는 무한한 연기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화엄사상은 하나가 일체요(一卽一切), 일체가 곧 하나
[일체즉일(一切卽一)]여서 우주만물이 서로 원융해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루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하나의 사물은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라는 뜻에서 한 사물을 연기법으로 관찰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성립의 체(體)요, 힘인 동시에 그 한 사물은
전 우주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緣由)해 있는
중중무진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라고 한다.
이 사상은 법상종(法相宗)의 업감연기[(業減緣起)=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와
법성종(法性宗)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등과 유기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이들 세 이론이 불교연기설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인다라망(因陀羅網)은 제석천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인데
법계연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 인다라망 그물의 마디마디를 이루고 있는 작은 구슬은
전부 그 옆에 있는 모든 구슬을 서로 비춘다.
내 모습은 저쪽 구슬 모두에 비추고, 저쪽 구슬 모두는
내 모습에 반영이 된다. 전부가 다 같이 그렇게 서로를 비춘다.
그 인다라망 그물이 실제로 있는지, 제석천이 있는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 상관이 없다.
인다라망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우리를 깨우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세상의 존재원리(存在原理)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원리는 인다라망 그물에 비치는 구슬이
서로서로 반영하고, 비추고 비춰 들이는 그 원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법계연기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승의 법계연기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 법계연기의 특징은 ‘상호의존(相互依存)’으로 본다.
이는 무한대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인과를 말한다.
그래서 “우주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만물이 서로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과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와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과가 ‘선형적으로’ 설명된다.
근본원인이 있고 부수적인 조건들과 합쳐져서 결과가 나오는 식이다.
주변조건이 갖추어지면 원인이 과보를 맺는 것이다.
만물은 모든 조건이 들어맞아야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들이 제거되면 모든 만물이 소멸할 것이며,
따라서 만물이 무상하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현상을 무상ㆍ고ㆍ무아로 통찰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대승의 볍계연기는 초기불교의 선형적 연기설과 다르다.
“화엄종에서는 인도사상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을 더럽고, 타락하고, 무상하고, 고통에 가득 찼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 존재 자체로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상호 연결돼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그물을 형성하며,
그 그물 안에서 각 부분들은 모두 연결돼 거대하고
완전한 전체, 일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근간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상입, 혹은 완전한 융합, 즉 원융(圓融)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본개념은 이 상호관계가 개별성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正體性)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로 보는 것이다.” ― 로버트 버스웰
2) 무진연기(無盡緣起)---인간 개개, 삼라만상 하나하나를 두고 보면
생멸이 있는 것 같지만, 우주 전체를 보면 변화가 없다.
일체만법이 이와 같으므로 우주는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불생불멸한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이다.
곧, 이 세상의 모든 법(사물)은, 그것이 생명이 있는 것이건,
생멸이 없는 무생물이건 간에, 그 모두가 애초부터 생겨나는 일이 없고,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따라서 사라지는 일도 없다고 하는 게 부처님 말씀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세상은 ‘지금 있는 이대로’ 적멸(寂滅) 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한다.
곧, 한 없이 연기할 뿐, 그 본디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해, 온 우주가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멸(常住不滅)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주불멸이란 항상 없어지지 않고
지금 이대로 머무른다는 말이다.
우주의 본 모습은 불생불멸, 본래모습 그대로란 말이다.
이것을 법계연기라고도 한다.
법계, 곧 우주만유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화엄교학의 근본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 중생은 생멸의 세계에 빠져 있다.
생겨난다, 사라진다는 현상(겉보기)만을 놓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제법의 공(空)한 도리를 모른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볼 줄 알면 生이 생이 아니요,
滅이 멸이 아님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언설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 우리 범부들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제로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무진연기를 말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심심 난해해 부처님의 혜안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돼 현대과학의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돼 있음을 증명해 구체적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은 2천 600년 전에 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했고,
과학은 2천 600년 후에 불생불멸을 실증해 시간차는 있으나
그 내용은 상통한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바로 보면 그 견해가 다를 수 없다.
다만 부처님 혜안의 탁월함에 감탄할 뿐이다.
불교가 과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접근한 과학이론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불생불멸의 상주법계에는 증감(增減)과 거래(去來)가 영절(永絶)한 무진연기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의 실상(實相)이다.
3) 사법계(四法界)---대승불교의 궁극적 이치를 말한다.
<화엄경>에서는 법계(法界)라 하고, <법화경>에서는 실상(實相)이라 한다.
법계는 그 체(體)를 따라 이름 한 것이고,
실상은 그 뜻을 따라서 이름 한 것이니 사실은 하나이다.
화엄세계는 법계(法界)로써 체(體)를 삼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 법계의 이(理)를 밝힘에 불과하고,
그러기에 화엄법계라고 한다.
화엄 4법계는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등 넷으로 나눈다.
이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一心)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 통괄되는 것을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해,
네 가지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상의 세계를 사법계(事法界)라 하고,
언제나 평등한 본체 ― 진리의 세계를 이법계(理法界)라 한다.
그러나 현상과 본체는 결코 떨어져서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항상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를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라 한다.
다시 나아가 현상, 그것도 각 현상마다 서로가 원인이 돼
밀접한 융합을 유지하는 ―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세계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
그러니 4법계란 모든 존재의 세계를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한 화엄종 우주관이다.
그리고 법계라고 하는 것은 우주만유란 말과 같은 것인데,
우주만유는 그 본체인 일심(一心)으로부터 연기한 것이요,
이 연기한 우주만유를 총섭한 것이 일심으로서 서로 주(主)가 되고
반(伴)이 돼 무진연기해가는 상태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
이것을 화엄 4법계라 한다.
① 사법계(事法界)---사법계라 할 때
사(事)는 현상계에 드러나고 있는 색상(色相)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법계는 가장 열등한 범부의 경계에서 현상계에 드러난 색상,
즉 사(事)를 보고 그것을 참다운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의 근원인 본체,
즉 이(理)를 보지 못하고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법계(事法界)의 특징은 우주 만유의 차별 현상을 말한다.
곧 현상세계-경험세계를 말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눈앞에서 모든 것을 보는 바와 같이
집, 가구, 집기… 등으로 따로따로 차별해서 보는 것이다.
이때의 계(界)란 말은 나누어진 한계의 의미를 가졌으므로
하나의 물이 얼음이 되고 끓는 물이 되는 것을,
얼음, 물, 끓는 물의 각각으로 보는 것을 이른다.
이는 현실인 미혹의 세계를 일컬으며, 우주만유현상이
서로 대립해 차별이 있는 현상세계이다.
이와 같이 사(事)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낱낱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기는 하나,
제각기의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며,
개체와 개체는 공통성이 없이 차별적인 면만을 본 것이다.
② 이법계(理法界)----이(理)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理)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말하고,
계(界)란 성(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理)는 총체적 일심진여
(一心眞如)이며, 공(空)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와 개체의 동일성, 공통성을 본 것이다.
사(事)를 일단 제쳐놓고 색상을 일어나게 하는 근원자,
곧 이(理)를 근원으로서의 법계, 모든 사물의 본체로 보는 것이다.
하나의 이(理)가 모든 사물에 두루 존재하며,
각각의 사물 안에는 완전한 참된 이(理)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계에서는 철저한 공(空)의 논리가 전개된다.
우주 만유의 평등성. 곧 본체계ㆍ근본원리를 말한다.
모두가 평등하며 하나라고 한 것으로,
부처님도 중생도 삼라만상 모두를 평등하게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고, 끓는 물이 돼도
물건을 적시는 성질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니,
물건을 적시는 성질에서 보면 모두가 같다는 말이다.
이는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수행이 최고조에 달해 상수멸정(想受滅定)의 상태가 되는 경지,
번뇌가 녹아서 완전히 없어지고, 너와 나의 차이 또는
사물과 나와의 차이가 전혀 없이 일체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완전히 통일이 돼버리는 경지이다.
바로 정각성불(正覺成佛)이 되는 것을 말한다.
③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사법계와 이법계의 편향성을 극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 모순되지 아니하고
화합하고 조화시킴으로써 온전한 법계의 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상세계인 사(事)와 본체 세계인 이(理)가 서로 융통무애해서
현상이 곧 실재라는 것을 말한다.
진여의 이(理)로부터 나타난 만법(事)이기 때문에
사(事)가 이(理)이고, 이(理)가 사(事)인 것이,
비유하면 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인 것과 같이
서로 융합해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는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와 사,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이상인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인 미혹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번뇌 즉 보리, 현실 즉 이상인 세계를 말한다.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세계관이다.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이사무애법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당 왕조시대의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그의 저서 <탐현기(探玄記)> 안의 ‘금사자장(金獅子章)’에서
금사자(金獅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理)’는 이치요, ‘사(事)’는 현상이다. 법신의 바탕이 이치요,
그로 인해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이 현상이다.
이치가 작용해 현상이 일어나니 이치를 떠나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에서 그 이치가 드러나니 현상에서 이치를 분리할 수 없어,
본디 서로 ‘상즉’ 한다고 했다.
금으로 만든 금사자(金獅子)에 있어서,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佛性을 금으로 표현]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여러 가지 수행방편이란 뜻]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해
표상(불성에 의지해서 수행결과)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의 경계라는 것이다.
※금사자장(金獅子章)---원래 이름은 <화엄금사자장>이다.
현수 법장이 당나라 측천무후에게 뜰 앞에 놓인 금사자를 가지고
비유해 10문(門)으로써 화엄의 교관(敎觀)을 설명한 것이다.
④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우주만상이 모두 법성(法性)으로부터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나타난 모두가 서로 융통해서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미 이(理)와 사(事)가 무애하다면 사와 사가 무애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티끌 하나에 이르기까지 융통무애해서
어느 하나를 들면 다른 모든 것이 이에 따라 취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결과 파도는 둘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한 것은 화엄의 특색이다.
이는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에 있는
세계를 말하는데, 현상계는 서로 교류해,
한 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즉 현상과 현상이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ㆍ융합하는 세계이다.
이 말은 어떠한 사물이건 고립돼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에 해당한다.
공과 공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애한 것처럼,
색과 색도 서로 걸림이 무애하다는 논리이다.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해 받아들이고 하나가 돼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이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세계는
이사무애(理事無礙)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깨달음의 세계, 곧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과
실천행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늘 그렇게 있는 세계이다.
이해나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현실화해야 하는 세계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강조하는 무진연기, 인다라망, 상입상즉,
육상원융, 십현연기 등을 뜻하며, 현실적으로는
‘나비 효과’ 역시 사사무애법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4) 육상원융(六相圓融)---‘육상원융’이란 화엄종의 교리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여섯 가지 상(相),
즉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
괴상(壞相)을 갖추고 있고, 그 전체와 부분 또 부분과 부분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돼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화엄세계를 상징해서 ‘인다라 그물망’이라 한다.
인다라의 보석 그물이라는 뜻이다. 인다라란 제석천(帝釋天)을 말한다.
제석천은 도리천(忉利天) 33천의 주인이다.
제석천의 궁전인 선견성(善見城)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보석그물이 인다라망이다. 그래서 인다라망을
흔히 '제망(帝網)'이라고도 한다.
제망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수많은 보석 하나의 구슬마다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비치며,
구슬마다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쳐 무수한 보주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춘다. 이처럼 이 세계 혹은 우주 삼라만상이
서로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 인다라망이다.
마찬가지로 일체제법도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을 상징하며,
나아가서 절실하게 자신을 아는 개체는
전체를 안다고 하는 불교철학을 상징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서로 연결돼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화엄경>의 중중무진, 상즉상입, 법계연기, 무진연기란 말들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리하여 화엄철학에서는 ‘인다라망경계문
(因陀羅網境界門)’이라고 해서 모든 현상은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포용하고, 또 포용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는 부처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 등장하는
마찬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 육상원융이다.
육상(六相)이란 모든 현상의 여섯 가지 상태를 말한다. 즉,
① 총상(總相) ― 여러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② 별상(別相) ―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개별특성.
③ 동상(同相) ― 여러 모습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전체의 모습.
④ 이상(異相) ― 여러 모습이 서로 어울려 전체를 이루면서도
각각의 개별특성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
⑤ 성상(成相) ― 여러 역할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의 역할.
⑥ 괴상(壞相) ― 여러 역할이 모여 전체를 이루면서도 유지되고 있는
각각의 역할.
예를 들어, 얼굴의 특성을 총상이라 한다면,
눈ㆍ귀ㆍ 코ㆍ입 등의 특성은 별상이다.
눈ㆍ귀ㆍ코ㆍ입 등이 서로 어울려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동상이라 한다면, 눈ㆍ귀ㆍ코ㆍ입 등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이상(異相)이다.
눈ㆍ귀ㆍ코ㆍ입 등의 역할이 서로 의존하면서 얼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성상(成相)이라 한다면, 눈ㆍ귀ㆍ코ㆍ입 등이
각각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괴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는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상태를 잃지 않고,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융합돼 있다고 해서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 한다.
그리고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한 몸이 돼 원만하게 융화돼 있다는 것이다.
이 육상의 원칙은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 화합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각 상들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주 법계의 실상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십현연기(十玄緣起)와 더불어 육상원융 또한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 다른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다.
육상에서 총별(總別), 동이(同異), 성괴(成壞)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 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다 육상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연기로써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 연(緣)이 모여 성립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성립된 총상(總相)은 부분을 총괄해 전체를 만들고 있다.
또 별상(別相)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을 말하는데,
이것이 총상에 의지해 원만하고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총상이 없으면 별상이 없고 따라서 총상 밖에 별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 육상의 관계를 체ㆍ상ㆍ용(體相用)의 관계로 나누어 보면,
총상과 별상은 연기의 체(體)라고 보고, 동상과 이상은
연기의 상(相)이라고 하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의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총상은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는 측면이고, 별상은 그 총상에 의지해 완성시키는 측면이다.
동상은 서로의 공통점이며,
별상은 서로 다른 개별적인 측면이다. 성상은 이 모든 뜻이
서로 연결돼 있는 측면이고, 괴상은 모든 뜻이
각각 자기의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측면이다.
이 육상 중에 별상ㆍ이상ㆍ괴상은 서로 다른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항포문(行布門)이라 하고, 총상ㆍ동상ㆍ성상은 하나로서
전체를 포섭하므로 원융문(圓融門)이라 한다.
‘항포(行布)’란 벌여놓다, 순서대로 늘어놓는다는 말이고,
이때 행(行)을 ‘항’으로 발음한다.
즉, 총상ㆍ동상ㆍ성상의 삼상은 그 통일성, 유기적 동질성의 양상들이고,
별상ㆍ이상ㆍ괴상의 삼상(三相)은 각각 위의 삼상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그 모든 구성분자들이 갖는 개별성, 특이성의 양상들이다.
그러면서 항포와 원융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를 들면 전체가 따라오는 것과 같이 전체가 하나에 포섭돼
원융(圓融)과 항포(行布)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원융문과 항포문의 각 상들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주법계의 실상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은 한 결 같이 평등해
현상과 이치가 서로 걸림이 없고, 나아가 차별적 현상의
사물 상호간에도 원융무애하다고 했다.
이러한 원리를 화엄종에서는 이사무애ㆍ사사무애 등으로 표현한다.
즉,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은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돼 서로 융화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말들이다.
5) 십현연기(十玄緣起)---십현연기는 십현문(十玄門)이라고도 한다.
화엄종의 중요한 교의로서 화엄교학의 대표적 사상이며,
사법계(四法界) 중,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특징을
10가지 측면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십현연기설은 중국 당나라시대 화엄종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의
<화엄일승십현문(華嚴一乘十玄門)>에 나오는 말이다.
진여법계(眞如法界)가 인연에 따라 태동해서 차별의 현상을 이루고,
이 현상이 연기해서 원융무애한 것을 나타낸다는 법문인데,
갖추어 말하면 ‘십현연기무애법문’이라 한다.
즉, 사사무애의 법계연기를 체계적으로 관찰한 구체적 설명이
십현연기와 육상원융이다. 여기서 ‘십(十)’은 원만구족의
만수(滿數)이고, 현(玄)은 현묘(玄妙), 문은 사사무애법문을 말한다.
따라서 10가지 심오한 신비의 무애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6) 상입상즉(相入相卽)---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도 한다.
화엄종의 교리로서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의 병칭이며,
중중무진, 법계연기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모든 현상의 본질과 작용은 서로 융합해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즉,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이
일체라는 말이다. 마음과 현상에 있어서, 보는 주관도 없고
보이는 객관도 없는, 현상계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돼 있으며, 상호개입과 상호연계 돼 있는 존재양식을
일컫는 화엄사상이다.
이에 바탕 한 일(一)과 다(多)의 상입상즉 법계관(法界觀)이
마치 화엄의 인다라망 구조와 같다는 것이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리고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空)’으로 돌려 상대방과 일치시키고,
‘나’로 하여금 상대방이 생겨나는 원인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나’를 상대방과 일치시키는 것이 상즉(相卽)이요,
‘나’ 자신으로 하여금 상대가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 속에 들어가듯 하는 것을 상입(相入)이라 한다.
즉, 상입(相入)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걸림 없이 융합하는
묘용의 측면이라면, 상즉(相卽)은 서로 자기를 폐(廢)해
다른 것과 같아지는 체(體)의 측면이다.
두 가지가 하나로 융화하는 ‘즉(卽)’은 물과 물결처럼
한 물건의 체 그대로가 다른 물건인 뜻으로 말하는 ‘즉’이다.
따라서 ‘상입상즉’은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 이 사회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상입상즉을 상즉상용(相卽相容)이라고도 하고
약칭해서 상입(相入) 혹은 상유(相由)라고도 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융합해 작용하며
무한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베이징의 나비’가 날갯짓을 한 것이 뉴욕에서 폭풍이 된다는 이른바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결과적으로 나비의 날갯짓에서 일어난 바람이
곧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비의 날갯짓으로 일어난 바람과 태풍의 바람이 둘이 아닌 하나다.
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이다.
그 근원은 하나인데, 분별해 둘로 다르게 봐서 다를 뿐이다.
분별하지 않고 보는 지혜가 상즉이다.
종이는 펄프로 만드는데, 펄프는 나무에서 나오고,
나무는 흙과 물과 공기와 태양 등
수많은 요소의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진다.
또 종이는 여러 종류의 기계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계속 확대해 나가면, 종이 속에는 이러한 수많은 요소들,
즉 우주의 모든 요소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 곧 상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 만물은 상즉상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곧 너고, 들꽃이 곧 우주다.
상입상즉의 세계는 조화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요,
너와 나의 분별이 없는 적멸의 세계다.
좋음도 나쁨도 없으며, 미움도 사랑도 없고,
즐거움도 고통도 없으며, 나아가 삶과 죽음도 없는
뭉뚱그려진 하나의 고요한 경지다.
7)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공식이
바로 ‘존재하는 것’을 공간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생긴다는 것이 시간적인 관찰이라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했을 때 있음은 공간적인 관찰이다.
그리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분리할 수 없는
깊은 관계 속에 있다. 서로 의지해 있다는 말이다.
화엄사상의 상입상즉(相入相卽)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인연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이 돼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언젠가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과정과도 같다.
이러한 이치는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모든 자연법칙 속에서도 상의상관성은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한다든가
인과의 과정 없이 저절로 생겨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즉, 인연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연화합에 의한 어떤 결과는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돼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상주불변(常住不變)한 것은 없으므로
연기법칙에 의해 상의상관성을 가진 일체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다.
부처님 이전에도 소박한(?) 수준의 연기법은 있었다.
"원인 없이 생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표현되는 인과설이 그것인데,
주로 중생이 짓는 업을 중심으로 선업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악업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생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인연(업)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고 해서 업보설, 인연법, 인연과보설이라고도 하는
이 소박한 연기이론은 주로 시간적 선후관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상호의존을 넘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제법)가 상호의존상관관계(상의상관성)가 있으며,
이 상의상관성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이치를
처음 깨달아 밝히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이 상의상관성이 있는 나의 참모습을 깨닫고,
그에 따른 바른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가이아(Gaia)의 세계----지구 시스템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이론을 가이아(Gaia)라고 한다. 즉, 가이아 이론은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물리ㆍ화학적 환경을 유지하는데
전 지구의 생물권이 관여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가이아이론에 의하면 흘러가는 흰 구름, 푸른 하늘,
말없는 꽃 한 송이 역시 그냥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절대 절명의 생명체라는 것이다.
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고, 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 그런 장식물,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자격을 가지고 이 지구,
그리고 내 생명과 함께 절대존엄의 또 하나의 생명들로 보는 것이다.
어느 하나 의미 없는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존재가 등가(等價)의 가치를 가지고
온 우주를 생명의 불로 환히 타오르고 밝히는 것을
불교에서는 꽃 ‘화(華)’, 장엄할 엄(嚴)을 써서 ‘화엄(華嚴)’이라 부른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차별이 없다. 잘난 자 못난 자,
있는 자 없는 자가 똑같은 가치를 가진 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생명의 노래를 힘차게 합창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 없이 많은 갈등이 물결치고,
수 없는 생사 역시 오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 채,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생명이 생멸거래(生滅去來) 없이 언제나 생명의 대 합창을
울리고 있는 세계가 화엄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상(實相)이다.
불교의 화엄사상 중에서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란 말이 있다.
일(一)과 다(多)는 서로를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지만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즉,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하되 하나와 전체가 혼동되지 않는다는 말로서,
하나는 전체에 들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 무애자재(無碍自在)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유하고 있어서, 하나와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상입(相入)을 말한다.
상입이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여 걸림이 없이
융합하는 것이다. 하나란 하나라는 자성(自性)을 가진
확정적인 하나가 아니라 연기(緣起)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지만,
하나는 하나로서 전체가 아니고 전체는 전체로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가 아니고 전체도 하나가 아니다.
각각 제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함이 화엄사상이자 가이아의 이론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화엄사상에 의하면,
생태계의 일부가 인위적으로 변경 파괴되는 생태계의 위기란
바로 지구 생태계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잡화엄(雜華嚴)---어떤 분이 물었다.
『“이 스님에게 가면 <금강경>이 최고라 하고,
저 스님에게 가면 <천수경>을 지송하라고 하고,
또 다른 스님에게 가면 <법화경> 사경이 제일이라 하는데,
모두 다 할 수도 없고, 그 중 한 가지만 하려면
도대체 무얼 해야 합니까?”
사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불교는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모든 강물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러므로 자칫 하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제 근기 대로 이해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愚)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천수경>이 비타민 A 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비타민 C, <법화경>은 비타민 D 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하나 되는 가르침,
<금강경>은 아상(我相)을 없애는 가르침,
<법화경>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장과 상황을 잘 생각해서
그에 맞는 가르침을 선택해 꾸준히 공부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코 <화엄경>을 권한다.
<화엄경>이야말로 종합비타민 같은 경전이다.
<화엄경>의 엑기스라 할 수 있는
용수보살 「약찬게」만 놓고 보더라도,
삼신불(三身佛)로부터 시작해서 문수, 보현, 관음, 미륵보살은
물론 수많은 보살과 성문, 그리고 39위(位) 신중에 이르기까지
사부대중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또한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들 중에는 비구, 비구니는 물론
심지어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렴족왕 내지는
사창가 여인인 바수밀과 이교도들까지 포함돼 있다.
이 세상에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는 없다.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면 그뿐이다.
이 땅에 불교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은 화엄사상의 덕이다.
원효, 의상, 자장, 균여 같은 위대한 스님들도 모두 화엄종사(華嚴宗師)였다.
삼국통일의 원동력 또한 화엄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엄이 살아야 이 땅에 불교가 생동하고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예컨대 <금강경>에서는
‘만약에 몸뚱이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그는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눈앞의 현실을 벗어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화엄경>에서는 ‘몸뚱이는 부처가 아니고
음성 또한 그러하지만, 몸뚱이와 음성을 떠나서
부처의 신통력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네.’라고 설한다.
눈앞의 현실에 입각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리를 강조한 것이다.
애착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애착을 놓도록 하는 것이
<금강경>이라면, 낙담과 절망에 떨어져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어
열심히 살도록 해주는 것이 <화엄경>이다.
칼로 비유하자면, <금강경>은 사람을 죽이는 칼인 살인도(殺人刀)요,
<화엄경>은 사람을 살리는 칼인 활인검(活人劍)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은 아상(我相)을 죽여주고, <화엄경>은 개성(個性)을 살려준다.
현대는 개성의 시대이다. 각자 저마다의 개성을 살리되
서로 존중하고 융화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잡화엄(雜華嚴)의 세계인 것이다.
화엄경 본래 이름은 <잡화엄경>이다.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님 꽃은 무슨 꽃일까?
연꽃일까? 아니면 장미? 백합? 들국화일까?
<화엄경>에서는 말한다.
모든 꽃이 부처님 꽃이라고. 장미는 장미대로 들국화는 들국화대로
저마다의 멋과 향이 있다. 들국화는 장미꽃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장미는 들국화를 능멸하지도 않는다.
다만 저 마다의 멋과 향을 한껏 피울 뿐이다.
모든 생명은 이미 불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여여(如如)부동(不動)한 성품을 바라보는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품이 몸과 마음을 돌이켜보는 차원에 들어설 때,
각각의 개성(個性)이 그대로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화엄의 가르침에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 월호 스님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을 존숭해
대부분의 거대 사찰이 화엄사상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법화경> 하나에 집중하는 현상이다.
일본에서 고승이라 칭하는 신란(新鸞), 니치렌(日蓮) 등도
철저히 법화사상을 지향했다.
그리고 화엄(華嚴)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Ganda-vyuha라고 하는데
Ganda란 잡화(온갖 꽃)라는 뜻이고,
산스크리트어 vyuha란 장엄이란 뜻이다.
따라서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잡화엄’이란 말이고, 잡화엄식(雜華嚴飾)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갖가지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인데,
만유가 다 부처란 것이고, 이것이 곧 화엄사상의 결론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